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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의 지급시 | |||||
[ruby(铁岭, ruby=Tiělíng)][ruby(市, ruby=Shì)] 톄링시 | Tieling City | |||||
시정부 소재지 | 랴오닝성 톄링시 톄링현 판허신구 진사장루28호 辽宁省铁岭市铁岭县 凡河新区金沙江路28号 | ||||
지역 | 둥베이 | ||||
면적 | 12,966km² | ||||
하위 행정구역 | 2구 2현급시 2현 | ||||
시간대 | UTC+8 | ||||
인문 환경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 인구 | 2,388,294명 (2020) | |||
민족 구성 | 한족 76.99% | 만주족 20.39% 시버족 0.89% | 조선족 0.72% 몽골족 0.51% | 후이족 0.39% 기타 0.11% (2020) | ||||
인구밀도 | 184명/km² | ||||
서기 | 쑹청(宋诚) | ||||
시장 | 리원뱌오(李文飙) | ||||
GRDP | 전체 | $103억 7,493만 (2020) | |||
1인당 | $4,344 (2020) | ||||
상징 | 시화 | 백합 | |||
시목 | 단풍나무 | ||||
차량번호 | 辽M | ||||
행정구역 약칭 | 铁 | ||||
행정구역코드 | 211200 | ||||
지역전화번호 | 024 | ||||
우편번호 | 112000 | ||||
ISO 3166-2 | CN-LN-12 | }}}}}}}}} |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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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북부의 지급시. 선양시에서 동북쪽으로 40km 거리로 가깝다. 다만 번시, 푸순, 랴오양처럼 선양 외곽 순환도로 안에 있지 않다는 점에서 안산시와 공통점이 있다. 지급시 관할 인구는 약 240만이고, 도시 자체에는 40만 정도가 거주한다. 지명의 유래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를 이루는 고개인 철령, 그리고 거기서 유래한 명나라 시기 요동의 군사 거점이던 철령위로, 한국계 장군 이성량과 이여송 부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석탄, 화학 등의 공업과 서쪽과 북쪽 평지의 농업이 발달하였다. 당나라 때의 원통사(員通寺), 명대의 간화루(看花樓), 저우언라이가 소시적 공부했던 은강서원(銀崗書院) 등의 고적지가 있다. 전체 인구 중 한족은 77%로 적은 편이다. 북부 카이위안에서는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등이 주민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이다. 조선족은 시청이 있는 인저우구에 많다.2. 역사
춘추시대 이전에 이 지역은 숙신의 영토였다.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현재의 톄링시 남부는 요동군 관할이 되었고, 북부 지역은 동호의 영토가 되었는데, 진나라와 한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남부와 북부 지역을 포함한 대부분이 요동군 관할에 들어가게 되었다.후한 때부터 삼국시대, 서진 때까지 남부 지역은 현도군에, 북부 지역 중 지금의 카이위안시(开原市)·창투현(昌图县) 지역은 부여의 영토였다. 동진 때에 이르러서는 이 지역은 현도군 관할이 되었고, 남북조시대 때는 거란의 영토가 되었다.
수나라 때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다가, 고구려 멸망 후 남부 지역은 안동도호부, 서북부 지역은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의 관할이 되었다. 그리고 창투현 지역은 일찍이 발해의 서경압록부·부여부(扶餘府)의 관할에 들어갔다. 그 뒤 이 지역은 월희말갈(越喜靺鞨)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713년(당나라 현종 2) 발해 고왕이 이 지역을 빼앗아 부주(富州)를 두었다.
그러다가 917년(요나라 태조 11) 야율아보기가 발해의 부주를 복속한 뒤 이 지역에서 은화를 제련한다는 것에 착안하여 이유로 이름을 은주(銀州)[1]로 고쳤고, 현재의 톄링시 지역의 대부분이 동경도(東京道) 요양부(遼陽府) 관할이 되었다.
금나라 때 남부 지역은 동경로(東京路) 함평부(咸平府), 서부 지역은 북경로(北京路), 북동부 지역은 상경로(上京路) 회령부(會寧府)에 각각 속하게 되었다. 원나라 때는 서부 지역이 중서성(中書省) 회창로(會昌路)에 속하게 되었고, 그 나머지 지역은 개원로(開原路) 함평부(咸平府) 관할이 되었다.
현재 이곳의 지명은 의외라면 의외로 한국과 관련이 있는데, 바로 명나라 건국 후 1387년 철령위가 설치된 것과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가 있다. 명나라는 고려를 압박하기 위한 목적으로 원나라로부터 공민왕이 수복한, 강원도와 함경도의 경계 지방에 있는 철령 인근이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철령위를 만들었고, 1388년 3월에는 실제로 군대를 움직이며 한반도에 진입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무력 충돌을 감수한 최영의 강경 대응 앞에 명나라의 야욕은 무산되어 철령위는 페이퍼 플랜으로 남았고, 고려에서 명에 대한 강경 대응의 연장선상에서 요동정벌을 단행했다가 이듬해 위화도 회군이 벌어진 이후에도 당연히 고려, 그리고 뒤이은 조선이 생짜로 자기 땅을 내놓으라는 명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그 때문에 결국 원래 계획이 엎어진 채 남의 집에 더부살이하던 철령위를[2] 옮겨 1393년(홍무 26) 지금의 선양시와 카이위안시 사이의 옛 은주 지역에 둔 것이다. 즉 기묘하게도 이름은 한반도의 철령에서 유래했는데, 이름만 그랬을 뿐 실질적으로는 한 번도 철령위가 한반도에 들어와 설치된 적은 없었다. 반대로 요동의 톄링시가 사실은 고려 땅이었다는, 일각에서 주장되고 있는 괴설 또한 역사적 사실을 상당히 잘라먹고 만들어진 역사 왜곡이다.[3]
그 뒤 남부 지역은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철령위, 서부 지역은 요하투(遼河套) 부여위(扶餘衛), 북부 지역은 삼만위(三萬衛) 등에 각각 편입되었다. 그리고 홍무제의 20번째 아들 한왕(韓王) 주송(朱松)을 지금의 카이위안시에 봉했다.
명나라 멸망 후 1664년(청나라 강희 1) 강희제는 철령위를 폐지하고 이 지역에 철령현(鐵嶺縣)을 설치하였고, 인근에 설치된 개원현(開原縣)과 함께 봉천장군(奉天將軍) 봉천부(奉天府)의 관할이 되었다. 당시 철령현 지역은 지금의 시펑현(西豊縣)을 비롯한 북동부의 경우 봉금지대의 일부분이었고, 서부와 북부의 경우 내몽골 코르친부(科爾沁部) 소속이었다.
1907년(광서 33) 봉천장군이 폐지되고 봉천성으로 개칭되자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1913년 남부 지역이 봉천성 요심도(遼瀋道)의 관할, 서부와 북부 지역이 도창도(洮昌道)의 관할이 되었다. 1929년 2월 5일 봉천성이 랴오닝성으로 개칭되어 랴오닝성 소속이 되었다.
만주국이 건국한 뒤 랴오닝성이 다시 봉천성으로 개칭되어 봉천성 소속이 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양정우(楊靜宇)가 이끄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1군이 이 지역에 거점을 형성하기도 했다.
국공내전 시에는 인민해방군이 게릴라전 끝에 1948년 10월 28일 도시를 접수하였다. 1948년 요북성(遼北省) 소속이 되었다가 1949년에는 요서성(遼西省)에 편입되었다. 그러다가 1954년 9월 1일 요동성(遼東省)과 요서성이 통합되어 랴오닝성이 되면서 랴오닝성 소속이 되었다. 이후 석탄 등의 광산업 거점으로 성장하여 1979년 지급시가 되었다.
2.1. 인저우구(银州区)
1946년 톄링현에 인저우진(银州镇)이 설치되었고, 1948년 랴오베이성에 편입되었다. 1949년 톄링현이 랴오시성에 편입되면서 인저우진이 폐지되었다.1954년 톄링현이 랴오닝성에 편입되었는데, 1955년 인저우진이 복구되었다. 1979년에는 다시 폐지되어 톄링지구에 편입되었다가, 1984년 톄링지구가 폐지되어 인저우진을 복구하였고, 이어 인저우구(银州区)로 개칭되어 지금에 이른다.
2.2. 칭허구(清河区)
본래 카이위안현(開原縣) 관할로, 1948년 카이위안현 제8구(第八区)가 되었다가 1957년 화랑툰구(貨郞屯区)가 설치되었다. 1958년 화랑툰구의 일부를 쪼개어 칭허진(清河镇)을 신설하였다.1984년 카이위안현 칭허진·칭허향(淸河乡)을 분리하여 톄링시 칭허구(清河区)로 편입하였다.
2.3. 댜오빙산시(调兵山市)
1906년(광서 32) 법고문무민청(法庫門撫民廳, 법고청)이 신설되자 조병산촌(調兵山村)으로 편입되었다. 1910년(선통 2) 동일향(東一鄕)이 되었고, 1913년 법고청이 법고현으로 개칭되자 이 소속이 되었다.1981년 9월 21일 톄링시에 편입되면서, 톄링시의 '톄(铁)'과 파쿠현(法库县)의 '파(法)'를 따 톄파시(铁法市)를 신설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10월 톄링시 소속의 톄파구(铁法区)가 되었고, 1986년 9월 톄파시로 복구되었다.
2002년 댜오빙산시로 개칭되었다.
2.4. 카이위안시(开原市)
1664년 개원현으로 설치되었으며, 1984년 9월 톄링시에 편입되었다. 1989년 3월 카이위안시로 승격했다.2.5. 시펑현(西丰县)
1902년 서풍현이 설치되어 해룡부(海龍府)의 관할이 되었다. 1914년 6월 봉천성 요심도 관할이 되었다. 1947년 랴오베이성 소속이 되었다가 1948년 다시 랴오닝성 소속이 되었다. 1949년에는 랴오둥성 소속이 되었다가 1955년 랴오둥성과 랴오시성이 통합되면서 다시 랴오닝성 소속이 되었다.1959년 선양시 소속이 되었고, 1976년 톄링시 소속이 되었다.
2.6. 창투현(昌图县)
1806년(가경 11) 창도청(昌圖廳)이 설치되었다. 1877년(광서 3) 창도부(昌圖府)로 개칭되었다가, 1913년 창투현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3. 교통
징하철도가 톄링시 내의 톄링역(铁岭), 카이위안역(开原), 창투역(昌图)을 지난다.[1] 이 지명은 현재도 톄링시 도심 중심부에 있는 인저우구(銀州区, 은주구)로 남아 있다.[2] 1388년 3월 철령위의 한반도 내 설치 시도가 실패한 이후 철령위에 보내질 예정이던 부대는 원나라 때 행정 구역을 폐지했던 봉집현(奉集縣)을 부활시켜 그곳에 임시로 머물게 되는데, 지금의 선양시 남부이다.[3] 심지어 철령위의 설치에 대해 항의할 때 고려에서 '공험진까지 전부 우리 땅이었다'고 한 주장을 근거로 동북 9성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주장을 들고 와서 한반도의 철령을 만주 한복판까지 옮겨놓는(...) 괴설도 존재한다. 당연하지만 고려에서 공험진까지 전부 우리 땅이라고 주장한 것은 철령이 공험진에 있다는 얘기가 아니라 철령보다 훨씬 북쪽 공험진도 역사적으로 고려 땅인데 명에서 철령위를 두어서 고려 땅의 허리를 끊어 채간다는 것이 대체 무슨 소리냐는 항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