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34><colcolor=#fff> 헨리 포드 2세 Henry Ford II | |
출생 | 1917년 9월 4일 |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 |
사망 | 1987년 9월 29일 (향년 70세) |
미시간 주 디트로이트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조부모 | 할아버지 헨리 포드 할머니 클라라 제인 브라이언트 포드 |
부모 | 아버지 에드셀 브라이언트 포드 어머니 엘리너 클레이 포드 |
배우자 | 앤 맥도넬 (1940 ~ 1964년 / 이혼) 마리아 크리스티나 베토레 (1965 ~ 1976년 / 이혼) 캐슬린 두로스 (1980 ~ 1987년) |
자녀 | 3명 |
활동 기간 | 이사회 의장: 1960년 7월 13일 ~ 1980년 3월 13일 사장: 1945년 9월 21일 ~ 1960년 11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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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젊은 시절의 헨리 포드 2세 |
헨리 포드 2세(1917 ~ 1987)는 헨리 포드의 장손이자 포드 모터 컴퍼니의 총수였던 사람이다. Jr(주니어)가 아니라 II(로마자 숫자 II)가 공식 표기다. 읽을 때도 '헨리 포드 세컨드'라고 읽는다.
창업주이자 그 유명한 헨리 포드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다. 헨리 포드의 아들은 에젤 브라이언트 포드(1893 ~ 1943)였다.[1]이며, 헨리 포드 2세는 에젤 포드의 아들로 1917년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다. 에젤 포드는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의 아버지 이름을 따서 헨리 포드 2세라고 이름붙였다. 즉 헨리 포드 2세는 할아버지 이름을 물려받은 셈이다. 참고로 헨리 포드 2세의 아들 이름도 할아버지 이름을 따서 에젤 포드 2세다.
에젤 포드는 창업주 헨리 포드 밑에서 경영을 배웠고 젊은 시절에는 포드 모델 A를 출시하고 머큐리 브랜드를 설립하거나 링컨(자동차)를 인수하기도 하는 등 차근차근 2세 경영자의 길을 걸으며 아버지 헨리 포드와는 또 다른 진보적인 경향을 보이던 기업인이었으나, 1943년 그만 헨리 포드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2]
에젤의 빈자리는 젊고 패기있던 30대 중반의 헨리 포드 2세에게 대물림되었다. 4년 후 창업주 헨리 포드까지 세상을 떠나자 포드 컴퍼니는 오롯이 헨리 포드 2세의 왕국이 된다. 1945년 그는 포드 컴퍼니의 대표가 되었고 CEO로 재직하는 내내 포드 컴퍼니의 제왕으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름값 이상으로 능력을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한국이나 일본의 재벌가와는 다르게 미국의 경영 환경은 경영권이 주주(투자자)들의 압력에도 늘 노출되어 있었고 능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순간 성난 주주들이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열어 바로 뒷방으로 물러나게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1956년에는 포드 컴퍼니를 뉴욕 증권거래소에 상장시켜 상장회사로 만들었고 회사를 더욱 성장시켰다. 물론 포드 에드셀[3] 같은 대실패도 겪었으나, 이후 포드 머스탱 등 여러 히트작들을 성공시켰다. 이처럼 헨리 포드 2세는 19세기와 달리 보통 CEO나 COO를 따로 두는 20세기식 미국식 경영 체제에서도 흔치 않은 타입의 (나쁘게 말하자면 구시대적 제왕적인) 재벌 총수였다.
헨리 포드 2세의 전성기는 아메리칸 머슬카의 전성시대와 거의 일치한다. 상술한 머스탱의 대성공도 머슬카 시장의 패권을 장악한 것이었고 1950~1960년대 부유하고 풍요로운 미국 중산층의 삶은 곧 자동차 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던 것이 1973년 1차 석유파동, 1979년 2차 석유파동을 거치며 미국 소비자들도 기름 먹는 하마인 머슬카보다는 좀 더 연비에 신경쓴 차량을 원하게 된다. 포드도 해외에서 포드 유럽지사의 개발에 노력을 경주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1970년대는 포드뿐만 아니라 미국차 전체가 주춤하는 동안 독일차와 일본차가 약진하던 시대였다. 이 때문에 포드 컴퍼니에서 평생을 바쳐 헌신해 오며 포드 머스탱, 링컨 컨티넨탈 마크 III, 포드 에스코트 등을 개발해 온 핵심 인재인 리 아이아코카와 의견충돌을 빚었고[4] 포드 핀토가 인명까지 경시하는 수준의 단가절감으로 인한 사망사고가 연달아 벌어지며 잘 팔리지 않자 결국 1978년 7월 13일에 그를 해고했다. 그리고 아이아코카는 헨리 포드 2세 사후인 1980년대에 포드의 숙적인 크라이슬러로 옮겨 포드 모터 컴퍼니에게 화끈하게 복수한다.
헨리 포드 2세는 계속되는 실적부진과 고령 등을 이유로 1979년에는 포드 컴퍼니의 CEO에서 물러나고 이듬해인 1980년에는 회장[5]직에서도 물러나 완전히 은퇴한다. CEO 및 회장 자리는 조카[6]인 윌리엄 클레이 포드 주니어(1957 ~ )가 물려받는다.
1987년 헨리 포드 2세의 사망 이후 현재의 포드 모터 컴퍼니는 윌리엄 클레이 포드 주니어가 대표를 맡고 있지만, 과거 헨리 포드 2세 시절의 제왕적 경영의 모습까지는 보이고 있지 않다. 단지 윌리엄 클레이 포드 주니어는 회사의 대표이자 이사회의 회장, 그리고 포드 가문의 수장으로서 지분 2%와 이사회 의결권의 40%를 쥐고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7]
모터스포츠 쪽에 고개도 돌리지 않았던 할아버지와 달리 본인은 모터스포츠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투자를 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영화 포드 V 페라리에 그 모습이 잘 드러나 있는데, 각색이 좀 들어갔지만 대체로 실화다. 또한 영화에서는 당시 회사 내에서 헨리 포드 2세의 제왕적 입지가 어떠했는지 잘 드러나고 있다. 특히 첫 장면에서 그의 위압감은 마치 한국 재벌가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마저 있다.
2. 가족관계
자세한 내용은 포드 가문 문서 참고하십시오.[1] 철자가 Edsel인데 흔히 '에드셀'이라고 알려져 있다.[2] 아버지인 헨리 포드와 경영상 이견을 많이 보였고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공 분야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견해 차이가 컸다. 결론적으로는 에젤의 선견지명이 맞아떨어졌지만 그는 이 과정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고 이로 인해 위암이 발병, 수술하였지만 뇌수막염 등으로 전이되어 더 이상 손쓸 수 없었다.[3] 단, 헨리 포드 2세 본인은 브랜드명에 아버지 이름인 "에드셀"을 쓰는 것을 반대했다.[4] 아이아코카는 연비가 개선된 소형 일본차, 특히 혼다의 소형 엔진을 채용한 모델을 선보이자는 전략을 세웠지만 헨리 포드 2세는 이 의견을 용납하지 않았다.[5] 이사회의 회장을 의미한다. 한국에서 기업총수=회장 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것도 대표이사가 이사회 회장을 겸하기 때문이다.[6] 헨리 포드 2세의 동생인 '윌리엄 클레이 포드 시니어'의 아들. 윌리엄 클레이 포드는 이사회의 일원이었지만 형과는 달리 경영 전반보다는 차량 디자인 파트나 혹은 포드 가문의 방계 사업에 집중했다.[7] 순수 지분율로만 따지자면 뱅가드 그룹이 5%로 비중이 더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