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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레)

레 러이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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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레 왕조 초대 황제
태조 | 太祖
파일:레러이(여리, 黎利).jpg
출생 1385년 9월 10일
명나라 청화로 양강현 남산향
(現 베트남 타인호아성)
사망 1433년 9월 5일 (향년 47세)
대월 승룡황성
(現 베트남 하노이 승룡황성)
능묘 영릉(永陵)
재위기간 평정왕
1418년 2월 ~ 1428년
후 레 왕조 초대 황제
1428년 3월 30일 ~ 1433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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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BF2D><colcolor=#670000> 성씨 레(Lê / 黎 / 여)
러이(Lợi / 利 / 리)
부황 선조(宣祖) 복황제(福皇帝) 레코앙(黎廣)
모후 문태후(文太后) 정씨창(鄭氏蒼)
배우자 공자황태후(恭慈皇太后)
자녀 2남 2녀
묘호 태조(太祖)
시호 통천계운성덕신공예문영무관명용지홍의지명대효고황제
(統天啓運聖德神功睿文英武寬明勇智弘義至明大孝高皇帝)
}}}}}}}}} ||

1. 개요2. 표기 및 칭호3. 생애
3.1. 집안 내력과 출생3.2. 반명 운동의 시작
3.2.1. 람썬 봉기3.2.2. 명군을 격파하다3.2.3. <군헌 10조>
3.3. 명군을 몰아내다
3.3.1. 대월 재건3.3.2. 치적3.3.3. 외교관계
3.4. 사망
4. 가계5. 평가
5.1. 당대 신하들의 평가5.2. 사관의 평가5.3. 근-현대 사학자들의 평가
6. 후대에 미친 영향
6.1. 하노이 환검호 전설6.2. 근대 베트남의 정치 모델6.3. 관련 지명
7. 여담8. 대중매체에서9. 관련 문서10. 외부 링크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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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월(베트남) 후여조의 초대 황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중국의 제4차 북속시기를 종결시킨 베트남의 민족 영웅이다.

청화성(淸化省/Tỉnh Thanh Hóa: 타인호아성)에서 태어났으며, 명나라의 식민 지배를 물리치기 위해 1418년부터 1428년까지 약 10년에 걸친 대봉기를 일으켜 명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고, 명나라와 대등한 수준의 외교관계를 만들었으며, 사상적 측면으론 유교를 공인하여 중세 베트남의 기반을 만들었다.

2. 표기 및 칭호

언어별 표기 및 칭호
레러이(Lê Lợi) 휘를 베트남어로 발음, 쯔꾸옥응으로 표기.
여리(黎利) 휘를 한국 한자음으로 표기.
여태조(黎太祖) 왕조+묘호.
레타이또(Le Thai To) 왕조+묘호의 현지 발음.
평정왕(平定王) 항명운동때 사용한 자칭 왕호.
대월 황제(皇帝) 재건 대월의 황제로 즉위.
순천승운예문영무대왕
(順天承運睿文英武大王)
존호.
남산동주(藍山洞主) 아호.
안남국왕(安南國王) 중국(명나라)에서 봉해준 작호.

3. 생애

3.1. 집안 내력과 출생

레 러이는 후폐제(영덕왕) 창부 9년[1], 뇌양 주산[2]에서 베트남의 청화(타인호아)로 양강현 남산(람썬)향(清化路 梁江縣 藍山鄉)의 호족 가문 출신인 레코앙[3]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서에 따르면 레 러이의 증조부 레호이[4]는 이곳을 지날 때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여 정착했고, 3년 뒤 실제로 자신의 산업이 크게 발달하여 독자적인 세력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레호이의 아들 레딘[5]이 그의 자리를 계승할 땐 여씨 가문을 따르는 자들이 1,000여명에 도달했다고 한다.

3.2. 반명 운동의 시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50px-Yongle-Emperor1.jpg
대월을 침략한 명나라 제3대 성조 영락제 주체

레 러이가 젊었을 시기, 쩐 왕조는 외척 출신 권신 호꾸이리의 만행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호꾸이리가 마침내 제위를 찬탈하자 명나라의 성조 영락제는 호꾸이리를 찬탈자로 간주하고, 대우(다이응우)를 침략했다. 결국 호조 대우군은 패배했고, 호꾸이리, 호한트엉 부자는 막투이[6]에게 사로잡혀 명나라의 난징에서 참수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승리한 명나라는 대우, 즉 대월을 지배했다. 전한때처럼 중국의 복속기가 도래한 것이다.

호 왕조 대우를 멸망시켜 베트남을 주(州) 단위로 편입한 명나라는 베트남에 가혹한 약탈과 동화 정책을 시행했다. 대월의 특산물인 비취옥, 황금, 그리고 장인이 중국으로 반출되거나 압송당했고, 대월의 서적이나 예술 작품들은 한 줌의 재가 되었으며,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베트남인들이 명제국에 크게 분노했으며 레 러이도 마을이 명군의 약탈로 불타는 모습을 보고 명나라에 대한 분노가 쌓여가 결국 대월인을 해방시킬 것을 결심했다.

대월사기전서》에는 레 러이에 대해
'명의 온갖 계략과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관직에 손대지 않았으며, 후 쩐 왕조의 항명활동이 가망없음을 깨닫고 산림에 은거하면서, 지략에 밝은 자를 모집하고 유랑민을 거두었다.'
고 전한다. 그런데 《명 실록》에는 레 러이가 중국에 투항하여 관직을 얻고 별개의 이유로 암암리에 항명 음모를 꾸몄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둘 중 정설은 없지만 레 러이 자신도 주목할 만한 말을 한 적은 있다. 신왕조의 황제로 즉위한 레 러이가 신하들에게 명 복속기 때를 회상하며
朕雖罄家所有以奉事之,冀其免禍,而彼害朕之心曾不少, 怒義兵之舉,朕實出於不得已焉耳。
짐이 비록 집안 물건들을 다 팔아서 섬기며, 그 화를 면하고자 하였지만, 저들의 짐을 해하려는 마음이 일찍이 적지 않았다. 노하여 의병을 일으킨 행위는 짐의 실로 부득이한 사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사련 등 《대월사기전서》,565쪽。

3.2.1. 람썬 봉기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람썬 봉기
, 똣동-쭉동 전투
,
,
,
,
파일:명의 교지.jpg
명나라의 주(州)로 복속당한 대월

레 러이는 명나라의 가혹한 통치에 맞서 식민지가 된 대월을 해방하기 위해 각 지방의 호걸들을 끌어모아 독립전쟁을 준비했다. 1418년(명 영락 16년) 2월, 레 러이는 자신의 세력 및 라오스의 국왕 란캄덩의 지원을 받아 봉기를 일으켜 스스로를 '평정왕'(平定王)이라 칭했다. 레 러이 외에도 봉기군이 여럿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명군에게 격파당했다.

1418년 2월 7일 레 러이 장군은 화려한 출병식을 열고 조국 독립을 향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봉기다. 병사 2천 명과 말 200마리, 코끼리 14마리의 군대를 이끈 레 러이는 대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던 명나라의 군대에 전면전으로 맞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레 러이가 이끈 람선 봉기군은 첫 공격 목표로 타인호아 성 서부 산악지대의 베트남 현지인 관리들을 노렸다. 이들은 명나라 식민정부에 부역하여 경제 수탈을 일삼던 이들이었고, 레 러이 장군은 이들을 척결했다. 당연히 명나라는 레 러이 군대가 친명 관리들을 청산하자 진압군대를 파병했다. 명나라는 레 러이가 봉기를 일으키자 마기(馬騏)를 파견하여 진압을 시도했다. 그러나 레 러이는 명군을 낙수(洛水)로 유인해 미리 대기하고 있었던 복병들로 명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병력과 무장 그리고 훈련 면에서 상대가 안되었던 레 러이의 군대는 패했으며, 영산으로 겨우 퇴각할 수 있었다. 이후 레 러이는 영산(靈山)으로 이동하다가 명군의 추격을 받아 그의 휘하 사람들 일부분이 명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퇴각한 레 러이의 군대는 명나라군의 극심한 고립 속에서 두 달동안 버텼다. 그러나 많은 병사들이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레 러이가 람선으로 돌아왔을 당시 그가 지휘하는 병사들은 100명까지 숫자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레 러이는 포기하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세력을 회복해나갔다. 레러이는 지속적으로 유격전을 벌이면서 명나라군을 공격했다. 그는 주로 후퇴하면 쫓아가 공격하고, 방비가 약한 적의 보급부대나 전진기지들을 노렸다. 그리고 베트남인 관리들에게 동참을 요구했다. 이런 방법을 통해 레러이는 빠르게 세력을 회복했다.

이후, 레 러이는 잔여 병력을 이끌며 영산에 주둔했고, 1419년부터 1424년까지 약 5년 동안 영산, 남산을 주요 거점으로 삼아 여러번 병력을 이끌고 명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이 때 레 러이는 개국공신이 되는 응우옌짜이의 귀순을 받아들였다. 평정왕의 세력은 불리하거나 패배하면 서쪽의 동맹국인 라오스로 도망쳤는데 어느 순간부터 란캄덩의 비난과 명나라의 압박 문제 등의 외교문제로 라오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레 러이는 한쪽으론 명나라, 다른 한쪽은 라오스와 싸워야 하는 양면전쟁의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레 러이의 세력은 명군을 막아낼 정도의 세력은 갖추고 있었으나 양쪽으로 오는 세력들을 한번에 막아낼 정도는 안되었기에 라오스를 비롯한 소수민족의 공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산악 지대로 숨어다녔고, 식량 부족에 시달렸기에 군마나 군용 코끼리를 죽여 식량으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1422년 레 러이와 명나라는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1년 후 평화협정은 깨지고 레 러이는 항명운동을 재개했다.

1425년 (명 홍희 원년) 행군 기간에 레 러이는 연도(沿道)에 있던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엄격한 규칙을 바탕으로 진격하는 곳마다 성을 포위하고, 함락시켜 백성들의 호응이 이어졌다. 명군이 점령했던 지역들은 레 러이가 다시 수복했다. 명군의 주력이 예안성(乂安城)에만 집중되어 있고, 다른 곳은 방어가 약하다는 점을 알아챈 레 러이는 시선을 돌려 신평(新平), 순화(順化)를 공략했다.

이후 명나라에선 인종 홍희제가 붕어했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선종 선덕제는 남쪽의 전쟁을 끝내고 싶었지만 대신들의 간언을 받아들여 마지막으로 레 러이 세력과의 총공전을 펼치게 되었다. 명나라는 유승(柳昇)과 100,000명의 대군을 파견했는데, 유승은 레 러이의 세력을 만만하게 보고, 봉기군을 보자 후방의 군대들을 무시하곤 뒤꽁무니만 쫓아 군대의 본진과 분리된 상황에서 레 러이의 계략중 하나인 가짜 다리에서 군대가 무너져내려 진흙탕 속에서 전사했고[7] 그 목이 효수되는 굴욕을 겪게 되었다.

또한 레 러이 세력의 거짓 투항으로 명군은 잘못 투성이인 계획을 세우고 고도 탕롱으로 쳐들어가다 대패했다. 1427년 레 러이 세력은 베트남 중부를 점령하고, 동도(東都)로 출병하여 1426년 10월과 11월 사이(명 선덕 원년) 명군과의 전투에서 명군을 가로막아 명군의 세력이 몇 개의 포위된 도시에만 한정되게 만들었다.

남산 봉기와 항명운동을 이끈 의병장 레 러이는 베트남의 자랑거리이다. 관련 전설도 많이 내려오는데 그 중 하나는, 레 러이가 명군과 싸우던 중 결국 포위당한 최악의 상황에서 부장 여래(黎來, 레라이)가 레 러이의 옷을 입고 명군을 혼란시켜 레 러이가 무사히 빠져나가 후일을 도모했다는 이야기이다.

3.2.2. 명군을 격파하다

파일:Portrait_assis_de_l'empereur_Ming_Xuanzong.jpg
대월을 포기한 명나라 선종 선덕제 주첨기

레 러이의 세력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명나라왕통이 기습하여 10,000여명이 참살당하는 큰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며칠 뒤 사방에서 반격하여 레 러이는 창강과 양강을 점령하고, 왕통에게 화친을 제안했다. 왕통은 선덕제에게 서신을 전달했고 당시 명군은 대대적인 피해를 감안해 왕통은 급히 화친 요구를 받아들이고 양측이 철군하기로 약속했다.

응우옌짜이, 찐카, 쩐응우옌한, 레삿, 팜반싸오, 딘리엣, 레응언등 휘하 참모 및 장수들과 함께 계속 항전해 끝내 명나라에게 승리하고, 명군을 베트남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결국 명나라는 1428년 왕통을 통해 사실상 패배를 선언하여 대월은 독립에 성공했다. 대월의 레 러이는 천자국인 명나라에게 명목상의 복종의 자세를 갖춰 형식적인 주군인 쩐까오(천경제)를 정식 '안남국왕'에 책봉케 하고, 대월에 주둔하던 잔류 명군을 처형해 명나라의 식민 잔재를 제거했다.

레 러이가 명군과 오랫동안 장기전을 벌이며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용병술[8]과 베트남 북부의 자연환경에 해박했기 때문이었다. 레 러이는 명군의 복병을 치고, 공격을 피하며 매번 나란히 대진했고, 명군의 숫자가 레 러이 세력보다 많았지만 동시에 행군이 멀어 최적의 상태에서 전투할 수 없다는 점을 십분활용했다.

3.2.3. <군헌 10조>

레 러이는 부하들의 규율과 통합을 중시했고, 빈틈없이 그 점을 관리했다. 그는 일찍히 <군헌 10조>를 반포하기도 했다.

또한, 레 러이는 모든 문•무관료들에게 말했다.
「一、勿無情;二、勿欺慢;三、勿奸貪。」
하나, 무정하게 대하지 마라. 둘, 업신여기지 마라. 셋. 간사하지 마라.

레 러이는 올바른 규칙을 만들어 자신의 세력과 적대하는 자가 매우 적었다.

3.3. 명군을 몰아내다

3.3.1. 대월 재건

파일:완채.jpg
개국공신 완채의 초상.
<평오대고>(平吳大誥)를 작성해 레 러이의 황제 즉위를 선포했다.

항명전쟁이 끝난 후 여씨(黎氏) 일족은 대월의 통치자가 되었고, 명과의 기나긴 전쟁이 끝났음을 선포했다. 실세가 된 레 러이는 이제 제위를 넘보고 있었고, 천경제 쩐까오(진고)를 제거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쩐까오는 1426년(명 선덕 원년) 레 러이 세력이 옹립한 쩐 왕조 황족 쩐씨 출신(?)의 괴뢰 군주였다. 문제는 이 쩐까오가 그냥 쩐씨인지 아니면 쩐 왕조의 진짜 후손인지 불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쩐까오를 옹립한 이유는 민심을 모으기에 적합하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명군을 몰아낸 레 러이는 꼭두각시 군주인 천경제를 제거하고, 1428년(명 선덕 3년) 3월 15일 탕롱(하노이)에서 후 레 왕조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천경제 쩐까오의 사인에 대해선 도주할 때 조정에 잡혀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도 하며, 바다에서 배를 몰다가 레 러이에게 쫓겨 죽었다고도 하는 등 여러 설이 있다.

레 러이는 국호를 다시 다이비엣(Dai Viet, 大越/대월)이라 정하고, 통킹[9], 즉 탕롱에서 즉위했다. 그는 국내를 5개 도(道)로 나누어 행정관을 파견했고, 사상적 측면으로는 중국으로부터 유교를 받아들여 장려했다.

3.3.2. 치적

레 러이는 재건 대월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여러 개혁정책들을 펼쳤다. 교육에 관해선 경성에 국자감을 설치하고 지방 각 부로에 학당을 설치해 유학을 가르쳤으며, 과거 시험을 개최하고 종교별로 시험 제도를 만들었다. 율령의 경우엔 당나라때의 형벌을 참고하여 태질, 장형, 징역, 유배, 사형으로 구분했으며 자수한 경우, 감형하는 경우도 생각했다. 또한 공이 없는 자가 토지를 점유하고, 개국 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는 경작할 토지가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균전법을 제정해 빈부의 불균형을 완화시켰다.

국방 부문의 경우, 항명전쟁이 끝난 뒤 당시 25만명에서 10만명으로 인원을 줄이고 나머지는 귀농시켰다. 또 전 군을 다섯으로(단위:번/番) 나누었으며, 한 번이 근무하고 4개의 번은 귀농하는 등의 교대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자신의 통치기간에도 봉기가 일어나자 친정하여 정벌했다.

3.3.3. 외교관계

명나라와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안남국왕'으로 새로 책봉해 줄것을 요구했다. 명나라는 처음엔 쩐씨를 왕으로 생각하여 불응했으나 여러 차례 요구하자 1431년 정식 '안남국왕'으로 책봉했다. 명과의 관계는 형식상으론 제후국 책봉이었으나, 대월은 자주적이었으며(외왕내제), 절대 중국이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등 국가를 안정시킬 수 있는 외교를 펼쳤다.

또한 레 러이가 황제가 되기 전, 1427년(명 선덕 2년) 참파인이 와서 방물을 조공하자 후 레 왕조(레 러이 세력)는 점차 참파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3.4. 사망

「卿等所言,固是如此。亦有未盡。朕昔時遭板蕩,棲迹藍山,本欲苟全性命而已,初無取天下之心。及其賊虐愈甚,民命弗堪,凣有智識者皆被其害,朕雖罄家所有以奉事之,冀其免禍,而彼害朕之心曾不少。怒義兵之舉,朕實出於不得已焉耳。」
경 등이 말한 바가 실로 이와 같으나, 다만 말하지 못한 바가 있다.

짐은 옛날에 어지러운 시기를 만나, 남산으로 처량히 숨어들어, 본래 목숨만 구차히 보전하려 하였기에, 처음에는 천하를 가지려는 마음이 없었다.

그 도적들의 학정이 더욱 심해지자, 백성들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고, 뭇 지식인들은 해를 입었으며, 짐이 비록 모든 가산을 털어 명을 섬겨 그 재앙을 면하고자 하였지만, 저들의 짐을 해치려는 마음이 일찍부터 적지 않았다. (이에) 노하여 의병을 일으켰음은, 짐이 실로 어쩔 수 없었던 이유로 그리하였을 뿐이다.
대월사기전서》 <태조본기> 中 -레 러이의 마지막 말-

1433년 (순천 6년) 8월 22일 레 러이는 정침(正寢)[10]에서 사망했다. 향년 49세였으며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산에 매장되었고, 사후 묘호는 태조(太祖)로 정해졌다. 능의 이름은 영릉(永陵)이었으며 제위는 차남인 여원룡이 이었다.

4. 가계

5. 평가

5.1. 당대 신하들의 평가

당대의 신하들 역시 초강대국이자 종주국인 명나라를 이기고 독립에 가까워지는 상황에서 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明淫刑虐政,久失民心,帝反其道而用之,以仁易暴,以治易亂,此所以成功之速也。」
명나라는 추잡한 형벌과 포악한 정치로 민심을 잃은지 오래였습니다. 황제께서는 그 길과 반대로 하시어, 어지심으로 포악함을 바꾸고, 치세로 난세를 바꾸셨으니, 이것이 성공이 그토록 빠르셨던 까닭입니다.

무려 10년에 걸친 장기전을 통해 뛰어난 용병술과 게릴라전으로 숫자가 몇배나 많은 명군을 이긴건 대월인의 집념어린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당대뿐 아니라 현대 베트남에서도 여태조 레 러이는 위대한 민족 영웅으로 여겨지며, 명제국과 자주적인 외교관계를 맺었다는 점 역시 높게 평가받는다.

하지만 자신이 모시던 주군인 천경제 쩐까오를 시해하고, 항명운동때 힘을 합친 공신들을 시기해 처형하는 등 도덕적인 면에서 결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명나라의 말단 관직을 지냈고, 항명운동의 이유가 단순 명으로부터의 독립 의지로 비롯된게 아닌 점에서 여태조 레 러이가 항명을 시작한 다른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5.2. 사관의 평가

대월사기전서》를 쓴 사관들은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論曰:太祖即位以來,其施為政事,藹有可觀。如定律令,制禮樂,設科目,置禁衞,設官職,立府縣,收圖籍,創學校,亦可謂創業之宏謨。然多忌好殺,此其短也。
논하여 말한다[14]. 태조께서는 즉위하신 이래로, 그 정사를 펼치심에 볼만한 바가 많다. 그 예로 율령을 확정하시고, 예악을 제정하시며, 과거를 여시고, 금위[15]를 두시며, 관직을 설치하시고, 부현[16]을 세우셨으며, 도적[17]을 거두시고, 학교를 창설하시었으니, 또한 창업의 원대한 계획이라 이를 만하다. 다만 시기가 많고 죽이기를 즐기시었던 것이 단점이다.
又曰: 帝承祖父之業,時遭大亂,而志益堅,晦跡山林,以稼穡為業,由其憤強賊之陵暴,尤留心於韜畧之書,罄竭家貲,厚待賓客。及戊戌年起集義兵,經營天下,前後凡數十戰,皆設伏出奇,避實擊虛,以寡敵眾,以弱敵強。及明人出降,戒戢軍士,秋毫無犯,兩國自是通好,南北無事。忙禮、哀牢,俱入版圖;占城、闍槃,航海修貢。帝宵衣旰食,凡十年而天下大治。
또 말한다. 황제께서는 조부의 업을 이어받아, 대란의 때를 만나시었지만, 뜻이 더욱 굳어지시어, 산림에 은거하시면서 농사일을 하시다가, 강적의 능욕과 포악함에 분개하시고, 특히 육도삼략의 책[18]에 마음을 두시어, 집안의 재산을 모두 내어 빈객을 후하게 대접하셨다. 무술년에 이르러 의병을 일으켜 모으시고, 천하를 경영하시며, 앞뒤로 모두 수십 번을 싸우시었는데, 모두 복병을 두고 기이한 계책을 내시고, 충실한 상대를 피하고 공허한 상대를 치시며, 적은 군대로 많은 군대와 맞서고, 약한 군대로 강한 군대와 맞서셨다. 명나라 사람들이 나와서 항복하자, 군사들을 엄히 다그치시어 그들을 추호도 범하지 말도록 하시어, 두 나라가 이로부터 통호하고, 남과 북에 일이 없었다. 망례[19], 애뢰[20]가 모두 판도에 들어왔고, 참파, 도반[21]이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을 바쳤다. 황제께서는 날이 밝기도 전에 의복을 갖추시고 해가 진 후에야 식사를 하시며, 무릇 십 년 동안 천하가 잘 다스려졌다.
史臣論曰: 帝起義兵,未嘗濫殺一人,惟能以柔制剛,以寡敵眾,不戰而屈人兵,故能革否為泰,轉危為安,易亂為治,所謂仁者無敵於天下,其帝之謂歟!其有天下而傳萬世之業也宜哉!
사신은 논하여 말한다. 황제께서 의병을 일으키시고서,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으셨고, 다만 부드러움으로 굳셈을 제어하시고, 적은 군대로 많은 군대에 맞서며, 싸우지 않고도 명군을[22] 굴복시키실 수 있으시었기에, 능히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시고[23], 위급함을 편안함으로 바꾸시며, 난세를 치세로 바꾸시었으니, 이른바 어진 이는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다는 말이[24], 황제를 이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천하를 차지하시고 만대에 전하시는 대업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위에 인용된 《대월사기전서》의 논평은 반드시 같은 사람의 글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사관은 잔인한게 흠이라고 하다가 어느 사관은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다는 식으로 사관들 간의 평가가 살짝 달라 내용이 모순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어쨌든 '대월사기전서'의 논평은 후 레 왕조의 공식 견해이긴 하다.

5.3. 근-현대 사학자들의 평가

레 러이에 대한 쩐쫑낌의 평가는 구국 영웅이다. 그러나 가혹한 형벌 제도를 비판했고 질투심과 견제로 공신들을 죽인 토사구팽은 문제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베트콩 출신 학자들은 그를 항명운동을 위해 모든걸 바친 강직하고 정의로운 애국자로 호평했으며, 중국의 일부 학자들도 위협 세력이 되는 호족을 거느린 점과 명과의 대등한 외교관계를 세운 것을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는 토지, 식량 문제를 개선하지 못한 점을 아쉽다고 평가했으며, 이러한 문제는 후 레 왕조 최고의 명군이었던 성종대에 이르러 해결되었다.

6. 후대에 미친 영향

6.1. 하노이 환검호 전설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환검호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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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검호

하노이(탕롱)에 있는 호안키엠 호수(還劍湖, 환검호)의 이름 유래와 관련된 유명한 전설이 있는데, 레 러이가 한창 명나라에 맞서 전쟁 중일 때 호수에서 황금 거북이 입에 용왕이 준 검[25]을 물고 나타나서 그에게 주었고, 레 러이는 이 신검으로 명나라와의 격렬한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며 재건 대월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 뒤 다시 호수에서 만난 거북에게 용왕의 신검을 돌려주었다고 한다.

2000년에 환검호에서 하연덕(何廷德)이란 학자가 새로운 자라 종을 발견했는데 이 자라를 '환검자라'라 칭했으며 종소명을 'Rafetus leloii'라 칭했는데 종소명의 leloii는 태조의 휘에서 따온 것이다.

6.2. 근대 베트남의 정치 모델

레 러이의 업적은 근대에도 전해져 각 정치 세력의 선전, 정치용 모델이 되었다.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이 프랑스군을 격파한 지 조금 지나서 자신을 위해 같이 싸워준 군대에게 여태조, 쯩 자매, 조구, 쩐흥다오, 응우옌반후에 같은 명장을 예로 들며, 그들의 공을 본받고, 나라를 위해 싸운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한편 미국이 지지하는 반공조직들은 여태조 레 러이가 외적인 명군을 물리친 것을 인용해 반공의식을 대중에게 선전했다고 한다.

6.3. 관련 지명

베트남의 몇몇 대도시에 있는 일부 거리들에는 레 러이의 이름이 붙어져 있으며, 호찌민 시의 거리 하나에도 레 러이가(黎利街)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7. 여담

위의 환검호 전설과 관련해 <런닝맨>에서도 이 전설을 주제로 한 미션을 진행한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로 호안키엠 호수에는 큰 거북이들이 살고 있는데, 여기에서 비롯된 전설이다.

본래 여태조의 이름 利는 lì(리)라고 읽혔는데, 피휘를 위해 이 글자가 들어간 단어를 lợi(러이)로 바꿔 읽게 되었다. 근데 현재는 利를 이렇게 lợi로 읽는 게 굳어져서 여태조의 이름도 lợi로 바뀌었다. 그래서 이 문서의 표제도 '레리'가 아니라 '레러이'이다.

8. 대중매체에서

한국 내에서 여태조 레 러이를 다루는 대중매체는 찾기 힘들지만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라자의 부흥>에서 베트남이 신규 문명으로 추가되면서 그가 주인공인 캠페인 미션이 추가되었다. 특이하게도 미션의 서술자가 레 러이가 아닌 적이었던 명나라 장군 왕통으로 나온다.[26][27] 작중에서 왕통은 적이었지만 레러이를 형제처럼 존경했다고 표현했다.

Fate 시리즈》에서는 스핀오프작인 히무로의 천지에서 등장한다. 보구는 『약속된 먼 호수의 검 - 톈 키엠』(Thiên kiếm; 위대한 검). 이 보구의 원형은 위 일화의 뚜언띠엔으로 보인다. 참고로 세이버 페이스.

SBS의 예능 프로그램인 <런닝맨>의 여러 특집들 중에서 -아시아 레이스-편이 뚜언띠엔 호수의 신검 설화를 모티브로 만든 것이다. 비록 방송에서 여태조 레 러이가 직접 언급되는 것은 아니나, 미션의 마지막 장소가 베트남의 뚜언띠엔 호수라는 점에서 확실히 레 러이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9. 관련 문서

10.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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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조의 위국공
대월 재건 레 러이 칭제

[1] 1385년 9월 10일.[2] 雷陽 主山.[3] 여광. '선조'로 추존됨.[4] 여회. '고상조'로 추존됨.[5] 여정. '현조'로 추존됨.[6] 막당중의 5대조이다.[7] 마안산(馬安山).[8] 군사를 부리는 기술.[9] 東京, 동경 즉 하노이[10] 제사를 지내는 방.[11] 여석(黎石)의 아버지로 여석은 숙부였던 태조의 봉기를 도운 공신이다. 이후 여석은 '충무대왕'(忠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12] 태조는 정실을 세우지 않았으며, 태종의 생모 또한 태조의 첩이었다. 황후라는 존칭은 사후 추존된 것으로 실제 황후로 재위하진 않았다.[13] 장남. 신비 소생.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군왕(郡王)으로 강등됨.[14] 사관이 평가하는 대목을 시작하는 표현[15] 황제 직속의 중앙군[16] 지방의 행정구역[17] 그림과 서적[18] 병서를 의미한다[19] 오늘날 베트남 서북쪽 변경 라이쩌우성(萊州省) 일대로, 따이족이 사는 곳이었다.[20] 라오스에 위치한 란쌍 왕국을 의미[21] 오늘날 베트남 남부 꾸이년시에 위치[22] 한문에서 人은 타자를 가리킨다. 즉 명나라 병사[23] 否와 泰는 주역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각자 액운과 행운을 가리킨다.[24] <맹자> 양혜왕 상편에서 유래한 표현.[25] 이름은 '투언티엔'(Thuận Thiên, 順天; 순천)이다.[26] 다른 캠페인에도 비슷한 화자가 있는데 <바르바로사 캠페인>의 스포일러, <스포르차 캠페인>의 미켈레토 같은 경우가 있다.[27] 결정판에서는 <레 러이 캠페인>의 나레이션 화자가 왕통에서 베트남인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