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의 前 축구 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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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후아니토 알론소 Juanito Alonso | |
본명 | 후안 아델라르페 알론소 Juan Adelarpe Alonso | |
출생 | 1927년 12월 13일 스페인 기푸스코아주 푸엔테라비아 | |
사망 | 1994년 9월 8일 (향년 66세) 스페인 기푸스코아주 푸엔테라비아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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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8cm | |
직업 | 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케리즈페 (유스) CD 로그로녜스 (1946~1947) 라싱 클루브 데 페롤 (1947~1949) 레알 마드리드 CF (1949~1961) AD 플러스 울트라 (1962~1963) |
감독 | CF 파르디냐스 (아마추어) | |
국가대표 | 2경기 (스페인 / 1958~1959) |
1. 개요
스페인의 축구 선수 출신 前 축구 감독.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전설적인 선수로 명성을 얻었다. 안정적이고 침착함이 특징인 골키퍼였으며, 초기 레알 마드리드 CF의 황금기를 이끈 핵심 선수 중 하나였다. "후아니토 알론소"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2. 선수 경력
후안 아델라르페 알론소는 1927년 12월 13일, 스페인 기푸스코아주 지방의 푸엔테라비아에서 태어났다. 산 니콜라스 지역에서 성장했으며, 4살 위의 형인 가브리엘 알론소 아리스티아기레 또한 축구 선수였다. 흥미롭게도 두 형제의 성이 서로 다른데, 이는 가브리엘이 어머니가 미혼일 때 태어나 어머니의 성을 따랐고, 후안은 합법적인 아버지의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15세에 지역 팀 케리즈페에서 골키퍼로 활약하기 시작했으며, 청소년기에는 이룬에서 건설 노동자로 일했다. 18세에는 3부 리그 팀 CD 로그로녜스와 첫 프로 계약을 체결하며 본격적인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46-47 시즌이 끝난 뒤 1부 리그 팀 RC 셀타 데 비고의 입단을 추진했으나, 당시 골키퍼 출신 감독 리카르도 사모라가 "이 청년은 내게 맞지 않는다. 골키퍼가 될 수 없다"며 영입을 거부했다.
병역 의무로 페롤에 배치된 후, 군 당국의 허가를 받아 2부 리그 팀 라싱 클루브 데 페롤에서 2시즌을 활약했다. 이곳에서 그의 재능이 알려지며 여러 팀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1949년, 레알 마드리드 CF에 입단했다. 당시 조기 은퇴한 골키퍼 호세 바뇬의 추천으로 영입되었으며, 처음에는 아다우토와 가르시아 마르틴에 이은 3순위 골키퍼였다. 하지만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기회를 잡게 되었고, 1949년 9월 25일 레알 소시에다드와의 리그 4라운드 경기에서 스페인 프리메라 디비시온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했고, 이후 빠르게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알론소는 이후 10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하며 클럽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의 플레이 스타일은 꾸준함, 안정감, 절제력, 침착함이 특징이었으며, 뛰어난 위치 선정과 반사 신경, 강력한 펀칭과 직관적인 예측 능력을 자랑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안정적인 선방이 특징이었고, 단점으로는 172cm의 비교적 작은 키가 있었다. 하지만 이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과 성실함으로 팬들의 신뢰를 얻었다.
레알 마드리드에서 보낸 13시즌 중에서 세 시즌은 수비수였던 형 가브리엘과 함께 뛰었다. 클럽은 매 시즌마다 새로운 골키퍼를 영입했지만, 알론소의 자리를 위협한 이는 없었다. 그의 주요 경쟁자로는 아다우토, 가르시아 마르틴, 그레우스, 코스메, 마누엘 파소스, 후아니토, 가르시아 페레스-추에코스, 비사, 하비에르 베라살루체, 로헬리오 도밍게스 등이 있었다.
1952년, 카라카스에서 열린 비공식 클럽 월드컵인 소형 클럽 월드컵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우승을 차지했으며, 보타포구 FR과의 경기에서 알론소는 환상적인 선방을 연출해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1953-54 시즌부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합류하면서 마드리드는 전성기를 맞이했고, 알론소는 그 중심에서 골문을 지켰다. 그 시즌 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1954-55 시즌에는 리그와 라틴컵을 모두 제패했다. 이 시즌에 그는 자신의 유일한 사모라 트로피를 수상했다. 이후 1956-57, 1957-58 시즌에도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1956년엔 클럽 월드컵을, 1957년에는 라틴컵 우승도 경험했다.
레알 마드리드가 첫 세 번의 유러피언컵을 우승할 당시, 알론소는 모두 결승전에 출전했다. 1956년 스타드 렌 FC을 상대로 4-3 승리를 거둔 결승전, 1957년 ACF 피오렌티나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둔 결승전, 1958년 AC 밀란을 상대로 3-2로 이긴 결승전에서 모두 선발 출전해 우승에 기여했다.
하지만 1959년 희귀한 폐 질환에 걸리며 주전 자리를 잃었고, 1958-59 시즌 후반과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결장했다. 질병의 여파로 약 1년간 공백기를 가졌으며, 복귀 승인을 받았을 때인 1960년 2월 21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다시 부상을 입었다. 아델라르도 로드리게스와의 충돌로 쇄골이 부러졌고, 이후 더 이상 공식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클럽은 그와의 계약을 1년 더 연장했으며, 알론소는 벤치에서 팀의 다섯 번째 유러피언컵, 첫 번째 대륙간컵, 그리고 1960-61 시즌 리그 우승을 함께했다.
그의 마지막 공식 경기는 레알 마드리드와 CA 리버 플레이트 간의 명예 은퇴 경기였다. 이후 1961-62 시즌 종료 후 선수 생활을 마쳤다. 마지막 해에는 2부 리그 산하 팀 AD 플러스 울트라의 전력을 보강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 과정을 수료했지만 전문적으로 지도자 활동은 하지 않았으며, 1970년대에는 취미로 지역 리그 팀 CF 파르디냐스를 지도했다. 이후 호텔 사업에 종사했다. 자녀로는 후안 세바스티안 아델라르페, 돌로레스 아델라르페, 비올레타 아델라르페가 있으며, 1994년 9월 8일 고향 푸엔테라비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3. 국가대표 경력
스페인 국가대표팀에서는 A대표팀과 B대표팀을 통틀어 총 5경기에 출전하였다. B팀에서는 3경기에 출전했으며, A대표팀에서는 단 2경기 출전에 그쳤다. B팀 데뷔전은 1955년 10월 10일, 마드리드에서 열린 프랑스 B팀과의 경기로, 이 경기는 스페인이 3-1로 승리하였다.A대표팀 데뷔전은 1958년 10월 15일, 북아일랜드와의 친선 경기였다. 이후 1959년 이탈리아와의 경기까지 포함하여 A매치 출전 기록은 총 2경기다. 이는 동시대에 이그나시오 에이사기레, 카르멜로 세드룬, 안토니 라마예츠 등 쟁쟁한 골키퍼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매우 치열했던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