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베르트 슈트라슬(Hubert Straßl : 1918. 5. 24~1943. 7. 8)
1. 서훈
2급 철십자 훈장1급 철십자 훈장
공군 명예컵 (1943. 7. 22)
공군 최전선비행 금장
독일 황금십자장 (1943. 8. 16)
기사철십자 훈장 추서 (1943. 11. 12)
2. 안슐루스와 입대
종종 역사가들에 의해 최초의 트리플 에이스였다고 일컬어지는 격추의 천재 후베르트 슈트라슬은 1918년 5월 24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난 마을인 오스트리아 도나우 주의 린츠에서 태어났다. 1938년 3월 13일에 나치 독일이 총 한방 쏘지 않고 오스트리아를 병합시켰을 때, 약관 20세의 청년 후베르트 슈트라슬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열광했다. 다음날 총통 히틀러가 자신의 고향에 와서 퍼레이드를 벌일 때, 청년 후베르트는 미친 듯이 열광어린 성원을 보내는 군중들 틈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 순간에 그는 독일군에 입대하기로 마음을 굳게 먹었다.3. 자대 배치와 첫 격추
1939년에 루프트바페에 입대한 슈트라슬은 전투조종사 훈련을 마친 후 1941년 말 동부전선에 전개해 있던 JG 51에 배치되었다. 전선으로 출발하기 전에 하사로 진급한 그는 러시아 땅 두기노(Дугино)에 발을 내딛고 제4비행단 예하 제9비행중대(9./JG 51)의 편대원으로 배속되었다. 중대원의 환영을 받으며 침상에 놈을 누인 자대 첫날, 슈트라슬 하사는 당장 내일부터 땅을 박차고 이륙해 러시아 빨갱이들이 탄 비행기들을 풍비박산낼 꿈에 잔뜩 부풀었다. 그렇지만 하루, 또 하루가 지나도 그에게는 계속 편대장의 후미를 지키는 윙맨 역할만 맡겨질 뿐, 일껏 적기를 포착해도 로테 리더가 달려나가 사격을 퍼붓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42년이 되고 중대가 스콜렌스크로 옮겨 간 후에도 여전히 윙맨으로만 날던 그는 이런 현실에 적지 않게 실망했지만, 군대인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사병 출신 조종사들이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신참 슈트라슬이 적기와 자유 교전 허가를 받은 것은 9중대원이 되고도 거의 6개월이 지나고 중대는 다시 두기노로 돌아온 후였다. 그래서 슈트라슬 하사가 첫 승리를 기록한 것은 자대에 배치받고도 반 년 이상 더 지난 1942년 7월 6일로, 아군을 공습하기 위해 낮게 날던 소련 공군의 Pe-2 쌍발 전폭기가 그의 제물이 되었다.4. 교관 파견 생활
그로부터 20일이 지난 8월 19일에 후베르트 슈트라슬 하사는 하루에 4대의 Pe-2를 격추하여 7대부터 10대째 격추 기록을 동시에 세워 동료 전우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942년이 저물기 전까지 13번의 승리를 더 거두었다. 해가 바뀐 1943년 3월, 조종 솜씨가 특출났던 슈트라슬은 비행 교관으로 선발되어 동부전선 보충비행단(Ergänzung-Jagdgruppe Ost)으로 옮겨 후배 조종사들을 교육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2개월 동안 교관 노릇을 하느라 제대로 된 교전을 해보지 못한 그는 5월에 다시 제9비행중대로 돌아가 최전선으로 복귀했다. 그는 6월 5일에 브랸스크로 가서 제8비행중대(8./JG 51)로 이적하기 전까지 6대를 더 잡아내 쉬는 동안 녹슨 전투 감각을 다시 예리하게 벼려냈다. 메서슈밋 전투기를 몰던 묄더스 항공단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강력한 공랭 엔진을 달고 중저고도에서 더 나은 성능을 보이는 포케불프 Fw 190으로 갈아타게 된 것이었으나, 슈트라슬은 보충 비행단에서 이미 기종전환 연습을 해 둔 후라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5. 첫 트리플 에이스
6월 6일에 포케불프로 첫 번째이자 자신의 20번째 격추를 달성한 그에게는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6월 8일에는 하루에 6대를 격파해 생애 처음으로 1일 에이스가 되는 기쁨을 맛보았다. 6월 11일에는 오랜만에 고공 요격에 나서 MiG-3 전투기 3대를 1번의 공중전에서 격추시켰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나머지 1대의 미그기는 기가 질려 달아났다. 6월 28일에는 34번째부터 36번째 격추를 달성해 한 달 동안 22대라는 놀라운 스코어를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경력에서 가장 놀라운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7월 5일에 오룔 남쪽으로 4회 출격하는 동안 후베르트 슈트라슬은 무려 적기 15대를 격파하여 루프트바페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트리플 에이스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이 기록 덕분에 슈트라슬은 4일 동안 30대 격추라는 초인적인 신기록까지 더하게 되었다. 독소전 초기 같으면 당장에 기사 철십자훈장을 목에 걸고도 남을 전공이었지만, 이 시기는 훈장 수여 기준이 더욱 높아져 후보에만 자신의 이름을 올리게 된다. 중사로 진급한 그의 격추 행진을 계속되었다.6. 전성기
1943년 7월 5일 오전 5시 30분, 독일군 야포의 포성이 터지며 치타델레 작전의 뚜껑이 열렸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전투에서 양군의 항공전력이 정면으로 충돌했고, 후베르트 슈트라슬 앞에는 성대한 만찬이 차려졌다. 작전 첫 날, 쿠르스크 상공에서는 소련 공군기 1,800대와 독일 공군기 700대가 뒤얽혀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대규모 공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작전 2일째인 7월 6일에 4대를 잡으면서 슈트라슬의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인 7일에는 6대를 격추해 두 번째로 1일 에이스가 되는가 하면, 또 그 다음 날인 7월 8일에도 5대를 추락시켜 1일 에이스가 되자 후베르트 중사의 격추 기록은 던숨에 67대로 늘어났다.이쯤 되자, 후베르트 슈트라슬 중사가 공중전의 명인이 된 것에 이의를 달 만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렇지만 이토록 놀라운 격추 행진을 계속 하는 동안 그에게는 좋지 못한 습관이 붙기 시작했다. 한 대만 더... 한 대만 더.... 하면서 전과에 집착하게 된 그는 독일 전투기들의 장점인 고속 일격 이탈 전법을 바꿔 선회전이나 동항전에 들어가는 경우가 잦아진 것이다. 게다가 쿠르스크 상공은 공기 반, 비행기 반일 정도로 수많은 피아가 뒤엉켜 싸우는 통에 편대 하나를 잡고 나면 다른 편대가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어서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익면하중이 낮고 선회 능력이 좋았던 소련 공군의 신예 전투기들을 상대로 이와 같은 모험을 계속하는 것은 점점 위험한 도박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높은 스코어가 이런 염려를 보상해주고 있었던 탓에, 슈트라슬은 급강하 공격 후 선회전에 빠지는 패턴을 점차 습관적으로 구사했다. 실력과 전투기의 성능이 하늘과 땅 차이던 독소전 초기 같았다면 슈트라슬의 이런 공격법은 당분간 계속 통했을지도 모르지만 때는 1943년 중반을 넘어가고 있었고, 방어측의 잇점을 안고 자기들의 고향땅에서 싸우는 소련 조종사들은 이제 숙련도가 높아지면서 새로 지급받은 전투기들의 성능도 점차 독일 공군기들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7. 최후
작전 3일째인 1943년 7월 8일, Fw 190A-4(W.Nr. 142 351) "슈바르츠 퓌어(Black 4)"에 오른 후베르트 슈트라슬 중사는 오전 출격에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다소 초초해진 그는 자신의 로테를 이끌고 곧바로 두 번째 출격에 나섰는데 그러지 말았어야만 했다.1차 초계 임무 때와 다른 쿠르스크 북쪽 방향으로 순찰 코스를 잡은 그들은 포니리(Поныри) 상공에서 아군 슈투카 폭격기들을 엄호해주느라 낮게 내려왔다. 편대가 300미터 고도에서 완만하게 선회하고 있을 때, 러시아 조종사들이 LaGG-3 전투기 4대로 짠 편대로 슈트라슬 중사의 로테를 내리찍었다. 그 무렵부터 편대장기를 먼저 잡는 전술을 구사하던 소련 전투기들은 정확하게 로테를 이끌고 있던 슈트라슬 중사가 탄 Fw 190에 공격을 집중시켰고, 날개에 피탄되어 불이 붙은 그의 기체는 더 이상 날 수가 없게 되었다. 후베르트 중사는 재빨리 캐노피를 사출시키고 비상탈출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고도가 너무 낮아 낙하산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했고 그대로 지면에 부딛혀 즉사하고 말았다.
그가 죽고 나서 사흘이 지나 제4비행단장인 카를 하인츠 슈넬 대위는 안타깝게 최후를 맞이한 부하에게 기사 철십자훈장을 신청했지만, 웬일인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사병이나 하사관의 서훈 처리에 인색하던 루프트바페 사령부는 그가 전사하고 4개월이나 지난 11월 12일에야 후베르트 슈트라슬 중사를 1계급 특진시키고 공군 명예컵, 독일 황금십자훈장과 기사 철십자훈장을 추서했다.
후베르트 슈트라슬 상사는 동부전선에서 221회 출격을 하는 동안 67대의 적기를 잡아냈는데, 그 모두가 소련 공군기였으며 그중에서 6대는 Il-2 슈투르모빅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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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 이름 | 국적 | 격추 수 | 비고 | |
180위 | 빌헬름 헤르게트 | 독일 | 73대 | ||
안톤 린트너 | 독일 | ||||
게르하르트 미칼스키 | 독일 | ||||
오토 슐츠 | 독일 | ||||
184위 | 후쿠모토 시게오 | 일본 | 72대 | ||
빌헬름 밍크 | 독일 | ||||
카를 하인츠 슈넬 | 독일 | ||||
188위 | 한스 푸스 | 독일 | 71대 | ||
알프레트 헤크만 | 독일 | ||||
귄터 셸 | 독일 | ||||
192위 | 스기타 쇼이치[1] | 일본 | 70대 | ||
카를-하인츠 호프만 | 독일 | ||||
헤르만-프리드리히 요핀 | 독일 | ||||
하인츠 랑게 | 독일 | ||||
루디 린츠 | 독일 | ||||
에밀 오메르트 | 독일 | ||||
198위 | 루츠-빌헬름 부르크하르트 | 독일 | 69대 | ||
아르민 쾰러 | 독일 | ||||
에른스트 바이스만 | 독일 | ||||
오이겐-루트비히 츠바이가르트 | 독일 | ||||
202위 | 쿠르트 돔바허 | 독일 | 68대 | ||
발터 회크너 | 독일 | ||||
헤르베르트 후페르츠 | 독일 | ||||
하인리히 융 | 독일 | ||||
헤르베르트 카이저 | 독일 | ||||
리하르트 레플라 | 독일 | ||||
프리츠 로지히카이트 | 독일 | ||||
귄터 프라이헤어 폰 말트찬 | 독일 | ||||
한스 슈트렐로 | 독일 | ||||
에른스트 쥐스 | 독일 | ||||
오토 탕게 | 독일 | ||||
213위 | 프리츠 딩거 | 독일 | 67대 | ||
헤르베르트 핀다이젠 | 독일 | ||||
카를 문츠 | 독일 | ||||
하인리히 퓔그라베 | 독일 | ||||
카를 하멀 | 독일 | ||||
라인홀트 호프만 | 독일 | ||||
에르보 그라프 폰 카게네크 | 독일 | ||||
프란츠 쉬스 | 독일 | ||||
프란츠 슈바이거 | 독일 | ||||
후베르트 슈트라슬 | 독일 | 하루에 15대를 격추 | |||
223위 | 에르빈 플라이크 | 독일 | 66대 | ||
베르너 슈트라이프 | 독일 | 야간 65대 격추 | |||
225위 | 베르톨트 그라스무크 | 독일 | 65대 | ||
카를 켐프 | 독일 | ||||
만프레트 모이러 | 독일 | ||||
228위 | 이반 코제두브 | 소련 | 66대 | 연합군 1위, 소련 1위 | |
▼ 229~304위 |
[1] 단독격투 70대, 협동격추 40대로 일각에선 비공인 격추수까지 포함하면 120대에 이를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343해군항공대에 합류하여 칸노 나오시의 301비행대에서 시덴카이를 타고 활약했으며 45년 4월 1일 기지를 기습한 헬켓들에게 대응하여 이륙하던 중 피격당해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