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Bonn | |||||
휘장 | |||||
본의 위치 | |||||
<colbgcolor=#e3001b> 행정 | |||||
국가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
시간대 | (UTC+1/+2) | ||||
주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 ||||
현 | 쾰른 현 | ||||
인문환경 | |||||
면적 | 141.06km | ||||
인구 | 335,789명(2023년 12월) | ||||
인구밀도 | 2,380명/km² | ||||
홈페이지 | |||||
정치 | |||||
시장 | | 카탸 되르너 | |||
시의회 | 연립 여당 | | 19석 | ||
| 11석 | ||||
| 4석 | ||||
볼트 독일 | 3석 | ||||
야당 | {{{#!wiki style="display: inline; background-color: currentcolor;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font-size: .9em" | 17석 | |||
[[자유민주당(독일)| 자유민주당 ]] | 3석 | ||||
| 2석 | ||||
| 1석 | ||||
기타 | 6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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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도시이다. 쾰른 선제후국의 수도였으며 독일 분단 시절 서독의 실질적 수도의 기능을 했다. 통일 이후에도 일부 정부부처는 남아 독일의 제2의 수도로도 불린다. 행정 기능만 따지면 독일의 푸트라자야로 볼 수 있다. 다만 현대 신도시인 세종시와는 달리 본 자체는 수백년 이상 도시 기능을 수행한 역사 도시이다.
2. 역사
1597년부터 쾰른 선제후국의 수도였다.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쾰른 선제후직을 약 200여 년 동안 숙질계승으로 준세습화했는데, 이들은 시민들의 영향력이 강한 쾰른을 버리고 가까운 본에서 머물렀다. 베토벤의 어린 시절 쾰른 선제후[1]가 나오는 이유도 쾰른 선제후가 쾰른이 아닌 본에서 머물렀기 때문이다.1949년 서독(독일연방공화국) 건국 이후 법적인 수도는 베를린(서베를린)이었지만, 동독에 둘러싸여 있는 월경지였던 탓에 수도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지리학적으로 한계가 있었고 독일이 통일 될때까지 다른 곳에 임시로 수도 기능을 이전해야 했다. 유력한 후보군으로 독일 최대의 항구이자 제2의 도시 함부르크, 바이에른의 주도이자 제3의 도시 뮌헨, 주요 공업지대인 라인란트의 중심지이자 제4의 도시 쾰른 등이 거론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후보는 바로 프랑크푸르트(암마인)로 전쟁 이전부터 이미 경제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었으며 서독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주도가 아니라는 점도 작용했다.[2] 또한 연합군 점령하 독일의 미군 관할지역의 수도 역할을 한 적이 있어서 행정 중심지로서의 자격 또한 충분했다. 실제로 프랑크푸르트에 독일 의회로 사용할 건물도 지었고 프랑크푸르트 시민들도 내심 기대하였으나 서독의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가 본을 수도로 지정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여기엔 본이 아데나워 총리의 출생지이자 고향인 쾰른 시와 가깝다는 명분도 있었다. 다른 정치인들 또한 프랑크푸르트를 수도로 정할 경우 "프랑크푸르트가 서독의 공식 수도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베를린으로 도시 수도를 환원하는 게 힘들어지므로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지지도가 낮아질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서는 바람에 결국 본이 서독 수도로 결정되었다.
뒤집어 말하면 프랑크푸르트는 사실 굳이 수도가 아니라도 중세부터 유서깊은 역사와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 그리고 독일 자유주의의 역사적 성지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 중요하고 상징성이 큰 도시였기 때문에 서독 정치인들도 여기 수도를 택했으면 분단이 영구화되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아 '분단은 독일사에서 일시적인 현상일뿐이다'란 메세지를 주기 위해 촌구석인 본을 선택했단 얘기가 된다. 군사 안보상으로도 프랑크푸르트가 당시 동독령이었던 튀링겐 지역과 너무 가까운 최전방이라 안보 관련 우려가 있었던 것[3] 또한 한몫 했다.[4] 때문에 본을 수도를 두면서 서독 정부는 프랑크푸르트를 사용할 때보다 추가로 9,500만 마르크를 지출해야 했다.
독일 재통일로 베를린이 다시 독일의 수도가 되자 1994년에 각 정부 기관들을 베를린으로 다시 옮기기로 결정되었지만, 구 서독 지역 내부에서 반발이 많았다.[5] 특히 본이 반발이 거셌지만 이에 대해 수도 노릇을 못해 본 프랑크푸르트가 본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사실 동베를린에는 동독정부청사가 있었기에 공화국 궁전[6]을 통일정부청사로 그대로 쓸수도 있었지만, 하필이면 그 자리가 옛 프로이센의 정궁이었던 베를린 성 터라서 상징성 문제 때문에 정부청사로 쓰기 곤란했고, 건물의 석면을 제거해야 해서 어차피 돈을 써야 하는 건 마찬가지이기는 했다. 그래서 거하게 돈을 들여 정부청사 신축작업에 들어갔고, 통일 이후에도 한동안 연방정부 업무를 나눠서 보았다.
3. 지리
3.1. 인구
인구 30만 정도의 도시라서 독일에서는 대도시로 분류한다. 인구 많은 순으로 20위 안에 들지만 근처에 워낙 큰 도시가 많아서 존재감이 없을 뿐.4. 교통
쾰른-본 국제공항이 가장 가까운 공항이지만, 공항의 규모가 작은 편이라 프랑크푸르트 공항을 이용하자. 본 중앙역에서는 쾰른, 코블렌츠 방면으로 RE와 IC가 다닌다. 굳이 쾰른-본 국제공항으로 가고 싶다면,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에 직항이 있다.옛 수도여서인지는 몰라도 경전철이 다닌다. 경전철을 타면 쾰른에 갈 수는 있지만 추천하지 않는다.ICE를 타기 위해서는 본 중앙역에서 쾰른을 가거나 30분 정도 전철을 타고 외곽의 지크부르크/본역에 가야 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쾰른을 잇는 고속선이 본 도심을 빗겨 지나가기 때문이다. 근데 지크부르크는 정차하는 열차 편수가 많지 않아 쾰른으로 가서 환승하는 경우가 많다. 본 중앙역에서도 ICE가 정차하지 않는건 아닌데, 본 중앙역을 경유하기 위해선 재래선을 이용하다보니 속도가 많이 느리다. 프랑크푸르트까지 갈 경우 본 중앙역에서 출발하는게 지크부르크 역에서 출발하는 것 대비 시간차가 꽤 나는 편이다. 슈투트가르트나,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 남쪽에 있는 도시까지 기차 경로를 검색해보면 쾰른으로 역주행 했다가 ICE로 환승하는 경로를 추천해 준다.
5. 경제
이곳을 기반으로 하는 유명 기업으론 도이체 포스트(DHL), 도이체 텔레콤, 하리보 등이 있다. 도이체 벨레와 몇몇 국제연합 산하 기관도 본에 본부를 두고 있다.젤리 제조회사 하리보의 '보'가 이 도시의 이름 Bonn에서 왔다. '하리'는 하리보의 창업자인 한스 리겔(Hans Riegel)의 이름에서 따왔다. 하리보는 1920년 본에서 설립되었다.
6. 생활·문화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7] 그의 이름을 딴 오케스트라인 베토벤 오케스트라 본은 본 시를 대표하는 교향악단이다. 주 공연장은 라인강변의 베토벤할레이고 과거에는 베토벤홀 관현악단으로 알려졌으나, 2006년에 새롭게 개명되었다.매년 9월달에 주독한국대사관과 본한인회가 주간하는 한국주간이라는 축제와 대한민국 영화 상영을 한다. 2010년대 기준 초반이지만 대한민국 문화에 익숙한 독일 시민들의 참여도도 높고 특히 음식도 인기가 많다.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 매월 셋째주 토요일에 Rheinaue에서 벼룩시장이 열린다. 독일에서 손꼽히는 대규모 벼룩시장이다. 경치 좋은 공원에서 열린다. 가끔 정말 가치 있어 보이는 물건이 1유로도 안 되는 가격에 나오기도 한다.
Rheinaue의 공원에 2017년 즈음부터 뉴트리아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서는 뉴트리아가 생태계교란 생물로 분류되어 있으나, 독일에서는 자연환경이 좋아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하여 사람들도 피하지 않고 귀여워하며 오히려 집에서 먹이를 들고 와서 주기도 한다. 뉴트리아도 사람들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앞에 쪼르르 달려와서 두 발로 서서 먹이를 달라고 보챈다. 그래서 생태계교란 생물임을 배제하고 자세히 보면 좀 귀엽다. 본 뿐만이 아니라 NRW 지역 전체에서 실시하고 있으며, 최근 NRW 지역의 자연환경이 많이 좋아졌다.
6.1. 교육
다른 지역에 비해 비용 대비 수준있는 교육을 제공하다보니 한국인들이 어학연수를 하러 많이 오는 곳이다.[8] 그래서인지 인구, 도시 규모에 비해서 외국인들[9]이 꽤 많다.본 대학교는 독일 내에서도 수준급의 의학, 신학으로 유명하며, 박사과정을 밟기에 좋은 학교라고 독일 학생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 있다. 오래된 대학들은 대부분 권위를 내세워 박사과정의 절차가 복잡한 편인데, 본 대학교는 교수들이 젊기 때문인 듯. 하지만 정작 석박사 하는 학생들은 학교 자체에서 지원금이 적은 편이라고. 특히 자연과학 계열은..
6.2. 스포츠
이 도시를 연고로 하는 스포츠팀으로는 본 SC과 본 캐피털스가 있다.7. 관광지
볼만한 것은 베토벤 생가, 구 시청,[10] 역사박물관, 과학관, 연방전시관 (Bundesausstellungshalle), 베토벤이 처음으로 오르간을 쳤다는 St. Remigius 성당, 그리고 라인강(...) 하리보 젤리를 좋아한다면 본 대학교 앞에 있는 하리보박물관이나, 하리보 옛 공장 자리에 있는 대규모 매장에 가 보는것도 좋다.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그리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모친인 마리아 막달레나 판 베토벤(Maria Magdalena van Beethoven, 결혼 전 이름은 케베리히(Keverich)) 무덤이 중앙역 인근 공동묘지에 있다.
[1] 여담으로 이 쾰른 선제후 막시밀리안 프란츠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막내 아들이다. 선제후가 된 이후로는 맏형 요제프 2세와 손윗누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는 프랑스 왕국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했다.[2] 프랑크푸르트가 있는 헤센 주의 주도는 근처의 비스바덴이다.[3] 근처의 풀다 갭(Fulda Gap) 때문. 전면전이 발발할 경우 바르샤바 조약기구 병력이 대규모로 가동하려면 북독일 평원 아니면 여기 외엔 선택지가 딱히 없었다. 여기가 뚫리면 바로 그 다음은 프랑크푸르트고, 프랑스 국경까지 일직선으로 기동이 가능했기 때문에 NATO로선 목숨 걸고 방어해야 하는 지점이었다. 나폴레옹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퇴각 루트로 사용했던 유서 깊은 지역.[4] 사실 동독-프랑크푸르트 거리가 북한-서울 거리보다는 훨씬 멀다. 하지만 상대가 북한이고 임진강 방어선이 있는 서울과 달리 서독은 소련을 위시한 WTO군 주력을 상대해야 하는데다가 이쪽은 내독국경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쭉 야트막한 구릉지의 연속으로 이렇다 할 방어선을 설정하기가 힘들다.[5] 독일 연방의원들 중에서도 의회 이전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이 많아서 의회에서 투표를 실시했는데, 베를린 338표 vs 본 320표로 근소한 차이로 베를린으로의 이전이 결정되었다.[6] 2006년 철거되었고, 호엔촐레른 가문의 로비와 서독 시민들의 성금이 모여 2020년, 공화국 궁전 터에 베를린 성이 재건되었다. 현재는 훔볼트 포룸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민속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7] 그러나 정작 베토벤의 알려진 작품이 나온 곳은 빈이며, 첫 공식 출판작품인 3개의 피아노 트리오 Op.1 또한 빈에서 작곡되었다. 본에서의 작품은 습작 수준의 곡들밖에 없다.[8] 중앙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한국어를 흔히 듣게 될 정도.[9] 유럽이 대개 그렇지만 아랍 계열과 흑인들이 대다수.[10] 이라고 해봤자 아직도 쓰는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