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클럽 경력
2.1. 초창기
2.1.1.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2.1.2. 레알 마드리드 CF2.1.3. 페네르바흐체 SK2.1.4. SC 코린치안스2.1.5. FC 안지 마하치칼라2.1.6. 델리 다이나모스
2.2. 국가대표 경력[clearfix]
1. 개요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선수 경력을 서술하는 문서.2. 클럽 경력
2.1. 초창기
선수 생활 초기에는 브라질에서 성장했고 1995년 유럽에서 그의 활약에 관심을 보였고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가 잽싸게 데려갔다.
2.1.1.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그는 비첸차와의 경기에서 신고식을 치러 27미터 프리킥으로 1-0 결승골을 넣었다. 그러나 인테르나치오날레에서의 카를로스는 부진했는데, 소속 구단은 세리에 A를 7위로 마무리했다.
인테르에서 주전 레프트백으로 활동했으나 불완전한 수비력으로 인해 굳건한 입지를 지키지 못한 카를로스는 한 시즌만 뛰었고 이후 이반 사모라노를 영입하기 위해 카를로스+현금으로 스왑딜이 성립되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다.[1]
이후 2005년, 포포투와의 인터뷰에서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로이 호지슨 당시 인테르나치오날레 감독이 그를 측면 공격수로 기용하려 했지만, 자신은 좌측 수비수로 계속 뛰기 원했다고 밝혔다. 카를루스는 마시모 모라티 인테르나치오날레 구단주에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살펴봤지만 해결책이 떠나는 것밖에는 없다"라고 말을 건넸다. 본인 말에 따르면 윙어로 뛰면서 7경기 7골을 기록했다고 한다.
2.1.2. 레알 마드리드 CF
카를루스는 1996년에 시즌이 종료된 후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해 등번호 3번을 받았다.
레알로 이적하자마자 주전 레프트백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철강왕의 모습을 보여 한 시즌 45경기 이상씩 기용되었다. 1998년 2월에는 테네리페와의 코파 델 레이 경기에서 선발 출전하여 왼발로 경기장 끄트머리에서 감겨 돌아가는 슛으로 골을 넣었는데, 이는 "불가능한 골"로 묘사될 정도로 엄청난 득점이었다. 또한 카를루스가 이적한 후에 레알이 챔피언스 리그에서 다시 강자의 모습을 보여 사비우와 함께 97-98, 99-00, 01-02시즌 우승을 경험하게 된다.
카를루스는 이적 첫 시즌인 1996-97시즌과 2000-01시즌에 라리가 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특히 01-02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전반 8분 롱 스로인으로 라울 곤살레스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고 전반전 막판 산티아고 솔라리의 패스를 받아 문전으로 띄워 지네딘 지단의 역대급 원더골을 또 한번 어시스트하며 맹활약하였다. 그러나 당시 레알 마드리드는 리그 우승 시즌에는 챔스에서 부진하고, 챔스에서 좋은 성과를 얻으면 리그 성적이 다소 아쉬운 등의 리그-챔스 반비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2002-03 시즌에는 호나우두가 영입되며 브라질리언끼리 친한 모습이 포착되었다. 라리가 최종전에서 마드리드는 레알 소시에다드를 제치고 29번째 라리가 우승을 차지하기 위해 아틀레틱 빌바오를 제압해야 했는데, 카를루스는 전반 추가 시간 2분에 프리킥으로 득점을 올려 레알 마드리드가 2-1로 앞서나가게 만들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후 쐐기골에 힘입어 3-1 완승을 거두고 우승을 차지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준결승 진출에 기여하였다.
2003-04 시즌에는 우승 없이 무관에 그치고 말았지만 2003년 12월 6일에 캄 노우에서 벌어진 FC 바르셀로나와의 엘 클라시코에서 카를루스가 선제골을 넣어 20년만의 라 리가 엘 클라시코 더비 첫 원정승을 견인했다.
이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침체기가 시작되는데 리그는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에 밀리고 챔피언스 리그는 04-05시즌부터 09-10시즌까지 계속 16강에서 탈락하기 시작한다. 또한 2000년대 중반이 되면서 카를루스의 기량또한 저하되며 스피드로 빨리 메꾸었던 뒷공간을 쉽게 계속해서 내주고 실점에 관여하는 등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레알에서의 마지막인 2006-07시즌은 매우 기량이 하락해 부진하였고 부상까지 겹쳐 리그 23경기 출전에 그쳤고 챔피언스 리그 16강 FC 바이에른 뮌헨 원정에서는 킥오프와 동시에 볼컨트롤 미스로 상대 공격수에 공을 넘겨 주었고 경기 시작 후 10.12초만에 로이 마카이가 골을 성공시키며 유러피언컵 역사상 최단시간 골이라는 안 좋은 기록을 쓰기도 했다. 이 실수로 마드리드의 챔피언스리그 탈락을 야기해 맹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2007년 3월 9일에 2006-07 시즌 종료와 함께 계약이 끝나면 레알 마드리드를 떠날 것임을 선언했다. 그런데 카를루스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기록한 마지막 골은 라리가 35라운드 레크레아티보전에서 추가시간에 나온 골로 2006-07 시즌 리그 3경기를 남기고 터졌다. 이 골은 팀의 30번째 리그 우승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레알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와 승점 동률을 이루었지만, 상대 전적 원칙에 따라 우승을 차지했다. 마드리드는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벌어진 마요르카와의 최종전이자 카를루스의 고별전에서 3-1로 이겨 라 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11년을 보내면서, 그는 모든 대회를 통틀어 584경기에 출전해 71골을 기록했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의 라리가 최다 출전 외국인 선수로 370번의 경기에 나섰고, 2006년 1월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세운 종전의 329경기 출전 기록을 경신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AC 밀란과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거물 파올로 말디니와 더불어 세계 최고의 좌측 수비수로 손꼽혔다. 화려한 경력의 선수이자 선수단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선수들 중 한 명으로, 카를루스는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의 1번째 임기의 갈락티코스의 주축이었다.
2.1.3. 페네르바흐체 SK
2007년 6월 19일, 터키 쉬페르리그 우승을 거둔 페네르바흐체와 2년+1년 연장 조항 계약을 체결했다. 수천명의 팬들이 웅집한 구단의 홈 구장인 쉬크리 사라졸루에서 입단식을 치렀다.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페네르바흐체에서 치른 첫 경기에서 베식타시를 2-1로 꺾고 TFF 쉬페르쿠파 우승을 거두었다. 2007년 8월 25일, 시바스스포르와의 리그 경기에서 페네르바흐체에서 첫 골을 머리로 넣었는데, 이는 불과 그가 머리로 넣은 3번째 골이었다. 그는 시즌 말에 부상을 당해 페네르바흐체가 갈라타사라이와 리그 우승 경쟁을 벌이는 과정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팀은 갈라타사라이에게 우승을 내주었지만, 다음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 진출권을 확보했다. 카를루스는 최종 성적이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쉬크뤼 사라졸루에 국내 대회 우승컵을 가져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임을 밝혔다.
하지만 07-08 시즌에도 무관에 그치고 말았다.
2009년 10월 7일,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2009년 12월에 계약이 만료되면 페네르바흐체를 떠날 것임을 밝혔다. 카를루스는 무보수로 레알 마드리드에 복귀할 제의를 받았지만, 브라질 국내로 복귀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고, 11월 25일에 공식적으로 떠날 것임을 밝혔다. 그의 페네르바흐체 고별전은 12월 17일 경기로, 셰리프 티라스폴과의 UEFA 유로파 리그 경기에 막판 교체로 출전했다.
2.1.4. SC 코린치안스
이후 2010년에 SC 코린치안스 입단하여 15년만에 브라질 무대에 복귀해 그의 친구이자 前 레알 마드리드 동료 호나우두와 재회했다. 2010년 6월 4일, 카를루스는 인테르나시오나우와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해 코린치안스가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선두로 올라갔다. 팀은 경기를 2-0으로 이겼다. 그리고 생애 최초로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 올해의 팀에 들었다. 2011년 1월 16일, 카를루스는 포르투게자와의 경기에서 코너킥을 그대로 골로 연결하는 인상적인 골을 기록했다.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콜롬비아의 톨리마에게 패하며 지지자들의 협박으로 위협을 느낀 카를루스는 구단에 방출을 요청했고, 코린치안스 구단 관계진들은 이를 즉시 수락했다.
2.1.5. FC 안지 마하치칼라
2011년 2월 12일, 카를루스는 러시아 프리미어 리그의 FC 안지 마하치칼라와 2년 반 계약을 맺었고, 규모는 약 €10M으로 책정되었다. 한국나이 39세의 나이로 135억원 가량의 계약을 맺은셈이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활약하는 카를루스는 3월 8일에 안지의 주장으로 명명되었다. 4월 25일, 그는 2-2로 비긴 FC 디나모 모스크바전에서 안지 1호골을 기록했는데, 58분에 페널티 킥을 성공시켰다. 4월 30일, 그는 로스토프전에서 페널티 킥으로 2호골을 넣어 1-0 승리에 일조했다.
이후 6월 10일에는 스파르타크 날치크를 상대로 20분에 시즌 3호골을 기록해 2-0 승리에 공헌했다.
2011년 9월 11일,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2-1로 이긴 볼가 니즈니 노보고로드와의 경기에서 4호골을 기록했다.
카를루스는 안지에서의 1년차에 28경기 출전 5골을 기록했다. 9월 30일, 그는 가지 가지예프 감독이 경질되면서 안드레이 고르데예프 감독이 대행 감독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안지의 감독 대행을 맡았다.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2012년 말에 은퇴할 계획을 밝혔지만, 2012년에도 FC 안지 마하치칼라에서 계속 활약한다. 2012년 8월, 거스 히딩크 감독은 모스크바의 기자 회견에서 "호베르투는 세계구급 축구 선수입니다. 모든 도사의 경력은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라고 말하며 카를루스의 은퇴를 밝혔다.
2.1.6. 델리 다이나모스
2015-16 시즌에는 인도 슈퍼 리그 소속 델리 다이나모스의 플레잉 코치로 현역에 복귀하여 노익장을 과시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92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카를루스는 3번의 FIFA 월드컵과 4번의 코파 아메리카, 1997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그리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 참가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도 꽤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수비에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2] 결승전에서 에메 자케가 이끄는 프랑스에게 3:0으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1999 코파 아메리카 파라과이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펼치면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남미 예선에서는 엄청나게 고전하면서 겨우 2002년 한일 월드컵에 출전한다.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해당 년도 발롱도르 유력 후보로 떠올랐으나, 정말 간발의 차이로 호나우두에게 밀려 2위에 그쳤다.[5] 이후 2006년 독일 월드컵에도 출전했으나 8강 프랑스와의 경기에서 티에리 앙리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결국 1:0으로 패했다. 이 결승골을 허용하는 과정에서 전담 마크해야 할 앙리를 완전히 놓치면서 패배의 원흉이 되고 만다.[6] 이후 카를루스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여담으로 카를루스 은퇴 이후 오랫동안 브라질은 적당한 대체자를 찾지 못해 고심했으며,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선 왼쪽 윙이 본래 포지션인 바스투스를 풀백으로 쓰다가 네덜란드의 아르연 로번에게 철저하게 무너졌다. 이후 마르셀루가 자리를 잡긴 했으나 당시 라리가 최고의 레프트백으로 꼽히던 필리피 루이스는 전성기를 구가하려던 시점에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당하며 수비진에 구멍이 생겼다. 사실 마르셀루는 주제 무리뉴 시절 들어와 공수 밸런스를 잡는데 성공, 지금은 마드리드의 든든한 주전 풀백이 되었지만 2010년 때만 해도 공격력만 좋은 반쪽짜리 선수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그 뒤에는 마르셀루는 물론 필리피 루이스도 국가대표팀에 자리를 잡으면서 레프트백 문제는 해결되었다.
[1] 여담으로 이후 카를로스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기량이 만개하며 세계적인 레프트백으로 자리잡게 되지만 당시 이미 나이가 많이 들었던 사모라노는 인테르에서 부진한 모습만을 보였고 이후 새로 영입된 호나우두와의 주전 경쟁에서 압도적으로 밀려 백업 공격수가 되었다. 인테르 시절 리그에서 총 101경기에 출전해 26골만을 득점하며 인테르 최악의 영입 중 한 명으로 남게 되었다. 게다가 이후 인테르는 카를로스가 떠난 뒤 영입하거나 유스에서 승격한 대체자들이 연달아 망하면서 믿고 맡길만한 전문 레프트백이 부재하다는 레프트백 저주에 시달리고 만다.(인테르의 레프트백 저주는 이후 06/07 시즌이 돼서야 파비오 그로소와 막스웰이 영입된 뒤에야 해결되게 된다.) 이후에도 축구계에서도 가끔 역대 최악의 선택 중 하나로 언급되곤 한다.[2] 8강 덴마크 전에서는 환상적인 오버헤드 킥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며 동점골을 내주었고, 결승전에서는 불필요한 터치로 코너킥을 내주며 지단에게 선제골을 내준 빌미를 제공했다.[3] 카를루스와 카푸가 노쇠한 2006년에는 어쩔 수 없었지만 이때만 해도 워낙 발이 빠르고 체력이 좋아 활동량이나 공격 후 복귀 속도가 빨랐고 스리백을 썼기에 윙 백을 뚫었다고 해도 포 백처럼 바로 위기 상황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함부로 측면에서 기웃대다가는 순식간에 역으로 당할 위험이 높았고, 그 이전에 선수 한명 한명이 공으로 묘기를 부리는 브라질을 상대하면서 제대로 대열과 태세를 정비하고 공을 탈취, 전개하기는 매우 어려웠다.[4] 준우승팀 독일은 훨씬 더 편한 대진표였다. 조별리그 상대가 사우디아라비아, 아일랜드, 카메룬이었고 16강이 파라과이, 8강이 미국, 4강이 대한민국이었다. 그 쉬운 대진표에도 불구하고 16강과 8강, 심지어 준결승에서도 이천수에게 위협적인 슈팅을 허용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고 올리버 칸과 미하엘 발락의 하드캐리, 그리고 8강에서의 오심에 힘입어 겨우 결승에 진출했다. 네덜란드는 이미 지역예선에서 떨어졌고,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 나이지리아, 스웨덴이라는 죽음의 조를 만나서, 포르투갈은 한국전에서 박지성에게 일격을 맞았으며, 프랑스는 그 유명한 세네갈 쇼크와 더불어 무득점으로 무기력하게 조별리그를 탈락하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대한민국이 다 잡아주는 등 자이언트 킬링이 굉장히 많이 발생한 대회라 이런 대진표가 나왔다. 솔직히 독일 대진운의 절반은 한국 덕분이라 할 수 있다.[5] 이에 대해서는 월드컵이 치러지기 전까지 시즌 통합 16경기 정도 밖에 뛰지 못한 호나우두보다 월드컵 우승뿐 아니라 챔스 우승까지 차지한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더 적합한 발롱도르 수상 후보자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호나우두가 결승전에서 대회 MVP 올리버 칸을 상대로 멀티골을 기록한 점과 24년 동안 지속되던 6골 득점왕 징크스를 깨트린 임펙트로 인하여 발롱도르는 호나우두에게 돌아갔다.[6] 가만히 서서 따라가지도 않고 먹힐때까지 가만히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