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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03 21:57:44

815(게임)

파일:815 게임.jpg

1. 개요2. 스토리
2.1. 광복군2.2. 일본군
3. 병과4. 건물5. OST6. 여담

1. 개요

클라리온 소프트가 개발하고 게임박스에서 유통한 이후에 1998년에 나온 대한민국의 비디오 게임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광복군일본일본군과의 혈투를 그린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이자 일제강점기 시대를 소재로 한 역사 RTS로, 개발 초기 및 출시할 당시 각 게임 잡지 등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게임 방식은 독립군과 일본군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며 진영을 선택하면 진영을 관리하고 각 진영의 여러가지 병과를 가진 부대원을 선택해 미션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각 진영은 선택시 스토리 모드로 진행하며 임무의 경우 각 진영당 13개씩 총 26개의 미션이 있다. 전투 방식은 트리거 소프트보스 1999 게임과 비슷하다.

이 게임은 광복 5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게임으로 봐도 되는데 90년대 말에 나온 작품이라 아무래도 완성도 면에서는 떨어지지만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게임 개발당시 각 실존 독립운동가 및 광복군 유족들의 고증협력을 얻어서 실제 광복군 지사들의 사진을 사용하는 등 큰 노력을 기울였으며 일본군의 경우에는 예전 국사수업때 사용한 역사 교과서 및 역사 사전에 나온것을 그대로 사용한듯 하다.

고전게임 사이트를 찾아보면 다운로드 받아 해볼 수 있지만 특정 그래픽카드에서는 작동하지 않은 현상이 있어(별도의 패치를 하거나 윈도우 XP 경우는 그래픽 가속 설정으로 플레이 할 수는 있다.) 플레이하기 전 설정이 필요하다.

여담으로 이 게임이 박스형태의 패키지로 첫 발매될 당시에는 광복절 마케팅의 일환으로 게임 패키지(당시 가격이 무려 8500원.)를 구매하게 되면 안에 태극기가 동봉되어 있었는데 1999년에 주얼로 재발매될시에는 당연히 미포함되었다. 그리고 본 게임의 CD를 넣고 인스톨을 하게 되면 어떤 사진이 나오는데 이는 1943년부터 벌어진 학병제 실시 사진이다.

2019년 현재 티스토리의 고전게임 전문 다운로드 블로그인 두기의 고전게임 블로그 에서도 다운로드가 가능함으로써 드디어 윈도우 XP나 윈도우 7로도 아무런 제약(특정 그래픽카드에서 작동하지 않은 현상이나 별도의 패치설정 같은 것.)이 전혀 없이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2. 스토리

2.1. 광복군

백범 김구 선생과 철기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한국 광복군 3지대의 활약상을 그린다. 플레이어는 광복군의 지휘관이 되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각종 게릴라 작전 및 각종 사보타주를 하는 등, 일본군을 무찌르는 작전에 참여하여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또한 특정 이벤트때마다 장제스 총통이 조연으로 등장하며 역사적인 고증을 위해서 몇몇 자문과 제작협력을 얻어서 안중근 의사의 당질인 안춘생 선생,[1] 고려대 총장이었던 김준엽 선생, 장준하 선생과 함께 활약했던 노능서 선생의 사진이 사용되었다.

게임상에서 광복군이 상징하는 색깔은 백의민족을 뜻하는 하얀색을 사용하며 계급은 부령>정령>참장>부장>정장 순으로 오르게 된다.

2.2. 일본군

일본 육군 제 13사단 78연대 소속의 아즈마 마사히코 육군 소장이 이끄는 부대에서 광복군을 소탕하려는 임무에 참여한다. 플레이어는 일본군의 부관이 되어 광복군에 즉각 협력하려는 주민들을 사살하거나 일제에 방해가 되는 한국 광복군들을 모두 없애버려야만 한다.

일제가 광복군을 학살하고 소탕하는 스토리인지 미션의 대부분이 모든 맵을 뒤져가면서 숨어있는 잔적들까지 처리하는 내용이다. 여담으로 아즈마 마사히코의 바로 윗 상관의 사진은 1919년에 사망한 데라우치 마사타케 일본 총독의 사진을 썼다.

게임상의 퍼스널 컬러는 당연히 대 일본제국의 황국신민을 상징하는 황색. 계급은 중위>대위>소좌>중좌>대좌 순으로 진행된다.

3. 병과

이 게임의 병과는 구대장을 제외하고 모두 다섯개로 구성된다. 각 진영마다 도합 16인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지만, 소규모 사보타주 및 게릴라 작전을 위해서 총 8명의 특공대를 조직하여 미션에 나갈 수 있다.

여담으로 이 게임에 등장하는 광복군의 이름들은 실제 광복군 단원들의 성함들이며, 철저한 자료 고증을 거쳐서 게임에 삽입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풀네임은 패키지 발매 당시에 들어 있는 매뉴얼에 적힌 기준으로 작성한다. 제작진이 임의로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실제 게임에서는 그냥 성을 뺀 이름만 나온다.






4. 건물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이곳에서 대원을 선발하고 작전 지시를 받으며 무기를 구입할 수 있는 총 7개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5. OST

고전게임이어서 시스템적으로도 약간의 문제가 좀 있었지만 게임 잡지 내에서도 음악이 굉장히 좋은 게임으로 평가 받았으며 장엄하고 웅장한 사운드가 일품이었다. 비록 적은수의 BGM이 사용되었으나 하나하나가 명곡이라는 편. 본 작품의 음악은 공룡기획이 담당했다.

6. 여담

유튜브에서 고전게임 전문 중계의 스트리밍을 하고있는 유튜버인 와무우 PD가 이 게임을 플레이 한적이 있었다. 원래 플레이의 첫 시작은 2016년 2월이었는데 중간에 잠시 계정을 정지먹은 후에 다시 정지가 풀리자 2017년 8월에 광복절 기념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재플레이를 시작하여 결국에는 엔딩을 보는데 성공하게 된다. 참고로 일본군으로 플레이 했으며 구대장은 수류탄병으로 클리어 하였다.

실제 사용하지 않는 총기가 몇자루 나오고 그마저 사진에 나온걸 잘라서 붙힌 것...


[1] 1912년 8월 12일 ~ 2011년 1월 26일. 5촌 조카이며, 안중근 의사의 아들인 안준생 선생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2] 안중근 의사의 당질로, 독립기념관 이사 및 광복회 회장 및 고문을 지냈다.[3] 임시정부 군무총장을 지냈던 노백린의 차남.[4] 1938년 10월에 한국광복 진선 청년 공작대의 일원으로 시작하였고 광복군 제 3지대의 구대장 및 훈련대장을 역임했다.[5] 평안남도 진남포 출신으로, 1941년에 광복군 제2지대의 제3구대장 및 총무조장으로 활동하였고 6.25때도 활동하였다. 다른 이름은[6] 일본군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사진이 사용되었다.[7]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일 당시 동석한 일본군 3인중 왼쪽 사람의 사진이 사용되었다.[8] 1919~1951. 광복군 서기장 최일성의 동생으로, 경기도 개성 출신. 1940년 10월에 한국청년전지 공작대에 대원으로 있다가 1942년에 황포군관학교 보병과에서 공부한후 44년에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그후 국내 진공작전 계획준비중 해방을 맞이하여 귀국후 6.25때 다시 자진 입대하여 전사했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 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9] 메이지 유신 당시 일본의 내각 총리대신을 지낸 구로다 키요타카의 젊은 시절(1868년으로 추정) 사진이 사용되었다.[10] 광저우시에서 임시정부 지하공작대원으로 활동 후 광복군이 만들어진 후 장병 훈련을 담당하는 훈련대 대장을 맡았었다.[11] 생몰 : 1921.9.12 ~ 2011.12.5 중국 상하이시 태생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민필호 선생의 장남이다. 1940년 광복군 창설과 동시에 제 2지대 총무조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주홍콩 부총영사·주 대만 대리대사, 독립유공자협회 회장, 독립기념관 이사장 등을 지내고 향년 90세로 별세하였다.[12] 황해도 해주 출신. 한국 광복군 정모처 제 3분처 주임 겸 3지대 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13] 1918~미상. 평북 의주 출신으로 광복군 2지대에서 국내정진군 평안도반 제1조에 배속되어 활동했다.[14] 당시 30대 초반의 이완용의 사진이 사용되었다.[15] MIS 어학원 출신으로 1943년에 광복군에 입대했다. OSS 한국그룹 수석 요원으로 있었던 조종문의 동생이다.[16] 고려대학교 前 총장 당시 만 23세의 광복군 입대 초기 시절인 안경을 벗은 상태로 찍은 것을 사용했다.[17] 광복군은 빨간색의 탄띠를 착용하며, 일본군은 빨간색의 배낭을 메고 다닌다.[18] 매뉴얼에서는 이런 내용으로 나오지만, 실제 게임을 해 보게 되면 광복군은 폭파 미션이 달랑 하나 있지만 일본군은 폭파 미션 자체가 아예 없어서 데리고 나갈 일이 전혀없다.[19] 공격 시 자세에 차이가 있는데, 광복군은 한 손으로 쏘는 반면 일본군은 두 손으로 잡고 쏜다.[20] 지금도 장준하 선생, 김준엽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 남아있을 정도로 유명하다.[21] 놀랍게도 이토 히로부미가 어린시절의 영친왕과 함께 찍은 사진이 사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