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설립 초기의 명칭은 '정동예배당', '정동교회'로 불리다가 1895년 교회 이전 후 '신문내 제일예배당', '서대문교회'로 불렸고, 1910년 현재의 위치로 교회를 이전할 때 비로소 '새문안교회'로 명명되었다. 이름의 유래는 근처에 위치했던 돈의문을 세종대왕 당시 새로 옮겨 세웠는데, 그 이름을 '새문'이라고 불렀고 안쪽에 위치한 동네의 이름을 '새문안'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많은 독립운동가들도 배출하였다. 안창호 선생이 언더우드 고아원에서 접장으로 일했었고 김규식, 김순애, 서병호, 서재현, 장붕도 새문안교회 출신이다.
민주화운동 시기에 학생운동이 심화될 때 청년층의 적극적인 시위 참여가 있었으며 심지어 대학부 공간에 화염병과 같은 시위 용품까지 만들어 보관했었다. 이들은 교회의 과거 친일행적에 대해 비판적이였고 교회가 이를 인정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친일 간부들의 후손들도 그대로 다니고 있었기에 이들과의 사이가 무척 껄끄러웠다.
2020년: Architizer A+ Awards의 종교건축 및 기념관 부문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2021년: 예배당의 곡면이 Phaidon의 출판한 『The World's Best Architecture』 작품집의 표지를 장식했다.
Phaidon의 『The World's Best Architecture』 작품집 표지
[1]영락교회 동사목사직을 사임하고 부임했다.[2] 보이다시피 마당에 종이 있다. 매 주일마다 치는 종은 아니고 신년 크리스마스 등에만 쳤었다. 그동안 마지막 황세손으로 알려진 건축가 이구의 작품이라고 구전되어 왔기 때문에 예배당 재건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필요 면적을 확보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구 예배당 보존을 검토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도면에 기재된 설계자가 이구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철거가 확정되었다.[3] 종교건축의 권위자인 이은석 건축가가 서인건축과 함께 설계했다. 건축과정에서 교회가 여러 이유로 건축가가 제안한 초기 설계안을 많이 수정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건축가의 원안에서 유지된 독특한 외부 곡면(파사드)이 이 건물의 국제 건축계의 주목을 이끌었고, 많이 수정된 내부공간에 대해선 외부에서 느끼는 감동에 못 미친다는 의견이 많다. 이은석 건축가의 원안대로 지어졌다면 건물의 완성도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의견과 원안의 일부라도 유지되어 도시미관을 해치지 않게되어 다행이라는 의견이 건축계에 혼재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