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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5 09:39:31

포함외교

함포외교에서 넘어옴
1. 개요2. 역사3. 사례

1. 개요

砲艦外交

영어 gunboat diplomacy의 한자 번역어로, 군함을 앞세워서 하는 외교를 의미한다. '함포외교'라고도 한다. 상대방보다 우월한 군함(해군력)을 이용해 사실상 압력을 가하면서도 외교 자체는 일견 합법적으로 진행하여 유리한 협상을 달성하려고 하는 눈 가리고 아웅식 강제외교의 일종이다.

여기서의 '포함'은 다소 상징적인 의미로, 실제적 의미는 '군사력(특히 해상군사력)'을 의미한다. 물론 인류 역사상 무력을 앞세워 외교를 요구하는 사례는 고대부터 꾸준히 있어 왔던 사례지만[1] 실제 '외교, 수교'만을 위한 이런 군사시위 행위는 근대의 전열함, 전함 등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포함외교라고 불리게 되었다.

파머스턴 경으로도 알려진 영국의 전 총리 겸 외무장관 헨리 존 템플이 포함외교의 원조격 쯤 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단순한 무력외교까지 합쳐 설명하면 난잡해지기 때문에 이 항목에선 근대이후 벌어진 함선, 해상군사력에 의한 외교만을 설명하기로 한다.

2. 역사

스페인 제국의 성공을 일으킨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의 열강들은 앞다투어 식민지 경영을 하고자 했다. 이러한 제국주의의 발흥은 무력을 통해 강제적으로 식민지를 확장시키는 것을 당연시하였고 유럽의 동쪽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은 해로를 통해 식민지를 확장시키게 되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강력한 해군력은 곧 국가의 국력을 뒷받침해 주는 필수요소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유럽 국가의 해군력은 산업 혁명을 거쳐 유럽 국가들이 기존의 약탈식 식민정책을 포기하고 식민지를 값싼 원료의 생산지와 자국 공산품의 판매처로 운용하는 '자본주의식' 약탈 체제로 넘어가면서 더욱 성장했다. 얼핏 보면 더 쉬워 보이는 단순 약탈 체제에서 더 복잡해 보이는 체제로 넘어간 이유는 '공장에서 대량생산을 했으면 당연히 팔아야 하는' 한계에 봉착했기 때문으로 기존 국가들의 정책이었던 단순 약탈 식민지 경영은 산업사회에선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에 쓰이던 전열함과 같은 목재 범선 군함 역시 포함외교에 널리 쓰였고 동남아시아 등지에선 먹혀들어갔지만 정말 강력한 국가[2]에는 먹히지 않았다. 비록 전열함은 강력했지만 정말 제대로 해전, 전쟁을 경험하고 해안 포대와 군대를 구축한 중앙집권이 제대로 구축된 국가를 상대로 할 경우 타지에서 제한된 보급과 제한된 인원, 함선만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가진 원정함대는 처절하게 박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업 혁명과 특허제도로 인해 기존의 범선은 증기선, 철갑선 등으로 대체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강철로 장갑을 댄 군함은 산업 혁명을 거치지 않은 국가들의 해안 방어로는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요즘처럼 고폭탄이나 대함 미사일 따위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기 때문에 산업 혁명의 영향을 받지 않은 국가들의 함포, 요새포는 기존의 둥근 철탄환을 쏘아대는 것이 고작이었고 당연히 그런 포로는 철제 장갑함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게 된다.

이런 철갑함들은 서구 과학기술의 상징이었고 근대화를 이루지 못한 국가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당장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일본 측에서 언급되듯이 철갑선들은 '물 위를 떠다니는 해상요새, 불침함' 정도로 취급되었다.[3] 심지어 일본 측에서도 '흑선' (쿠로후네 사건)이라고 언급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근대화되지 못한 국가들은 철갑함에 확실한 피해를 주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군함을 내세울 수 있었던 서구 열강의 입장에서 보면 군함은 두려움도 주고 군사적 우위도 점하는 '확실하고 편안하고 효과적인 대화수단'이 되었다. 이런 군함의 속성 때문에 전함이 부각되고 함대결전이 발전하게 되지만 이건 조금 더 훗날의 이야기.

무엇보다 전근대 시기였던 당시에도, 그리고 현재까지도 핵심적인 수송수단은 선박과 연안항로다. 제대로 닦이지도 않은 도로로 우마차나 사람이 지고 나르는 것보다, 현대의 기준으로도 도로나 철도, 항공기를 통한 지상 및 항공 수송수단보다 배에 짐을 실어서 물길 따라 이동하는 것이 훨씬 수송 능력이 높다.[4] 한반도에서도 조운선이 사용되었고 일본은 비좁은 우라가 수도를 봉쇄하기만 하면 대도시인 에도에서 순식간에 기아 사태가 벌어지며 대륙국가인 중국조차 강남의 막대한 생산물을 대운하를 이용해 베이징을 비롯한 내륙에 운반하였기 때문에 제해권과 내강항행권을 제압당하면 국가경제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그나마 이전 목제 전함 정도라면 방어측 특유의 물량전으로 집중시킨 연안포대와 화공선 등으로 어떻게 되겠지만 증기 엔진을 단 철갑선이 등장하면 대책이 없게 된다. 정치집단에 실질 능력만큼 중요한 위신 역시 치명타.

게다가 서구 국가들의 식민지 경영 정책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들은 '통상'을 요구했다. 굳이 식민지를 점령해서 다른 열강들에게 욕을 먹고 싸우는 것, 그리고 식민지 치안을 유지하고 정치적 부담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근대화되지 못한 국가들에게 공업제품을 비싸게 팔고 원료를 싸게 사오는 폭리를 취하는 편이 여러모로 이득이였기 때문이였다. 물론 당하는 쪽도 바보는 아니었기 때문에 경제적 예속을 우려하는 경우가 많았고(그리고 전근대적인 국가의 무역독점주의에 의거해 통상수교라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고) 흥선대원군처럼 수교를 거부해 버리는 사태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포함외교는 악명을 떨쳤다.

이렇게 포함외교는 한동안 맹위를 떨쳤지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민족자결주의가 대세를 이루고[5] 결정적으로 냉전 시대가 찾아오면서[6] 거의 소멸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말을 듣지 않는 모사데크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영국이 키프로스에 군대를 증강하는 등 꽤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1956년 수에즈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옛날처럼 말 안 듣는 이집트를 조지려다가 소련의 핵 협박에 깨갱하고 물러나면서 끝났다.

이후에는 19세기와 같은 포함외교는 사라졌지만 해군 함정을 동원한 무력시위는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미국은 수틀리면 항공모함 전단을 전개하는 것으로 무언의 무력시위를 한다. 미국뿐만 아니라 웬만한 해군을 지닌 다른 나라들도 해군 함정들을 동원해서 상대국에게 무력시위랑 경고를 하는 것은 지금도 흔한 일이다. 포함외교 시대와의 차이점이라면 해군 무력시위는 이제 강대국만의 점유물만은 아니라는 것. 2003년에는 태국차크리 나루에벳을 동원해 캄보디아를 압박한 적도 있었다.

대한민국에서는 MT한국케미호 나포 사건 당시 청해부대 소속 최영함을 호르무즈 해역으로 급파해 이란 정부에 대한 압박 카드로 사용했다.#

3. 사례

예시 작성 시 '사건명 - 가해국→피해국' 순으로 작성해 주세요.

[1] 하지만 보통 군사력으로 외교를 강제할 정도로 군사력, 국력의 격차가 발생할 경우 고대국가의 특성상 차라리 정복전쟁이 나았으므로 고대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전쟁을 하곤 했다.(일례로 중국 춘추전국시대합종연횡. 진의 국력이 다른 국가를 압도했지만 다른 국가들이 뭉치면 진도 이길 수 없어서 외교적으로 강제하는 선에서 끝내곤 했다. 이후 분열책이 성공하자 각개격파에 성공하고 진시황은 중국을 통일했다.)[2] 이를테면 근대 직전 강희제, 옹정제로 포텐을 터뜨려 세계 국력 정점을 찍은 청나라 등.[3] 여기서 더 하자면 '우리는 못 만드는 무적의 요새를 양이(洋夷)놈들이 만들어 왔다!', '저거 뭐야? 무서워!' 등의 반응. 그나마 기존의 목제 범선은 화공선 등으로 태울 수라도 있었지 철제 군함 앞에선 이런 공격 따위는 먹혀들지 않았다.[4] 도로와 철도는 안전성과 유연성이 선박에 비해 높고 항공기는 신속성이 높지만 이에 반비례하여 수송량은 선박에 비하면 바닥을 긴다. 선박은 유연성과 안전성이 도로와 철도에 비하면 낮고 신속성은 낮지만 이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송 능력과 공해만의 유연성으로 압도한다.[5] 유엔 등이 결성되면서 다른 국가에 대한 무력 개입이 국제사회의 큰 비난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6] 억지로 포함외교를 하다가는 반대진영의 폭포같은 항의와 흑색선전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