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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3:08:07

호조 우지마사

파일:external/www.sankei.com/lif1507090010-p1.jpg

[ruby(北,ruby=ホウ)][ruby(條,ruby=ジョウ)][ruby(氏,ruby=うぢ)][ruby(政,ruby=まさ)]
(1538 ~ 1590.08.10)


1. 개요

후호조씨의 4대 당주.

호조 우지야스의 차남. 통칭 신쿠로(新九郞). 형인 호조 신쿠로가 일찍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우지야스의 장남.

2. 생애

1554년 3국동맹이 성립되자 다케다 신겐의 딸 오우바이인과 결혼한다.[1]

이후 1559년 아버지 우지야스로부터 가독을 계승받아 세력확대에 힘을 쓴다. 고즈케(上野)의 유라 나리시게, 사노 마사츠나, 기타조 다카히로 등 호족들을 차례로 항복시키고 무사시(武藏)로 침공, 오타가를 멸망시켜 우에스기 겐신과 동맹관계인 사타케가와 대립상황이 된다. 그러나 1567년 사토미 요시타카, 요시히로 부자와 미후네산에서 합전을 벌이나 대패하여 가즈사(上總) 지배권을 상실하고 만다.

다케다 신겐의 스루가 침공으로 3국동맹이 무너지자 우에스기 겐신과 동맹을 맺어 다케다가와 대립한다. 1569년 오다와라 (小田原)에서 다케다군과 싸워 격퇴하나 미마세 고개의 싸움에선 동생 호조 우지테루 등과 손발이 맞지 않아 양쪽 모두 큰 피해만 입은 채 물러선다. 결국 스루가는 다케다가의 손으로 떨어지고 호조가는 슨토(駿東) 고코쿠지성 일대만 점령하는 데 그친다. 아버지 우지야스 사망후, 다시 다케다가와 동맹을 맺는다.

이후 우에스기가와 대립하게 되어 코즈케로 침공하여 세력을 확대하며 시모사의 유키 하루모토를 종속시킨다. 그후 우에스기 겐신이 죽고 후계자 문제로 오타테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인 우에스기 가게토라[2]를 지원하기 위해 동생인 호조 우지테루와 우지쿠니를 에치고로 파병시키나 우군인 다케다 카츠요리가 갑작스럽게 철군하는 바람에 결국 가게토라는 패배, 자결하고 만다. 이 때문에 우지마사는 다케다가와 동맹을 파기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손을 잡는다. 그리고 다케다가의 멸망에 일조한다.

1580년 이전의 호조가 당주들이 해왔던 것처럼 아들인 호조 우지나오에게 가독을 넘겨주고 은거했으나 여전히 실권을 쥐고 있었다. 1582년, 오다군의 전격적인 침공으로 다케다가가 불과 1달만에 멸망할 때, 호조 우지마사는 오다편을 들면서도 전투가 오래 끌리라 생각,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다 다케다군이 캐발리자 황급히 출진하지만 기여한 바도 없고 얻은 것도 없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기회주의자로 찍혀 다케다 영지 분할에서도 제외된다.[3] 그리고 이후의 역사가 말해주지만 이 전투의 결과로 호죠는 자신을 대신해 방패막이가 되어줄 세력을 완전히 잃게 된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의 변으로 죽자, 확증을 얻지 못했던 호조 우지마사는 타키카와 카즈마스에게 사신을 보내 지원을 약속했다가, 노부나가가 죽었다는 확증을 얻자 바로 5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코즈케로 침공, 타키카와 카즈마스의 1만 8천과 칸나가와에서 대진한다. 전투 첫날은 다키카와군의 우세였으나 이틀 째 다키카와군이 패주하는 호조군을 쫓아 호조군진에 너무 깊숙이 추격하다 포위당하고, 때를 맞추어 코즈케의 영주들이 배신하여 다키카와 군은 궤멸, 호조씨는 코즈케를 손에 넣는다.

패주하는 오다군을 추격하여 시나노까지 추격해 사나다 마사유키, 기소 요시마사 등을 항복시키고 다시 가이의 지배권을 놓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격돌한다. 하지만 마사유키가 이에야스의 편에 붙어 전세가 불리해지자 결국 장남 우지나오와 이에야스의 딸 도쿠히메가 혼인하는 조건으로 화해한다. 그리고 기세가와에서 회담을 벌여 가이, 시나노는 도쿠가와령, 고즈케를 호조령으로 확정한다.[4]

그런데 마사유키가 도쿠가와가를 배신하고 다시 우에스기가에 붙어 호조, 도쿠가와가와 대립하면서 상황은 복잡하게 변한다.

1585년 사타케 요시시게와 우츠노미야 구니츠나가 나스 스케하루를 공격하자, 스케하루를 도와 시모츠케 남부를 장악한데 이어 사다케령을 제외한 히타치 일대도 정복하며 호조가 최대 판도를 구축한다.[5]

하지만 당시의 천하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대립하여 히데요시의 쥬라쿠테이[6] 행사 참석에 대해 거부한다. 결국 이에야스가 중재에 나서서 우지마사의 동생인 우지노리가 대신 참석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나름 우지마사도 사태 해결을 위해 가신인 이타베오카 고젯사이를 사자로 보내 1590년 봄이나 여름 쯤에 상경하겠다고 입장을 밝혔지만 히데요시에게 거부당해 더욱 더 상황은 악화된다. 여기에 우지마사의 동생인 우지쿠니의 가신 이노마타 쿠니노리가 사나다령 나구루미성을 강탈[7]하면서 그야말로 불난 집에 부채질한 격이되고 만다.

마침내 열받은 히데요시가 호조 토벌령을 내리고 우지마사도 화친대신 대항을 한다. 우지마사는 원거리에서 오는 히데요시 군은 보급이 길어져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배고픈 군대는 자신들이 쉽게 격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또한 아직 히데요시에게 신종을 하지않은 동북 지방의 다이묘 중 최대의 세를 자랑하는 다테씨와의 동맹 역시 우지마사가 항전을 결의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군으로 기대했던 다테 마사무네는 전세를 관망하다 히데요시 우세가 확실해지자 히데요시에게 신종한다.

22만이나 되는 대군 앞에 호조가의 성들은 차례대로 정복당한다. 선봉은 관동지역에 인접한 미카와에서 출병한 도쿠가와군이 섰고, 그 뒤로 히데요시가 직접 친정한 본진이 따르고 있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우에스기 겐신이나 다케다 신겐도 몇차례 공략에 나섰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던 거성 오다와라성에서 농성을 벌이지만 식량이 떨어진데다 가신인 다이도지 마사시게, 마츠다 노리히데 등의 배신 등이 겹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항복한다.

마침내 히데요시에 의해 개전 책임을 지고 동생인 우지테루와 함께 1590년 7월 11일 할복한다. 이때 배신했던 가신인 다이도지 마사시게와 마츠다 노리히데도 자결 처분 받았다. 호조가의 영지는 대부분 도쿠가와가에 넘겨지고 도쿠가와가는 대신 원래 가지고 있던 미카와, 스루가, 도토미, 가이, 시나노를 도요토미측에 넘겼다. 도요토미는 구 도쿠가와 영지에 이케다 테루마사(미카와)나 호리오 요시하루(도토미), 나카무라 카즈우지(스루가) 같은 직속가신들을 배치하여 그보다 동쪽에 있던 도쿠가와가를 감시했다.

3. 평가

위대한 선조의 위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데다가 유서깊은 가문에 태어나 형성된 오만한 성격과 천하인 히데요시와 전쟁이라는 오판을 저지르며 가문을 끝장낸 것으로 악명이 높다.

당시 우지마사의 생각을 추측하자면 히데요시는 오다와라 원정을 위하여 각 다이묘들의 병력을 모아서 연합군을 편성했고 따라서 원래 히데요시의 산하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은 다이묘들과 우에스기/도쿠가와를 비롯한 유서깊은 다이묘 가문들은 농민출신 히데요시를 위하여 있는 힘껏 싸울 생각은 없었다고 판단한데다가 이전부터 대권을 위해 오랫동안 좋은관계를 맺으며 동맹관계였던 다테 마사무네가 증원만 온다면 이길수 있다 라고 생각했다. 즉, 우지마사측은 농성을 통해 시간을 끌면서 지성의 병력을 별동대로 삼아 히데요시측의 보급선을 끊은 뒤 병량부족에 빠진 히데요시측을 괴롭히며 약화시키는 사이 다테 마사무네가 지원으로 후방을 공격해주면 원래부터 충성심이 거의 없던 다이묘들이 반기를 들어 다시 독자세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우지마사측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오다와라성은 당시 호조가가 대대로 쌓아올려 굳건한 것으로 명성이 높았고, 당시 도호쿠 최대의 다이묘였던 다테 마사무네가 호죠가의 손을 들어줄 것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볼 때 이것은 호죠 우지마사가 천하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한 완전한 오판이었다.

첫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는 자신의 거점 오사카와 사카이를 바탕으로 쌓은 재력으로 당시의 일개 다이묘가 감당할 수 없었던 압도적인 병력과 물자가 있었다.

둘째, 우지마사의 생각과 달리 히데요시는 자신의 영지이자 영향권 안에 있던 상업 및 교역의 중심 사카이를 비롯해 상인들의 해운력을 동원해 이러한 병력과 물자를 장거리 운송할 수 있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히데요시는 이미 3년전 규슈 정벌전에서도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장거리 원정을 통해 시마즈를 정벌한 경험이 있다. 이미 한 번 전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우지마사의 실책이다.

셋째, 히데요시의 군대는 비록 여러 다이묘들의 혼성군이지만 그의 주력은 이미 오다 노부나가의 병농분리 정책으로 직업화한 상비군이었으며 오다 시대부터 전국의 수많은 다이묘들을 상대하며 추려진 정예 중의 정예였다. 이들은 평소에 농사를 하다가 전투가 있을 때에만 참여하는 호죠의 군사들과는 병력의 질에서 차원이 달랐다.

넷째, 히데요시에게는 오다와라를 공략하는 도중에 그의 배후를 불안하게 할만한 세력이 없었다. 이미 히데요시는 내부적으로 볼 때 오다 노부나가의 자식들과 아케치, 시바타 등을 제거하여 정적들을 굴복시켰고, 외부적으로 볼 때 서쪽으로는 모리와 시마즈, 동쪽으로는 다케다를 정벌하고 우에스기를 복속시키면서 이 당시 그에게 대항할만한 세력은 호죠와 다테 정도밖에 없었다. 즉 일본의 전국에서는 실질적으로 히데요시를 위협할만한 세력이 완전히 평정된 상황이었고, 자신이 믿던 다테마저도 오다와라 성을 완전히 포위한 히데요시의 힘에 압도당해 상대했다가는 개죽음이라는 것을 빠르게 깨달아 호죠가 다테를 오매불망 기다리는 동안 히데요시에게 무조건 적인 충성을 의미하는 백의를 입고 상락을 하러 오면서 다테까지 정리되었기 때문에 히데요시는 자신의 모든 전력을 오직 호죠의 정벌에만 쏟아부을 수 있었다.

다섯째, 상술한 바에서 알 수 있듯 우지마사가 히데요시에게 대항할 시점에서 이미 천하의 대세는 누가 봐도 완전히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이미 서쪽의 다이묘들은 완전히 평정되었으며, 호죠의 바로 앞마당인 다케다와 우에스기마저 멸망하거나 히데요시에게 복속하여 이미 일본에서는 히데요시에게 대항할 만한 세력이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고작 성 하나만 믿고 버티면 호죠와 아무 이해 관계도 없는 전국의 다이묘들이 이에 호응하고 다테가 호죠의 편을 들어줄 것이다라고 판단한 것이 그의 결정적인 오판이었다.

그나마 커버를 쳐주자면, 이미 이 시점에는 뭔 짓을 해도 히데요시와 우지마사의 마찰은 피하기 힘들었다는 점. 이전부터 이미 히데요시와 우지마사는 불편한 관계였고, 큐슈 정벌을 끝낸 시점에서는 우지마사가 히데요시의 천하를 인정한다해도 충성심을 의심된 것은 당연한 지사고, 무엇보다 세력이 너무 거대했다.[8] 그냥 냅두기엔 너무 위협적이였던 셈. 따라서 히데요시에게 복종하더라도 다이묘로서 존속 할지는 몰라도 세력 자체는 크게 축소될 위험이 크다.[9]

평가를 하자면 주변 세력들의 약화를 이용해 한때 호죠의 최대 판도를 이룩하였으나, 전략적으로는 오히려 자신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세력들을 스스로 제거한 꼴이었으며, 천하의 대세가 정해진 후에도 시세를 읽지 못하고 세력을 확대하다가 결국에는 히데요시에게 호죠를 칠 명분을 쥐어줘서 가문이 멸망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센고쿠시대의 일개 다이묘로서는 나름 유능한 인물이었을지 모르나, 시대의 흐름을 읽는 장기적인 안목이 부족해 가문을 말아먹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4. 일화

밭의 보리를 보고 오늘 저녁은 저 보리로 만든 보리밥이라고 했다가 다케다 신겐에게 비웃음을 당했다거나,[10] 아버지 우지야스와 밥을 먹는 데 밥에 부을 국의 양을 조절하지 못해 두 번 붓자 우지야스가 호조가가 여기서 끝나겠구나고 탄식했다거나 하는 등 어째 밥과 인연이 깊다. 다만 이런 이야기들은 후세에 호조가를 말아먹은 암군이라는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창작된 것이다. 밥에 국을 두 번 부은 이야기는 모리가에도 있다. 근데 모리가는 적어도 망하지는 않았다.

5. 대중 매체에서

5.1. 오다 노부나가전

직전신장전에서는 가상모드(혼노지의 변이 일어나지 않는 루트)에서의 최종보스로 등장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최종보스일때보다 더 힘들다는 평가다.

5.2. 전국 바사라 시리즈

호조 우지마사(전국 바사라) 참조.

5.3.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北条氏政1.jpg 파일:北条氏政.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파일:대지국밥.jpg
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혁신까지는 정치만 높고 다른 능력치(특히 지력)들은 낮았다. 천도에 와선 능력치가 대폭 상향되었고 무엇보다 더 튜토리얼 주인공이 된다.[11]

사족으로 천도에서 튜토리얼 판 일러스트와 실제 게임판 일러스트의 표정이 다르다. 튜토리얼에서는 노는 것과 먹는 것이나 밝히는 얼간이 캐릭터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에 걸맞은 얼빠진 표정이다. 튜토리얼을 끝까지 진행하면 호조 겐안의 목숨을 바친 튜토리얼로 각성하면서 게임 내의 근엄한 일러스트가 된다. 그리고 얼간이 캐릭터를 아들 호조 우지나오가 물려받고, 이번에는 우지마사 자신이 호조 겐안처럼 골머리를 앓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5.4. 전국무쌍 시리즈

클론 무장으로 나온다. 그런 주제에 아버지가 등장하기전까지는 형제들인 우지나오, 우지테루와 같이 약간의 존재감이 있다.

전국무쌍 2에서는 클론 무장이지만. 후마 코타로 스토리 3장에서 후마가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죽이는 오사카 성 공략전에서 원군으로 출현한다.
호조 우지마사: 후마 덕분에 호조일족도 세력이 넓어졌구만

호조 우지나오: 후마가 히데요시를 죽이면, 호조가 천하인이 되는검다, 아버지!

호조 우지테루: 해냈구나 형!

위 이벤트 후 일정시간 경과

호조 우지마사: 후마여, 가라! 호조일족의 야망을 등에 지고서!

호조 우지나오: 오늘, 호조의 야망은 현실이 되는거다!

호조 우지테루: 해냈구나 형!

그러나 4장에서 후마가 반란을 일으켜서 호조일족의 야망도 뭐고 우지마사와 포함한 호조 무장들과 다테 마사무네는 사이좋게 후마에게 척살당한다.

전국무쌍 3에서는 아버지가 정식으로 참여하면서 높은 비중을 부여받아 히데요시 연합군을 상대로 한 오다와라 성 방어전까지 지휘하게 되면서 아버지에게 비중을 많이 뺏겼다. 전국무쌍 4에서는 누나인 하야카와도노가 추가됨으로서 가족과의 인연이 돋보이게 되었다. 동생인 호조 사부로도 주요 NPC로 등장. 하지만 정작 본인은 다른 동생들과 동일하게 클론 무장. 게다가 사부로의 경우 비중이 꽤 높은 NPC여서 다음 시리즈에 정규 참여 가능성도 매우 높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국무쌍 사나다마루에서는 실제 역사의 흐름을 많이 반영하면서 다시 비중이 높아졌다.

무쌍 오로치에서는 촉 외전 3장에서 방덕을 얻기위해 보호해야할 NPC로 나온다.

마왕재림에서 오로치 1장 오다와라 성에서 나오는데, 정작 본인의 집인 오다와라 성은 히데요시가 갖고있고 본인은 밖에 나온 상태이다. 히데요시와 같이 총대장으로 나와서 격파할 시에 유명무장 격파씬이 나온다.

드라마틱 모드인 아먀타이 전투에서 유비를 포위하는 복병으로 등장했지만 여포, 혼다 타다카츠, 마에다 케이지에게 깨지고 오히려 이들 편이 되었다.

5.5. 사나다마루

NHK사나다마루에선 많은 매체와는 달리 음흉하고 교활한 인물로 등장한다. 배역은 다카시마 마사노부.[12] 멍청하다고 까이는 밥에 국 두번 부은 일화조차 오히려 우지마사 특유의 방식을[13] 표현하는 것으로 재해석될 정도다.

사나다 가문이 시나노를 중심으로 독립하려 할때의 주적이라 할수 있는데, 마사유키의 책략을 이미 꿰뚫고 있는등 책략가로서의 수준이 대단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인물의 외모가 노부나가의 야망의 일러스트와 매우 비슷하다.

최후가 상당히 간지 넘친다.

항복 직전까지 반 광기에 물든 연기에서 항복 후 화장을 벗고 초췌한 모습으로 모든걸 달관한듯한 연기가 그야말로 압권.

나레이션과 함께 밥에 국을 부어 먹는[14] 모습을 보이며 퇴장한다.

5.6. 센고쿠(만화)

센고쿠 곤베에에 등장. 오다와라 정벌편의 주요인물로 아버지 못지 않은 능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된다. 혼간지 겐뇨와 함께 백성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인물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오다와라성이 포위되었을 때 시찰에 나섰다가 굶주린 소녀가 그를 위해 들꽃을 바쳤는데 무릎을 꿇고 두손으로 그 들꽃을 받았다. 이후 도요토미에게 항복하고 자결하는데 그 들꽃은 꽃병에 장식되어 있었다.

5.7. 천하제일

6대째 후마 고타로의 후원자로 등장한다. 상당히 경박한 모습의 개그 캐릭터로 5대째 후마 고타로가 멍멍 거리자, 뭔소린지 못알아 먹는다고 짜증낸다. 이에 5대째 후마 고타로가 말로 설명하자, 사람 말을 할 줄 아냐고 깜짝 놀란다. 6대째 후마 고타로가 고노에 사키히사의 검술가 토다 세이겐을 죽이고 승리하자 그 아버지도 못한 천하통일에 한 걸음 다가갔다고 크게 기뻐하다가, 6대째 후마 고타로에게 호죠와 후마가 천하통일에 다가간 거라는 소리를 들으며 머리를 잡힌다.


[1] 그러나 신겐이 이마가와가를 침공하면서 이혼했고, 이후 아버지 우지야스가 죽은 후 다케다가와 다시 동맹을 맺는 데 이때 우지마사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죽은 아내의 시신을 돌려 받아 성대히 매장하였다는게 기존의 설이었으나 최근에는 각종 사료의 발견을 통해 동맹 파기 후에도 이혼하지 않았고 오다와라에서 사망했다는 것이 정설.[2] 우에스기 가게토라는 호조 우지야스의 일곱째 아들로, 겐신이 양자로 들였다.[3] 다케다가의 영지 중 스루가(駿河)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나머지 시나노(信濃), 고즈케(上野)는 오다령.[4] 이때 우지마사는 이에야스를 거의 부하 취급하였다. 먼저 아들 우지나오와 함께 상석에 앉았고 이에야스는 하석에 앉았다. 우지나오가 이에야스의 사위임에도 말이다. 거기다 이에야스가 연회의 흥을 돋우기 위해 춤을 췄는 데 이때 호조가 가신들은 이에야스가 호조가의 신하가 되었다고 개드립을 날린다. 거기다 술에 취한 우지마사는 이에야스가 차고 있던 칼을 뽑은 후 도카이도 제일의 무사의 검을 뺏었으니 이 우지마사가 대공을 세웠다고 했다.[5] 이때 호조가의 영지는 240여만석으로 당시 일본에서 그보다 영지가 넓은 다이묘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 사람뿐이다.[6] 聚樂第. 히데요시가 교토에 지은 자신의 저택.[7] 이게 왜 큰 일이냐면 누마타라는 시나노의 핵심 요새이자 지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던 사나다 가문과 고토회복이라며 충돌하는 후호조 가문으로 인한 분쟁지였다. 후호조의 상락을 원했던 히데요시의 강력한 중재안으로 인해 사나다 가문이 나구루미성을 포함한 누마타1/3을 호조 가문이 누마타성을 포함한 2/3으로 배분할 정도로 호의를 보였다. 근데 후호조가 나구루미까지 꿀꺽하자 사실상 중재안을 파기한 것이고 히데요시에게 빅엿을 선사한 것이었다.[8] 곧 이어 이에야스가 호조 가문의 영지를 차지함으로 250만석의 석고를 달성하긴 했지만, 이 경우는 상황이 좀 다르다. 이 시기는 토착화가 매우 중요했기에, 생판 남의 영지를 가면 영지를 통제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따라서 히데요시의 의도는 100만석 석고 증가를 미끼로 이에야스의 기존 영지의 영향력 축소와 새 영지에서도 제대로된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들 점을 노린 것이다. 아무리 이에야스라도 호조 가문이 토착화되었고, 250만석이라는 거대한 영지는 제대로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 만약 거부한다면 이를 빌미로 처벌해도 좋았을 것이다. 실제로 오다 노부카츠가 이에야스의 기존 영지 전봉을 거부하여 처벌당했다. 문제는 이에야스의 능력이 히데요시의 의도를 한참 초월한 것.[9] 다테 가문도 히데요시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오다와라 전투에 늦게 참전하는 바람에 가문과 기존의 영지는 유지할 수 있었지만, 새롭게 얻은 영지인 아이즈를 뺏겨서 석고가 반토막이 났다. 다테 마사무네가 아이즈를 얻게 된 스리아게하라 전투가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 전투라는 점을 보면 굉장히 한스러운 일이었을 것,[10] 보리로 밥을 하기 위해선 탈곡하고 말리고 하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 때문에 밭의 보리로 바로 밥을 만들 순 없다.[11] 단 호조 겐안과 공동 주인공이다.[12] 1966년생 배우. 형인 다카시마 마사히로도 유명배우다. 일본에 유학해 연기를 공부했던 김응수와 친분이 있다. 임진왜란 1592를 시청 후 김응수의 연기를 극찬했다고 김응수가 본인 입으로 말한적이 있다. 국내에서는 재일교포와 결혼했다가 지독한 낭비벽에 혼줄이 난후 간신히 이혼한 것으로 유명하다.[13] 자신이 먹을만큼 조금씩 부어 먹는 것이 자신의 방식이라고.[14] 평소 밥에 조금씩 국을 부어 먹는 것이 "먹을 수 있는만큼 조금씩 조금씩 먹어나가는 것"이고 자신의 방식이라고 했었는데, 죽기 직전에는 밥에 국을 모두 붓고 먹으면서 "이렇게 먹는 방법도 맛있구만..."라고 중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