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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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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호
파일:FSJ372YU2C6ZRX3FLEB35Y2KNY.jpg
출생 1930년 10월 2일
평안남도 평양
사망 2006년 11월 19일 (향년 76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종교 개신교(예장통합)[1]
복무 대한민국 육군
기간 1950년 ~ 1994년 11월 26일[2]
임관 포병간부후보생 13기
최종 계급 중위
주요 보직 육군본부 직할 제101포병대대 관측장교

1. 개요2. 일생
2.1. 출생부터 참전, 억류에 이르기까지2.2. 탈북 및 귀환2.3. 중위 진급과 전역 후
3. 대중매체에서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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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6.25 전쟁 당시 포병간부후보생 13기로 임관하여 육군 포병 소위로 참전했는데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군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후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신분으로 43년간 강제 노역에 동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51년에 전사자로 처리됨과 동시에 육군 중위로 추서되어 있었으나 귀환 후 정식으로 전역하였다. 인간승리의 표본.

2. 일생

2.1. 출생부터 참전, 억류에 이르기까지

평안남도 평양의 부유하고 독실한 개신교[3] 가정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연희대학교[4]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는데 그 해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그는 대한민국 육군에 자원 입대했는데 갑종장교 포병간부후보생으로 육군 소위 임관하여 대한민국 육군본부 직할 101포병대대 관측장교로 참전하였다가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군 현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후 조선인민군 육군국군 포로들이 강제 편입되어 편성된 의용군에 배속되었으나 1952년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가 정치부에 발각되어 월남기도와 반동분자 혐의로 13년간 서흥군, 덕천시, 함흥시, 아오지 탄광, 강계시 광산 등지의 강제 노역소에 복역하였다.

13년 동안의 강제 노역소 생활을 마친 후에는 자강도에 광부로 배치되어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오랜 광산에서의 노역으로 인해 지병인 규폐증을 얻게 되었다. 하루 10시간여의 중노동에 동원되었으나 일일 식량 배급량은 고작 300g[5] 정도였다.

2.2. 탈북 및 귀환

이후 규폐 증세가 심해져서 압록강변의 산간 마을로 보내지게 되었는데 거기서 알게 된 중국 조선족 상인을 통해서 하루는 한중수교가 최근에 되었으며 이제 한중 간에 서신교환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전해듣고 자신이 한국전쟁 전에 남한에서 살았고 남한에 가족이 있음을 이야기하자 그 조선족 상인은 자신이 남한에 편지를 전해 주겠으니 편지를 써 보라고 했다.

답장을 받을 거라는 확신 없이 그는 지난 40여년의 사연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남한 가족의 현재의 정확한 주소를 알 수 없었지만 친누이가 성신여학교에서 교사로서 일하던 과거 사실에 바탕해 성신학교로 주소를 적었고 실제로 친누이를 수신인으로 하여 성신여대로 배달되었다.

당시 친누이는 이미 퇴직한 상태였기 때문에 수신자불명 우편이 되어 휴지통으로 버려졌지만 기적적으로 성신여대 교직원 한 명이 버려진 우편물들 속에서 중국 우표가 붙어 있고 특이한 모양[6] 때문에 눈에 띈 이 편지를 집어들었고 어차피 버려질 편지인지라 무심히 내용이라도 보자 고하여 뜯어 보았는데 읽어보니 한 국군포로의 구구절절한 사연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 교직원은 나아가 직접 조창호의 친누이를 찾아주리라 마음을 먹게 되었고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수소문하고 살펴 마침내 편지를 친누이에게 전달해 줬다. 친누이 조창숙은 조창호 소위보다 10살 많은 조씨 집안의 맏딸이었고 성신여대 교원을 거쳐 건국대학교 학과장을 마치고 정년퇴임하여 서울 압구정동 모 아파트에 살고 있었는데 죽은 줄 알았던 남동생의 생존을 40여년이 지나 확인해 중국으로 직접 가서 모친 이곤옥 씨(영상 18분 47초)(1982년 작고)의 컬러 사진을 그 조선족 상인을 통해 북의 동생에게 전해 주었고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조창호를 남으로 데려오고자 하였다.

남한의 가족들의 생존을 확인한 그는 남쪽 가족을 만나기 위해 남한으로 가고 싶었지만 북에서 낳은 쌍둥이 아들들과 딸의 안전을 위해 주저하다가 남한행을 포기했다.

하지만 남녘 가족들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움을 눈치 챈 세 자식들은 더 늦기 전인 생전에 남한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시라고 아버지를 설득해 남한행을 권하자 마침내 남으로 귀환을 결심했고[7] 목선을 타고 중국을 통해 북한을 탈출하여 해상을 표류하다가 1994년 10월 23일 새벽 대한민국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되었고 병원에 입원하여 가족 상봉을 하였다.

다만, '대한민국' 수산청의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그를 국군 포로 출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조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구조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분노한 민심을 돌리기 위한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당시 그의 조카였던 조선일보 사회부의 최우석 기자가 탈북 과정을 함께했는데 이에 대해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라는 초대형 사고를 더 큰 뉴스로 덮기 위해 원래 구해줄 생각도 없던 사람을 필요에 의해 구해줬을 뿐이다. 그 증거로 김영삼 정부는 북에 남은 조창호 자녀(3남매)의 안전을 위해 언론 공개를 하지 않거나, 적어도 자녀들이 피할 수 있도록 발표를 미뤄달라는 통사정마저 뿌리치고 귀환 발표를 강행했다.(조 소위의 북한에 남겨진 3남매 근황에 대해서는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간략한 설명이 나온다.)

당시 한겨레21 1994년 11월 10일자 기사 <국민들의 시선을 돌려라>에서도 이를 비판하였다.
애당초 정부(안기부)는 한중수교 초기 단계에서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려 조창호 소위 가족이 탈북 과정 중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팔짱만 끼고 방관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조창호 소위는 10월 20일 대한민국 영해상까지 밀항했으나 돌아가야 했다.[8] 그로부터 이틀 뒤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21일)를 고비로 정부(안기부)는 마음을 180도로 돌려 먹었고 22일이 되어서야 조 소위 가족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조 소위가 두번째로 표류하고 있던 해상에 어업지도선이 '우연히' 나타날 수 있었고 조 소위는 무사히 남한에 안착했다.

조선일보 10월 25일자 기자수첩도 <이례적 신속발표>에선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창호 씨 북한 탈출/귀환 발표는 전례 없이 신속하고 친절해 언론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비판했으며 동아일보도 다음날 기자의 눈 <안기부의 구태(舊態)>에선 안기부의 이와 같은 행태를 '3류 소설'이라고 비판했다.

2.3. 중위 진급과 전역 후

곧이어 그는 국군수도병원[9]으로 옮겨지고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입원한 병실을 찾아온 국방부 장관 이병태에게 귀환을 보고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육군 장교의 정복을 지급받아 착용하고 육군참모총장에게 귀환을 보고하였다. 11월 25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을 손수 지웠는데 왜냐하면 1951년에 육군 중위로 추서됨과 동시에 전사자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중위로 정식 진급하였으며 군인 정신에 귀감이 된 점을 평가받아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다.[10]

11월 26일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짐으로써 43년 3개월이라는 최장기록의 군생활을 마감하였으며 1995년 2월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6.25 전쟁 당시 포로로 잡힌 많은 국군포로들이 여전히 북한에 생존하고 있음을 증언하였고 이는 북한에 생존해 있을 많은 국군포로들과 강제 납북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참혹한 인권환경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 왔다.

2006년 11월 19일 북한에서의 오랜 노역으로 인한 지병이 악화되어서 76세의 나이로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서 영면#했으며 11월 21일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1, #2

3. 대중매체에서



4. 여담

5. 관련 문서



[1] 학창시절부터 새문안교회 신도였으며 귀환 이후부터 다시 다니기 시작하였다[2] 1951년 5월 납북, 1994년 10월 귀환[3] 그의 할아버지는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였다.[4] 현재의 연세대학교.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하며 교명이 바뀌었다.[5] 참고로 일반적인 성인 기준으로 1인당 하루 최소 권장량은 600g이다.[6] 때문에 당시 중국 우표와 봉투가 존재감만은 확실하게 나타냈다. 전체적인 상태가 쓰레기에 가까웠다는 점도 한 몫했다. 한술 더 떠 수신인 주소조차 '남조선(南朝鲜) 한성중구 성신여대' 라고 적혀 있었다. 대한제국 이후 한성이라고 불린 적이 없는데다, 성신여대가 소재한 돈암동은 역사상 한 번도 중구 관할인 적이 없었다. 당시 서울에서 연세대를 다니던 조창호가 자신이 살던 도시와 국가를 까먹었을 리는 없으므로 조선족 상인이 본인이 알고 있던 기본상식을 최대한 이용해 적어 보낸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선 2005년까지 서울시를 한성으로 표기했다.[7] 탈북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제발 같이 가자고 제안했으나 자식들이 아버지 먼저 내려가시라고 하는 바람에 자식들은 탈북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자식들과 생이별했다.[8]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높은 너울성 파도 때문에 작은 목선으로는 무리였다.[9] 처음에는 서울중앙병원 (현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으나 스스로 현역 군인이므로 군 병원으로 옮겨 줄 것을 요청하여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겼다.[10] 전사 처리되어 계급 특진이 추서된 사람이 살아돌아온 것은 전례가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아직 정식 전역처리된 것도 아니지만 합당한 예우는 하여야 했기 때문에 국방부도 그의 신분처리에 고심이 많았다. 일단 현역 육군소위 신분으로 인정하고 중위로 진급시킨 뒤 전역처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으나 연령정년을 한참 넘긴 사람을 현역 중위로 진급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기왕 진급시킬 거라면 중위가 아니라 더 높은 계급으로 특진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 계급을 동시에 특진시키는 것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현실적으로 그에게 어떤 계급을 부여해야 합당할지도 난제일수 밖에 없다. 물론 계급만 중위일 뿐 실제로 국방부는 그를 장성급 장교 이상으로 극진히 예우하였다. 보국훈장 통일장은 보통 대장이 전역할 때 받는 훈장이다.[11]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재산이 5백만원이었다. 어느 정도의 금액이냐면 기와집 1채가 1천원이었다.[12] 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조창호 중위 어머니의 여동생이 최우석 기자의 할머니였다고 한다.[13] 당초 최성규는 출연이 예정되어있지 않았으나 스튜디오에 있던 출연자들이 강력히 요청해 즉석에서 전화연결이 이뤄졌고 며칠후 최성규와 따로 인터뷰를 했다.[14] 한 달간은 남한에서도 존재를 숨길 테니 강에 투신자살한 것처럼 위장시키라고 하면서 나중에 다시 보자는 내용이었다. 출연자들 모두 내용을 듣고 결과적으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됐다는 말을 하며 "차라리 전해지지 않아 다행이다."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