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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스트라시아의 왕 Childebert III | 킬데베르 3세 | ||
제호 | 한국어 | 킬데베르 3세 |
프랑스어 | Childebert III | |
생몰 년도 | 미상 ~ 662년 | |
재위 기간 |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 |
656년 ~ 6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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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가문에서 첫번째로 배출한 프랑크 왕국의 국왕이다. 그러나 킬데베르 3세는 폐위된 후 메로빙거 가문이 다시 왕위에 복귀하여 왕위가 이어지지 않았고 피핀 3세가 즉위한 이후에야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가 왕위를 세습하여 왕조가 이어지기 시작했으므로 카롤루스 왕조의 실제 창시자는 피핀 3세라고 인정된다. 킬데베르 3세는 궁재 그리모알드 카롤루스[1]의 아들이었으나 아버지의 강압으로 시게베르 3세의 양자가 되어 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2. 생애
727년경 익명의 성직자에 의해 작성된 『프랑크인들의 역사서(Liber Historiae Francorum)』에 따르면 킬데베르 3세는 본래 아우스트라시아 궁재인 그리모알드 카롤루스의 아들이었다. 시게베르 3세는 침네차일드와 결혼했으나 아들을 좀처럼 얻지 못했다. 이에 그리모알트는 자기 아들을 양자로 삼을 것을 권고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이고 아이에게 '킬데베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얼마 후 침네차일드 왕비가 다고베르 왕자를 낳았다. 이로 인해 킬데베르가 왕이 될 가망이 사라지는 듯했지만, 그리모알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656년 시게베르 3세가 사망하자, 그리모알트는 사병들을 이끌고 궁궐을 장악한 뒤 어린 다고베르를 삭발하고 푸아티에의 주교 디도에게 보내 수도사로 삼게 했다. 디도는 이 소년을 아일랜드의 수도원들 중 한 곳으로 데려갔고, 그리모알트의 친자이자 시게베르 3세의 양자인 킬데베르가 킬데베르 3세로서 왕위에 올랐다.그러나 이는 매우 무리한 행동이었고, 그리모알드는 정통 왕족이 아닌 이를 왕으로 만들었기에 전국적인 반발을 사게 된다. 이는 삼국지로 비유하자면 관구검과 제갈탄 등의 세력이 버젓이 있는데 이들을 내버려두고 사마사, 사마소가 무리하게 찬탈해 빌미를 줘, 반사마사 대연합을 만들어놓은 격이다.
실제로 킬데베르 3세의 재위 기간인 6년 간의 기간은 기록으로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는 아우스트라시아 왕국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기록의 누락은 이러한 혼란의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연히 같은 메로베우스 왕조가 다스리던 네우스트리아 왕국이 아우스트라시아의 정치적 혼란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왕국의 재통합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려고 하던 네우스트리아의 궁재 에브로인은 662년 그리모알드와 킬데베르 3세를 네우스트리아로 유인해 처형하고, 시게베르 3세의 조카인 킬데리크 2세[2]를 시게베르 3세의 딸 빌리킬다와 결혼시켜 아우스트라시아의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3. 의문점
이상은 프랑크 왕국 역사집에서 전하는 기록이다.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리하르트 게르베르딩, 마티아스 베헤르, 크리스티안 세타파니 등 일부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게르베르딩은 시게베르 3세는 사망했을 때 25~26세밖에 안 됐으며, 침네차일드와 결혼했을 때의 나이는 21세였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런 사람이 아들이 태어나지 않는다며 근심하다가 양자를 들였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또한 베헤르는 당대의 메로베우스 왕조 문서에는 킬데베르 3세를 비 메로베우스 왕조의 왕으로 언급하지 않으며, 양부모에 대한 언급은 8세기 말 카롤루스 대제의 치세에서 처음 등장한다고 밝혔다. 또한 크리스티안 세타파니는 킬데베르 3세는 사실 시게베르 3세의 아들로, 시게베르 3세가 죽은 뒤 그리모알트를 후견인으로 삼았는데, 네우스트리아 측이 이를 왜곡한 거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는 평을 받지만, 당대 기록을 부정할 뚜렷한 증거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기에 진위 여부는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