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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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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의 1955년생 전 정치인:
조창호(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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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호
趙昌浩
파일:FSJ372YU2C6ZRX3FLEB35Y2KNY.jpg
출생 1930년 10월 2일
평안남도 평양부 (현 평양시)
사망 2006년 11월 19일 (향년 76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분당서울대학교병원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봉안당 제1충혼당 209실 137호
본관 배천 조씨(白川 趙氏)[1]
학력 경성청계공립국민학교 (졸업)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 (전학)
경기상업중학교 (1950 졸업)
연희대학교 문과대학 (교육학 50 / 명예학사)
가족 아버지 조영국, 어머니 이곤옥
2남 5녀 중 둘째, 큰누나 조창숙, 작은누나 조창수
남동생 조창원, 여동생 조창억, 조창윤, 조창애
종교 개신교(예장통합)[2]
군사 경력
복무 대한민국 육군[3]
1950년 10월 ~ 1994년 11월 26일[4]
임관 포병사관후보생 (13기)
최종 계급 중위 (대한민국 육군)
주요 보직 제9보병사단 제30보병연대 제101포병대대 관측장교

1. 개요2. 일생
2.1. 출생부터 참전, 억류에 이르기까지2.2. 탈북 및 귀환2.3. 중위 진급과 전역 후
3. 대중매체에서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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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군인. 6.25 전쟁 당시 포병사관후보생 13기로 임관하여 육군 포병 소위로 참전했으나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군 매봉·한석산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후 북한에서 국군포로의 신분으로 43년간 강제 노역에 동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에서는 1951년에 전사자로 처리됨과 동시에 육군 중위로 추서되어 있었으나 1994년 10월 귀환 후 정식으로 전역하였다. 인간승리의 표본.

2. 일생

2.1. 출생부터 참전, 억류에 이르기까지

1930년 10월 2일 평안남도 평양부(현 평양시)의 부유하고 독실한 개신교[5] 가정에서 아버지 조영국(趙永國, ? ~ 1969)과 어머니 이곤옥(李坤玉, ? ~ 1982)[6] 사이에서 2남 5녀 중 장남(셋째)으로 태어났다. 본가는 평안남도 중화군에 있었고, 위로 큰누나 조창숙(趙昌淑), 작은누나 조창수(趙昌洙), 아래로 남동생 조창원(趙昌源), 여동생 조창억(趙昌億), 조창윤(趙昌潤), 조창애(趙昌愛)가 있었다.

조부 조익순(趙益洵, ? ~ 1958)[7]은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태어나 단발령 때 상투를 자르고 예배당을 다녔다. 이후 선교사의 인도로 신식 교육 기관에서 양의학을 배워 최초의 한국인 의사로 평양부에서 제세의원(濟世醫院)이라는 병원을 경영하였다. 또한 평양부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의 장로였고, 평소 도산 안창호와 친분이 있었다. 조부께서 바로 도산 안창호(安昌浩)의 이름을 빌려 애국자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창호(昌浩)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아버지는 평양부에서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관을 중퇴한 뒤 고향 중화군에서 과수원을 경영하였다. 외조부 또한 평양부 장대현교회 장로로, 금은방과 광산을 경영하였으며 평소 민족의식이 강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외조부의 교육으로 어머니는 진명여자보통학교와 숭의학교를 졸업하였고, 평양부에서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친가와 외가 모두 당시로서는 매우 개화된 집안이었다.

1933년 아버지가 평양부에 '유니온상회'라는 자동차 부속품상을 개업하였으나 장사가 잘 되지 않았다. 이때 조부는 경기도 경성부 마포동[8]의 한옥을 임대하여 거주하면서 이곳에 병원을 차렸다. 이에 부모님 또한 가게를 접고 경성부 다옥정[9]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곳에 살면서 가족들과 함께 서대문정1정목[10] 새문안교회를 다녔고, 학교는 경성청계공립국민학교[11]에 입학했다. 이후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동 165번지[12]로 이주하여 서울대학교사범대학부속중학교에도 입학했으나 통학하기에 거리가 많이 멀어져 중학교 2학년 때 경기상업중학교로 전학하였고, 교회 또한 옥인동 옥인교회로 옮겼다.[13]

1950년 5월 3일 경기상업중학교를 졸업한 뒤 같은 달 연희대학교 문과대학 교육학과[14]에 입학하였다.[15]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6.25 전쟁이 발발했다. 당시 주일이었기에 평소 출석하던 새문안교회를 다녀왔는데, 집에 돌아오니 집안 어른들께서 전쟁이 났다고 알려줬다고 한다. 이후 며칠간 자택에서 칩거하다가 어느 날 세종로 중앙청 앞으로 나가보니 총살당한 경찰공무원 가족들의 시체가 거리에 나뒹구는 것을 보고 전쟁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16]

이후 연희대학교 1학년을 잠시 다니다가 1950년 10월에 갑종간부후보생으로 자원 입대한 뒤 포병사관후보생(13기)으로 지원해 포병사관학교에 입교하였으며, 4개월간의 교육을 수료한 뒤 1951년 4월 14일 육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17] 제3군단 제9보병사단 제30보병연대 제101포병대대[18]에 배치되어 관측장교로 복무하였다. 이때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서리 매봉산과 인제읍 고사리 한석산에서 조선인민군 육군 제6보병사단과 제12사단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19], 임관한 지 한 달 만에 마침 소속 중대의 병력이 30명 밖에 남지 않았다며 증원을 요청하는 무전을 연대본부에 계속 보냈지만 증원군이 도착하지 않는 등 급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결국 1951년 5월, 중공군에 포위되어 후퇴하는 과정에서 통신병과 함께 본대에 합류하지 못하는 바람에 포로로 붙잡힌 뒤 북한으로 끌려갔다.

이후 조선인민군 육군의 국군 포로들이 강제 편입되어 편성된 의용군에 배속되었다. 그러나 1952년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가 정치부에 발각되어 월남기도와 반동분자 혐의로 13년간 황해도 서흥군, 평안남도 덕천군, 함경남도 함흥시,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읍 아오지 탄광, 자강도 강계시 광산 등지의 강제 노역소에 수감되어 복역하였다.[20]

1975년에는 반동계급이라는 이유로 더 변방으로 밀려나 자강도 중강군 구리광산에 광부로 배치되어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오랜 광산에서의 노역으로 인해 지병인 규폐증을 얻게 되었다. 하루 10시간여의 중노동에 동원되었으나 일일 식량 배급량은 고작 300g[21] 정도였다.

2.2. 탈북 및 귀환

이후 규폐 증세가 심해져서 1977년 자강도 중강군 호하로동자구에 있는 압록강변의 산간 마을로 보내졌고, 그곳에 있던 3월5일청년광산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러던 1992년 여름, 거기서 알게 된 중국 조선족 상인을 통해서 하루는 한중수교가 최근에 이뤄졌으며 이제 대한민국과 중국 간에 서신교환도 가능하게 되었다고 전해듣고 자신이 한국전쟁 전에 남한에서 살았고 남한에 가족이 있음을 이야기하자 그 조선족 상인은 자신이 남한에 편지를 전해 주겠으니 편지를 써 보라고 했다.

답장을 받을 거라는 확신 없이 그는 지난 40여년의 사연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정리하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남한 가족의 현재의 정확한 주소를 알 수 없었지만 큰누나가 성신여자중학교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던 과거 사실에 바탕해 '성신여자대학교'로 주소를 적었고 실제로 친누이를 수신인으로 하여 성신여자대학교로 배달되었다.

당시 친누이는 이미 퇴직한 상태였기 때문에 수신자불명 우편이 되어 휴지통으로 버려졌지만 기적적으로 성신여자대학교 과[22] 교직원 최성규(崔盛奎)[23]가 버려진 우편물들 속에서 중국 우표가 붙어 있고 특이한 모양[24] 때문에 눈에 띈 이 편지를 집어들었고 어차피 버려질 편지인지라 무심히 내용이라도 보자 고하여 뜯어 보았는데 읽어보니 한 국군포로의 구구절절한 사연이라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최성규씨는 직접 조창호의 친누나를 찾아주리라 마음을 먹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편지에 '1953년에 의거 입북하였다'는 표현이 있어 국가안전기획부, 국군기무사령부, 경찰청 등에 문의한 결과 내용상으로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말을 듣고[25] 성신여자대학교를 운영하는 재단인 학교법인 성신학원의 기록과 교육부, 구청, 경찰청, 대한가정학회 등을 통해 조창호의 친누나 조창숙(趙昌淑) 여사의 주소지를 수소문하고 살폈다. 그리고 1994년 8월 마침내 편지를 조창숙 여사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친누이 조창숙은 조창호 소위보다 10살 많은 조씨 집안의 맏딸로, 성신여자중학교 가정교사와 건국대학교 가정대학 교수 겸 학장을 역임한 뒤 정년퇴임하여 당시 서울특별시 강남구 압구정동 모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동생의 생존을 40여년이 지나 확인하자, 그해 10월 중국으로 직접 가서 어머니 이곤옥 여사의 컬러 사진을 그 조선족 상인을 통해 북의 동생에게 전해 주어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조창호를 남으로 데려오고자 하였다.

남한의 가족들의 생존을 확인한 그는 남쪽 가족을 만나기 위해 남한으로 가고 싶었지만 북에서 낳은 쌍둥이 아들 조선일, 조선이와 딸 조선옥 등 세 자식[26]의 안전을 위해 주저하다가 남한행을 포기했다.

하지만 남녘 가족들에 대한 아버지의 그리움을 눈치 챈 세 자식들은 더 늦기 전인 생전에 남한의 가족들을 만나러 가시라고 아버지를 설득해 남한행을 권하자 마침내 남으로 귀환을 결심하였다.[27] 이에 1994년 10월 4일 북한에서 목선을 타고 이튿날 아침 중국에 도착했고, 16일 후인 20일 새벽에 랴오닝성 다롄시에서 중국 어선을 타고 77시간 동안 풍랑과 싸우며 해상을 표류하였다. 그러던 10월 23일 새벽에 황해에서 대한민국 수산청 소속 어업지도선에 구조되어 인천항에 도착하면서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서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었다.

다만, '대한민국' 수산청의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그를 국군 포로 출신이기 때문에 당연히 구조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구조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분노한 민심을 돌리기 위한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당시 그의 조카였던 조선일보 사회부의 최우석 기자가 탈북 과정을 함께했는데 이에 대해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성수대교 붕괴 사고라는 초대형 사고를 더 큰 뉴스로 덮기 위해 원래 구해줄 생각도 없던 사람을 필요에 의해 구해줬을 뿐이다. 그 증거로 김영삼 정부는 북에 남은 조창호 자녀(3남매)의 안전을 위해 언론 공개를 하지 않거나, 적어도 자녀들이 피할 수 있도록 발표를 미뤄달라는 통사정마저 뿌리치고 귀환 발표를 강행했다.(조 소위의 북한에 남겨진 3남매 근황에 대해서는 채널A 이제 만나러 갑니다에서 간략한 설명이 나온다.)

당시 한겨레21 1994년 11월 10일자 기사 <국민들의 시선을 돌려라>에서도 이를 비판하였다.
애당초 정부(안기부)는 한중수교 초기 단계에서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려 조창호 소위 가족이 탈북 과정 중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팔짱만 끼고 방관하고 있었고 그리하여 조창호 소위는 10월 20일 대한민국 영해상까지 밀항했으나 돌아가야 했다.[28] 그로부터 이틀 뒤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 사고(21일)를 고비로 정부(안기부)는 마음을 180도로 돌려 먹었고 22일이 되어서야 조 소위 가족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조 소위가 두번째로 표류하고 있던 해상에 어업지도선이 '우연히' 나타날 수 있었고 조 소위는 무사히 남한에 안착했다.

조선일보 10월 25일자 기자수첩도 <이례적 신속발표>에선 "국가안전기획부의 조창호 씨 북한 탈출/귀환 발표는 전례 없이 신속하고 친절해 언론사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고 비판했으며 동아일보도 다음날 기자의 눈 <안기부의 구태(舊態)>에선 안기부의 이와 같은 행태를 '3류 소설'이라고 비판했다.

2.3. 중위 진급과 전역 후

곧이어 그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풍납동 서울중앙병원[29]으로 옮겨졌으나 스스로 현역 군인임을 내세워 군 병원으로 옮겨 줄 것을 요청해 강서구 등촌동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졌다.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입원한 병실을 찾아온 이병태 국방부장관에게 귀환을 보고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현역 육군 장교의 정복을 지급받아 착용하고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에게 귀환을 보고하였다. 11월 25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을 손수 지웠는데 왜냐하면 1951년에 육군 중위로 추서됨과 동시에 전사자로 처리되어 1977년 국립서울현충원 위패실에 봉안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중위로 정식 진급하였으며 군인 정신에 귀감이 된 점을 평가받아 보국훈장 통일장을 수훈하였다.[30]

11월 26일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짐으로써 43년 3개월이라는 최장기록의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1994년 12월 14일 대한민국재향군인회에서 조창호 회원 귀환 환영행사가 거행되었고, 향군종신회원증을 수여받았다. 1995년 2월에는 모교인 연세대학교로부터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

그는 6.25 전쟁 당시 포로로 잡힌 많은 국군포로들이 여전히 북한에 생존하고 있음을 증언하였고 이는 북한에 생존해 있을 많은 국군포로들과 강제 납북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참혹한 인권환경에 대한 논의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말년에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북한에 남아 있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 왔다.

그러나 북한에서 생활할 당시 오랜 노역으로 인해 앓게 된 직장암이 악화되어 2006년 11월 19일 밤 12시 30분에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구미동 분당서울대학교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76세.[31] 대한민국재향군인회에서 주관하는 최초의 '향군장'으로 장례가 치러졌고, 유해는 11월 21일 국립서울현충원 봉안당 제1충혼당에 안장되었다.#1, #2

3. 대중매체에서



4. 여담

5. 관련 문서



[1] #[2] 모태신앙이며, 학창시절에는 새문안교회 신도였다. 1994년 귀환한 이후부터 교회에 다시 다니기 시작하였다.[3] 최초 군번 212366. 이후 대한민국 국방부 특명 제98호에 따라 새로운 군번 212966이 부여되었다.[4] 1951년 5월 납북되었고, 서류상으로는 1951년 9월 10일에 사망처리되어 병적에서 제적되었다. 1994년 10월 23일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였다.[5] 할아버지가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였다.[6] 영상 18분 47초 참조. 1982년 작고하였다고 한다.[7] 영상 18분 24초 참조[8]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동[9]서울특별시 중구 다동[10]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11]서울청계초등학교[12] 1994년 10월 24일 연합뉴스 기사[13] #[14] 현재의 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교육학과이다.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하며 교명이 바뀌었다.[15] 1994년 10월 25일 동아일보 기사[16] 1995년 6월 20일 동아일보 기사[17] 1994년 10월 25일 동아일보 기사[18] 나중에 제5포병단 소속으로 변경되었다가 현재는 제1포병단 소속이 되었다.[19] 이를 매봉·한석산 전투라고 한다.[20] 1995년 6월 20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제101포병대대 소속으로 함께 포로가 되었던 김성태 소령과 박중호를 수용소 생활을 하며 만났는데, 이들은 북한에서 혹독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한다.[21] 참고로 일반적인 성인 기준으로 1인당 하루 최소 권장량은 600g이다.[22] 2022년 5월 8일 이만갑 542회에서는 총무과가 아닌 학생지도과에서 근무하였다고 증언하였다.[23] 1994년 11월 8일 동아일보 기사[24] 때문에 당시 중국 우표와 봉투가 존재감만은 확실하게 드러냈다. 전체적인 상태가 쓰레기에 가까웠다는 점도 한 몫했다. 한술 더 떠 수신인 주소조차 '남조선(南朝鲜) 한성중구 성신여대'라고 적혀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 서울특별시가 한성이라고 불린 적이 없는데다, 성신여자대학교가 소재한 돈암동은 1914년부터 1936년까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돈암리로 되어 있었고, 1943년부터 1949년까지 동대문구 관할, 1949년 이후로는 쭉 성북구 소속으로서 역사상 한 번도 중구 관할인 적이 없었다. 과거 서울특별시에 거주하면서 연희대학교를 다녔던 조창호가 자신이 살던 도시와 국가를 까먹었을 리는 없으므로 조선족 상인이 본인이 알고 있던 기본상식을 최대한 이용해 적어 보낸 것으로 보인다. 중국에선 2005년까지 서울특별시를 한성으로 표기했다.[25] 2022년 5월 8일 이만갑 542회[26] 2006년 11월 19일 한겨레 부고 기사[27] 탈북을 앞두고 자식들에게 제발 같이 가자고 제안했으나 자식들이 아버지 먼저 내려가시라고 하는 바람에 자식들은 탈북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자식들과 생이별했다.[28] 기상 상태가 좋지 않아 높은 너울성 파도 때문에 작은 목선으로는 무리였다.[29]서울아산병원[30] 전사 처리되어 계급 특진이 추서된 사람이 살아돌아온 것은 전례가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아직 정식 전역처리 된 것도 아니지만 합당한 예우는 하여야 했기 때문에 국방부도 그의 신분처리에 고심이 많았다. 일단 현역 육군 소위 신분으로 인정하고 중위로 진급시킨 뒤 전역처리하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으나 연령정년을 한참 넘긴 사람을 현역 중위로 진급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기왕 진급시킬 거라면 중위가 아니라 더 높은 계급으로 특진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논란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 계급을 동시에 특진시키는 것은 어렵기도 하거니와 현실적으로 그에게 어떤 계급을 부여해야 합당할지도 난제일수 밖에 없었다. 물론 계급만 중위일 뿐 실제로 국방부는 그를 장성급 장교 이상으로 극진히 예우하였다. 보국훈장 통일장은 대장이 전역할 때 받는 훈장이다.[31] #[32]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의 재산이 5백만원이었다. 어느 정도의 금액이냐면 기와집 1채가 1천원이었다.[33] 1915년 4월 26일 조선총독부 관보 제0816호[34] #[35] 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조창호 중위 어머니의 여동생이 최우석 기자의 할머니였다고 한다.[36] 당초 최성규는 출연이 예정되어있지 않았으나 스튜디오에 있던 출연자들이 강력히 요청해 즉석에서 전화연결이 이뤄졌고 며칠후 최성규와 따로 인터뷰를 했다.[37] 한 달간은 남한에서도 존재를 숨길 테니 강에 투신자살한 것처럼 위장시키라고 하면서 나중에 다시 보자는 내용이었다. 출연자들 모두 내용을 듣고 결과적으로 '지키지 못한 약속'이 됐다는 말을 하며 "차라리 전해지지 않아 다행이다."라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