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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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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1978년엔 한큐 브레이브스의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플레이오프가 개최되지 않았다. 2007년부터는 클라이맥스 시리즈로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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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79 킨테츠우승.jpg
1979년 퍼시픽리그 우승
킨테츠 버팔로즈
플레이오프 MVP 야마구치 테츠지

1. 개요2. 일정 및 결과
2.1. 1차전2.2. 2차전2.3. 3차전2.4. 타이틀 시상
3. 기타

1. 개요

파일:킨테츠 버팔로즈 네이비 로고.svg 파일:한큐 브레이브스 레드 심볼.svg
킨테츠 버팔로즈 한큐 브레이브스
전기: 39승 19패 7무 (.672, 우승) 전기: 39승 21패 5무 (.650, 2위)
후기: 35승 26패 4무 (.574, 2위) 후기: 36승 23패 6무 (.610, 우승)
종합: 74승 45패 11무 (.622, 2위) 종합: 75승 44패 11무 (.630, 1위)

1979년 10월 13일부터 10월 16일까지 개최된 제5회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 전기 우승팀 킨테츠 버팔로즈와 후기 우승팀 한큐 브레이브스가 맞붙어 킨테츠가 3연승으로 한큐를 꺾고 창단 30년 만에 처음으로 퍼시픽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1975년에 이은, 한큐의 전성기를 이끈 니시모토와 니시모토 휘하에서 한큐의 첫 전성기를 이끌었던 한큐의 신임 감독 카지모토 타카오[1]의 사제 대결이기도 하다.

킨테츠 버팔로즈는 1975년과는 달리 난카이 호크스의 홈구장이었던 오사카 구장을 빌려 홈경기를 개최했다.

2. 일정 및 결과

경기 날짜 경기장 원정팀 점수 홈팀
1차전 10월 13일(토) 오사카 구장 한큐 브레이브스 1 5 킨테츠 버팔로즈
2차전 10월 14일(일) 한큐 브레이브스 4 7 킨테츠 버팔로즈
3차전 10월 16일(화)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킨테츠 버팔로즈 2 1 한큐 브레이브스
우승: 킨테츠 버팔로즈

2.1. 1차전

1979.10.13(토) | 오사카 구장 (관객 수: 25,000명)
<rowcolor=#00014e>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한큐 야마다 히사시 0 0 0 0 0 0 0 1 0 1 10 0
킨테츠 이모토 타카시 0 0 0 2 1 0 1 1 X 11 17 1

승리투수:
킨테츠
이모토 타카시(1승): 7.1이닝 2탈삼진 6피안타 2사사구 1실점(1자책)
패전투수:
한큐
야마다 히사시(1패) : 9이닝 6탈삼진 6피안타 5사사구 5실점(5자책) 완투패
세이브:
킨테츠
야마구치 테츠지(1S): 1.2이닝 0탈삼진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홈런
킨테츠
오가와 토오루(7회 말, 1점), 쿠리하시 시게루(8회 말, 1점) 1호
한큐
없음

킨테츠가 4회 말 1사 2루에서 나가오 야스노리의 적시타, 나시다 마사타카희생 플라이로 2점을 먼저 딴 것을 시작으로 한큐의 에이스 야마다 히사시에게 솔로 홈런 2방을 포함한 5점을 뽑아내며 한큐를 따돌렸다. 한큐는 8회에 대타 사사모토 신지의 적시타와 함께 1사 만루 찬스로 3점차 열세를 메꾸려 했으나 후속 투수로 등판한 야마구치 테츠지에게 시마타니 킨지가 병살타를 치는 바람에 만루 찬스가 무산됐고 9회에도 틀어막히면서 결국 킨테츠의 승리로 경기가 끝났다.

2.2. 2차전

1979.10.14(일) | 오사카 구장 (관객 수: 32,000명)
<rowcolor=#00014e> 선발 1 2 3 4 5 6 7 8 9 R H E
한큐 시라이시 시즈오 1 0 0 0 0 1 0 2 0 4 5 0
킨테츠 스즈키 케이시 0 1 0 0 4 0 0 2 X 7 10 0

승리투수:
킨테츠
스즈키 케이시(1승): 7.1이닝 2탈삼진 6피안타 2사사구 1실점(1자책)
패전투수:
한큐
시라이시 시즈오(1패) : 4.2이닝 2탈삼진 4피안타 4사사구 실점 불명(3자책)
세이브:
킨테츠
야마구치 테츠지(2S): 1.2이닝 2탈삼진 무피안타 무사사구 무실점
홈런
킨테츠
오가와 토오루 2호(5회 말, 1점), 아리타 슈조(5회 말, 3점), 히라노 미츠야스(8회 말, 2점) 1호
한큐
타카이 야스히로 1호(6회 초, 1점)

2차전은 한큐가 1회 초부터 4번 타자 카토 히데지의 적시타로 선제점을 땄으나 킨테츠는 2회 말에 동점을 만든 뒤 5회 말에 오가와 토오루의 솔로포, 아리타 슈조의 쓰리런을 연달아 터뜨리며 역전했다. 한큐는 곧바로 6회 초에 타카이 야스히로의 솔로포에 이어 8회 초에도 타카이가 또 다시 2점 적시타를 뽑아내며 1점차까지 쫓아갔지만 어제에 이어 도중 등판한 야마구치 테츠지에게 또 다시 틀어막혀 더 이상의 점수를 내지 못했고, 킨테츠가 곧바로 8회 말 히라노 미츠야스의 투런으로 한큐를 따돌리면서 먼저 2승을 잡고 첫 리그 우승까지 1승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2.3. 3차전

1975.10.15(수) |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관객 수: 22,000명)
<rowcolor=#00014e> 선발 1 2 3 4 5 6 7 8 9 10 R H E
킨테츠 무라타 타츠미 0 0 1 0 0 0 0 0 0 1 2 7 1
한큐 이나바 미츠오 2 0 1 0 1 0 2 0 1 0 1 7 3

승리투수:
킨테츠
야마구치 테츠지 (1승 2S): 3.1이닝 3탈삼진 1피안타 1사사구 무실점
패전투수:
한큐
이나바 미츠오(1패): 9.1이닝 5탈삼진 7피안타 3사사구 2실점(무자책)
홈런
킨테츠
없음
한큐
후쿠모토 유타카 1호(6회 말, 1점)

타격전을 펼친 2차전까지와는 정반대로 니시노미야로 돌아온 3차전은 철저한 수비전으로 치뤄졌다.

킨테츠가 3회 초 하위타순에서 하다 코이치의 안타와 이시와타 시게루의 아웃 타구를 3루수 시마타니 킨지가 실책으로 놓쳐 무사 1, 3루 찬스를 만들었으나 1차전에서 선제 적시타를 친 나가오 야스노리가 이번엔 병살타를 치는 바람에 1점 선제에 그쳤다. 이후 한큐가 6회 말 후쿠모토 유타카의 솔로포로 동점을 만들었고, 이외엔 양팀 모두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서 경기가 플레이오프 최초의 연장전으로 흘러갔다.

연장 10회 초에 킨테츠가 연장전 이후에도 완투를 이어가던 이나바 미츠오를 상대로 2사 만루 찬스를 만들고, 여기서 오가와 토오루의 타구를 백업 유격수로 출장한 이노우에 오사무가 놓치는 실책을 틈타 3루 주자 나시다 마사타카가 홈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리드를 잡았다. 뒤이은 10회 말에 한큐는 7회 도중 3연투 등판을 감행한 야마구치 테츠지에게 2사 2루 찬스로 동점을 노렸으나 마지막 타자였던 미노다 코지가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며 경기가 끝났고, 그렇게 킨테츠가 3연승으로 창단 첫 리그 우승을 결정지었다.

2.4. 타이틀 시상

킨테츠}}} 야마구치 테츠지
한큐}}} 이나바 미츠오
한큐}}} 타카이 야스히로
킨테츠}}} 이모토 타카시
킨테츠}}} 하다 코이치
킨테츠}}} 오가와 토오루

이 해를 끝으로 일본시리즈와 동일하게 기능상, 우수투수상, 수위타자상이 모두 우수선수상으로 통일되었다.

3. 기타


[1] 전임 우에다 토시하루 감독이 지난 해 일본시리즈 7차전 당시 판정에 불복해 1시간 이상 경기를 지연시킨 책임을 지고 퇴임하면서 후임 감독으로 취임했다.[2] 명목상 홈구장이었던 후지이데라 구장은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조명 시설을 설치하지 못해서 낮 경기밖에 개최할 수 없었고, 대신 사용하던 일본생명 구장은 관중수용량이 2만명 가량에 불과해 두 구장 모두 '3만명 이상의 조명시설을 갖춘 구장'이란 조건에 미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