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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국군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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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상세4. 6.25 전쟁 기간 중 발표되었던 포로 명부5. 탈출6. 여담7. 유명 탈북 국군 포로 8. 국군 포로 출신 수기 및 회고록9. 관련 문서10. 관련 단체11. 참고 자료

1. 개요

6.25 전쟁 당시 북한군중공군에게 생포되어 포로로 끌려간 군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약 6만명 정도가 북한에 억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 배경

정전 협정 이후 한국과 UN군은 3만여 명의 북한군 포로를 송환했으나 북한은 이들이 전향했다는 이유로 8천여 명만 송환했다.

3. 상세

유엔군사령부에 따르면 6.25 전쟁 당시 포로로 붙잡히거나 실종된 대한민국 국군 포로의 숫자를 대략 8만 2천여명 정도로 추산했다.

정전 협정 후 한국과 UN군은 3만여 명의 북한군 포로를 송환했으나 북한은 포로 교환 때 최종적으로 8,726명의 국군 포로만 대한민국에 송환하였다.

미송환 포로들의 대부분은 탄광에 징집되어 열악한 환경 속 강제 노역을 하고 나이가 들어서는 농장에서 노역을 했는데 당연히 조금이라도 북한 당국에게 거스르는 발언을 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경우도 많았고 처참한 대우로 사고가 발생하거나 과로사, 아사가 발생하는 경우도 잦았다. 북한체류가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결혼하고 가정도 꾸렸지만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사회에서 자손 대대로 불이익/차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 포로 가족(집안)이라는 이유로 이별/이혼을 당하는 사례도 간혹 있었다.

정작 북한은 미송환 포로들에 대해서는 존재 자체가 없거나 북한으로 전향[1]해서 공화국의 혜택을 받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식으로 거짓 프로파간다를 펼치면서 일관되게 대응하였고 휴전협상 당시에도 본인의 자유의사로 인민군에 재입대한 경우는 송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는 1953년 휴전협정 체결 후 미귀환 포로들에 대해서 별다른 방법을 쓰지 못한 채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최초로 1994년 조창호 소위가 자력으로 북한을 탈출해서 대한민국으로 귀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1950년 10월에 국군에 자원입대한 뒤 육군종합학교를 수료하고 1951년 4월 포병장교로 임관해서 전선에서 복무하다가 1951년 5월 중공군과의 한석산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북한에 끌려갔다고 한다.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지만 1952년에 동료 국군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가 북한에 발각돼 월남기도와 반동분자 혐의로 노역소에 수감되었고 휴전협정이 체결돼서 포로송환이 이뤄질 때도 귀환하지 못한 채 북한의 여러 지역을 강제로 끌려다니면서 광산에서 복역하다가 광부로 배치되어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목선을 타고 중국을 통해 북한 탈출에 성공해서 가까스로 대한민국 귀환에 성공한 뒤 여러 증언을 통해 미귀환 포로들이 많다는것 과 미귀환 포로들이 받는 대우가 북한에서의 최하층민 대우라는 것을 증언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미귀환 포로들의 존재와 그들이 처한 열악한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다. 이후에도 장무환을 비롯한 20명의 포로들은 본인 혼자 아니면 한국에 남은 가족들의 도움을 받아 자력으로 탈출해 귀환에 성공했지만 아직도 500여명의 포로들이 생존해서 북한에 억류된 걸로 추정되고 있다. 게다가 지금이야 법이 제정되고 외교부의 무능함이 어느 정도 조명되어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이전에는 남북해빙기 + 북한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기조 때문에 도움조차 받을 수 없었다. 따라서 브로커(중개인)을 통해서 은밀하게 탈북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귀환 후 정착지원금이 나오면 여기서 비용을 공제하는 방식이었다.

1993년에 기밀해제된 미국 국방부 문서에 따르면 수천명의 국군 포로들과 UN군 포로들이 북한에서 소련의 수용소로 보내졌던 걸로 파악했다고 하지만 러시아 외교부의 비협조로 진실은 제대로 드러나지 못했다.

4. 6.25 전쟁 기간 중 발표되었던 포로 명부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정전 협정 과정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양 측이 각각 포로수용소에 수용한 포로들의 명부 교환에 합의하여# 1951년 12월부터 1월까지 국군 포로 명부가 언론에 보도되었다.#

5. 탈출

국군포로들은 휴전선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함경북도 무산, 아오지, 철산 등 광산에 배치되어 수십년 간 차별대우와 감시를 받으며 노동을 했다. 이들은 죽어도 상관없는 소모품으로 취급받았으며 가장 위험한 채광작업에 투입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과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보내진 최북단 지역이 두만강 인근이었던 덕분에 국군포로들은 90년대부터 중국을 통해 탈북과 연락을 시도할 수 있었다. 물론 중국을 거쳐야 하다 보니 시도하다가 공안에 적발되어 북송되는 경우도 많았다. 여기에 한국 정부의 미온적 대처도 한몫 했는데 1998년 장무환의 문의에 대한 주중국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의 반응이 대표적이었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3년에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를 송환할 때와 국민의 정부 시기인 2000년에 나머지 비전향 장기수 63명을 송환하는 과정에서 국군포로와 맞교환했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2] 만약 이 시기에 맞교환이 성립되었다면 국군포로들은 평균 60~70대 정도 되었을 것이라 여생을 한국에서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창호, 장무환도 한국에서 각각 12년, 17년을 살다가 별세했다.

결국 귀환자는 스스로 탈북하여 성공한 80여명 밖에 되지 않으며 국군포로들이 초고령이 된 2010년대 이후에는 귀환자가 없다.[3] 북한의 평균수명을 고려하면 휴전으로부터 70년이 넘게 지난 현재는 국군포로 대부분이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

국군포로 본인은 사망했어도 북한에서 낳은 자녀들이 탈북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으로 온 북한이탈주민이 200여명 정도 된다고 한다.#

6. 여담

7. 유명 탈북 국군 포로

8. 국군 포로 출신 수기 및 회고록

9. 관련 문서

10. 관련 단체

11. 참고 자료



[1] 그러나 북한은 당연히 조작하거나 문맹률이 높았던 이들이 많은 것을 악용해 속여서 원치 않는 전향을 한 경우가 많았다.[2] 이때 강제전향 장기수들은 제외되었는데 이것도 국내외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다. 사상전향제도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온갖 고문과 협박으로 만들어낸 전향이라서 이들도 원한다면 북한에 보내주는 게 맞긴 했다.[3] 2017년 1월경 국군포로들이 탈북에 성공했으나 한국 정부의 미온적 대처로 북송되었다. 당시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상태라 행정부에 공백이 생겨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