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2. 설립, 그리고 생존 (1899 ~ 1909)3.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에서의 합병 (1909 ~ 1919)4. 황금 세대 (1919 ~ 1930)5. 고통의 시기 (1930 ~ 1939)6. 인내의 시간 (1939 ~ 1950)7. 쿠발라의 시대 (1950 ~ 1961)8. 최악의 암흑기 (1961 ~ 1970)9. 요한 크루이프의 시대 (1971 ~ 1978)10. 스타플레이어 영입과 이어지는 암흑기 (1978 ~ 1988)11. 크루이프의 드림팀과 첫 번째 유러피언 컵 (1988 ~ 1996)
11.1. 1988-89 시즌11.2. 1989-90 시즌11.3. 1990-91 시즌11.4. 1991-92 시즌11.5. 1992-93 시즌11.6. 1993-94 시즌11.7. 1994-95 시즌11.8. 1995-96 시즌
12. 잠시 동안의 성공, 암흑기 (1996 ~ 2003)12.1. 1996-97 시즌12.2. 1997-98 시즌12.3. 1998-99 시즌12.4. 1999-00 시즌12.5. 2000-01 시즌12.6. 2001-02 시즌12.7. 2002-03 시즌
13. 호나우지뉴, 두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 (2003 ~ 2008)14. 펩 과르디올라와 최고의 황금기 (2008 ~ 2021)15. 계속해서 유럽 정상에 도전하다 (2012 ~ 2021)15.1. 2012-1315.2. 2013-1415.3. 2014-1515.4. 2015-1615.5. 2016-1715.6. 2017-1815.7. 2018-1915.8. 2019-2015.9. 2020-21
16. 포스트 리오넬 메시 시대 (2021 ~)17. 참고/관련 자료[clearfix]
1. 개요
클럽 창설 년도인 1899년부터 현 시대까지의 FC 바르셀로나 역사를 정리하는 문서이다. 주요 내용은 바르셀로나 공식 홈페이지와 후술할 축구 전문서적들을 참조하였다.2. 설립, 그리고 생존 (1899 ~ 1909)
1899년 10월 22일,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점점 널리 퍼지는 축구의 인기에 힘입어 스위스인 주안 감페르를 주축으로 <로스 데 포르테스> 신문에 창단 광고를 실어 클럽의 탄생을 알렸다. 11월 29일 솔레 힘나시오에서 스위스인 오토 쿤슬, 욀터 윌드, 잉글랜드인 윌리엄 파손스, 독일인 오토 마이어, 카탈루냐인 루이스 드 오소, 바르토메우 테라다스, 에흐리크 두칼, 페레 카보트, 카를레스 푸졸, 주제프 요베트과 조안 감페르를 포함하여 11명이 회의를 진행하였고 만장일치로 팀 명을 Futbol Club Barcelona로 정하기로 했다. 창단 당시에는 초대 회장직에 영국인 월터 와일드를 선임했으며, 프로 축구단이 아닌 취미 축구단으로 창단 되었다.[1] 창단 이후 1년 동안 보나노바 종합 운동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했다.1899 ~ 1900, 보나노바 종합 운동장 |
1900년, 카탈루냐 최초의 축구 대회인 1900-01 코파 마카야가 개최되면서 바르셀로나 역시 대회에 참가하였다. 총 6개 팀이 참가하여 리그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었지만 SD 산타하흐가 기권을 선언하면서 5개 팀의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승리 시 2점, 무승부 시 1점, 패배 시 0점의 승점 방식을 적용하여 6승 1무 1패 승점 13점을 달성하며 히스파니아 AC에 이어 2위로 대회를 마감하였다. 이 대회에서 조안 감페르가 31 득점을 기록하며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다음 시즌인 1901-02 시즌에는 6개 팀의 리그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바르셀로나가 우승을 차지하며 역사상 첫 트로피를 차지하였다. 1902-03 시즌에는 클루브 에스파뇰에 이어 준우승을 차지했고 바르셀로나 주 컵 대회인 코파 바르셀로나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첫 컵 트로피를 차지하였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코파 마카야는 폐지되었다.
1903-04 시즌부터는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가 새로 개최되었고 1904-05, 1908-09, 1909-10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였다.
1909-10,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우승 |
★ 우승 기록 |
코파 바르셀로나: 1902-03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 1904-05, 1908-09, 1909-10
3.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에서의 합병 (1909 ~ 1919)
1908년, 클럽 구성원은 38명에 불과했고 이에 대해 조안 감페르는 클럽을 더 크게 만들고 싶었다. 나머지 구성원의 동의를 받아 초대 회장으로 등극하였고 지난 10년 사이에 4번의 홈 구장 변화가 있었던 만큼 제대로 된 홈 구장의 필요성을 느끼면서 1909년 4월,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를 공식 홈 구장으로 선정했다. 감페르 회장은 1925년까지 총 5번 회장을 역임하며 팀의 기틀을 잡아 성장에 기여했다.1909년 4월, 캄프 데 라 인두스트리아 |
1910년, 제대로 된 축구단으로서의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클럽 엠블럼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 하에 새로운 엠블럼이 만들어졌다. 이후 이 엠블럼은 현재까지 사용되는 엠블럼의 배경이 되었다.
Futbol Club Barcelona 첫 엠블럼 |
드디어 제대로 된 홈 구장이 생기고 난 뒤 현재는 코파 델 레이에 참가하여 1909-10, 1911-12, 1912-13에 우승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1910년부터 처음으로 국제 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했는데 카탈루냐, 바스크, 그리고 남부 프랑스 팀들이 참가한 피렌스 컵에 참가하여 1910, 1911, 1912, 1913까지 네 시즌 연속 우승을 차지하였다. 기존에 참가하던 카탈루냐 리그인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에서도 10년 사이 5번의 우승을 차지하였다.
이렇게 클럽이 부상할 수 있던 이유는 바르셀로나 최초의 슈퍼 스타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1군 아시아 출신 선수, 파울리노 알칸타라의 맹활약이 있었다. 1911-12 시즌부터 고작 만 15세의 나이로 바르셀로나로 합류하여 최고의 활약을 보여주었고 1915-16 시즌까지 총 4시즌을 소화하고 보헤미안 SC로 이적하였다.
바르셀로나의 좋은 성적과 알칸타라의 등장으로 클럽의 인기는 점점 올라갔고 클럽에 대한 바르셀로나 시민들의 지지도 끝을 모르고 올라가면서 이 덕에 금전적인 도움 역시 받을 수 있었다. 홈 구장에 점점 많은 팬들이 몰리자 자리가 부족해졌고 그럼에도 경기를 놓치기 싫었던 팬들이 지붕과 담벼락에 걸터앉기 시작하면서 이때부터 엉덩이를 뜻하는 '꾸레'라는 단어가 바르셀로나 팬을 지칭하는 별명이 되었다.
★ 우승 기록 |
코파 델 레이: 1909-10, 1911-12, 1912-13
피렌스 컵: 1910, 1911, 1912, 1913
4. 황금 세대 (1919 ~ 1930)
1920년대부터 축구 자체의 인기와 규모 역시 날이 갈수록 커지면서 좋은 활약을 보이던 바르셀로나는 파울리노 알칸타라, 주젭 사미티에르, 리카르도 사모라와 스타 선수들의 등장에 힘 입어 더 큰 클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덕분에 1922년, 드디어 바르셀로나 자체 소유의 홈 구장 캄프 데 레스 코르트로 홈 구장을 이전하게 되었다. 22,000명의 정원을 목적으로 건축되었고 전체 입석으로 입장할 시 60,0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1922년, 새 홈 구장 캄프 데 레스 코르트 |
1924년 12월 7일과 8일, 클럽 창단 25주년을 기념하여 레알 우니온 데 이룬과 이틀 연속 기념 경기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이 날을 기점으로 11명으로 시작했던 클럽 구성원은 25년 만에 12,207명으로 늘었다.
1928년 코파 델 레이 결승까지 진출하였고 연장전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당시였기에 무려 2차례나 무승부 경기를 치르고 마지막에 치러진 3번째 경기에서 3대1로 승리하였다. 이 경기는 바르셀로나 경기 중 최초로 라디오로 라이브 중계가 된 경기로 남았다.
그리고 1929년 2월 12일, 라리가가 창설되어 코파 델 레이 우승 클럽 자격으로 대회에 참여하였다. 4달 반 동안 대회가 진행되었고 승점 25점으로 라리가 최초의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1929년, 사상 첫 엘 클라시코 |
★ 우승 기록 |
코파 델 레이: 1921-22, 1924-25, 1925-26, 1927-28
라리가: 1929
5. 고통의 시기 (1930 ~ 1939)
1930년 7월 30일, 클럽 설립자이자 초대 회장이었던 조안 감페르가 개인적인 문제로 안 좋은 선택을 하면서 향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주제프 수뇰이 제 2대 회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1930년, 조안 감페르의 사망 |
1936년,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였고 과달라마 근처 전선 지역에 잘못 들어간 주제프 수뇰이 체포되었다가 프랑코 군에게 총살 당했다. 고작 6년 사이에 2명의 회장을 잃게 된 바르셀로나의 운영진은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카탈루냐어 사용 자체가 금지되며 Futbol Club Barcelona라는 팀 명을 버리고 Club de Fútbol Barcelona라는 명칭으로 이름이 바뀐다.
이런 와중에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스페인이 갈리게 되면서 스페인의 전 지역 클럽들이 참여하는 라리가를 진행할 수 없게 되자 1936-37 시즌, 6개의 카탈루냐 클럽과 4개의 발렌시아 클럽이 참가한 지중해 리그가 개최되었고 14경기 7승 6무 1패 승점 20점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내전으로 인해 코파 델 레이도 진행할 수 없게 되자 카탈루냐 지역 팀들만 참여하는 리가 카탈라나가 개최되었고 이 대회에서도 17경기 14승 1무 2패 승점 29점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기존에 참가하던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에서도 최강자 다운 모습을 보여주며 또 10년 사이에 5번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1939-40 시즌을 끝으로 캄피오나트 데 카탈루냐는 폐지된다.
하지만 내전으로 인해 대회의 규모 역시 매우 작아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클럽의 경제적 부분에 타격이 오게 되자 선수들을 아메리카 투어라는 명분으로 아메리카 대륙 클럽들로 보냈다.[2] 여기서 벌어 들인 돈은 이후 클럽 재건에 큰 도움이 된다.
★ 우승 기록 |
지중해 리그: 1937
리가 카탈라나: 1937-38
6. 인내의 시간 (1939 ~ 1950)
스페인 내전 종식 이후 바르셀로나는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스포츠 적인 부분에서 모두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하지만 다행히 1939년 6월 29일, 캄프 데 레스 코르트의 재개장이 허가되었고 이와 동시에 세사르 로드리게스가 바르셀로나에 나타났다. 이후 바르셀로나에서 1955년까지 뛰면서 456경기 304골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1939년, 캄프 데 레스 코르트 재개장 |
하지만 빼앗긴 팀 명으로 인해 로고에 적힌 FCB를 사용하지 못하고 CFB로 바뀌게 된다.
1941년, 빼앗긴 이름과 바뀐 로고 |
재개된 코파 델 레이에서 1941-42 시즌 우승을 차지한다.
그리고 1944년, 주젭 사미티에르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돌아온다. 복귀와 동시에 1944-45 시즌, 17년만에 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되찾아 온다.
1947년 사미티에르가 감독직을 내려놓고 엔리크 페르난데스가 부임하게 되고 1947-48 시즌, 라리가 우승을 차지한다. 1948-49 시즌에는 라리가에서도 우승하고 FIFA의 인증을 받은 유럽 클럽 대항전 라틴 컵에서 스포르팅 CP를 꺾으며 대회 초대 우승팀 타이틀을 얻게 된다.
1949년, 라틴 컵 |
★ 우승 기록 |
코파 델 레이: 1941-42
라틴 컵: 1948-49
코파 에바 두아르테: 1948-49
7. 쿠발라의 시대 (1950 ~ 1961)
1947년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난 주젭 사미티에르가 테크니컬 디렉터로 보직을 바꾼 뒤 1951년, 바르셀로나의 역사를 뒤흔들 스타 플레이어, 라슬로 쿠발라를 바르셀로나로 데려온다. 이후 바르사는 3년 동안 코파 델 레이 3연속 우승, 라리가 2연속 우승, 코파 에바 두아르테 2연속 우승을 거두며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된다.그리고 1954년, CD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꾸준히 몸값을 높이고 있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전 소속팀인 CA 리버 플레이트와 디 스테파노의 이적에 대해 합의를 하면서 많은 기대를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선수 개인 합의 직전, 레알 마드리드 CF가 끼어들어 디 스테파노를 하이 재킹 하는 바람에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로 향하게 되었고 쿠발라의 바르셀로나 vs 디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의 라이벌 의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디 스테파노를 빼앗겼기에 그를 대체할 선수로 루이스 수아레스를 영입한다.
이와 동시에 1955년, 점점 커지는 클럽의 위상에 걸맞게 새로운 홈 구장이 필요하다는 많은 클럽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나왔고 운영진들도 이를 받아들여 새로운 홈 구장을 디자인하기 시작한다.
1955년, 새로운 홈 구장 모델링 |
그리고 1957년 9월 24일, 2년 간의 건설 끝에 새로운 홈 구장 캄 노우가 개장한다. 당시 최대 수용 인원은 99,053명으로 전 세계 최대의 축구 전용 구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다.[3]
1957년 9월 24일, 캄 노우 개장 |
새로운 홈 구장과 함께 바르셀로나는 승승장구 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UEFA 유로파 리그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는 인터-시티 페어스컵에서 1957-58, 1959-60 시즌에 우승을 차지하게 되고 라리가에서도 1958-59, 1959-60 시즌에 2연속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1960년, 루이스 수아레스가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최초로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된다.
★ 우승 기록 |
코파 델 레이: 1950-51, 1951-52, 1952-53, 1956-57, 1958-59
라틴 컵: 1951-52
코파 에바 두아르테: 1951-52, 1952-53
인터-시티 페어스컵: 1957-58, 1959-60
8. 최악의 암흑기 (1961 ~ 1970)
1960-61 시즌 유러피언 컵 준우승 이후 바르사는 30년에 걸친 최악의 암흑기를 겪었다. 처음에는 일시적인 것처럼 보였던 이 암흑기는 해가 지나가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이 되었다. 바르셀로나는 60년대 동안 라리가 우승을 단 한차례도 차지하지 못했으며, 1989-90시즌까지 30시즌 동안 라리가 우승이 단 두 차례(1973-74, 1984-85)에 불과했다.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쟁은 커녕 라리가에서도 중상위권의 평범한 팀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1960-61 시즌, 유러피언 컵 결승전 CF 바르셀로나 vs SL 벤피카 |
1960-61시즌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유러피언컵 결승전에 진출하였지만 SL 벤피카에게 3:2로 패하면서 우승을 놓쳤고, 이후 끝없는 몰락으로 빠져들었다. 방만하게 팀을 운영했던 구단은 재정난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캄 노우 건설에 재정을 쏟아부은 댓가가 컸다. 이후 라슬로 쿠발라를 비롯한 주축 선수들이 차례로 팀을 떠나게 되었고 팀의 성적도 추락했다. 계속해서 선수들이 팀을 떠났지만 재정난의 여파로 좋은 선수들을 충원하지 못했고, 바르셀로나 유스에서 성장한 선수들은 기대에 한참 못미쳤다.
60년대에는 레알 마드리드 역시 당시 프랑코 정권의 압력으로 예예 정책을 실시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유러피언컵에서 몰락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바르셀로나의 몰락은 레알 마드리드와 비교될 처지조차 못되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암흑기라 불리던 60년대 중반 ~ 70년대 중반에도 라리가 우승을 밥먹듯이 했다.
다만 이런 최악의 암흑기 속에서 코파 델 레이에서는 두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완전히 죽지 않은 모습을 과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코파 델 레이에 외국인 선수 출전 금지 덕분이었다. 때문에 50년대에도 바르셀로나는 라리가보다 코파 델 레이에서 더 많은 우승을 차지했다. 물론 레알 마드리드도 60년대 중반 예예 정책으로 외국인 선수가 대폭 줄긴 했다. 오히려 70년대 이후 바르셀로나가 외국인 스타 수집에 열을 올렸고 코파 델 레이 규정도 차차 변화되었다.
1960년대에 카탈루냐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바르셀로나를 응원하는 팬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기술 역시 점점 발전하면서 바르셀로나의 경기가 TV로 중계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1968년, 회장 나르시스 데 카레라스가 처음으로 Mes que un club, 클럽 그 이상이라는 문장을 처음으로 사용하면서 이후 클럽의 모토로 사용된다.
★ 우승 기록 |
인터 시티 페어스 컵: 1965-66
9. 요한 크루이프의 시대 (1971 ~ 1978)
끝없는 암흑기와 함께 팀의 몰락이 계속될 것이라고 예상되던 1971년, '토탈 풋볼'의 창시자 리누스 미헬스 AFC 아약스 감독을 선임하고 1973년 8월 13일, AFC 아약스의 스타이자 네덜란드 최고의 스타를 최대 이적료로 영입했고 곧바로 바르셀로나의 주장으로 선임되었다. 이리하여 감독 리누스 미헬스, 주장 요한 크루이프 구조로 팀을 벼랑 끝에서 끌어 올라오기 시작하며 1973-74시즌 라리가 타이틀도 다시 되찾아 오게 되었고, 크루이프는 1974년 발롱도르를 거머쥐게 되었다. 다음 시즌에는 네덜란드 동료인 요한 네스켄스도 영입되었다.1973년, 요한 크루이프의 합류 |
1974년, 바르셀로나는 창단 75주년을 맞이하여 공식 응원가를 처음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자우마 피카스, 주제프 마리아 에스피나스 작사에 마누엘 발스와 코랄 산트 조르디 작곡으로 Cant del Barça를 만들었다.
1974년, Cant del Barça의 탄생 |
그리고 스페인 정부가 민주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모든 지방의 언어 사용이 자유화 되면서 Club de Fútbol Barcelona에서 다시 원 이름인 Futbol Club Barcelona를 되찾았고 로고 역시 CFB에서 FCB로 바뀔 수 있게 되었다.
1974년 되찾은 Futbol Club Barcelona |
크루이프와 함께 무려 15년만에 라리가 우승을 일구어냈지만 그렇다고 바르사의 암흑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세대 교체기였던 레알 마드리드가 다시 진용을 정비하였으며, 다른 라리가 팀들도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에서 서독이 크루이프를 완전히 봉쇄한 것을 보고 크루이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하면서 크루이프는 첫 시즌 만큼의 빛나는 활약을 보이지는 못하게 되었다. 결국 1973-74 우승 이후 바르셀로나는 또다시 침체기에 빠져들었고, 바르사가 또다시 라리가 정상에 오른 것은 11년이 지난 1984-85 시즌이었다.
★ 우승 기록 |
코파 델 레이: 1970-71, 1977-78
10. 스타플레이어 영입과 이어지는 암흑기 (1978 ~ 1988)
1978년에 직선제로 다시 치러진 회장 선거에서 주젭 유이스 누녜스가 당선된 후 재정이 넉넉해졌고, 1979년에는 위너스 컵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하였다.1979년, 위너스컵 우승 |
1982년, 캄 노우에 입성한 디에고 마라도나 |
이때부터 누녜스는 스타 플레이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1982년 여름 이적시장에 80년대 최고의 축구 스타, 디에고 마라도나를 영입했다. 이어 게리 리네커, 베른트 슈스터, 안도니 수비사레타 같은 슈퍼스타들을 돈을 뿌려가며 영입했다. 뿐만 아니라 누녜스는 명장을 영입하는데도 돈을 아끼지 않으며 우도 라텍,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 테리 베너블스, 루이스 아라고네스 등 명장들을 연이어 영입했으나 성과가 나오지 않자 조기 경질을 거듭하는 조바심을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천문학적인 돈을 뿌린 것에 비하면 바르사가 거둔 성과는 보잘 것 없었다. 1982년부터 처음 생기게 된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의 1983년 시즌에 코파 델 레이 우승팀 자격으로 참가하여 대회 2번째 우승자 타이틀을 거머쥔 것과 1984-85시즌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차지한 정도가 성과였다.
라 리가 우승팀 자격으로 다음 1985-86시즌, 25시즌만에 유로피언 컵 결승전에 진출했으나 CSA 스테아우아 부쿠레슈티를 상대로 승부차기 끝에 사연뻥을 시전하면서 우승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1984-85시즌 라 리가 우승은 크루이프 시절인 1973-74시즌 이후 11년만의 우승이자, 돈지랄한 것이 드디어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는 희망을 팬들에게 안겨주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이후에도 바르사의 암흑기는 1989-90시즌까지 계속되었다.
바르사는 세대 교체 후 또다시 전성기에 오른 레알 마드리드의 독주를 속절없이 바라만 봐야만 했다. 바르사가 천문학적인 돈을 써가며 스타플레이어들과 명감독들을 쇼핑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것과 달리 레알 마드리드는 유스 출신을 포함하여 자국 출신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세대 교체에 성공한데다가 슈틸리케처럼 화려한 스타플레이어는 아니지만 가성비가 뛰어난 외국인 선수를 영입하여 내실있고 빈틈없는 스쿼드를 꾸렸고, 바르사를 압살하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1985-86시즌부터 1989-90시즌까지 프리메라리가 5연패를 했다.
★ 우승 기록 |
코파 델 레이: 1980-81, 1982-83, 1987-88
위너스컵: 1979, 1982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83
코파 데 라 리가: 1982-83, 1985-86
11. 크루이프의 드림팀과 첫 번째 유러피언 컵 (1988 ~ 1996)
우승 기록 |
코파 델 레이: 1989-90
유러피언 컵: 1991-92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1, 1992, 1994
위너스컵: 1988-89
코파 제네랄리타트: 1990-91, 1992-93
11.1. 1988-89 시즌
1977-78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난 요한 크루이프가 10년 뒤에 감독으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그는 선수단을 대폭 정리하여 베스트 일레븐 중에서 무려 10명을 갈아치웠다. 사실상 주전 필드 플레이어 전원이 크루이프가 부임한 후 은퇴당하거나 팀을 떠나게 되었다.누녜스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 약속을 바탕으로 크루이프는 기존 주전 선수들을 싸그리 정리하고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크루이프는 부임하자마자 바르셀로나에서 16시즌 동안 549경기에 출전한 레전드 미겔리를 은퇴시켰고, 다른 선수들도 전원 내보냈다. 대신 바스크 출신인 호세 마리 바케로, 치키 베히리스타인, 혼 안도니 고이코에체아, 안도니 수비사레타을 영입했고,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미카엘 라우드루프, 로날트 쿠만, 게오르게 하지 등 외국인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다. 크루이프의 스타 플레이어 영입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호마리우까지 영입하면서 초호화 스쿼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크루이프의 '드림팀'이라 불리는 새로운 바르사가 탄생했다. 하지만 초기에 이 드림팀은 카탈루냐 팬들에게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기존 바르사의 레전드들이 가차없이 내쫓겼을 뿐 만아니라 크루이프가 영입한 선수들은 전원 외국인들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는 원래부터 카탈루냐 민족주의,독립운동과 뗄수없는 끈끈한 관계를 지닌 구단이고 심지어 많이 희석된 지금조차도 암암리에 카탈루냐 혈통선수에 집착하는 경향이 남아있는지라 스쿼드를 통째로 물갈이해서 외국인으로 채워놓은건 상당히 큰 충격이었고 그나마 크루이프였기에 불만을 참은거였다. 물론 외국인 쿼터 때문에 전원 외국인으로 채우지 못했고 바스크 출신 4인방을 영입했다. 하지만 바스크인이 가까운 사이긴 해도 결국은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렇게 선수단 전원을 물갈이하고 나서도 두 시즌 동안은 성적도 신통치 않았다. 많은 팬들은 누녜스 회장 이후 경질된 많은 전임 감독들과 마찬가지로 크루이프 역시 2~3시즌 내에 누녜스에게 경질될 것으로 여겼다.
자신이 원했던 선수들로 스쿼드를 전원 갈아엎은 크루이프는 이후 바르사에 자신이 원하는 축구를 덧입히는 작업을 했다. 크루이프는 이를 '네덜란드식 축구'라 불렀다.
게다가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초기 2년간 라리가는 물론이고 각종 대회에서 결과도 신통치 않았고, 이에 카탈루냐 팬들의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88-89시즌에는 클럽 역사상 세 번째 UEFA 컵 위너스컵 타이틀을 땄다. 만약 위너스 컵 우승에 실패했다면 누녜스는 이전에 자신이 갈아치운 숱한 명장들과 마찬가지로 크루이프도 경질할 참이었다. 이후 크루이프의 드림팀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11.2. 1989-90 시즌
코파 델 레이 우승을 차지했다.11.3. 1990-91 시즌
크루이프는 외국인으로 구성된 드림팀이라는 비판에 대해서 1990-91시즌 카탈루냐 순혈 성골 펩 과르디올라를 1군으로 올려 카탈루냐인들의 불만을 해소시켰다. 또다른 카탈루냐 성골인 알베르트 페레르, 카를레스 부스케츠도 바르셀로나에서 데뷔하였고 미겔 앙헬 나달, 후안 카를로스, 난도, 훌리오 살리나스 등 국내 선수도 영입하여 드림팀에 합류시켰다.1990-91 시즌에는 드림팀의 시즌들 중 가장 순탄하게 리그 우승에 성공했지만, 크루이프는 심장 수술을 받게 되어 그가 아닌 수석 코치 렉사흐가 일부 경기에 감독으로 나섰다. 승리하면 승점 2점을 주던 시절인데도 2위와 승점 차가 10점차일 정도로 압도적인 우승이었다.
UEFA 컵 위너스 컵에서 8강 디나모 키이우와 총합 스코어 4 대 3으로, 4강 유벤투스와 총합 스코어 3 대 2로 꺾고 결승에 올랐다. 결승에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2 대 1로 패배했다. 결승에서 로날드 쿠만이 프리킥으로 팀의 유일한 득점을 했다.
11.4. 1991-92 시즌
1992년, 마침내 들어 올린 유러피언 컵 |
바르셀로나는 1992년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UC 삼프도리아를 상대했다. 연장 후반 7분에 그 쿠만의 시속 188km 프리킥 골이 터지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렇게 바르셀로나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개편 이전 마지막 유러피언 컵 우승팀이 되었다.
레알 마드리드가 5라운드부터 37라운드까지 리그 1위를 유지했지만, 유러피언 컵 결승전 이후 펼쳐진 리그 마지막 라운드에서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마드리드는 테네리페 원정에서 패배한 반면, 바르셀로나는 스토이치코프의 멀티골로 아틀레틱 클루브 원정에서 2 대 0으로 승리하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이렇게 바르셀로나는 리그 2연패에 성공했다.
11.5. 1992-93 시즌
마지막 라운드까지 레알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를 승점 1점으로 앞서고 있었지만 마지막 라운드에서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는 레알 소시에다드를 홈에서 승리하고 마드리드는 테네리페 원정에서 패배하며 리그 3연패에 성공했다.11.6. 1993-94 시즌
1993-94 시즌에는 전 시즌 PSV에서 뛰며 챔피언스 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상을 보인 브라질의 호마리우를 영입했다. 호마리우는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했고, 바르셀로나는 드림팀 시절 그 어느 때보다 리그에서 가장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호마리우의 해트트릭에 힘입은 엘 클라시코 5 대 0 승리 |
바르셀로나는 데포르티보와 치열한 리그 우승 경쟁을 했다. 데포르티보가 리그 20라운드에서 37라운드까지 1위를 기록했고, 마지막 라운드 직전 바르셀로나와 승점 1점 차이로 리그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데포르티보는 마지막 라운드 발렌시아 상대로 베베투가 동료에게 양보한 페널티킥을 동료가 실축하며 바르셀로나와 승점이 같아졌고 승자승 원칙으로 바르셀로나가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이렇게 무뇨즈의 레알 마드리드가 기록한 리그 5연패 다음으로 리그 4연패를 기록하며 역사상 두 번 뿐인 라리가 4연패를 달성했다.
그러나 크루이프 감독과 라우드루프, 호마리우, 스토이치코프 등 스타플레이어들이 심각한 대립을 하면서 팀 케미가 박살나기 시작했다.
외국인 선수들 인원 제한으로 인해 결국 크루이프는 라우드루프를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제외시키기로 결정했다. 라우드루프가 벤치도 아닌 관중석에서 지켜보는 상황에서 진행된 1993-94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바르사는 AC 밀란에게 4:0 대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는데, 이는 현재까지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최다 점수 차 패배 경기로 남아있다.
드림팀의 몰락을 알린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최다 점수 차 패배 |
바르셀로나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로 많이 꼽히는 수비사레타가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팀을 떠났다.
11.7. 1994-95 시즌
지난 시즌 클럽과 국가대표의 활약을 바탕으로 팀의 주축 선수인 스토이치코프가 발롱도르를 수상했다.1995년 3월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파리 생제르맹 FC에게 탈락하며 조지 웨아의 파리가 역사적인 챔피언스 리그 4강 진출을 막지 못했다.
다수의 스타 플레이어들이 차례로 타 팀으로 이적하면서 '드림팀'은 와해되었다. 스토이치코프는 파르마로, 쿠만은 페예노르트로, 호마리우는 브라질로 돌아갔다. 그 중 라우드루프는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충격을 사기도 했다. 이렇게 스타플레이어들이 떠나자 크루이프와 바르셀로나도 함께 몰락했다.
11.8. 1995-96 시즌
1995년 스포르팅에서 뛰던 루이스 피구가 영입되었다.이 시즌까지 두 시즌 동안 계속 실패를 거둔 크루이프는 결국 누녜스 회장과 갈등 끝에 팀을 떠났다.
12. 잠시 동안의 성공, 암흑기 (1996 ~ 2003)
우승 기록 |
코파 델 레이: 1996-97, 1997-98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6
위너스컵: 1996-97
UEFA 슈퍼컵: 1997
코파 카탈루냐: 1999-00
12.1. 1996-97 시즌
클럽의 마지막 컵 위너스컵 우승 |
12.2. 1997-98 시즌
1997년에 누녜스 회장은 호나우두 원맨팀이 된 팀에 만족하지 않아 시즌 후 롭슨 감독을 내쫓고, 호나우두를 인터 밀란으로 내보내는 말도 안되는 일을 버렸다. AFC 아약스에서 1994-95 시즌 리그 무패 우승과 20년 동안 기다리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안겨준 루이 판할 감독을 선임했다. 원래 강했던 바르셀로나의 '네덜란드 커넥션'은 판할이 감독이 된 이후 유난히 더 강해졌다. 판할 감독은 아약스 때 본인이 지도했던 파트릭 클라위버르트와 프랑크 더부르, 필립 코퀴, 마크 오베르마스 등을 영입했다. 그 중 야리 리트마넨은 아약스에서 뛸 당시 각 포지션 중 최고로 여겨졌었으나 부상과 부진으로 최악의 활약을 보였다. 브라질의 히바우두도 영입되어 이후 몇 년 동안 팀을 이끌게 되는 중요한 영입이 되었다. 판할은 루이스 피구와 루이스 엔리케의 기량도 더 끌어올렸다. 이에 따라 1997-98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12.3. 1998-99 시즌
1995년에 팀을 떠났던 쿠만이 수석 코치로 팀에 다시 돌아왔다.1998-99 시즌에 또다시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바이에른 뮌헨과 같은 조에 편성 받았다. 맨유와 1, 5차전 경기는 모두 비기고 뮌헨과 3, 4차전 경기는 모두 패했다. 결국 바이에른 뮌헨이 조 1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조 2위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고 바르셀로나는 브론뷔와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뮌헨은 결국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랐다.
팀이 정상이 아니었던 탓에 판할은 유스 선수를 1군에서 써 보았는데, 차비 에르난데스가 공식적인 1군 경기를 처음 치렀다.
12.4. 1999-00 시즌
1999년, FC 바르셀로나 창단 100주년 |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최초로 첼시를 만났다. 1차전에서 첼시에게 3 대 1로 졌지만 2차전에서 루이스 피구의 엄청난 활약으로 첼시를 5 대 1로 꺾는 명승부 끝에 4강에 진출한다. 이후에도 길게 이어지는 첼시와 바르셀로나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5 대 1 승리의 마지막 득점을 하고 기뻐하는 클라위베르트 |
피구는 경고 누적으로 발렌시아와의 4강 1차전에서 나오지 못했고 팀은 패배한다. 피구가 돌아온 2차전에서 승리하나 결국 탈락했다.
초반에는 트레블 후보로도 거론됐으나 시즌 중반 들어 선수진과 감독 사이에 불화 등 온갖 문제가 터져 트레블은 물건너갔다. 이 시즌을 무관을 기록해 판할은 이 시즌을 끝으로 떠났다.
10년 동안 주장을 맡게 될 카를레스 푸욜이 다소 늦은 나이에 이 시즌 1군에 처음으로 데뷔했다.
이 시즌 바르셀로나에는 축구계에 큰 획을 그은 반 할이 감독으로, 쿠만이 코치로, 무리뉴, 선수로 과르디올라, 엔리케, 피구, 푸욜, 차비가 모두 소속되어 있었다.
12.5. 2000-01 시즌
결국 1999-00시즌 후 누녜스 회장과 판할 감독이 동시에 물러났고, 조안 가스파르트가 새 회장으로 선출되었다.피구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 |
최근 몇 년 간 히바우두와 함께 팀을 이끌던 루이스 피구가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며 팬들의 가슴에 비수가 꽂혔다. 이전에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경우는 종종 있었으나, 과르디올라가 아니면 주로 주장 완장을 찬 것은 피구였고 피구 본인은 바르셀로나에 남겠다는 인터뷰를 해 더욱 충격을 산 사건이었다.
팀의 에이스였던 피구마저 나가자 팀의 전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2000년대 초반 동안 바르셀로나는 3년간 무관 상태에 머무는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2000-01 시즌 리그 최종전에서 챔피언스 리그 진출이 놓인 경기에서 히바우두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4위로 간신히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시키는 바르셀로나 역사에 남는 경기가 펼처졌다. 첫 두 골은 모두 동점골이었으며, 마지막 결승골은 오버헤드킥이었다.
해트트릭을 마무리짓는 히바우두의 오버헤드킥 |
팀의 주장이었던 펩 과르디올라가 이 시즌을 끝으로 떠났다.
12.6. 2001-02 시즌
마드리드가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며 다시 암울한 시즌이었다.12.7. 2002-03 시즌
결국 2002년에는 판할 감독을 다시 부르고, 후안 로만 리켈메를 영입했다. 하지만 당시 바르셀로나에서 그나마 사람 구실하던 히바우두는 악연인 판할이 오자 즉각 팀을 떠났다. 이렇게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2002-03 시즌 바르셀로나는 라리가에서 16위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경기력을 보였고, 결국 시즌 도중 판할 감독이 경질되었고, 가스파르트 회장도 사임했다. 이후 라도미르 안티치가 땜빵으로 감독을 맡았고, 팀은 6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챔피언스 리그 출전이 불발되었다.안드레스 이니에스타와 빅토르 발데스가 1군에 데뷔했다.
13. 호나우지뉴, 두 번째 챔피언스 리그 우승 (2003 ~ 2008)
우승 기록 |
UEFA 챔피언스 리그: 2005-06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5, 2006
코파 카탈루냐: 2003-04, 2004-05
13.1. 2003-04 시즌
2003년 조안 라포르타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라포르타는 전 네덜란드 국대 감독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선임했다. 라포르타는 데이비드 베컴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부터 영입하겠다는 걸로 큰 지지를 받았었는데, 베컴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난다면 레알 마드리드로 가고 싶다며 이에 실패했다. 그래서 2002 한일 월드컵 이후 호나우두와 히바우두를 잇는 브라질의 에이스로 확실히 자리매김한 파리 생제르맹 FC의 호나우지뉴를 얼떨결에 영입하게 되었는데, 호나우지뉴는 바르셀로나에서 최고의 활약을 하기 시작했다.2003년, 호나우지뉴와의 계약 |
에드가 다비즈가 잠시 임대로 오게 되었는데 호나우지뉴와 함께 팀을 리빌딩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13.2. 2004-05 시즌
뿐만 아니라 루도빅 지울리, 줄리아누 벨레티, 시우비뉴를 영입했고, 마요르카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사무엘 에투, 직전 시즌 포르투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끌고 포르투갈의 첫 유로 결승에 크게 공헌한 데쿠를 영입했다. 이 시즌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가 역대 최연소 라리가 데뷔를 기록하며 1군에 올라섰다. 호나우지뉴가 16강에서 첼시를 상대로 엄청난 활약을 보였지만 결국 탈락했다.13.3. 2005-06 시즌
14년만에 유럽 정상에 오르다 |
2006년에는 전 세계 축구 사상 처음으로 기업이 아닌 공익 기구, 유니세프와 계약을 맺게 된다. 일반적으로 돈을 받는 스폰서십이 아닌, 기부 형식으로 돈을 지불하는 스폰서쉽이라는 점에서 당시 바르셀로나 운영진은 카탈루냐와 마드리드 주 정부의 지역 감정에도 불구하고 스페인 공로 훈장을 받게 된다. 이 스폰서쉽은 현재까지 계속 지속되고 있다.
13.4. 2006-07 시즌
그러나 호나우지뉴의 바르사는 성공가도를 오래 이어가지 못했다. 2005-06 시즌 이후 레이카르트 감독의 선수단 장악력이 약해지고 2005-06 시즌 말미부터 하락의 조짐이 보였던 호나우지뉴와 데쿠가 검은 양 사건으로 대표되는 사생활 및 자기관리 실패 문제가 생기면서 팀은 침체기에 빠져 2시즌 간 무관을 기록했다.2006-07 시즌부터 어렸던 메시가 팀을 이끌기 시작했다. 리그는 1위를 기록하다 레알 마드리드에게 역전 우승을 내주며 몇 년 동안 실패하던 갈락티코 중 마지막으로 남은 데이비드 베컴과 호베르투 카를로스에게 마지막 라리가 우승을 내주었다.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패배했는데, 경기력으로도 패배한 경기였다. 코파 델 레이에선 4강에서 헤타페를 만났다. 1차전에서 메시가 암까라 메시라 불리는 솔로 골을 비롯한 엄청난 퍼포먼스로 5 대 2로 이겼지만 메시가 빠진 2차전에서 4 대 0으로 지며 헤타페는 기적적으로 코파 델 레이 결승에 진출했다.
13.5. 2007-08 시즌
2007-08 시즌은 최악이었다. 시즌 중 단 한 번도 리그 1위를 기록해보지 못하고 3위로 마무리했다. 데쿠와 에투는 엘 클라시코에서 카드를 받아 퇴장당했다. 에투는 장기 부상을 당했고, 새로 영입된 티에리 앙리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메시는 매우 뛰어난 활약을 했고, 이 외에 영입생 야야 투레과 아비달, 보얀만이 그나마 팀을 지탱했었다.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샬케 상대로 부상으로 결장한 메시 대신 야야 투레가 진통제까지 맞으며 간신히 4강에 올랐다. 4강에서 폴 스콜스의 중거리 결승골을 맞고 탈락했다.이에 따라 레이카르트 감독을 경질하고 펩 과르디올라를 새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14. 펩 과르디올라와 최고의 황금기 (2008 ~ 2021)
우승 기록 |
코파 델 레이: 2008-09, 2011-12
UEFA 챔피언스 리그: 2008-09, 2010-11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09, 2010, 2011
UEFA 슈퍼컵: 2009, 2011
FIFA 클럽 월드컵: 2009, 2011
14.1. 2008-09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08-09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스페인 클럽 역사상 최초의 트레블 |
14.2. 2009-10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09-10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세계 최초 6관왕 달성 |
14.3. 2010-11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10-11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역대 최고의 팀 |
14.4. 2011-12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11-12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메시가 공격수들의 부진을 해결하다 |
15. 계속해서 유럽 정상에 도전하다 (2012 ~ 2021)
우승 기록 |
코파 델 레이: 2014-15, 2015-16, 2016-17, 2017-18, 2020-21
UEFA 챔피언스 리그: 2014-15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2013, 2016, 2018, 2023
UEFA 슈퍼컵: 2015
FIFA 클럽 월드컵: 2015
코파 카탈루냐: 2012-13, 2013-14
수페르코파 데 카탈루냐: 2014-15
15.1. 2012-13
시즌 시작과 동시에 티토 빌라노바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기존의 티키타카 전술에서 역습 위주의 전술로 탈 바꿈 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많은 팬들이 걱정했지만 2007년부터 꾸준히 바르셀로나에 몸 담았던 티토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신뢰를 보냈다.하지만 갑작스러운 전술의 변화 때문이었는지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당시 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FC 바이에른 뮌헨에게 합산 스코어 0:7이라는 충격적인 스코어로 탈락하게 된다. 다행히 라리가에서는 승점 100점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우승을 차지한다.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12-13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
라리가 승점 100점 우승 |
15.2. 2013-14
지난 시즌 다른 대회에서의 성적은 아쉬웠지만 라리가에서 승점 100점을 달성했던 티토 빌라노바였기에 다시 한번 기대를 품고 시즌을 시작하려던 찰나 감작스런 건강 악화로 감독직에서 사임하고 만다. 급하게 헤라르도 마르티노 감독을 선임하게 되고 프리 시즌에 결국 티토는 사망하고 만다. 티토의 사망과 2년 동안 2번의 감독 교체로 인해 바르셀로나는 크게 흔들리게 된다. 산투스 FC에서 새로운 스타 네이마르 주니오르를 영입하지만 팀에 제대로 녹아들지는 못하면서 팀은 점점 무너져 간다.결국 전 시즌의 성적과 연결되는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를 제외한 모든 정규 시즌 대회에서 단 한 개의 트로피도 따내지 못하면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팀의 원 클럽 맨인 카를레스 푸욜 역시 이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하며 팀을 떠난다.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13-14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
푸욜의 마지막 시즌 |
15.3. 2014-15
지난 시즌 성적으로 헤라르도 마르티노 감독이 사임하고 루이스 엔리케가 바르셀로나로 부임하게 된다. 지난 시즌 프리미어 리그 리버풀 FC에서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루이스 수아레스를 데려오며 전설의 MSN 라인업이 구성된다. 세비야 FC에서도 이반 라키티치를 데려오며 차비 에르난데스를 대체하였고 팀을 떠나려 했던 차비는 엔리케 감독과 나머지 3명의 주장단,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리오넬 메시, 세르지오 부스케츠의 설득 덕에 한 시즌 더 팀에 남게 되었다. 이전 시즌, 주장이었던 카를레스 푸욜이 팀을 떠나면서 함께 팀을 떠나려 했던 차비였지만 팀의 주장과 부주장이 한 번에 떠나면 힘들겠다는 생각에 잔류하게 되었다고 한다.새로 들어온 선수들과 베테랑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티키타카와 역습 전술 사이를 뜻하는 티키웨카를 완벽히 수행해내며 세계 최초로 2번째 트레블을 달성하게 된다. 시즌 시작 전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준우승을 거두며 정신적으로 크게 무너졌던 메시 역시 우상 파블로 아이마르의 응원 덕에 정신을 다잡고 최고의 시즌을 보내면서 팀에 매우 큰 공헌을 한다.
이 시즌 종료 이후 차비는 17년 간 몸 담았던 클럽을 떠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14-15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
세계 최초 트레블 2회 달성 |
15.4. 2015-16
2008-09시즌 이후 2번째 6관왕을 향해 달렸지만, 아틀레틱 클루브와의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결승전 1차전 원정에서 4:0 패배, 2차전 홈에서 1:1 무승부를 하면서 아쉽게 5관왕을 달성하였다.차비 에르난데스가 떠나면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리오넬 메시, 세르지오 부스케츠가 각각 주장, 부주장, 3주장으로 올라섰고 하비에르 마스체라노가 선수단 투표로 4주장에 뽑히며 새롭게 주장단에 합류하게 되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발목을 잡혀 8강에서 탈락했지만 라리가와 코파 델 레이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하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15-16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
두 번째 5관왕 달성 |
15.5. 2016-17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16-17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MSN 해체 |
15.6. 2017-18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17-18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이니에스타의 마지막 시즌 |
15.7. 2018-19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18-19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세 번째 트레블에 도전하다 |
15.8. 2019-20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19-20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바이에른 뮌헨 상대로 충격적인 점수 차 패배 |
15.9. 2020-21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20-21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메시의 마지막 시즌 |
16. 포스트 리오넬 메시 시대 (2021 ~)
16.1. 2021-22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21-22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차비가 감독으로 돌아오다 |
16.2. 2022-23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22-23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4년만의 리그 우승, 알바와 부스케츠의 마지막 시즌 |
16.3. 2023-24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23-24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4년만에 챔피언스 리그 8강 진출 |
16.4. 2024-25
자세한 내용은 FC 바르셀로나/2024-25 시즌 문서 참고하십시오.17. 참고/관련 자료
- FC 바르셀로나 공식 홈페이지
- 왜 클럽축구가 더 재미있을까 - 육성철 저. 동아일보사 출판국. 2003.
- 축구의 신화 프리메라리가: FC 바르셀로나 - 루이스 미겔 페레이라 저/윤승진 역. 보누스. 2013.
- 유럽축구 엠블럼 사전 - 류청 저. 보누스. 2013.
- 엘 클라시코의 모든 것 - 한준 저. 브레인스토어. 2013.
- Història del FC Barcelona(총 17부작) - rtve 카탈루냐. 1996~1998.
[1] 쉽게 설명하자면 우리나라의 조기 축구회 같은 개념으로 창단했다고 생각하면 된다.[2] 지금으로 생각하면 의미는 다르지만 임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3] 현재는 소규모 증축을 통해 99,354명을 수용할 수 있고 여전히 세계 최대 축구 전용 구장 타이틀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