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29 07:28:24

헨리 빙켈만



파일:Kl-koninklijke-landmacht-4.svg.png
네덜란드군 총사령관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6666, #004f4f 20%, #004f4f 80%, #006666); color: #ff99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네덜란드 육군 및 해군 총사령관
Opperbevelhebber Nederlandse Land- en Zeemacht
<rowcolor=#ff9900>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코르넬리스 스네이더르스 빌럼 프레데릭 폽 이자크 레인더르스 헨리 빙켈만
<rowcolor=#ff9900> 제5대 제6대
베른하르트 공 헨드릭 요한 쿠륄스 }}}}}}}}}
<colbgcolor=#006666><colcolor=#fff> 제4대 네덜란드군 총사령관
헨리 헤라르트 빙켈만
Henri Gerard Winkelman
파일:Henri Winkelman.jpg
출생 1876년 8월 17일
네덜란드 림뷔르흐주 마스트리흐트
사망 1952년 12월 27일 (향년 76세)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주 수스테르베르흐
국적
[[네덜란드|]][[틀:국기|]][[틀:국기|]]
학력 왕립사관학교
직업 군인
계급 대장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전쟁 전3. 제2차 세계 대전
3.1. 홀란트 요새 전략3.2. 독일의 침공3.3. 정권 위임 및 항복
4. 전쟁 후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네덜란드군의 총사령관이었다.

2. 전쟁 전

1876년 8월 17일 네덜란드 림뷔르흐주 마스트리흐트에서 율리우스 헨드릭 빙켈만[1]과 샤를로트 헨리에테 브람스[2]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덜란드령 동인도군의 장교가 되는 것을 목표로 네덜란드 왕립사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훈련 도중 보병 장교가 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1896년에 중위로 진급한다.

군사 훈련을 마치고, 그는 본격적으로 진급을 거듭하기 시작한다. 1913년대위로 진급하였고, 1923년에는 소령, 1931년에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네덜란드 육군 제4사단을 지휘하게 된다. 1934년에는 중장까지 진급하지만, 얼마 안가 군을 떠난다. 빙켈만은 네덜란드 참모총장이 되기 위해 나섰으나, 이자크 레인더르스 장군에게 패배한다. 이후 은퇴를 결심하고 명예 전역한다. 이후에도 퇴역 장교로써 다양한 방도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자문을 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독일의 폴란드 침공 4일 전인 1939년 8월 28일에 동원령을 선포한다. 참모총장인 레인더르스 장군이 네덜란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국방장관 아드리안 다익스호른과의 마찰로 인해 1940년 2월 5일에 사임[3]하게된다. 이에 네덜란드 국가의회에서는 짧은 회의 후에 빙켈만을 헤이그[4]로 소환하여 총사령관 자리를 제안한다. 빙켈만은 하루 뒤 제안을 받아들인다.

3. 제2차 세계 대전

3.1. 홀란트 요새 전략

빙켈만은 네덜란드군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군의 인력은 약 28만명으로, 이는 전 국토를 방위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인력이었다. 게다가 네덜란드군전차를 단 한대도 보유하지 못하였고, 야포와 대공포 또한 부족했다. 따라서 빙켈만은 네덜란드군이 현대식 기동 방어 전략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그는 "홀란트 요새"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인구가 밀집되어있는 란트스타트[5] 지역을 중심으로 정적이며 요새화된 전선을 유지하는 다소 전통적인 전략이다. 빙켈만은 네덜란드군독일군을 네덜란드 국경 밖으로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연합국 병력이 네덜란드에 도착할 때까지 독일군의 진격을 늦추고 홀란트 요새 지역을 사수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북부의 3개 주[6]는 사실상 방치되었다. 빙켈만은 북부로는 아프슬라우트 다이크[7]의 동쪽 끝에 위치한 최첨단 요새에서 독일군의 진격을 제지할 계획이었다. 동부에서는 아이셀강과 뫼즈 강을 따라 최전방선이 그어졌다. 그러나 네덜란드군의 중심 방어선은 네덜란드 정중앙에 위치한 흐레베선[8]으로, 제2군단 및 제4군단이 방어를 맡는다. 흐레베선은 홀란트 요새의 동부전선으로써 필사적으로 방어될 계획이었는데, 이는 본래 네덜란드 방어체계의 핵심이었던 신 네덜란드 흘수선[9]이 노후화되었을 뿐만아니라, 암스테르담이나 위트레흐트같은 대도시와 너무 근접했기에 치한 조치였다[10].

3.2. 독일의 침공

독일의 본격적인 침공은 1940년 5월 10일 오전 3시 55분에 시작된다. 공수부대를 헤이그로 진입시켜 네덜란드 정부네덜란드 왕가, 그리고 네덜란드군 총사령부를 생포하여 네덜란드를 24시간만에 굴복시키겠다는 히틀러의 대담한 계획은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독일군은 네덜란드 동부 국경을 비교적으로 쉽게 넘을 수 있었으나, 앞서 언급한 흐레베선 및 아프슬라우트 다이크 요새에서 멈추게 된다. 전쟁 하루가 경과했을 무렵, 빙켈만은 독일군의 1차 공격을 막아낸 네덜란드군의 성과에 만족했다고 한다.

사태가 심각했던 곳은 네덜란드 남부로, 독일 공수부대가 이미 로테르담도르드레흐트로 가는 무르다이크[11]다리를 이미 확보한 상태였다. 이 와중에 막강한 독일 보병은 제9전차사단의 지원하에 이미 남부 독일 국경의 페일-람선[12]을 돌파하여 네덜란드 남부의 노르트브라반트주를 거침없이 휘젓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대로 무르다이크 교두보와 접선하여 홀란트 요새를 남부로부터 진입하여 네덜란드벨기에프랑스로부터 사실상 고립시킬 수 있기 때문에 엄청나게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에 5월 11일, 네덜란드군프랑스군과 협력하여 무르다이크 다리를 되찾으려 하지만 실패하고, 흐레베선에서 잃은 고지를 되찾는 것 또한 실패하게 된다.

3.3. 정권 위임 및 항복

5월 13일빌헬미나 여왕은 이미 런던으로 떠났고, 대부분의 각료 또한 망명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이에 재무장관 막스 스테인베르헤[13]가 독자적으로 국왕정부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유럽 영토 전역에 대한 정부 권한을 모두 빙켈만에게 넘겨주면서, 의회가 빙켈만에게 충성할 것을 요구했다. 이는 나중에 정부국왕 모두에게 승인받게 된다.

그러나 같은 날 흐레베선은 3일간의 치열한 전투 후 무너졌다. 한편, 제9전차사단은 무르다이크 교두보와 연결하는데에 성공하며 홀란트 요새를 남부에서 돌파하며 로테르담까지 진출하는데 성공, 뫼즈 강 남쪽 기슭까지 나아간다. 전황은 전술적으로 가망이 없었지만, 강의 북쪽 기슭은 아직 네덜란드군이 확보한 상태였다. 북쪽 기슭의 네덜란드 기관총과 로테르담에서 시가전을 펼치는 네덜란드 해병대 때문에 독일군은 도하할 수 없었고, 이는 히틀러의 심기를 건드리고 만다[14]. 5월 14일, 그는 네덜란드군의 저항을 한번에 부수라고 지시했고, 이에 따라 독일 공군로테르담을 폭격[15][16]한다. 독일 공군위트레흐트에도 폭격을 가할 것을 위협하자, 빙켈만은 결국 항복을 결심한다. 그는 다음날, 라이소르트[17]에서 공식적으로 독일군에 항복한다.

4. 전쟁 후

네덜란드의 항복을 서명한 뒤, 독일 측은 빙켈만에게 네덜란드에서 독일군을 더이상 저항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거부하자, 7월 2일에 억류되어 남은 전쟁동안 전쟁 포로가 되었다. 이후 1945년 10월 1일에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훈장인 빌렘 군사훈장[18]을 수여받으며 명예 전역한다. 그가 5월 15일에 항복에 서명한 장소인 라이소르트의 초등학교 앞에는 아직도 그의 동상[19]이 서있다. 뉜스페이트[20]에 위치한 군 부대 또한 그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는데, 공교롭게도 항복을 서명한 날과 같은 2007년 5월 15일에 폐지되면서 하르스캄프[21]의 한 군 부대로 이름이 이전되었다. 빙켈만은 1952년 12월 27일, 자택에서 76세의 나이에 평화롭게 숨졌다.
[1] Julius Hendrik Winkelman[2] Charlotte Henriëtte Braams[3] 명예 전역[4] 네덜란드 정부가 위치한 도시이다.[5] 노르트홀란트, 자위트홀란트, 위트레흐트[6] 드렌터, 흐로닝언, 프리슬란트[7] 프리슬란트노르트홀란트를 잇는 긴 제방[8] Grebbe Linie[9] Nieuwe Hollandse Waterlinie[10] 후에 로테르담공습이 일어났다.[11] Moerdijk[12] Peel-Raam Linie[13] Max Steenberghe[14] 히틀러는 이 무렵이면 네덜란드를 완전히 정복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15] 이 때 민간인 사망자만 884명으로, 로테르담 도심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때문에 현재도 네덜란드의 다른 도시와는 달리 로테르담 도심에는 전통적인 건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16] 파일:rotterdam bombing.jpg[17] Rijsoord[18] Militaire Willems-Orde[19] 파일:winkelman statue.png[20] Nunspeet[21] Harskam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