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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7 09:54:59

타오시성

파일:도희성.jpg
중화민국 총통부 국책고문
간체 陶希圣
한국식 독음 도희성
영문 Táo Xīshèng
본명 타오후이쩡(陶汇曾)[1]
희성(希聖)
출생 1899년 9월 1일 청나라 호북성 황강현
사망 1988년 6월 27일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베이징대학 (법학 / 학사)
직업 교육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중일전쟁2.3. 대만 시절
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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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교육인, 정치인. 왕징웨이 공작을 따라 일본 제국에 투항하여 한간이 될 뻔했으나 일본의 목표가 중일의 동등한 강화가 아니라 중국을 낼름 처먹겠다는 것임을 알고 이탈하여 항전을 수행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9년 호북성에서 출생했다. 1922년, 베이징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여 왕징웨이의 개조파에 가담했다. 1929년~1930년의 반장전쟁, 1931년의 1차 양광사변 등에 참여하여 장제스 타도를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1931년 베이징대학 교수가 되어 정치에서 손을 떼고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1937년까지 교편을 잡아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게 된다. 1932년 1월, 항저우 회담을 계기로 장왕합작 체제가 수립되자 농촌부흥위원회 위원으로 초빙되어 <농촌부흥> 잡지의 주편을 맡았다. 1934년 잡지 <식화>를 창간하여 중국의 사회경제사 연구에 앞장섰다.

정치적인 친화력이 대단하였기 때 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었다.
"왕징웨이를 보면 주화를, 펑위샹을 보면 주전을, 그리고 장제스를 보면 주전 주화 모두 좋다고 말했고, 국민당을 만나면 공산당을 욕하고 공산당을 보면 국민당을 비난하며 파시스트를 보면 국공양당을 모두 욕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2.2. 중일전쟁

베이징대학 교수를 재직하면서 후스, 슝스후이, 가오쭝우, 천부레이, 메이쓰핑, 저우포하이 등 학계와 정계의 지식인들과 함께 항전비판론을 내세워 일본과의 전쟁은 중국을 죽이는 길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과의 화평을 '낮은 목소리'로 주장한다는 <저조구락부>를 조직하였다.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저조구락부 인사들과 일본과의 화평을 위해 토론을 가졌으며 저우포하이와 함께 1938년 1월 14일, 일본과의 대화 창구인 <예문연구회>를 한커우에 설치하여 국민당 중앙선전부 휘하에 두어 일본과의 화평에 나섰다. 타오시성은 예문연구회 총간사에 취임했으며 예문연구회의 수립 취지는 "독립자주의 이론을 수립하고 공산당의 영향에 저항하는 것, 정부에 화전 양면 정책을 촉구하는 여론을 만드는 것"을 내세웠다. 1차 고노에 성명 이후 일본이 대화 창구를 단절하자 장제스는 일본과의 화평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타오시성의 예문연구회에 정부예산을 지급하였다.

트라우트만 공작이 실패로 끝난 후 1938년 6월 18일, 타오시성은 저우포하이와 논의하며 현 시국이 이자성의 난이나 태평천국 운동, 의화단 운동을 떠올릴만큼 절망적이라 평가하며 차라리 자살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 전황을 비관했다. 저조구락부 멤버들 중 왕징웨이, 천비쥔, 천궁보, 저우포하이, 메이쓰핑 등은 더 이상 항전에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일본 군부의 가게사 사다아키, 이마이 다케오, 도이하라 겐지 등의 왕징웨이 공작에 호응하여 일본과의 협상에 매달렸다. 타오시성 역시 일본과의 강화에 희망을 걸고 참가하였다. 일본 측과 왕징웨이 측의 중광당 회담 이후 저조구락부 멤버들과 연일 토론하며 일본과의 강화를 주장했다.

결국 1938년 12월, 타오시성은 왕징웨이 일행과 함께 충칭을 탈출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하노이로 도주했으며 일본의 3차 고노에 성명에 호응, 12월 29일 <염전>이라 불리는 통전을 발표하여 일본과의 평화를 호소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묵살했다. 이때 타오시성은 천궁보, 가오쭝우와 함께 유럽으로 망명하여 유럽에서 강화여론을 조성하자고 주장했으나 왕징웨이의 비서 증중명이 남의사에게 암살되자 왕징웨이는 저우포하이, 천비쥔, 메이쓰핑의 주장을 수용하여 난징에서 신정권 수립에 참여하기로 하였다.

허나 상하이로 돌아와 괴뢰정부 수립에 참여한 타오시성은 일본이 제출한 요구가 기존에 일본이 약속한 대등한 주권국가로서 중국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괴뢰국화하겠다는 요구임을 알고 격분하게 된다. 타오시성과 가오쭝우는 저우포하이 등이 왕징웨이 그룹에서 너무 비중이 높은 것에 가뜩이나 불만을 품고 있던 상황에서 일본의 요구에 직면하고 왕징웨이 그룹에서 이탈, 1940년 1월 다이리의 포섭을 받고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하여 왕징웨이를 매국노로 맹비난하였다. 가오쭝우는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고 타오시성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로 일본군이 홍콩을 침공하자 다시 충칭의 국민정부에 합류, 장제스의 비서로 일하며 장제스의 자서전 <중국의 명운>을 집필했으며 1943년 국민당 기관지인 중앙일보 편집장에 취임하여 1952년까지 재직하였다. 서남부로 이전한 연경대학, 푸단대학, 칭화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으며 교육활동도 계속하였다.

2.3. 대만 시절

1947년 국민당 선전부 차장에 임명, 1950년까지 재직했다. 2차 국공내전에서 국민정부가 패배하자 국부천대를 따라 타이완으로 이주하여 공직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1954년 우궈전 사건이 발생하자 <두 칼로 끝까지 죽여야 한다>라는 글을 발표, 우궈전을 반역자로 맹렬히 비판했다. 1961년, 리아오(李敖)는 잡지 <문서>를 창간하여 후스를 비롯한 친정부 지식인들을 대거 비판하였으며 타오시성 역시 친정부 인물이라는 이유로 맹렬히 비판을 받았다. 이에 국민당 정권은 1963년 리아오의 저서를 금서 처분했으며 1965년 12월 문성도 1년간 정간시켰다.

대만에서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상무위원회 4조 주임, 혁명실천연구원장, 국민당 설계위원회 주임위원, 총통부 국책고문 등 당정의 요직을 두루 지냈으며 1968년 정치에서 은퇴하였다. 1967년 미국으로 망명한 가오쭝우와 만나기도 했으며 1988년 타이베이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3. 참고문헌


[1] 한국식 독음은 도회증. 번체 표기는 陶匯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