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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9 02:11:33

혜시

諸子百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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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施
기원전 370년경 ~ 기원전 310년

1. 소개2. 행적3. 사상

1. 소개

전국시대의 사상가. 혜자(惠子)라고 불리기도 한다. 공손룡 등과 더불어 명가학파의 주도적인 철학자이다. 그의 학설은 주로 장자의 저서에 묘사되어 있다. 장자의 주인공인 장주와는 친구 관계로 나오는데, 어째 나올 때마다 장주에게 논박당하는 역할로 나오기 일쑤다(...).

여러 학문을 추구해 서적이 수레 다섯 대에 실을 정도로 많았지만 그 도리가 잡다해 그 말이 적중하지 못했으며, 지극히 큰 것은 끝이 없고,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다고 주장했다. 사물을 분명히 보는 방법 열 가지를 제시해서 이를 천하에 공표해 종횡가들을 설득했다. 지금으로 치면 말장난이나 궤변에 불과하지만, 언어가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철학적으로는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활동하던 소피스트들과도 닮은 면모를 많이 보여준 인물이었다.

2. 행적

기원전 341년에 제나라와 위나라가 마릉 전투를 하면서 위나라가 크게 패했는데, 위혜왕이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자 제나라로 사람을 보내 조공한다고 전하면 초나라에서 분노해 제나라를 칠 것이라고 진언했다.

시기는 불명이지만 한나라, 위나라의 친교를 위해 태자 명을 제나라에 인질로 보냈다가 위혜왕은 태자 명을 보고싶어 했는데, 혜시가 병에 걸린 척 해서 초나라가 공자 고를 돌려보내도록 조장하면 제나라에서도 보낼 것이라고 진언해서 태자 명을 돌아올 수 있게 했다. 또 위혜왕에게 총애를 받고 있던 전수에게 군주의 총애를 계속 받으려 하지만, 군주의 총애를 잃게 하려는 사람은 아주 많다면서 군주의 측근들과 가까이 지내라고 충고했다.

322년에 장의가 위나라를 진, 한과 연합해 제, 초를 공격하려 했는데, 혜시는 위나라를 제, 초와 합종시켜 군사 동원을 저지하려는 의견을 내세웠다.

기원전 319년에 위혜왕이 죽자 장례를 치르려 했지만 장례를 치르려는 날에 비와 눈이 크게 내려 성곽이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장례를 강행하면 백성들이 힘들고, 장례 비용이 크게 늘어나 관의 비용으로 충당하기 어렵다고 하자 위양왕은 아들로서의 도리를 지켜야 한다면서 강행하려 했다.

서수가 혜시에게 설득할 것을 말하자 혜시는 옛 주나라의 계력을 장사지냈다가 물이 넘치자 3일 뒤에 장례를 치른 문왕의 이야기를 해서 기일을 미룰 수 있게 했다.

위양왕이 어느 나라가 자신이 보낸 사신을 후한 대접을 하는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수레의 숫자를 동등하게 해서 서수를 제나라, 혜시는 초나라에 파견되었는데, 혜시는 이를 알고 초나라에게 두 나라의 외교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라고 사람을 보내 초나라에게 전했다. 그러자 초회왕이 교외까지 나와 혜시를 맞이했다.

장의로 인해 위나라에서 쫓겨나자 초나라로 갔는데, 초왕이 그를 받아들이려 했다가 신하가 장의의 지지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해 송나라로 들여보내줄 것을 진언하면서 초왕으로 인해 송나라로 들어갔다.

3. 사상

《장자》 천하 편에 '역물10사(歷物十事)'라 불리는 10개의 명제가 전해지고 있다. 이 명제들은 모두 모순된 명제이다.
  1. 지극히 큰 것은 바깥이 없으니, 이를 일러 '커다란 하나'라 한다. 지극히 작은 것은 안이 없으니, 이를 일러 '작은 하나'라 한다.
  2. 두께가 없는 것은 쌓을 수 없으나, 그 크기는 천리나 된다.
  3. 하늘과 땅은 낮고, 산과 연못은 평평하다.
  4. 해는 중천에 떠오르면서 기울기 시작하고, 사물은 태어남과 동시에 죽어간다.
  5. 큰 부분이 같은 것은 작은 부분이 같은 것과 다르다. 이를 일컬어 '작은 부분은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고 한다. 만물은 모두 다 같기도 하고, 모두 다 다르기도 하다. 이를 일컬어 '큰 부분은 같지만 (사실은) 다르다'고 한다.
  6.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도 끝이 있기도 하다.
  7. 오늘 월나라에 갔다가 어제 돌아왔다.
  8. 이어진 고리는 풀 수 있다.
  9. 나는 천하의 가운데를 안다. 연나라[1]의 북쪽이며 월나라[2]의 남쪽이다.
  10. 두루 만물을 사랑하라. 하늘과 땅은 한 몸이다.
혜시는 이상의 명제를 뛰어난 것으로 자부하여, 이것을 천하에 공표하여 논리학자들을 설득하였다. 그래서 천하의 논리학자들이 모두 서로 더불어 이것을 즐거워했다고 한다.

또한, 그 당시 변론가들이 즐겨했던 명제들이 장자에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혜시의 사상을 엿볼 수 있다.
  1. 알에 털이 있다.
    닭이나 새에는 깃털이 있는데 알에 털이 없다면 닭이나 새의 깃털이 어디에서 생겼겠느냐는 반론적 논리에 근거한 주장이다. 또 시간의 무한성을 기준으로 말하면 알에서 닭으로 변화하는 시간은 없는 것과 같기 때문에 닭의 알에 털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2. 닭에는 세 개의 발이 있다.
    실재하는 닭의 발 둘에다, 닭의 발이라는 말[言]을 합치면 모두 셋이 된다는 주장이다. ≪公孫龍子(공손룡자)≫ 〈名實(명실)〉편에 “닭의 발이라고 하면 일단 하나이고, 발의 수를 헤아리면 둘이다. 발은 둘이면서 또 다른 말로서의 발이 있기 때문에 셋이다[謂之雞足則一 數足則二 二而一 故三].”라고 한 내용과 동일하다.
  3. 초나라 도읍인 영(郢)에 천하가 있다.
    우주공간은 무한히 크므로 그 무한대의 우주공간에서 보면 영(郢)은 작은 도시이나, 크고 넓은 천하 전체와 비교하자면 대소의 차이는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천하 속에 영(郢)이 있다.’고 할 것을 ‘郢 속에 천하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4. 개는 양이 될 수 있다.
    개와 양은 모두 네발짐승이라는 점에서 같다. 또 이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개를 양이라 부를 수 있고, 양을 개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5. 말은 알을 깐다.
    상식적으로 말은 태생동물이고 난생동물은 아니지만, 태생동물도 난생동물도 동물이라고 하는 데에서는 같다. 말이든 조류든 같은 동물이라는 점에서 보면 말이 알을 깐다고 할 수도 있다.
  6. 개구리에 꼬리가 있다.
    개구리에게는 꼬리가 없고 올챙이에게 꼬리가 있다. 올챙이는 변태과정을 거쳐서 개구리가 된다. 그런데 꼬리가 있는 올챙이로부터 꼬리 없는 개구리로 변화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을 커다란 우주의 시간에 비유하면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 시간을 무시하면 ‘개구리에 꼬리가 있다.’는 주장이 가능해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개구리와 올챙이는 이름은 다르나 실질은 같다. 그래서 이름은 무시하고 실체만 취하면 개구리에 꼬리가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7. 불은 뜨겁지 않다.
    불을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의 감각, 지각의 작용이므로 뜨겁다고 느끼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주관적 판단이라는 주장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불은 뜨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8. 산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거대한 산도 사람의 작은 입에서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형체를 갖는 것들에서 보이는 크고 작음의 차이는 무한대의 우주공간에서 보면 없는 것과 같으므로. 산은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는 산은 본래 이름이 없고 산이란 이름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므로 산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9. 수레바퀴는 땅에 붙어 있지 않다.
    만약 수레바퀴가 땅에 붙어 있다면 바퀴가 굴러갈 수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 지면에 접한 어느 순간(점)과 다음의 같은 순간(점)까지의 사이에는 중간 상태, 곧 땅에 붙지 않는 상태가 존재한다. 따라서 전후의 접점을 무시하고 중간적인 상태만을 문제 삼는다면 '수레바퀴는 지면에 접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성립한다.
  10. 눈은 보지 못한다.
    눈이 보는 것이 아니고 지각(知覺) 작용을 하는 정신이 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곧 사물을 보는 작용은 감각기관인 눈만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눈, 빛, 그리고 지각 작용이 일체가 되어 비로소 성립된다.
  11.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도달할 수 없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까지의 길이는 끊어지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므로 무한하다. 따라서 결코 그곳에 도달할 수 없고, 지시하는 것이 무한히 이어지므로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
  12. 거북이는 뱀보다 길다.
    사물의 길고 짧음의 차이는 ‘무한의 길이’에서 보면 상대적인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거북이와 뱀의 길고 짧음은 무시될 수 있다.
  13. 굽은 자로 네모를 그릴 수 없고 그림쇠로 원을 그릴 수 없다.
    직각과 원의 개념을 그대로 현실에 구현할 수 없다는 것. 절대적 사각과 절대적 원형에 대해 직각자와 컴퍼스는 상대적 불확실성 밖에 못 가진다는 뜻.
  14. 구멍에 꽂아 넣은 자루를 구멍이 꽉 둘러싸고 있지 않다.
    자루가 비록 구멍 속에 있지만 자루가 그 속에서 도는 것은 구멍이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때문에 둘러싸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 것.
  15. 나는 새의 그림자는 결코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새의 그림자는 움직이는 적이 없다. 그림자는 결코 그 자체로는 움직이지 않는 의존적인 존재이므로 움직인다고 할 수 없다. 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새이다. 새는 움직여도 그림자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그림자는 빛에 의해 생기므로 빛에 의해 지면에 투사되는 새의 그림자는 한 순간 한 순간 지면에 떨어져 정지하는 것일 뿐이다. 제논의 역설과 비슷하다.
  16. 화살이 빨리 날아가더라도, 날아가지도 머물지도 않을 때가 있다.
    한 순간 한 순간을 '간다'고 할 수도, '멈춘다'고 할 수도 없다. 빠르다고 해도 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가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화살의 움직임을 세밀하게 분할하면 動이라고도 靜이라고도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마찬가지로 제논의 역설.
  17. 강아지는 개가 아니다. (狗非犬)
    구(狗)는 강아지. 犬은 성견(成犬). 이 명제는 아마도 묵자학파(墨子學派)에서 “狗는 犬이다.”라고 한 정의에 반박을 가한 것이다. 묵자학파는 狗와 犬을 ‘實’, 즉 실질적인 면에서 보면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狗와 犬은 이름이 다른 이상 동일한 것일 수 없다. 이 명제는 名과 實을 분리하는 궤변으로 아주 적합한 예라 할 수 있다.
  18. 황색 말과 검은 소는 합해서 셋이다.
    이 명제는 ‘닭에는 세 개의 발의 있다.- 鷄三足(계삼족)’과 같은 명제이다. 같음과 다름을 합치는 궤변의 좋은 예이다. 황색 말과 검은 소는 '동물'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단위이다. 또한 '황색 말'이 하나의 단위이고, '검은 소'도 하나의 단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모두 합하면 셋이 된다는 주장이다.
  19. 흰 개는 검다.
    흰 개와 검은 개는 '개'로써 같다. 또 흑이나 백은 색(色)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따라서 같다는 점에서 말하면 흰 개는 곧 검은 개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흰 개는 검다.”고 말할 수 있는 것. 큰 부류가 같은 것(大同異)만 취하고 세세한 부류에서 서로 다르다(小同異)는 것을 무시한 궤변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20. 어미 없는 망아지는 과거에 어미가 있었던 적이 없었다.
    고아가 된 망아지라도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본래 그 어미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미없는 망아지'이므로 시간을 무시하게 되면 궤변이 된다. 무한한 시간 앞에서는 유한한 생명체의 시간은 없는 것과 같으므로 '어미 없는 망아지는 그 어미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1. 한 자 길이의 채찍을 매일 절반씩 자르면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는다.
    이 대목은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추월하지 못한다고 한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의 궤변을 상기시킨다. 제논의 궤변이 공간의 무한분할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이 명제도 공간의 무한분할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당시의 논리학자들은 이상의 명제를 가지고 혜시와 더불어 서로 주고 받으면서 죽을 때까지 논쟁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1] 중국의 최북단[2] 중국의 최남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