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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 이스라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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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농민반란 | ||
날짜 | ||
1834년 5월 - 8월 | ||
장소 | ||
팔레스타인 및 트란스요르단 | ||
교전 당사자 | 이집트 에얄레트 | 나블루스, 예루살렘, 헤브론, 제파트 지역 토호 |
지휘관 | 메흐메드 알리 이브라힘 파샤 살림 파샤 라샤드 베이† | 카심 알 아흐마드(처형) |
병력 | ~ 26,000 명 | 반군 수만명 |
피해규모 | 수 천명 추산 | 수 천명 사망, 1만여 농민 이집트 압송 |
결과 | ||
이집트군의 승리 | ||
영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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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تمرد الفلاحين الفلسطينيين히브리어 מרד האיכרים בארץ ישראל
영어 Peasants' revolt in Palestine
1834년 메흐메트 알리 휘하 이집트에게 점령된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전국적인 규모의 반란. 기존에 현지 토후들의 자치권을 인정하던 오스만 제국과 달리 서구식 중앙집권을 시도하며 자치권을 빼앗고 현지인들에 대한 징병과 추가적인 징세, 무장해제를 강행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초반에 반군은 소수의 이집트 군을 압도하며 예루살렘, 나블루스, 헤브론 등 현 서안지구 일대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으나, 메흐메트 알리가 직접 야파에 상륙하자 전세가 역전되었다. 가차없이 진압에 나선 이집트 군은 종교를 막론, 약 1만여명의 팔레스타인인을 학살하였고 다른 1만명은 이집트로 반출하였다. 또한 반군에 가담한 마을은 파괴하여 재정착을 불가하게 하였고, 고향을 잃은 농민들이 유랑민으로 전락하며 팔레스타인 인구의 20%가 감소하였다.
이로써 한세기 이상 이어지던 팔레스타인 각지의 현지 지배 계급과 향촌 질서가 붕괴되었으며, 반세기 후 팔레스타인은 제대로된 저항의 구심점을 갖지 못한 채로 시오니스트들의 이주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 1834년의 반란은 기존에 예루살렘 일대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민중봉기와 달리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다양한 계급과 종교의 주민들이 동참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18세기 중반부터 아크레를 중심으로 한 현지 정부가 생기며 팔레스타인 지역이 단일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해당 반란에서 그 연대감이 표출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일부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계는 팔레스타인 민족성 발현과의 연관성은 희박하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2. 배경 : 이집트령 시리아
1833년 퀴타히아 휴전 조약 무렵 메흐메트 알리 파샤의 영토 | 메흐메트 알리의 아들이자 장군인 이브라힘 파샤 |
19세기 초엽 이집트를 장악한 메흐메트 알리는 서구식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중앙집권 정부를 구성하고 신식 군대를 양성하였다. 더 나아가 독립 국가 건설을 추진한 그는 기존 이집트 왕조들처럼 시리아를 점령하여 오스만 제국과의 완충지대로 삼고자 하였다. 특히 대외 무역이 발달한 레반트 해안은 이집트의 물산을 수출하기에 적합하였다. 오랜 준비 끝에 1831년 10월 31일, 메흐메트 알리의 아들 이브라힘 파샤는 수륙 양면으로 시리아를 침공하였다.(1차 오스만-이집트 전쟁) 팔레스타인의 군벌 압둘라 파샤는 본거지 아크레에서 5개월간 버텼으나 1832년 봄 항복하였고, 나머지 지역들은 별 저항도 없이 정복되었다. 이로써 9년에 걸친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시작되었다. 한세기간 팔레스타인의 주도권을 지녔던 아크레 정부가 붕괴됨에 따라 팔레스타인에는 크게 4개의 정치 집단이 남았다. 이들은 예루살렘의 에펜디야트 (원로들), 예루살렘 인근 가문들, 나블루스 산지의 여러 가문들, 그리고 헤브론과 베들레헴의 베두인 부족들이었다. 하지만 중앙집권을 꾀하던 이집트 당국은 이들을 무시하였고, 양측은 충돌은 명약관화하였다.
역사적으로 1827년 투칸, 1830년 자라르 가문의 붕괴 이후 나블루스 산지는 카심 가문이 주도권을 지니고 있었다. 부족장 카심 알 아흐마드가 예루살렘, 아들 무함마드 알 카심이 나블루스의 징세관을 맡았는데 후자가 더 중요한 직위였다. 1832년 말엽 이브라힘 파샤는 카심의 연로함을 이유로 그를 해임하고 무함마드로 하여금 예루살렘의 과세를 맡겼는데, 동시에 후자 역시 나블루스 징세관에서 해임되었다. 나블루스에는 이집트의 동맹인 압둘 하디 가문의 술레이만이 임명되었고, 동시에 그의 친적 후세인이 아크레의 무디르(태수)로 부임하였다. 가장 중요한 나블루스의 수조권을 상실한 카심 가문은 이집트 당국과 압둘 하디 가문을 적대하게 되었다. 한편 예루살렘 인근 카르야트 알 이나브를 기반으로 한 아부 고쉬 가문은 기존 오스만 시절 야파 ~ 예루살렘 도로의 안전을 보장하며 통행세를 받았는데, 이를 착취라 판단한 이브라힘 파샤는 1833년 셰이크 이브라힘 아부 고쉬를 포함한 그 수뇌부를 체포하여 아크레에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얼마 후에는 헤브론 산지 두라에 기반한 아므르 가문이 토벌되었다.
이로써 이집트 당국과 베두인 부족들간의 불신은 심화되었는데, 이브라힘 파샤는 이슬람법에 위배되는 새로운 세금을 부과하면서도 베두인들에게 이집트 병력의 군량 운송을 명하는 등 의무만을 증대시켰다. 이미 아부 고쉬 가문과 이사 & 압둘 라흐만 아므르, 예루살렘 인근 라스 카르카르 기반 심한 가문은 이집트 측과의 대립에 나섰다. 대립이 고조되던 차에 오스만 제국의 2차 전쟁을 준비하던 이브라힘 파샤는 예루살렘과 나블루스의 유력자들을 모아 징집 연령에 해당하는 무슬림 청년 1/5에 대한 징병을 지시하였다.(1834년 4월 25일)[1] 현지 유력자들이 난색을 표하자 이브라힘 파샤는 무슬림들이 기독교권과 전쟁 중인데 어찌 대규모 정규군을 편성하지 않을 수 있겠냐며 설득하였다. 셰이크들은 동의하면서도 부족들은 수 세대에 걸친 훈련으로 '종교의 적으로부터 조국 수호를 위해 기꺼이 싸울 것'이라 답하였다. 이에 이브라힘 파샤는 병사들은 더 전문적인 훈련이 필요하다고 답하며, '전장은 무능한 자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모욕에 가까운 표현에 징병은 순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3. 전개
한편 자신의 해임과 아들의 좌천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던 카심 알 아흐마드는 이브라힘 파샤에 대한 반란을 위해 나블루스, 예루살렘, 헤브론의 아얀(유지들)을 소집하였다. 1834년 5월 19일 유지들은 이집트 당국에 농민들이 봉기하거나 산으로 도망가버려 과세와 징집을 할 수 없다고 통보하였다. 이브라힘 파샤는 이를 반역이라 간주, 군대를 준비하였다. 그 무렵 카심 가문의 거점인 베이트 아잔에서는 카심 알 아흐마드의 주재 하에 나블루스 산지 셰이크들의 회동이 열렸다. 참석자는 카심의 아들 유수프와 무함마드, 사누르의 압둘라 알 자라르, 슈파의 이사 알 바르카위, 베이트 푸리크의 나세르 알 만수르 알 핫지 무함마드 등이었다. 셰이크들은 압둘 하디 가문과 이집트 동맹에 대한 염려를 표시하며 팔레스타인에서 이집트 군을 축출하기로 결의하였다. 카심의 주도 하에 나블루스 산지의 농민들은 거병하였고, 동시에 사페드의 유지들[2] 역시 목숨을 바치지 않고서야 어찌 아들들을 내어줄 수 있겠냐며 징집 명령을 거부하고 카심에게 서신을 보내 호응하였다. 반란의 불길은 예루살렘, 헤브론과 다른 산간 지역으로 번졌다.[3]투칸 가문의 요르단 지역 거점인 앗 살트에선 농민들과 현지 베두인들은 무장하여 이집트 군과 대치하였다. 비록 반란의 중심은 나블루스였지만 첫 교전이 발발한 곳은 현지 이집트 태수가 징집의 강행을 위해 군대를 파병한 헤브론 인근 지대였다. 인근 사이르의 농민들과 베들레헴 기반 타아미라 부족의 베두인들이 연합, 이집트 군에 25명의 전사자를 안기며 승리를 거두었다.(5월 18일) 그후 이집트 19연대가 갈릴리로 향하던 중 제즈렐 협곡에서 반군의 습격을 받았는데, 1200의 병력 중 1/3이 전사하거나 사로잡혔다. 부상을 당한 연대장 무스타파 베이는 300여 병력과 하이파를 거쳐 아크레로 피신하였는데, 곧 그곳에서 반군에게 포위되었다. 처음으로 거둔 대승에 고무된 반란군 지도부는 예루살렘 공격으로 승부수를 띄우려 하였다.
3.1. 예루살렘 공방전
예루살렘 성채
5월 21일 약 7천의 반군이 헤브론에서 북상, 2천의 이집트 수비대가 배치된 예루살렘을 공격하였다. 반군은 우선 야파 문을 쳤으나, 500 ~ 600에 달하는 수비대가 집중 배치된 탓에 격퇴되었다. 22일 1천의 수비대가 성 밖으로 나와 반군을 회전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실패하자 리프타 마을을 약탈한 후 회군하였다. 그날 밤 반군은 성벽에 사격을 가하였다. 시간이 흐르며 성내 무슬림들의 충성을 확신할 수 없었기에 밤낮도 보초를 서야 했던 수비대의 피로는 축적되었다. 한편 헤브론, 나블루스, 예루살렘 뿐만 아니라 가자 등 팔레스타인 각지의 농민들이 합류하여 2만 이상으로 불어난 반군은 26일 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고 총공격을 준비하였다. 이에 수비대는 수중에 있는 2문의 대포를 번갈아가며 배치하며 적군의 대열을 흐리려 노력하였다. 반군이 우세를 점하던 26일 오후, 일대에 두 차례에 걸친 지진이 일어났다. 한밤중까지 여진이 계속됨에 따라 알 아크사의 외벽 일부와 여러 가옥들, 몇몇 미나렛 상부가 붕괴되었다. 다음날에도 진동이 있었으나 반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28일 강력한 공격을 가하였다.
다만 라샤드 베이 휘하 수비대 역시 보금품 부족에도 불구하고 결사 저항하여 이를 격퇴하였다. 그러던 31일 예루살렘 실완(실로암)의 주민들이 반군 지도부에 성벽 남동쪽 분문에서 유대인 구역의 방앗간까지 이어지는 하수도를 알려주었다. 다음날 베들레헴 일대 파와기라 부족의 셰이크 숩흐 샤우카 휘하 36명의 반군이 해당 하수도를 통해 성안으로 잠입, 분문을 열어 수천의 동료들이 입성하게 하였다. 이에 라샤드 베이는 수비대를 시타델로 철수시키고 농성하였다. 한편 입성한 농민병들이 시내의 가난한 무슬림 주민들과 함께 이집트 장교들의 거처를 약탈하자 5백여 수비대가 시타델에서 나와 이들을 쫓아버렸다. 다만 이들 역시 보복으로 다른 집들을 약탈하자 라샤드 베이가 불러들였다. 6월 1일 하루동안 예루살렘에선 16명의 주민과 5명의 병사들이 사망하였다. 다음날 반군은 도시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공격에 나섰고, 라샤드 베이는 반격에 나섰으나 이내 시타델로 돌아왔다. 그리고 반란에 동조한 일단의 주민들이 다마스쿠스 문을 열어 2천의 나블루스 민병대가 입성하였다.
한편 시내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잃기 전 라샤드 베이는 무프티 타히르 에펜디 알 후세이니, 주요 아슈라프인 우마르 에펜디 알 후세이니, 무함마드 알 칼리디 등 예루살렘의 주요 인사들을 사로잡아 인질로 삼았다. 시내에 진입한 2만의 반군은 시타델을 포위, 포격하였고 3일간 대규모 약탈을 행하였다. 종교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상점들이 털리거나 파괴되었다. 다만 무슬림 상점들은 나중에 약탈된 까닭에 주인들은 귀중품을 챙길 여유는 있었다고 한다. 당시 시내에 거주하던 그리스인 사제 스피리돈은 이집트 장교들의 집들이 약탈한 반군이 '유대인, 기독교도, 서방인, 무슬림'의 순서로 상점들을 약탈하기 시작하였고 2-3일만에 시장에는 온전한 상점이 남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약탈에 대한 일부 주민들의 항의는 수적으로 압도적인 반군에게 묵살되었고, 상업 지구에 이어 반군은 지도부와 현지 셰이크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혼란 와중에 주인 없이 남겨진 기독교도들의 집을 약탈하였다.
3.2. 피의 복수와 협상
반군 지도부는 주거 지역에 대한 약탈이 주군인 술탄 마흐무트 2세의 분노를 유발할 것이라 염려하였지만, 농민병들은 그에 개의치 않고 6월 4일 정부 소유의 곡물 창고까지 약탈하였다. 같은날 시타델을 제외한 예루살렘 전역은 반군의 수중에 놓였다. 주력군을 이끌고 야파에서 사태를 관망하던 이브라힘 파샤는 6월 5일, 9천 병력과 예루살렘 구원에 나섰다. 다음날 수천의 반군이 맞서기 위해 예루살렘을 나섰고, 시타델의 이집트 병사들은 그 틈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시내로 나왔다. 평상시라면 5시간 걸릴 거리지만 반군의 공격으로 3일 밤낮 전투를 치른 끝에[4] 1천의 부상자 및 5백의 전사자를 낸 후에야 이브라힘 파샤는 1개 연대와 5문의 대포와 함께 예루살렘 앞에 당도하였다.(6월 7일) 이브라힘 파샤는 예루살렘 대신 시온 산에 진영을 차렸다. 9일 그는 항복하는 반군에 대한 사면을 선포하였으나 아무도 응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친히 3천의 병력과 예루살렘 내부 반군을 추격하여 3백을 전사시키고 5백의 포로를 잡았다. 17명을 제외한 포로들은 석방되었다.11일 이브라힘 파샤는 재차 예루살렘에 입성하였고 다음날 이집트 군은 인근 기독교도 마을인 베이트 잘라를 공격하였다. 후자에선 이집트 군의 물자를 약탈한 혐의로 남녀 33명이 살해되었다. 이브라힘 파샤는 더이상의 보복 살해를 중지시켰으나 주민들의 가축은 압수되었다. 다음날 타아미라 부족 출신 1천 반군이 가족들과 (베이트 잘라와 같은 운명에서) 기독교도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베들레헴 인근에 주둔하였다. 다만 그들은 이브라힘 파샤와의 정면 대결은 피하였고, 결국 이집트 군이 베들레헴의 무슬림 구역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무장해제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이브라힘 파샤의 심복을 죽인 것에 대한 징벌이었다고 한다. 다만 윌리엄 맥클루어 톰슨 목사는 '이러한 끔찍한 복수도 민중의 적개심을 꺾지 못하였고, 예루살렘에서 무법천지의 축제를 벌인 그들은 일말의 가능성이 있는한 저항할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한편 농민 반란군은 베들레헴의 기독교도들에게 함께 싸우자며 수차례 권유하였으나 기독교도들은 종교적 신념과 정치적 지위를 거론하며 안전을 위해 시내 수도원으로 대피하였다. 결국 15일 반군은 도시의 기독교 구역을 약탈하였고, 다음날 예루살렘 남쪽 3시간 거리의 알 카다르의 솔로몬의 연못에서 이브라힘 파샤 휘하 4천의 병력을 공격해 격퇴시켰다. 한편 예루살렘에선 반군이 시타델에서 농성하던 라샤드 베이와 1천 5백의 잔여 이집트 군을 총공격하였다. 그 결과 라샤드 베이와 8백 이집트 군이 전사하였고 수백여명이 사로잡혀 헤브론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반군은 시온 산의 이브라힘 파샤 진영을 포위하려 하였다. 다만 18일부터 일대에는 역병이 창궐하였고, 그무렵 메흐메트 알리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야파로 향한다는 소식이 들리자 석방된 무프티 타히르 에펜디 알 후세이니 등 예루살렘의 유지들은 양측의 휴전 중재를 제안하였다. 헤브론 산지의 반군 지도자 이사 알 아므르는 알 후세이니에게 세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모든 반군에 대한 사면, 남성 1인당 1천 키르쉬의 인두세를 대가로 징병 철회, 그리고 신규 조세 체계의 철폐가 그것이었다. 이브라힘 파샤는 이를 거부하였지만 시돈 총독 후세인 압둘 하디를 통해 알 후세이니와의 협상은 이어나갔다. 그후 나블루스 산지의 반란 지도자 카심 알 아흐마드는 이브라힘 파샤에게 자신이 협상에 나서 반란을 끝낼 수 있도록 사면을 청하였다. 이브라힘 파샤는 이에 동의하고 그에게 알 후세이니와 압둘 하디 가문의 보증과 함께 안전을 보장하였다. 이로써 6월 말엽 양측은 회동하였는데 이브라힘 파샤가 부친에 대한 배신을 거론하며 카심을 혼내자 후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며 사과하였다. 모임 후 양측은 화해하였고 이브라힘 파샤는 카심을 나블루스와 예루살렘의 징세관으로 봉하였다.
3.3. 반란의 재개
한편 6월에 이르러 예루살렘과 나블루스 등 산간지방 뿐만 아니라 라믈라, 룻다, 야파, 아크레 등 해안 도시들 역시 전면적인 반란에 돌입해 있었다. 동시에 아틀리트 일대의 반군은 하이파를 포위하였고 갈릴리의 반군은 사파드, 티베리아스를 점령하였다. 반란에 참가한 베두인들 역시 케라크의 이집트 주둔군을 공격하여 2백여 전사자를 안겼다. 다만 15일 사파드에 대한 공격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33일간 강간 혹은 살해당하는 참극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는 7월 바시르 2세의 드루즈 군이 개입한 후에야 진정되었으며 사로잡힌 13명의 주모자들은 이브라힘 파샤의 지시로 아크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카심과 이브라힘 파샤의 타협으로 반란이 소강 상태에 접어들 것 같던 무렵, 메흐메트 알리가 개입하였다. 그는 후세이니 가문의 유지들[5]과 무함마드 알리 알 칼리디, 셰이크 압둘라 부다리, 무함마드 압둘 사우드 등을 체포하여 이집트에 유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야파 인근 유력자들 중 상당수 역시 반란을 도왔다는 이유로 처형되었고, 야파 시내의 유지들 중 반란에 협조했던 이들은 같은 운명을 피해 배에 올라 키프로스로 도피하였다. 그외에 나사렛의 셰이크 압둘라 알 파훔과 앗 지브의 셰이크 사이드 앗 사디가 이집트로 추방되었고, 야파의 징세관 마수드 알 마디와 그의 아들이자 사파드의 징세관인 이사 알 마디 역시 반란에 가담한 죄명으로 참수되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 북부 해안에서 가장 강성하던 알 마디 가문은 붕괴되었다. 이러한 체포와 처형 소식을 접한 카심은 휴전을 번복, 나블루스 산지의 반군을 모은 후 협상은 이집트측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의 지연책이었다며 반란의 재개를 선포하였다. 3만에 달하는 반군은 3개의 부대로 나누어 (야파-나블루스 사이의) 라스 알 아인, 갈릴리 방면, 나블루스에서 이브라힘 파샤의 군과 싸운다는 전략을 세웠다.
3.4. 메흐메트 알리의 개입
야파의 이집트 진영 (1838년 작)
6월 24일 카심과 간접 동맹한 베두인들이 팔레스타인 해안 이브라힘 파샤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라스 알 아인에서는 양측간의 전투가 4일간 지속되었으며 결국 28일 마을의 성채를 파괴한 이집트 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30일, 1만 5천 이집트 군대와 야파에 상륙한 메흐메트 알리는 7월 2일 라믈라에서 이브라힘 파샤와 합류하였다. 라믈라와 룻다는 그 직전에 이집트 해군 사령관 살림 파샤에 의해 점령되었다. 메흐메트 알리는 라믈라에 체포된 예루살렘 유지들을 모은 후 카심 부자와 압둘라 자라르, 이사 알 바르카위 역시 체포를 지시하였다. 그는 살림 파샤 휘하의 병력을 파견하며 동맹인 레바논 산지의 바시르 2세에게 후자의 아들 아민을 사절로 보내어 이집트 군을 지원하라 명하였다. 한편 술레이만 압둘 하디와 이브라힘 아부 고쉬가 포로들 중 자브르 아부 고쉬의 석방을 청하자 메흐메트 알리는 해당 가문들의 충성을 봐서 승낙하였고, 더 나아가 자브르를 무함마드 알 카심 대신 예루살렘 징세관으로 봉해주었다. 자브르는 즉시 예루살렘 일대 주민들의 무장해제에 나섰고, 무기를 소지한 채로 발견된 이는 누구든 처형하며 이행하였다.
메흐메트 알리는 친히 라믈라, 룻드 징세관 및 반란에 가담한 야파 인근 촌장들의 처형을 지시하였다. 그의 지휘 하에 아크레는 2천의 주민들이 희생되며 이집트 군에게 수복되었다. 이로써 레반트 해안이 평정되고 태수 후세인 압둘 하디로부터 이브라힘 파샤의 팔레스타인 지배를 확립하겠다는 다짐을 받은 후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로 귀환하였다. (1834년 7월 6일) 나블루스 산지에서 원정을 이어가던 이브라힘 파샤는 반군을 제이타까지 추격하며 90여명을 전사시켰다. 나머지는 제이타 동쪽 언덕 위의 데이르 알 구순으로 도주하였고, 주민들과 반군 상당수는 이집트 군이 다가오면 도주하라는 후세인 압둘 하디의 말에 따랐다. 분노한 카심은 이탈자들 중 자신 휘하 계급에 해당되는 자들을 처형하였다. 이브라힘 파샤는 약화된 데이르 알 구순을 공격하였고, 반군[6]은 3백여 전사자를 내고 패하였다. 부상을 당한 카심과 유수프 부자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도주하였고, 사로잡힌 반군 중 징집 연령에 해당되는 이들은 군사 훈련을 위해 이집트로 보내진 데에 반해 좀더 나이가 있는 자들은 오른손이 잘렸다.
3.5. 이브라힘 파샤의 진압
7월 14일 이브라힘 파샤는 압둘 하디 가문의 거점 아라바와 자라르 가문의 거점 사누르를 지나, 다음날 나블루스에 무혈입성하였다. 압둘 하디 가문의 통제와 니므르 가문의 중립으로 나블루스에 남은 주민들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브라힘 파샤의 입성 직후 나머지 나블루스 산지의 세력들이 복속하였고, 이후 그는 북쪽 제닌과 나사렛으로 파병하였다. 20일 이브라힘 파샤는 3만의 징집병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한편 메흐메트 알리의 파병 요구를 받은 바시르 2세 역시 7월 말엽 군대를 이끌고 갈릴리로 남하하였다. 그는 사파드의 반군에게 항복을 설득하는 포고령을 내렸고, 협상에 동의한 반군 측은 셰이크 살리흐 앗 다라쉬히를 사절로 보내 회담을 주선하게 하였다. 바시르 2세는 사파드 지도부를 빈트 즈베일 마을로 초청하였고, 그들은 이집트 복속에 합의하였다. 그후 사파드에 입성한 바시르 2세는 인근 반군 수뇌부의 항복 역시 주선하며 평화적으로 갈릴리를 평정하였다.3.5.1. 헤브론 학살
한편 나블루스 산지에서 패배한 카심과 그의 잔당은 헤브론 산지로 향하였고, 헤브론의 셰이크들은 반란 지속에 합의하였다. 이브라힘 파샤는 4천 보병과 2천 기병의 병력을 이끌고 예루살렘에서 남하하였다. 반군은 솔로몬의 연못에서 재차 이브라힘 파샤의 군대와 싸웠으나 짧은 전투 끝에 패한 후 헤브론으로 철수하였다. 8월 4일 이브라힘 파샤는 헤브론을 포위, 그 성채에 포격을 가하였다. 성벽이 무너지자 이집트 군은 진격하였고, 카심과 반군은 결사적으로 싸웠으나 도시는 점령되었다. 그때 무너진 성채는 현재까지 폐허로 남아있다. 역사가 로저 헤콕에 의하면 반군과 주민들은 매우 용감히,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포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치열하게 이어진 시가전에서 승리한 이집트 군은 (구분하지 못하였기에) 종교를 막론한 학살과 강간을 벌였다. 이브라힘 파샤는 공포를 심어주어 다시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군대의 폭력과 약탈을 허가하였다.그렇게 주어진 3 ~ 6시간 동안 약 5백여 주민이 살해되었고 750명이 징집되었으며 120명의 청소년들이 이집트 장교들의 재량에 따라 끌려갔다. 이집트 군도 26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유대인 역사가 요제프 슈와르츠에 의하면 대부분의 무슬림 주민들은 포위 전에 주변 구릉지대로 피신하였고 대부분의 유대인 역시 사파드와 티베리아스의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 측이 장악한) 예루살렘으로 도주했으나, 일부 남은 자들 중 12명[7]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반란에 참여하지 않았기에 유대인들의 안전을 보장했던 이브라힘 파샤는 뒤늦게 개입하여 그들의 절멸만은 막았다. 헤브론의 유대 공동체는 1858년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복구된다. 카심과 헤브론 지역 반군 지도자인 두라의 압둘 라흐만 아므르는 혼란을 틈타 도주하였다.
3.5.2. 케라크 파괴
케라크의 십자군 시절 성채
헤브론을 탈출한 카심은 아들 유수프와 무함마드, 이사 알 바르카위 등 잔당과 함께 요단강을 건너 케라크에 피신하였다. 8월 14일 이브라힘 파샤는 카심을 사로잡기 위해 헤브론을 떠났다. 케라크의 아니자 베두인들은 반란군 잔당을 수용하였다. 이에 8월 중순 이브라힘 파샤는 카라크를 포위하였다. 17일간 이어진 공성전과 포격 끝에 8월 말엽 성벽이 일부 붕괴하였고, 이집트 군은 총공격하여 도시를 함락하였다. 중세 요르단의 중심이던 카라크는 파괴되었고 카심을 도운 주민들에 대한 처벌로 이집트 군은 인근 과수원의 나무마저 뽑아버렸다. 더 큰 보복을 두려워한 아니자 부족장 두와이키 앗 사미르는 반군 지도부를 이집트측에 넘겨주었다. 사로잡힌 카심과 부관 아르사브 알 카홀, 이사 알 바르카위는 다마스쿠스에서 공개 처형되었다.
이스마일 파샤의 지시로 두라의 이사 알 아므르, 알리 라바흐, 자이드 부족의 압둘 자비르 바르구티, 셀루흐의 유수프 살라마, 라스 카르카르의 이스마일 이븐 심한, 케라크의 이스마일 마잘리 등 반란에 가담한 다른 셰이크들 역시 다마스쿠스에서 처형되었다. 한편 카심의 장성한 아들 유수프와 무함마드는 아크레에서 처형되었고, 어린 아들인 우스만과 아흐마드는 카이로로 추방되었다. 비교적 혐의가 가벼운 셰이크들은 아크레에 감금되었다. 이브라힘 파샤는 카라크에서 앗 살트까지 요르단 중부 일대를 약탈한 후 다마스쿠스로 향하였다. 후일담으로 원한을 잊지 않고 있던 케라크 주민들은 6년 후인 1840년, 이브라힘 파샤가 다마스쿠스에서 이집트로 철수하자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그들은 후퇴하는 이집트 군을 '왕의 도로' (핫지 루트)를 따라 카라크 동북면의 카트라나에서 가자까지 지속적으로 습격하였다. 이브라힘 파샤는 병력, 탄약, 군마 대부분을 잃은 채로 가자에 당도하였다.
4. 결과와 영향
1834년 반란은 팔레스타인 인구의 20%를 감소시켰다. 이는 농민들이 병사 혹은 일꾼으로 이집트에 반출되거나 마을, 농지를 버리고 베두인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집트로 끌려간 이들은 1만에 해당하고, 반란 도중 사망한 수도 거의 비슷하다. 반란 진압의 결과 주민 대부분이 무장해제되었고, 징병 명령은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도들에까지 확대되었다. 세금 역시 토지 소유 뿐만 아니라 가축 소유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브라힘 파샤의 팔레스타인 장악은 공고해졌고, 무장해제의 결과 현지 부족들에 의한 도적질과 내분이 크게 감소하였다. 다만 버려지거나 반란에 가담했던 마을들은 이집트 군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주민들이 돌아오는 것을 방지하였다. 나블루스 점령 전에만 이브라힘 파샤는 16개 마을들을 파괴하였고, 나블루스 부족 지도부로 하여금 인근 마을로 떠나게 하였다.추방 혹은 처형으로 인한 기존의 전통 계급 질서의 부재는 팔레스타인의 도시 주민들이 당국과 현지 반대파의 경제적 착취에 노출되게 하였다. 감금된 촌장들은 그 아들들로 대체되었는데, 이브라힘 파샤는 그들을 기존의 무크타르 (지도자) 대신 강등된 지위인 나와티르 (감시자)로 봉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카심 역시 아들 마흐무드로 대체되었다. 그의 부친에 대한 농민들의 지지로 인해 나블루스 산지의 부족장들은 이브라힘 파샤에게 마흐무드를 (술레이만 압둘 하디가 맡던) 나블루스의 징세관으로 추천해야 할 정도였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대한 오스만 지배는 1840년 영국 해군의 도움으로 오스만 군이 아크레를 함락하며 재정립되었다. 이집트 군대로 징병되었던 농민들은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만 기존 질서를 잃은 팔레스타인에선 19세기 중반 카이스와 예메니 부족간 내전을 겪었고, 서구 세력은 그 틈에 팔레스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5. 평가
1834년 팔레스타인 반란은 비슷한 시기 이집트 지배에 저항한 레반트 각지의 반란들[8]과 차별화된다. 반군의 구성원들은 종교적, 계급적으로 동일하지 않았고 매우 다양하였다. 또한 1703-05년의 나키브 알 아슈라프 반란과 1825-26년 예루살렘 봉기 등 나블루스, 헤브론, 갈릴리, 가자 일대의 호응을 이끌지 못하던 때와 달리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위의 내용에는 제시되지 않았지만 가자에서도 자바라트, 아우아라 베두인 등이 반군의 편에서 이집트 군을 습격하였고 갈릴리에선 하와라 베두인들이 봉기하였다. 비록 국가 공동체적인 의미로의 팔레스타인 (필라스틴)은 언급되지 않았지만[9] 공통의 적에 대한 협공의지가 드러나다고 평가된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바루크 키멀링과 조엘 미그달 등은 공통의 적 앞에서 서로 상이한 집단 간의 연대를 이룩했고, 후일 팔레스타인 민족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1834년 반란이 팔레스타인 공동체 의식의 발현기라 평한다.하지만 다른 이스라엘 역사가 베니 모리스는 반군이 연대 의식을 보이긴 했지만 독립이나 국가/민족적 권리를 주장한 바는 확인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실패하였기에 별 의미가 없다고 일축하였다. 반군은 팔레스타인에서 정치적 연대를 이룩하였지만 그들의 목표는 독립 국가 건설이 아닌 이집트 군을 몰아내고, 일정 수준의 자치를 보장하던 전통적인 오스만 지배로의 회귀였다는 것이다. 1831년 이브라힘 파샤가 처음 팔레스타인으로 진격했을 당시 그가 조정의 칙령을 대동하자 저항하지 않았던 것에서 독립이나 오스만 조에 대한 충성심이 아닌 자치 여부가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또다른 이스라엘 역사가 시몬 샤미르는 근대화된 이집트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처음으로 현지인들이 영토 국가를 체험한 시기라고 평가하였다. 한편 이와 같은 이스라엘측 연구와 달리 팔레스타인과 아랍권에서 1834년의 반란은 상대적으로 최근에 알려졌고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오스만 시기를 퇴보와 부패, 암흑의 시기로 여기는 아랍 민족주의자들과 좌파 진영은 아랍에 근대화를 시작한 메흐메트 알리를 고평가하기에, 그에게 저항한 팔레스타인 봉기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또한 반란 자체를 연구하기 위한 당대 아랍어 자료 역시 매우 부족하다. 주요 아랍 문헌은 이집트 측에서 작성한 것이기에 편향되어 있으며, 팔레스타인 현지인이 작성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또한 반란의 주축이 된 농민들과 달리 양측의 약탈과 보복에 시달린 도시 주민들은 반란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엽은 구전 증언을 받아낼 마지막 기회였지만 시오니즘에 맞선 민족주의 열풍으로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일각에서는 반란을 근대화를 반대한 기득권의 기만에 넘어간 서민들의 봉기, 혹은 아랍을 해방하고 통합하려는 이집트에 대한 오스만 측의 방해 공작 정도로 이해하기도 한다. 다만 21세기 들어 팔레스타인 학계에서도 반란의 다양한 구성원들에 주목하며 인식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6. 참고 자료
- "Peasants revolt in Palestine", 영어 위키피디아
- Karl Sabbagh (2008). "Palestine: A Personal History ". Journal of Palestine Studies.
[1] 예루살렘의 200명을 포함한 예루살렘-나블루스 일대에서 3500명이 해당됨. 헤브론에서는 500명.[2] 주로 종교 지도자들 + 징세관 이사 알 마디 가담[3] 현재 서안지구에 해당하는 지역.[4] 특히 예루살렘 북쪽 2시간 지점에서 나블루스로부터 남하한 반군과 싸운 것에서 큰 피해를 봄. 혹은 이집트 군이 적을 그렇게 패배시키고 포로 11명을 잡았다고도 함.[5] 타히르 에펜디 알 후세이니, 우마르 에펜디 알 후세이니, 무함마드 알리 알 후세이니[6] 대부분 카심, 자라르, 바르카위, 자유시 가문으로 구성됨[7] 남자 7인, 여자 5인. 이집트측 예루살렘, 나블루스 민병대가 행했다고도[8] 1834-35년 알라위 반란, 1838년 드루즈 반란 등[9] 17세기 라믈라의 성직자 카이르 앗 딘 알 라믈리가 파트와에서 지역명으로 팔레스타인을 언급하긴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