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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08 09:00:57

프리츠 로지히카이트

파일:Fritz Losigkeit.jpg
프리츠 로지히카이트(Fritz Losigkeit : 1913년 11월 13일~1994년 1월 14일)

1. 스페인에서 포로가 되다2. 해협 전투3. 일본 군사고문4. 지구를 돌아 본국으로5. 비행단장6. 항공단 사령관7. 서훈

1. 스페인에서 포로가 되다

2차 대전 동안 750여회나 출격하며 68기를 격추시켜 기사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은 에이스 파일럿 프리츠 로지히카이트 소령은 제51전투항공단과 제77전투항공단의 사령관을 지냈다. 독일 제국 시대인 1913년 11월 13일에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프러시안 경찰학교에 입학했다가 공군에 낸 지원서가 받아들여져 비행 훈련생으로 선정되었다. 비행학교 졸업 후 제132전투항공단(JG 132)에 배속된 프리츠 소위는 1938년 3월에 콘돌 군단의 제88전투비행단(J/88)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내전 동안에는 복엽 전투기 하인켈 He 51을 몰면서 임무를 수행하였다. 로지히카이트 소위는 그해 5월 31일에 20mm 대공 기관포에 피탄되어 추락해 1939년 2월에 탈주에 성공할 때까지 스페인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승리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정권를 잡은 후에는 참전에 대한 공로로 스페인 검십자훈장이 주어졌다.

2. 해협 전투

그 후 본국으로 돌아온 그는 제26전투항공단(JG 26)에 전속하여 Bf 109에 탑승했다. 로지히카이트는 프랑스 침공 작전 중인 1940년 5월 28일에 최초의 격추를 기록했다. 곧이어 시작된 해협 전투에서 RAF 전투기들과 조우한 그는 추가로 4대를 더 격추하여 9월에는 에이스 칭호를 갖게 된다. 그뒤로 JG 26 제2중대장이 된 그는 8개월 동안 100회 이상 전투에 출격했다.

파일:1941 Eagles in the Channel Front - Robert Taylor JG26.jpg
Eagles in the Channel Front - Robert Taylor

3. 일본 군사고문

1941년 5월, 로지히카이트는 동맹국인 일본에 대한 외교 특사로 임명되고, 이 보직은 1942년 1월까지 유지되었다. 이 기간 동안 메서슈밋 사의 테스트 파일럿인 빌헬름 슈테어와 함께, 일본 육군의 비행 실험부대에 파견을 가서 일본인 조종사가 모는 나카지마 Ki-44(2식 단좌전투기 쇼키)를 상대로 일본이 독일로부터 연구용으로 구입한 Bf 109E를 사용해 전술 전투 훈련을 비롯한 군사 교류를 했다. 이때 로지히카이트는 루프트바페에서는 일반화된 로테와 슈밤 편대 전술을 가르쳤고, 할힌골 전투에서 이미 여러차례 실전을 치러본 탓에 해군과 달리 근대적인 공중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일본 육군항공대의 전술 수준을 더욱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

4. 지구를 돌아 본국으로

일본에 남고 싶어했던 빌헬름 슈테어와는 달리 동료 전우들이 싸우는 유럽으로 하루빨리 돌아가기를 바했던 로지히카이트는 독일 해군의 엘사 에스베르거(MV Elsa Essberger)에 승선하여 연합군의 철통같은 봉쇄를 뚫고 독일로 돌아갔다. 영국 함대에게 포착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무려 43,200 km의 긴 항해 끝에 귀국한 로지히카이트는 아돌프 갈란트 장군의 요청에 응해 즉시 특별부대를 편성해서 노르웨이에 정박해 있는 순양전함 샤른호르스트에 대한 항공 지원 임무를 수행했다. 이 특수 임무를 마치고 나서 로지히카이트는 베르노이헨으로 가서 제1전투항공단 예하 제IV비행단을 지휘하게 된다. 나중에 이 부대는 JG 1의 제 I 비행단이 되었다. 서부전선에 배치된 로지히카이트의 부대는 독일로 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프트바페의 골칫거리인 DH-98 모스키토 전폭기와 B-17 중폭격기를 요격하는 임무가 맡겨진 것이다.

파일:Fw190A4-Stab-I_JG1-((+Fritz-Losigkeit-1943-01.jpg

5. 비행단장

1943년 7월에 로지히카이트 소령은 제51전투항공단(JG 51 : 묄더스 비행단)의 제 III 비행단장이 되었고, 동부전선에서 Bf 109를 몰고 싸웠다. 쿠르스크 전투에서 그의 부대는 분전했지만, 지상군이 패퇴하자 애써 손에 쥔 제공권도 보람없이 후퇴를 강요받았다. 그 후, 그의 부대는 점점 독일 본국쪽으로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게 되며 잃은 점령지를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1944년 4월 1일에 JG 51의 사령관이 된 그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붉은 군대의 압박과 함께 점점 악화되어가는 전황 속에서도 계속 출격을 거듭했다.

6. 항공단 사령관

1945년 4월에 그간의 무공을 인정받아 기사철십자 훈장을 받은 프리츠 로지히카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주둔하고 있던 제77전투항공단(JG 77)의 사령관으로 부임했고, 거기서는 더이상 출격을 하지 못한 채 패전을 맞게 된다. 전후 민간인이 된 그는 사업을 꾸리며 정치 활동에 점차 정력을 바쳤다. 1946년에 자유민주당(FDP) 의정관이 된 그는 1978년까지 공익성 회사의 대표와 마케팅 매니저를 겸하며 근무하다가 1994년 1월 14일에 독일 서부의 소도시 흉크세(Hünxe)에서 8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7. 서훈

스페인 검십자훈장
2급 / 1급 철십자 훈장
독일 황금십장 (1943년 10월 17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5년 4월 28일)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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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142~177위
순위 이름 국적 격추 수 비고
180위 빌헬름 헤르게트 독일 73대
안톤 린트너 독일
게르하르트 미칼스키 독일
오토 슐츠 독일
184위 후쿠모토 시게오 일본 72대
빌헬름 밍크 독일
카를 하인츠 슈넬 독일
188위 한스 푸스 독일 71대
알프레트 헤크만 독일
귄터 셸 독일
192위 스기타 쇼이치[1] 일본 70대
카를-하인츠 호프만 독일
헤르만-프리드리히 요핀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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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린츠 독일
에밀 오메르트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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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민 쾰러 독일
에른스트 바이스만 독일
오이겐-루트비히 츠바이가르트 독일
202위 쿠르트 돔바허 독일 68대
발터 회크너 독일
헤르베르트 후페르츠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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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베르트 카이저 독일
리하르트 레플라 독일
프리츠 로지히카이트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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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쥐스 독일
오토 탕게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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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퓔그라베 독일
카를 하멀 독일
라인홀트 호프만 독일
에르보 그라프 폰 카게네크 독일
프란츠 쉬스 독일
프란츠 슈바이거 독일
후베르트 슈트라슬 독일 하루에 15대를 격추
223위 에르빈 플라이크 독일 66대
베르너 슈트라이프 독일 야간 65대 격추
225위 베르톨트 그라스무크 독일 65대
카를 켐프 독일
만프레트 모이러 독일
228위 이반 코제두브 소련 66대 연합군 1위, 소련 1위
▼ 229~30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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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독격투 70대, 협동격추 40대로 일각에선 비공인 격추수까지 포함하면 120대에 이를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343해군항공대에 합류하여 칸노 나오시의 301비행대에서 시덴카이를 타고 활약했으며 45년 4월 1일 기지를 기습한 헬켓들에게 대응하여 이륙하던 중 피격당해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