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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구역 | 카를로비 바리주 헤프구 | ||||
시장 | 얀 브르바 (Jan Vrba) | ||||
면적 | 96.36㎢ | ||||
인구 | 32,825명[A] | ||||
인구 밀도 | 340명/㎢[A] | ||||
시간대 | UTC+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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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코 서쪽에 있는 도시로 카를로비 바리주에 속해있다. 면적은 96.37km2, 해발고도는 459m, 인구는 32,825명(2024년 기준), 인구 밀도는 340명/km2이다. 오흐르제 강과 접하며 독일 국경과 가까운 편이다.역사적으로는 주데텐란트에 속했다. 과거에는 독일인 다수지역[3]으로 독일계 보헤미아 지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나[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인 인구는 추방되었다.
2. 역사
원래 헤프는 슬라브인들이 살았다. 슬라브인들은 이 곳에 고르드[5]를 세웠고 현재 이 곳에 헤프 성이 있다. 하지만 동방식민운동이 시작되면서 독일과 가까운 헤프에 독일인들이 몰려들어 왔고 헤프를 에기레라고 불렀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이 곳을 점령하면서 독일인들은 더더욱 몰려왔다. 하지만 1322년 보헤미아 왕국의 얀 루쳄부르스키가 헤프를 점령하면서 보헤미아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1459년 4월 25일 작센 선제후령과 보히메이 왕국 간의 국경을 설정한 헤프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이 것은 오늘 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15세기 헤프는 7,300명의 인구를 가진 보헤미아 왕국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가 되었으나, 후스 전쟁, 30년 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동안 헤프는 심각한 고통을 겪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명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헤프에서 살해당했다. 3번의 전쟁을 겪으면서 헤프는 황폐화되었고 특히 1809년 큰 화재가 발생해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제1차 세계 대전 후 헤프는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도시의 대부분의 인구는 독일계라서 갈등이 생겼다. 왜냐하면 인구의 0.5%만 체코인이었고 또한 헤프의 말은 북부 바이에른 방언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결국 뮌헨 협정으로 나치 독일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독일이 2차 대전에서 패배함으로 인해 헤프의 독일계 주민 대부분 추방되었다.
3. 여담
- 헤프는 바이올린 제작 학교로 매우 유명하다.
[A] 2024년 1월 1일 기준[A] [3] 이곳 출신의 독일인으로는 과거 독일 50마르크 지폐의 도안이었던 건축가 발타자르 노이만 등이 있다.[4] 한때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개편안에서 독일계 보헤미아의 수도로 선정되기도 했다.[5] 고대 슬라브인들이 나무로 세운 정착지를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