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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 임광(林光) |
본관 | 남원 태씨 |
출생 | 1918년 4월 22일 |
함경남도 풍산군 이인면 내리[1] (現 량강도 풍서군 신덕리) | |
사망 | 2012년 5월 13일 (향년 94세) |
서울특별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17호 |
배우자 | 조순덕 |
자녀 | 2남 2녀 아들 태극 |
학력 | 메이지대학 (법학 / 학사) |
서훈 | 대통령표창 수훈 은성충무무공훈장 수훈 금성화랑무공훈장 수훈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군사 경력 | |
복무 | 한국광복군 |
1943년 ~ 1945년 | |
임관 | 특별간부훈련반 |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1948년 ~ 1955년 | |
임관 | 육군사관학교 (7기) |
최종 계급 | 대령 (대한민국 육군) |
병과 | 법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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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법조인, 인권변호사.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1918년 4월 22일 함경남도 풍산군 이인면 내리(현 량강도 풍서군 신덕리)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하여 메이지대학 법과를 졸업했다.1943년 중국 시안시에서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 입대하여 특별간부훈련반을 수료하였다. 1945년에 한미합작특수훈련인 OSS 훈련 정보·파괴반에 편입되어 훈련을 받았으며, 국내정진군 함경도반 1조에 배속되어 기다리고 있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8.15 광복 후 1948년 11월 육군사관학교 7기 후기반에 입교하였으며, 졸업 후 법무병과로 임관하여 대한민국 육군에서 복무했다. 1955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예편 후에는 변호사로 개업하여 활동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서울 성북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서범석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많은 간첩 조작 사건의 변호를 맡아 대한민국 인권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재일교포 간첩 사건만 14건을 수임했다고 국가안전기획부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변호사로서 이 사건들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결국 안기부에 끌려갔고 변호사 자격도 박탈당했다.
간첩으로 체포된 재미교포 홍선길의 무죄판결을 이끌어냈고, 1심 2심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던 재일교포 손유형을 대법원에서 파기환송을 받아내었다. 안기부에서 고등법원에서 손유형을 다시 사형 선고받게 만들었는데, 대법원 재상고심이 벌어지는 동안 태윤기를 안기부로 끌고가 일주일간 조사하였다. 조사를 받은 이유는 변호하면서 주요 서류들을 손유형의 가족들에게 복사해주었다는게 그 이유. 조사받는 일주일 사이에 대법원 재상고심에서 손유형에 대한 사형을 확정했다.[2]
문서 복사로는 죄로 몰아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이 문서를 복사한 법원 직원한테 태윤기가 고맙다고 감사인사 한 걸 뇌물공여죄로 몰고갔다. 뇌물공여죄도 결국 형사처벌에 이르지는 못했으나 이를 빌미로 징계위원회에서 변호사 제명을 당했다. 이는 5공 말에서야 변호사 자격이 복권됐다.
한편,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2012년 5월 13일 오전 9시 57분 서울특별시에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2012년 5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3. 기타
-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서슬퍼런 시절에 굵직한 시국사건을 주저없이 수임했다. 이승만 시절엔 이승만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 김창룡 암살사건, 진보당 사건을, 박정희 시절엔 박창암 김동하 반혁명 사건, 원충연 반혁명 사건, 안두희에 대한 살인미수 사건, 통일혁명당 사건, 강신옥 한승헌 변호사 사건을, 전두환 시절엔 10.26 사건[3], 간첩단 사건, 민청학련 사건 등을 변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