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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르셀로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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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설립, 그리고 생존 (1899 ~ 1909)3.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에서의 합병 (1909 ~ 1919)4. 황금 세대 (1919 ~ 1930)5. 고통의 시기 (1930 ~ 1939)6. 인내의 시간 (1939 ~ 1950)7. 쿠발라의 시대 (1950 ~ 1961)8. 최악의 암흑기 (1961 ~ 1970)9. 크루이프와 암흑기 (1971 ~ 1978)10. 스타플레이어 영입과 이어지는 암흑기 (1978 ~ 1988)11. 드림팀의 시대 (1988 ~ 1996)12. 호나우두, 피구 - 침체기 - 스타 군단의 재건 (1996 ~ 2008)13. 최고의 황금기 (2008 ~ 2016)14. 침체기 (2016 ~ 2021)15. 포스트 리오넬 메시 시대 (2021~2022)16. 참고/관련 자료

1. 개요

클럽 창설 년도인 1899년부터 현 시대까지의 FC 바르셀로나 역사를 정리하는 문서이다. 모든 소제목과 주요 내용은 바르셀로나 공식 홈페이지와 후술할 축구 전문서적들을 참조하였으며 홈페이지와 같이 10년 단위로 정리되어 있다.

2. 설립, 그리고 생존 (1899 ~ 1909)

1899년 10월 22일,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점점 널리 퍼지는 축구의 인기에 힘입어 스위스인 주안 감페르를 주축으로 <로스 데 포르테스> 신문에 창단 광고를 실어 클럽의 탄생을 알렸다. 11월 29일 솔레 힘나시오에서 스위스인 오토 쿤슬, 욀터 윌드, 잉글랜드인 윌리엄 파손스, 독일인 오토 마이어, 카탈루냐인 루이스 드 오소, 바르토메우 테라다스, 에흐리크 두칼, 페레 카보트, 카를레스 푸올, 주제프 요베트과 조안 감페르를 포함하여 11명이 회의를 진행하였고 만장일치로 팀 명을 Futbol Club Barcelona로 정하기로 했다. 창단 당시에는 초대 회장직에 영국인 월터 와일드를 선임했으며, 프로 축구단이 아닌 취미 축구단으로 창단 되었다.[1] 창단 이후 1년 동안 보나노바 종합 운동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다.
파일:FCB_The former cycle track grounds at Bonanova.jpg
1899 ~ 1900, 보나노바 종합 운동장

1900년, 카탈루냐 최초의 축구 대회인 1900-01 코파 마카야가 개최되면서 바르셀로나 역시 대회에 참가하였다. 총 6개 팀이 참가하여 리그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SD 산타하흐가 기권을 선언하면서 5개 팀의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승리 시 2점, 무승부 시 1점, 패배 시 0점의 승점 방식을 적용하여 6승 1무 1패 승점 13점을 달성하며 히스파니아 AC에 이어 2위로 대회를 마감하였다. 이 대회에서 조안 감페르가 31 득점을 기록하며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다음 시즌인 1901-02 시즌에는 6개 팀의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바르셀로나가 우승을 차지하며 역사상 첫 트로피를 차지하였다. 1902-03 시즌에는 클루브 에스파뇰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고 바르셀로나 주 컵 대회인 코파 바르셀로나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첫 컵 트로피를 차지하였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코파 마카야는 폐지되었다.

1903-04 시즌부터는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가 새로 개최되었고 1904-05, 1908-09, 1909-10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였다.
파일:FC_Barcelona_1910.jpg
1909-10,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우승
★ 우승 기록
코파 마카야: 1901-02
코파 바르셀로나: 1902-03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1904-05, 1908-09, 1909-10

3.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에서의 합병 (1909 ~ 1919)

1908년, 클럽 구성원은 38명에 불과했고 이에 대해 조안 감페르는 클럽을 더 크게 만들고 싶었다. 나머지 구성원의 동의를 받아 초대 회장으로 등극하였고 지난 10년 사이에 4번의 홈 구장 변화가 있었던 만큼 제대로 된 홈 구장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1909년 4월,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를 공식 홈 구장으로 선정했다. 감페르 회장은 1925년까지 총 5번 회장을 역임하며 팀의 기틀을 잡아 성장에 기여했다.
파일:camp-de-la-indstria-18d969cd-959a-479a-acd4-efdacaed22e-resize-750.png
1909년 4월,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

1910년, 제대로 된 축구단으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클럽 엠블럼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 하에 새로운 엠블럼이 만들어졌다. 이후 이 엠블럼은 현재까지 사용되는 엠블럼의 배경이 되었다.
파일:FCB_First_Logo.png
Futbol Club Barcelona 첫 엠블럼

드디어 제대로 된 홈 구장이 생기고 난 뒤 현재는 코파 델 레이에 참가하여 1909-10, 1911-12, 1912-13에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1910년부터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카탈루냐, 바스크, 그리고 남부 프랑스 팀들이 참가한 피렌스 컵에 참가하여 1910, 1911, 1912, 1913까지 네 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하였다. 기존에 참가하던 카탈루냐 리그인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에서도 10년 사이 5번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렇게 클럽이 부상할 수 있던 이유는 바르셀로나 최초의 슈퍼 스타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1군 아시아 출신 선수, 파울리노 알칸타라의 맹활약이 있었다. 1911-12 시즌부터 고작 만 15세의 나이로 바르셀로나로 합류하여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고 1915-16 시즌까지 총 4시즌을 소화하고 보헤미안 SC로 이적하였다.

바르셀로나의 좋은 성적과 알칸타라의 등장으로 클럽의 인기는 점점 올라갔고 클럽에 대한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지지도 끝을 모르고 올라가면서 이 덕에 금전적인 도움 역시 받을 수 있었다. 홈 구장에 점점 많은 팬들이 몰리자 자리가 부족해졌고 그럼에도 경기를 놓치기 싫었던 팬들이 지붕과 담벼락에 걸터앉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엉덩이를 뜻하는 '꾸레'라는 단어가 바르셀로나 팬을 지칭하는 별명이 되었다.
★ 우승 기록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1909-10, 1912-13, 1915-16, 1918-19, 1919-20
코파 델 레이: 1909-10, 1911-12, 1912-13
피렌스 컵: 1910, 1911, 1912, 1913

4. 황금 세대 (1919 ~ 1930)

1920년대부터 축구 자체의 인기와 규모 역시 날이 갈수록 커지면서 좋은 활약을 보이던 바르셀로나는 파울리노 알칸타라, 주젭 사미티에르, 리카르도 사모라와 스타 선수들의 등장에 힘 입어 더 큰 클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1922년, 드디어 바르셀로나 자체 소유의 홈 구장 캄프 데 레스 코르트로 홈 구장을 이전하게 되었다. 22,000명의 정원을 목적으로 건축되었고 전체 입석으로 입장할 시 60,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파일:Camp_de_les_corts_1930.jpg
1922년, 새 홈 구장 캄프 데 레스 코르트

1924년 12월 7일과 8일, 클럽 창단 25주년을 기념하여 레알 우니온 데 이룬과 이틀 연속 기념 경기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11명으로 시작했던 클럽 구성원은 25년 만에 12,207명으로 늘었다.

1928년 코파 델 레이 결승까지 진출하였고 연장전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였기에 무려 2차례나 무승부 경기를 치르고 마지막에 치러진 3번째 경기에서 3대1로 승리하였다. 이 경기는 바르셀로나 경기 중 최초로 라디오로 라이브 중계가 된 경기로 남았다.

그리고 1929년 2월 12일, 라리가가 창설되어 코파 델 레이 우승 클럽 자격으로 대회에 참여하였다. 4달 반 동안 대회가 진행되었고 승점 25점으로 라리가 최초의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파일:MD_20130629_MAS_DEPORTE_D_54376414688-652x492@MundoDeportivo-Web.jpg
1929년, 사상 첫 엘 클라시코
★ 우승 기록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1920-21, 1921-22, 1923-24, 1924-25, 1925-26, 1926-27, 1927-28, 1929-30
코파 델 레이: 1921-22, 1924-25, 1925-26, 1927-28
라리가: 1929

5. 고통의 시기 (1930 ~ 1939)

1930년 7월 30일, 클럽 설립자이자 초대 회장이었던 조안 감페르개인적인 문제안 좋은 선택을 하면서 향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주제프 수뇰이 제 2대 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파일:img308.gif
1930년, 조안 감페르의 사망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였고 과달라마 근처 전선 지역에 잘못 들어간 주제프 수뇰이 체포되었다가 프랑코 군에게 총살 당했다. 고작 6년 사이에 2명의 회장을 잃게 된 바르셀로나의 운영진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카탈루냐어 사용 자체가 금지되며 Futbol Club Barcelona라는 팀 명을 버리고 Club de Fútbol Barcelona라는 명칭으로 이름이 바뀐다.

이런 와중에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이 갈리게 되면서 스페인의 전 지역 클럽들이 참여하는 라리가를 진행할 수 없게 되자 1936-37 시즌, 6개의 카탈루냐 클럽과 4개의 발렌시아 클럽이 참가한 지중해 리그가 개최되었고 14경기 7승 6무 1패 승점 20점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내전으로 인해 코파 델 레이도 진행할 수 없게 되자 카탈루냐 지역 팀들만 참여하는 리가 카탈라나가 개최되었고 이 대회에서도 17경기 14승 1무 2패 승점 29점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기존에 참가하던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에서도 최강자 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또 10년 사이에 5번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1939-40 시즌을 끝으로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는 폐지된다.

하지만 내전으로 인해 대회의 규모 역시 매우 작아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클럽의 경제적 부분에 타격이 오게 되자 선수들을 아메리카 투어라는 명분으로 아메리카 대륙 클럽들로 보냈다.[2] 여기서 벌어 들인 돈은 이후 클럽 재건에 큰 도움이 된다.
★ 우승 기록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1930-31, 1931-32, 1934-35, 1935-36, 1937-38
지중해 리그: 1937
리가 카탈라나: 1937-38

6. 인내의 시간 (1939 ~ 1950)

스페인 내전 종식 이후 바르셀로나는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스포츠 적인 부분에서 모두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하지만 다행히 1939년 6월 29일, 캄프 데 레스 코르트의 재개장이 허가되었고 이와 동시에 세사르 로드리게스가 바르셀로나에 나타났다.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1955년까지 뛰면서 456경기 304골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파일:vitrina_5.v1311695620 (1).jpg
1939년, 캄프 데 레스 코르트 재개장

하지만 빼앗긴 팀 명으로 인해 로고에 적힌 FCB를 사용하지 못하고 CFB로 바뀌게 된다.
파일:CFB_LOGO.png
1941년, 빼앗긴 이름과 바뀐 로고

재개된 코파 델 레이에서 1941-42 시즌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1944년, 주젭 사미티에르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돌아온다. 복귀와 동시에 1944-45 시즌, 17년만에 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되찾아 온다.

1947년 사미티에르가 감독직을 내려놓고 엔리크 페르난데스가 부임하게 되고 1947-48 시즌, 라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1948-49 시즌에는 라리가에서도 우승하고 FIFA의 인증을 받은 유럽 클럽 대항전 라틴 컵에서 스포르팅 CP를 꺾으며 대회 초대 우승팀 타이틀을 얻게 된다.
파일:cesar '_Latin.jpg
1949년, 라틴 컵
★ 우승 기록
라리가: 1944-45, 1947-48, 1948-49
코파 델 레이: 1941-42
라틴 컵: 1948-49
코파 에바 두아르테: 1948-49

7. 쿠발라의 시대 (1950 ~ 1961)

1947년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난 주젭 사미티에르가 테크니컬 디렉터로 보직을 바꾼 뒤 1951년, 바르셀로나의 역사를 뒤흔들 스타 플레이어, 라슬로 쿠발라를 바르셀로나로 데려온다. 이후 바르사는 3년 동안 코파 델 레이 3연속 우승, 라리가 2연속 우승, 코파 에바 두아르테 2연속 우승을 거두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1954년, CD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꾸준히 몸값을 높이고 있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전 소속팀인 CA 리버 플레이트와 디 스테파노의 이적에 대해 합의를 하면서 많은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선수 개인 합의 직전, 레알 마드리드 CF가 끼어들어 디 스테파노를 하이 재킹 하는 바람에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로 향하게 되었고 쿠발라의 바르셀로나 vs 디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의 라이벌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디 스테파노를 빼앗겼기에 그를 대체할 선수로 루이스 수아레스를 영입한다.

이와 동시에 1955년, 점점 커지는 클럽의 위상에 걸맞게 새로운 홈 구장이 필요하다는 많은 클럽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나왔고 운영진들도 이를 받아들여 새로운 홈 구장을 디자인하기 시작한다.
파일:maxresdefault_NEWSTADIUM.jpg
1955년, 새로운 홈 구장 모델링

그리고 1957년 9월 24일, 2년 간의 건설 끝에 새로운 홈 구장 캄 노우가 개장한다. 당시 최대 수용 인원은 99,053명으로 전 세계 최대의 축구 전용 구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3]
파일:kezSrOSY_CampNou.jpg
1957년 9월 24일, 캄 노우 개장

새로운 홈 구장과 함께 바르셀로나는 승승장구 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UEFA 유로파 리그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1957-58, 1959-60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게 되고 라리가에서도 1958-59, 1959-60 시즌에 2연속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1960년, 루이스 수아레스가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된다.
★ 우승 기록
라리가: 1951-52, 1952-53, 1958-59, 1959-60
코파 델 레이: 1950-51, 1951-52, 1952-53, 1956-57, 1958-59
라틴 컵: 1951-52
코파 에바 두아르테: 1951-52, 1952-53
인터-시티 페어스컵: 1957-58, 1959-60

8. 최악의 암흑기 (1961 ~ 1970)

1959-60시즌 라리가 우승 이후 바르사는 30년에 걸친 최악의 암흑기를 겪었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것처럼 보였던 이 암흑기는 해가 지나가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 되었다. 바르셀로나는 60년대 동안 라리가 우승을 단 한차례도 차지하지 못했으며, 1989-90시즌까지 30시즌 동안 라리가 우승이 단 두 차례(1973-74, 1984-85)에 불과했다.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쟁은 커녕 라리가에서도 중상위권의 평범한 팀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파일:Barca_Benfica.jpg
1960-61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 CF 바르셀로나 vs SL 벤피카

1960-61시즌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하였지만 SL 벤피카에게 3:2로 패하면서 우승을 놓쳤고, 이후 끝없는 몰락으로 빠져들었다. 방만하게 팀을 운영했던 구단은 재정난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캄 노우 건설에 재정을 쏟아부은 댓가가 컸다. 이후 라슬로 쿠발라를 비롯한 주축 선수들이 차례로 팀을 떠나게 되었고 팀의 성적도 추락했다. 계속해서 선수들이 팀을 떠났지만 재정난의 여파로 좋은 선수들을 충원하지 못했고, 바르셀로나 유스에서 성장한 선수들은 기대에 한참 못미쳤다.

60년대에는 레알 마드리드 역시 당시 프랑코 정권의 압력으로 예예 정책을 실시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유러피언컵에서 몰락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바르셀로나의 몰락은 레알 마드리드와 비교될 처지조차 못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암흑기라 불리던 60년대 중반 ~ 70년대 중반에도 라리가 우승을 밥먹듯이 했다.

다만 이런 최악의 암흑기 속에서 코파 델 레이에서는 두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완전히 죽지 않은 모습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코파 델 레이에 외국인 선수 출전 금지 덕분이었다. 때문에 50년대에도 바르셀로나는 라리가보다 코파 델 레이에서 더 많은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레알 마드리드도 60년대 중반 예예 정책으로 외국인 선수가 대폭 줄긴 했다. 오히려 70년대 이후 바르셀로나가 외국인 스타 수집에 열을 올렸고 코파 델 레이 규정도 차차 변화되었다.

1960년대에 카탈루냐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바르셀로나를 응원하는 팬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기술 역시 점점 발전하면서 바르셀로나의 경기가 TV로 중계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1968년, 회장 나르시스 데 카레라스가 처음으로 Mes que un club, 클럽 그 이상이라는 문장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이후 클럽의 모토로 사용된다.
★ 우승 기록
코파 델 레이: 1962-63, 1967-68
인터 시티 페어스 컵: 1965-66

9. 크루이프와 암흑기 (1971 ~ 1978)

끝없는 암흑기와 함께 팀의 몰락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되던 1971년, '토탈 풋볼'의 창시자 리누스 미헬스 AFC 아약스 감독을 선임하고 1973년 8월 13일, AFC 아약스의 스타이자 네덜란드 최고의 스타를 최대 이적료로 영입했고 곧바로 바르셀로나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리하여 감독 리누스 미헬스, 주장 요한 크루이프 구조로 팀을 벼랑 끝에서 끌어 올라오기 시작하며 1973-74시즌 라리가 타이틀도 다시 되찾아 오게 되었고, 크루이프는 1974년 발롱도르를 거머쥐게 되었다.
파일:_Cruyff_Barca.jpg
1973년, 요한 크루이프의 합류

1974년, 바르셀로나는 창단 75주년을 맞이하여 공식 응원가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하우메 피카스, 주제프 마리아 에스피나스 작사에 마누엘 발스와 코랄 산트 조르디 작곡으로 Cant del Barça를 만들었다.
파일:cant-del-barca--1.jpg
1974년, Cant del Barça의 탄생

그리고 스페인 정부가 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모든 지방의 언어 사용이 자유화 되면서 Club de Fútbol Barcelona에서 다시 원 이름인 Futbol Club Barcelona를 되찾았고 로고 역시 CFB에서 FCB로 바뀔 수 있게 되었다.
파일:83-830746_fc-barcelona-old-logo-hd-png-download.png
1974년
되찾은 Futbol Club Barcelona

크루이프와 함께 무려 15년만에 라리가 우승을 일구어냈지만 그렇다고 바르사의 암흑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세대 교체기였던 레알 마드리드가 다시 진용을 정비하였으며, 다른 라리가 팀들도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에서 서독이 크루이프를 완전히 봉쇄한 것을 보고 크루이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크루이프는 첫 시즌 만큼의 빛나는 활약을 보이지는 못하게 되었다. 결국 1973-74 우승 이후 바르셀로나는 또다시 침체기에 빠져들었고, 바르사가 또다시 라리가 정상에 오른 것은 11년이 지난 1984-85 시즌이었다.
★ 우승 기록
라리가: 1973-74
코파 델 레이: 1970-71, 1977-78

10. 스타플레이어 영입과 이어지는 암흑기 (1978 ~ 1988)

1978년에 직선제로 다시 치러진 회장 선거에서 주젭 유이스 누녜스가 당선된 후 재정이 넉넉해졌고, 1979년에는 위너스 컵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하였다.
파일:16070582_Winnerscup.jpg
1979년, 위너스컵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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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캄 노우에 입성한 디에고 마라도나

이때부터 누녜스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1982년 여름 이적시장에 80년대 최고의 축구 스타, 디에고 마라도나를 영입했다. 이어 게리 리네커, 베른트 슈스터, 안도니 수비사레타 같은 슈퍼스타들을 돈을 뿌려가며 영입했다. 뿐만 아니라 누녜스는 명장을 영입하는데도 돈을 아끼지 않으며 우도 라텍,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테리 베너블스, 루이스 아라고네스 등 명장들을 연이어 영입했으나 성과가 나오지 않자 조기 경질을 거듭하는 조바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천문학적인 돈을 뿌린 것에 비하면 바르사가 거둔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1982년부터 처음 생기게 된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의 1983년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하여 대회 2번째 우승자 타이틀을 거머쥔 것과 1984-85시즌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차지한 정도가 성과였다.[4] 1984-85시즌 라 리가 우승은 크루이프 시절인 1973-74시즌 이후 11년만의 우승이자, 돈지랄한 것이 드디어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희망을 팬들에게 안겨주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이후에도 바르사의 암흑기는 1990년까지 계속되었다.

바르사는 세대 교체 후 또다시 전성기에 오른 레알 마드리드의 독주를 속절없이 바라만 봐야만 했다. 바르사가 천문학적인 돈을 써가며 스타플레이어들과 명감독들을 쇼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것과 달리 레알 마드리드는 유스 출신을 포함하여 자국 출신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세대 교체에 성공한데다가 슈틸리케처럼 화려한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지만 가성비가 뛰어난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여 내실있고 빈틈없는 스쿼드를 꾸렸고, 바르사를 압살하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1985-86시즌부터 1989-90시즌까지 프리메라리가 5연패를 했다.
★ 우승 기록
라리가: 1984-85
코파 델 레이: 1980-81, 1982-83, 1987-88
위너스컵: 1979, 1982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3
코파 데 라 리가: 1982-83, 1985-86

11. 드림팀의 시대 (1988 ~ 1996)

1977-78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난 요한 크루이프가 10년 뒤에 감독으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그는 선수단을 대폭 정리하여 베스트 일레븐 중에서 무려 10명을 갈아치웠다. 사실상 주전 필드 플레이어 전원이 크루이프가 부임한 후 은퇴당하거나 팀을 떠나게 되었다.

누녜스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약속을 바탕으로 크루이프는 기존 주전 선수들을 싸그리 정리하고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크루이프는 부임하자마자 바르셀로나에서 16시즌 동안 549경기에 출전한 레전드 미겔리를 은퇴시켰고, 다른 선수들도 전원 내보냈다. 대신 바스크 출신인 호세 마리 바케로, 치키 베히리스타인, 혼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 4인방을 중심으로 하여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미카엘 라우드루프, 로날트 쿠만, 게오르게 하지 등 외국인 선수들을 대거 영입해 '드림팀'을 구축했다. 크루이프의 스타 플레이어 영입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호마리우까지 영입하면서 초호화 스쿼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크루이프의 드림팀이라 불리는 새로운 바르사가 탄생했다. 하지만 초기에 이 드림팀은 카탈루냐 팬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기존 바르사의 레전드들이 가차없이 내쫓겼을 뿐만아니라 크루이프가 영입한 선수들은 전원 외국인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는 원래부터 카탈루냐 민족주의,독립운동과 뗄수없는 끈끈한 관계를 지닌 구단이고 심지어 많이 희석된 지금조차도 암암리에 카탈루냐 혈통선수에 집착하는 경향이 남아있는지라 스쿼드를 통째로 물갈이해서 외국인으로 채워놓은건 상당히 큰 충격이었고 그나마 크루이프였기에 불만을 참은거였다. 물론 외국인 쿼터 때문에 전원 외국인으로 채우지 못했고 바스크 출신 4인방을 영입했다. 하지만 바스크인이 가까운 사이긴 해도 결국은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렇게 선수단 전원을 물갈이하고 나서도 두 시즌 동안은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많은 팬들은 누녜스 회장 이후 경질된 많은 전임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크루이프 역시 2~3시즌 내에 누녜스에게 경질될 것으로 여겼다.

자신이 원했던 선수들로 스쿼드를 전원 갈아엎은 크루이프는 이후 바르사에 자신이 원하는 축구를 덧입히는 작업을 했다. 크루이프는 이를 네덜란드식 축구라 불렀다. 오늘날 바르셀로나의 축구라 불리는 그것이다. 하지만 크루이프는 자신의 축구에 대해 한번도 바르셀로나식 축구라는 말을 한 적이 없고 언제나 네덜란드식 축구라 불렀다.

게다가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초기 2년간 라리가는 물론이고 각종 대회에서 결과도 신통치 않았고, 이에 카탈루냐 팬들의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88-89시즌에는 클럽 역사상 세 번째 위너스 컵 타이틀을 땄다. 만약 위너스 컵 우승에 실패했다면 누녜스는 이전에 자신이 갈아치운 숱한 명장들과 마찬가지로 크루이프도 경질할 참이었다. 이후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1989-90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으며, 1990-91시즌부터 1993-94시즌까지 4시즌 연속 프리메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외국인으로 구성된 드림팀이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1990-91시즌 카탈루냐 순혈 성골 펩 과르디올라를 1군으로 올려 카탈루냐인들의 불만을 해소시켰다. 또다른 카탈루냐 성골인 알베르트 페레르, 카를레스 부스케츠도 바르셀로나에서 데뷔하였고 미겔 앙헬 나달, 후안 카를로스, 난도, 훌리오 살리나스 등 국내 선수도 영입하여 드림팀에 합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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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마침내 들어 올린 유러피언 컵

그리고 최고의 시간을 보내던 바르셀로나는 마침내 1991-92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UC 삼프도리아를 상대로 연장 후반 7분에 그 유명한 쿠만의 시속 188km 프리킥 골이 터지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개편 직전 마지막 유러피언 컵 우승팀이 된 것이다. 1993-94시즌 브라질의 슈퍼스타 호마리우까지 영입하며 절정에 달해 엘 클라시코에서도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크루이프 감독과 라우드루프,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심각한 대립을 하면서 팀 케미가 박살나기 시작했다. 숱한 갈등과 논란 끝에 라우드루프가 벤치도 아닌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상황에서 진행된 1993-94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바르사는 AC 밀란에게 4:0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는데, 이는 현재까지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최다 점수 차 패배 경기로 남아있다.

직후 1994-95시즌부터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라우드루프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차례로 타 팀으로 이적하면서 '드림팀'은 와해되었다. 이렇게 스타플레이어들이 떠나자 크루이프와 바르셀로나도 함께 몰락했다. 1995-96시즌까지 두 시즌 동안 계속 실패를 거둔 크루이프 감독은 결국 누녜스 회장과 갈등 끝에 팀을 떠났다.
★ 우승 기록
라리가: 1990-91, 1991-92, 1992-93, 1993-94
코파 델 레이: 1989-90
유러피언 컵: 1991-92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1, 1992, 1994
위너스컵: 1988-89
코파 제네랄리타트: 1990-91, 1992-93

12. 호나우두, 피구 - 침체기 - 스타 군단의 재건 (1996 ~ 2008)

2시즌 동안의 부진 끝에 1996년 크루이프를 경질한 누녜스 회장은 후임으로 FC 포르투바비 롭슨을 새 감독으로 영입했고, 동시에 PSV 에인트호번에서 주가를 올리던 호나우두와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 CF루이스 엔리케를 영입했다. 이 시즌에는 이적생 호나우두가 영입되자마자 원맨쇼에 가까운 엄청난 활약을 펼치면서 덕분에 팀은 라 리가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에 승점 2점차로 뒤지면서 2위로 마쳤지만 대신 코파 델 레이-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위너스 컵에서 우승하며 미니 트레블을 달성했다. 1999년, 바르셀로나는 기나긴 시간 끝에 마침내 클럽 창단 100주년을 기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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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FC 바르셀로나 창단 100주년

반면 1997년에 누녜스 회장은 호나우두 원맨팀이 된 팀에 만족하지 않아 시즌 후 롭슨 감독을 총감독으로 추대시키고, 호나우두를 인테르로 내보냈다. 대신 AFC 아약스에서 주가를 올리던 루이 판할 감독을 선임했다. 판할 감독은 아약스 때 제자인 파트릭 클라위버르트프랑크 더부르, 필립 코퀴 등을 영입하고 또다른 브라질 스타 히바우두도 영입했으며, 루이스 피구와 루이스 엔리케의 기량도 더 끌어올렸다. 이에 따라 1997-98 및 1998-99 시즌 연속으로 프리메라리가를 제패했고, 1999-00 시즌에는 트레블 후보로도 거론됐으나 시즌 중반 들어 선수진과 감독 사이에 불화 등 온갖 문제가 터져 트레블은 물건너갔다.

결국 1999-00시즌 후 누녜스 회장과 판할 감독이 동시에 물러났고, 조안 가스파르트가 새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구단과 불화를 보이던 팀의 상징 루이스 피구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며 팬들의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팀의 에이스였던 피구마저 나가자 팀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2000년대 초반 동안 바르셀로나는 3년간 무관 상태에 머무는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결국 2002년에는 판할 감독을 다시 부르고, 후안 로만 리켈메를 영입했다. 하지만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그나마 사람 구실하던 히바우두는 악연인 판할이 오자 즉각 팀을 떠났다. 이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2002-03시즌에서 바르셀로나는 라리가에서 16위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고, 결국 시즌 도중 판할 감독이 경질되었고, 가스파르트 회장도 사임했다. 이후 라도미르 안티치가 땜빵으로 감독을 맡았고, 팀은 6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챔스 출전이 불발되었다.

하지만 이때 판할이 세대 교체를 시도하며 발굴한 차비 에르난데스카를레스 푸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빅토르 발데스 등 젊은 유망주들이 경험을 쌓기 시작하면서 훗날 바르셀로나의 황금기를 이끌게 된다.

2003년 조안 라포르타가 회장으로 선출되어 전 네덜란드 국대 감독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선임하였고, 파리 생제르맹 FC에서 활약하던 당대 최고의 브라질리언 스타 호나우지뉴를 영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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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호나우지뉴와의 계약

호나우지뉴 뿐만 아니라 사무엘 에투루도빅 지울리, 줄리아누 벨레티, 시우비뉴, 데쿠 같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을 영입했고, 2004-05시즌에는 아르헨티나의 샛별 리오넬 메시도 1군에 데뷔했다. 이에 힘 입어 2005-06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정상에 오르게 된다. 유러피언 컵에서 UEFA 챔피언스 리그로 개편된 뒤 처음으로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게 된다. UEFA 챔피언스 리그 뿐 아니라 모든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하며 메가 클럽으로 거듭나기 시작한다.

2006년에는 전 세계 축구 사상 처음으로 기업이 아닌 공익 기구, 유니세프와 계약을 맺게 된다. 일반적으로 돈을 받는 스폰서십이 아닌, 기부 형식으로 돈을 지불하는 스폰서쉽이라는 점에서 당시 바르셀로나 운영진은 카탈루냐마드리드 주 정부의 지역 감정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공로 훈장을 받게 된다. 이 스폰서쉽은 현재까지 계속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호나우지뉴의 바르사는 성공가도를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2005-06시즌 이후 레이카르트 감독의 선수단 장악력이 약해지고 호나우지뉴와 데쿠에게 검은 양 사건으로 대표되는 사생활 및 자기관리 실패 문제가 생기면서 팀은 침체기에 빠져 2시즌 간 무관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레이카르트 감독을 경질하고 펩 과르디올라를 새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또한 호나우지뉴와 데쿠를 이적시키면서 이제 팀의 중심은 메시에게 넘어가게 된다.
★ 우승 기록
라리가: 1997-98, 1998-99, 2004-05, 2005-06
코파 델 레이: 1996-97, 1997-98
UEFA 챔피언스 리그: 2005-06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6, 2005, 2006
위너스컵: 1996-97
UEFA 슈퍼컵: 1997
코파 카탈루냐: 1999-00, 2003-04, 2004-05

13. 최고의 황금기 (2008 ~ 2016)

13.1. 2008-09

2008년, 펩 과르디올라가 바르셀로나 1군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최전성기가 시작된다. FC 바르셀로나 B에서 승격된 감독인 만큼 라 마시아 데 칸 플라네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으며 카를레스 푸욜, 빅토르 발데스, 차비 에르난데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리오넬 메시, 세르지오 부스케츠, 제라르 피케가 팀의 주축이 되어 펩의 티키타카 전술을 수행하면서 스페인 팀 역사상 처음으로 트레블을 달성하게 된다.

이 시즌부터 메시가 신으로 거듭나게 되며 시즌 종료 이후 2009 발롱도르의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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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9 시즌, 전설의 시작

13.2. 2009-10

이전 시즌의 기세를 이어 받아 UEFA 슈퍼컵,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FIFA 클럽 월드컵에서 우승하며 전 세계 최초로 6관왕을 달성하게 된다.

UEFA 챔피언스 리그는 4강에서 인터 밀란에게 패했으나 2연속 라리가 우승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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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세계 최초 6관왕 달성

13.3. 2010-11

성적과 별개로 축구사 역사상 가장 강력한 팀으로 평가 받는 팀이 완성되었다.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2시즌 동안 티키타카 전술을 녹이려 끝 없이 노력했고 이 시즌이 되어서 클럽에 완벽히 녹아들며 그 어느 팀도 바르셀로나를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이 박힐 정도로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 코파 델 레이에서의 준우승을 제외하고 모든 대회에서 우승하며 완벽한 팀으로 거듭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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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 시즌, 무적

13.4. 2011-12

전 시즌의 기세를 쭉쭉 이어가며 UEFA 슈퍼컵,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FIFA 클럽 월드컵에서 나란히 우승을 차지하며 또 한번 역대급의 시즌을 쓸 것으로 예상했으나 지난 시즌의 임팩트가 너무 강렬했던 것인지 후반기로 갈수록 리그에서 점점 밀리는 모습을 보여주며 라 리가 2위,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 탈락으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다행히 코파 델 레이에서는 우승하였고 이 시즌 리오넬 메시는 다시 한번 미친 듯한 모습을 보여주며 60경기 73골 29도움을 기록하며 구단 공격 포인트 기록을 무수히 갈아치운다.

그리고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팀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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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 시즌, 메시로 시작하여 메시로 끝난 시즌

13.5. 2012-13

시즌 시작과 동시에 티토 빌라노바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기존의 티키타카 전술에서 역습 위주의 전술로 탈 바꿈 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많은 팬들이 걱정했지만 2007년부터 꾸준히 바르셀로나에 몸 담았던 티토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신뢰를 보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전술의 변화 때문이었는지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당시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합산 스코어 0:7이라는 충격적인 스코어로 탈락하게 된다. 다행히 라리가에서는 승점 100점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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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3 시즌, 승점 100점 달성으로 프리메라리가 우승

13.6. 2013-14

지난 시즌 다른 대회에서의 성적은 아쉬웠지만 라리가에서 승점 100점을 달성했던 티토 빌라노바였기에 다시 한번 기대를 품고 시즌을 시작하려던 찰나 감작스런 건강 악화로 감독직에서 사임하고 만다. 급하게 헤라르도 마르티노 감독을 선임하게 되고 프리 시즌에 결국 티토는 사망하고 만다. 티토의 사망과 2년 동안 2번의 감독 교체로 인해 바르셀로나는 크게 흔들리게 된다. 산투스 FC에서 새로운 스타 네이마르 주니오르를 영입하지만 팀에 제대로 녹아들지는 못하면서 팀은 점점 무너져 간다.

결국 전 시즌의 성적과 연결되는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를 제외한 모든 정규 시즌 대회에서 단 한 개의 트로피도 따내지 못하면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팀의 원 클럽 맨인 카를레스 푸욜 역시 이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며 팀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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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4 시즌, 네이마르의 등장

13.7. 2014-15

지난 시즌 성적으로 헤라르도 마르티노 감독이 사임하고 루이스 엔리케가 바르셀로나로 부임하게 된다. 지난 시즌 프리미어 리그 리버풀 FC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루이스 수아레스를 데려오며 전설의 MSN 라인업이 구성된다. 세비야 FC에서도 이반 라키티치를 데려오며 차비 에르난데스를 대체하였고 팀을 떠나려 했던 차비는 엔리케 감독과 나머지 3명의 주장단,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리오넬 메시, 세르지오 부스케츠의 설득 덕에 한 시즌 더 팀에 남게 되었다. 이전 시즌, 주장이었던 카를레스 푸욜이 팀을 떠나면서 함께 팀을 떠나려 했던 차비였지만 팀의 주장과 부주장이 한 번에 떠나면 힘들겠다는 생각에 잔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새로 들어온 선수들과 베테랑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티키타카와 역습 전술 사이를 뜻하는 티키웨카를 완벽히 수행해내며 세계 최초로 2번째 트레블을 달성하게 된다. 시즌 시작 전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준우승을 거두며 정신적으로 크게 무너졌던 메시 역시 우상 파블로 아이마르의 응원 덕에 정신을 다잡고 최고의 시즌을 보내면서 팀에 매우 큰 공헌을 한다.

이 시즌 종료 이후 차비는 17년 간 몸 담았던 클럽을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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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5 시즌, 세계 최초 두 번째 트레블

13.8. 2015-16

2008-09시즌 이후 2번째 6관왕을 향해 달렸지만, 아틀레틱 클루브와의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결승전 1차전 원정에서 4:0 패배, 2차전 홈에서 1:1 무승부를 하면서 아쉽게 5관왕을 달성하였다.

차비 에르난데스가 떠나면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리오넬 메시, 세르지오 부스케츠가 각각 주장, 부주장, 3주장으로 올라섰고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선수단 투표로 4주장에 뽑히며 새롭게 주장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발목을 잡혀 8강에서 탈락했지만 라리가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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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6 시즌, 두 번째 5관왕 달성

13.9. 우승 기록

라리가: 2008-09, 2009-10, 2010-11, 2012-13, 2014-15, 2015-16
코파 델 레이: 2008-09, 2011-12, 2014-15, 2015-16
UEFA 챔피언스 리그: 2008-09, 2010-11, 2014-15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9, 2010, 2011, 2013
UEFA 슈퍼컵: 2009, 2011, 2015
FIFA 클럽 월드컵: 2009, 2011, 2015
코파 카탈루냐: 2012-13, 2013-14
수페르코파 데 카탈루냐: 2014-15

14. 침체기 (2016 ~ 2021)

세 얼간이의 노쇠화로 메시 의존도가 높아지고 점유율 축구가 저무는 시대였다. 이 시기가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악의 회장인 주제프 마리아 바르토메우 집권기였다.

14.1. 20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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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20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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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20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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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의 원맨캐리가 돋보였던 시즌.

14.4. 20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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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악재속에 무관에 그치고,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바이에른 뮌헨에게 2대8 대패를 당하면서 화룡점정을 찍게 되었다.

14.5. 20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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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기가 예상됐으나 예상 외로 첫 단추를 잘 맞춘 시즌. 그러나 뒷심이 부족하여 각종 안좋은 기록들을 새로 갈아치웠던 시즌이기도 했다

14.6. 수상 기록

15. 포스트 리오넬 메시 시대 (2021~2022)

바르셀로나를 괴롭혀오던 방만한 경영으로 인한 재정 문제와 뿌리깊은 보드진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결국 바르셀로나는 자신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리오넬 메시를 잃게 되었다. 원래부터 바르셀로나가 슬슬 리오넬 메시 은퇴 뒤에 팀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 많기는 했으나 아직은 남아줘야 할 시점,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리오넬 메시와의 계약이 종결되며 바르셀로나는 의도치 않게 포스트 리오넬 메시 시대를 앞당겨서 시작하게 되었다.

더 이상 플레이메이킹과 스코어링 양쪽 모두 월드클래스인 선수가 사라지고 재정난으로 그런 선수를 영입할 수 조차 없는 신세가 된 바르셀로나는 역으로 유동적인 스쿼드를 운용하며 몇몇 공격수와 미드필더 라인을 제외하곤 명확한 베스트 11이 없는 벤치가 두터운 방식으로 팀을 리빌딩하며 이전과는 다르게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이 팀에 있게 되었고[5] 이와는 반대로 차비 감독을 중심으로 패스 중심의 바르셀로나 철학을 강조하는 전략을 추구하며 팀의 색깔 또한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와는 별개로 한계는 명확했고, 21/22 첫 시즌부터 감독 경질, 불과 2년만의 또다시 무관, 충격의 18년만의 유로파행 그것도 2시즌 연속으로, 캄 노우에서만큼은 최강이라 자부했지만 그마저도 홈에서 3연패하며 유로파마저 탈락. 새로 바뀐 차비 감독마저도 부임 후 50경기 최악의 성적이라는 결과로 여전히 하락세를 막아내기는 버거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15.1. 20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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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2시즌 초반부터 불안한 공격 라인이 지적되었다. 새로 영입된 멤피스 데파이루크 더용은 썩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심지어 아구에로는 부상에서 복귀하자마자 엘클라시코 한 골만 넣고 심장 이상으로 은퇴, 쿠티뉴는 계속해서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리즈만은 사실상 완전이적이나 다름없는 꼬마 임대를 떠난 상태였고 팀의 상징인 10번을 이어받은 틈만 나면 안수 파티는 부상으로 뎀벨레와 함께 병원에서 누워있어 이정도면 미드필더를 공격수로 활용해야 하는게 낫지 않냐는 농담이 실제 경기에서 종종 일어나기도 할 정도였다.

이런 팀 상황에 누구라도 제대로 된 성적을 낼 리가 없었고 결국 라리가에서는 무려 9위로까지 추락하며 쿠만 감독을 경질, 바르셀러나의 레전드이자 카타르 알 사드에서 감독 경력을 쌓은 사비 감독을 새로 부임시키지만 사비 감독도 이미 괴멸된 스쿼드로는 손을 쓰지 못하고 속절없이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2경기 모두와 심지어는 벤피카에게도 3:0 참패를 당하며 조 3위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로써 바르셀로나는 03/04시즌 이후 18시즌만에 유로파리그에서 뛰게 되는 불명예를 안게 되며 바르셀로나의 추락을 보여준다.

다만 사비감독 부임 이후 나름대로 성공적인 겨울 이적시장을 보내며 많은 공격을 보충하고, 팀의 레전드 다니 알베스를 재영입하며 이전의 하락세에 비하면 조금이나마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비 감독은 점유율 축구를 시도하고, 스페인 국적, 라 마시아 선수들 위주로 선발 라인업을 짜고 영입을 하는, 기존 바르샤 철학에 기반을 둔 확실한 리빌딩 방향을 보였다. 이것이 나쁘지 않은 모습을 보여 팀 들의 성장한 몇년 뒤 바르샤를 기대 할 수 있는 모습을 보였다.

쿠만 감독과 시즌 초반 리그에서의 무기력한 모습,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탈락, 팀 그 자체였던 리오넬 메시의 이탈로 인하여 암흑기가 길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였지만 차비 감독의 합류 이후 페드리, 파블로 가비, 안수 파티 등등의 어린 선수들의 엄청난 성장과 더불어 겨울 이적시장에서 페란 토레스, 오바메양 등 좋은 영입을 하면서 세대교체도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있고 팀 스쿼드의 평균 연령이 엄청 낮아짐과 동시에 2022년 들어서는 성적도 잡아냈다. 그러나 유로파 리그에서 프랑크푸르트에게 탈락하였으며, 결정적으로 홈팬들의 외면으로 원정팬인 프랑크푸르트 팬들이 홈 구장을 점거한 초유의 사태가 터지면서 감독 교체 이후의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최종 성적은 리그 2위를 차지하면서 시즌 초에 다음 시즌 챔스권에 들 수 있을까를 염려하던 것에 비해서는 선전한 셈이 되었지만 챔스 조별탈락, 코파 델 레이 16강 탈락, 유로파리그 8강 탈락으로 무관으로 끝났고 후반기에는 뒷심 부족으로 인한 홈구장 3연패 등 많은 불명예를 남긴 시즌이었다.

사비 감독이 부임하면서 이전 바르셀로나 최전성기를 꿈꾸게하였으나 구단 내부의 문제는 여전하고 팀의 재정 상태 역시 여전히 열악하기에, 최근 FC바르셀로나의 최대 단점으로 지목되고 있는 운영진과 재정 상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다음 시즌 암흑기 탈출을 위한 최대 과제가 될 것이다.

15.2. 2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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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이적시장부터 여러모로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선 팀내 여러 선수들의 주급 삭감을 통해 재정 상태를 개선시키고 다니 알베스와의 작별을 선언하였다. 팀내 여러 잉여자원을 처분하더니 ac밀란의 미드필더 프랑크 케시에와 두명의 센터백, 리즈 유나이티드의 하피냐, 거기에 무려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현존 최강의 스트라이커이라 불리는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를 영입하며 이들을 앞세워 프리시즌 LA투어 엘클라시코를 1:0승리로 이끄는 결과를 내는 등 꾸레들의 기대감을 높이기에 충분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러고서는 확고한 잔류의지를 보이는 팀의 에이스 프랭키 더용을 강제로 이적시키려고 하고 돈이 없어 선수 등록에 문제가 생기자 향후 무려 25년간의 TV중계권료 25%를 매각하여 자금을 충족해냈다. 이정도면 거의 우승을 두고 도박을 하는게 아닌가 싶은 수준의 결정인데 이번 시즌도 무관으로 끝난다면 바르셀로나가 어디까지 추락할지는 미지수가 되어버린다.

결국 인테르바이에른 뮌헨에 밀려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수모를 겪고 유로파 리그로 강등 당하게 되며 우려는 점점 현실로 되어 가고 있다.

하지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결승전에서 레알마드리드를 3대 1이라는 스코어로 멋지게 꺾고 1년 넘게 이어진 무관의 늪을 벗어나면서 적어도 숨은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남은 것은 이제 리그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느냐가 관건이다.

시즌 초반에는 1R부터 바예카노에게 홈에서 무승부, 챔스에서는 패망의 길을 걸으며 우려를 멈출 수 없었지만 시즌 절반이 지난 지금, 리그에서는 엘 클라시코를 제외하고는 1패도 주지 않았고, 무승부도 단 2경기, 심지어는 테어슈테겐과 폭풍영입을 강행한 의 활약으로 16경기 6실점 13클린시트의 철벽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메시가 빠진 공격진은 여전히 아쉬운 것이 레반도프스키가 아무리 잘 한다 한들 결국 최전방 스트라이커이기 때문에 팀이 부진하면 결과를 만들어내기 힘들다는 점과 그마저도 레반도프스키가 출장하지 않는 날에는 결정력이 심하게 떨어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테겐을 비롯한 수비진의 맹활약으로 매경기마다 꾸역승을 챙겨가면서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유로파 리그에서도 16강 PO에서 맨유에게 탈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리가에서는 꾸준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편 이번 시즌이 끝나고 팀의 레전드인 부스케츠와 알바가 떠나는것이 확정되었다.

전반적으로 다음 세대 미드진, 수비진을 확실히 구축했지만 레반도프스키를 제외하면 여전히 부실한 공격진과 플랜 B의 부실함으로 인해 로테이션 없이 해당 미드, 수비진의 반복적인 혹사로 줄부상에 시달리자 벤치로는 괜찮던 선수들이 주전으로 나와 똥을 싸기 시작하였으며 부상을 당하지 않은 주전들도 서서히 후반기 기량이 떨어져 리그 10실점의 벽이 깨졌고, 이후로도 리그에서 부진하여 레알이 챔스가 아닌 리그에 좀 더 집중했더라면 리그 우승팀이 바뀔 수도 있었을 정도로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15.3. 20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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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와 자유 계약을 통해 적은 돈으로 일카이 귄도안, 비토르 호키, 주앙 펠릭스, 주앙 칸셀루 등 큰 이적을 대거 성사시켰고, 두 과 귄도안은 곧바로 mvp급 활약을 연이어 펼치고 있으며 적은 이적료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오리올 로메우 또한 상당한 활약을 보이며 이번 여름 이적 시장이 꽤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것을 기대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과감하게 잉여 선수 및 벤치 자원들을 방출하고, 임대를 보내며 팀을 재편성하였는데, 이 결과로 부스케츠, 알바, 케시에 등의 굵직한 선수들부터, 안수 파티, 움티티, 에릭 가르시아, 뎀벨레, 데스트, 랑글레 등 진작 명단에서 제외했어야 하는 선수들을 내보내는데 성공했다.

챔피언스 리그 조추첨에서도 바로 앞 G조와 다르게 꿀편성을 받으며 여유로운 16강행이 예상되었으나, 샤흐타르, 앤트워프에게 패배하며 아슬아슬하게 조 1위를 따내고, 스페인 내에서도 부진한 성적으로 코파 델 레이, 수페르코파에서 모두 탈락, 리그도 우승권에서 멀어지며 차비 감독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점점 커져갔다. 특히 매경기 아슬아슬하다가 결국 1골차로 이기던 전 시즌 모습과 달리 이번 시즌은 전반전에 리드를 내주고 후반에 역전으로 경기를 다시 가져오는 등의 경기 양상이 종종 나오기도 하였다.

결국 차비 감독이 재계약하지 않고 시즌 종료 후 팀을 떠난다는 소식이 났고, 이후 이상하게도 팀의 성적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폴리를 상대로 승리하며 4년만에 챔스 8강에 올랐고, 원정을 떠나 파리를 잡아내며 어느덧 5년만의 챔피언스 리그 4강을 바라보게 되었다.

하지만 캄 노우에서 치뤄진 파리와 2차전에서 아라우호의 이른 퇴장과 더불어 홈에서 스스로 무너지며 4대1 대패를 기록하며 어렵게 찾아 온 4강 기회를 날리게 되었다

16. 참고/관련 자료



[1]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나라의 조기 축구회 같은 개념으로 창단했다고 생각하면 된다.[2] 지금으로 생각하면 의미는 다르지만 임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3] 현재는 소규모 증축을 통해 99,354명을 수용할 수 있고 여전히 세계 최대 축구 전용 구장 타이틀을 갖고 있다.[4] 라 리가 우승팀 자격으로 다음 1985-86시즌, 25시즌만에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사연뻥을 시전하면서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다.[5] 이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 팀의 세트피스 및 헤딩골 득점이 상당히 증가하였다. 이전까지는 '바르셀로나'하면 차비, 메시, 이니에스타 등 주전 선수들의 키가 작은 팀이라는 인상이 많았지만 현재는 아라우호, 뤽 더용과 같이 피지컬이 되는 선수들을 많이 영입, 기용하는 추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