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연구원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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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03710><colcolor=#fff> 한국과학기술연구원 韓國科學技術硏究院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KIS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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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소속 | 과학기술정보통신부 | |
설립 | 1966년 2월 16일 ([age(1966-02-10)]주년) | |
분류 |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 | |
원장 | 오상록 | |
소재 | 본원 서울특별시 성북구 화랑로 14길 5 (하월곡동) | |
강릉분원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사임당로 679 | ||
전북분원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봉동읍 추동로 92 | ||
유럽연구소 독일 자르브뤼켄 Campus E7 1 | ||
링크 | | | | | | | | |
위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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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홍보영상 (2024) |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은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본원을 두고 있는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이다.
2024년 공공기관에서 지정 해제되었다.
2. 연혁
- 설립 이전
- 1961년, 정부가 연구소 설치의 타당성 조사를 시작했다.
- 1962년, 민간전문가로 이루어진 자문회의가 '한국과학기술원(가칭) 설치 계획안'을 수립했다. 하지만 필요예산 대비 국가재정이 부족해 곧바로 실행할 수는 없었다.
- 1964년, 경제기획원에서 국립공업연구소, 원자력연구소, 금속연료종합연구소를 통폐합해 종합적인 과학기술연구소 및 민간종합연구소를 설립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이 또한 재정 확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 1965년 5월 18일, 박정희 대통령과 린든 B. 존슨 미국 대통령이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백악관에서 발표했다. 미국의 연구소 설치 지원 제안은 박정희 정부의 베트남전쟁 파병에 대한 보상적 측면과 더불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나타내는 형태 중 하나였다. 존슨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종합연구기관의 설립에 대한 한국의 희망을 이해하고,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지원할 것을 제안한다"고 밝혔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과학연구소 설치가능성을 한국의 각계 지도자들과 더불어 검토하기 위해 과학기술고문을 파견하겠다는 제의를 환영한다"고 답했다.
- 1965년 7월, 미국의 과학기술고문 도날드 호닉(Donald F. Hornig) 박사를 단장으로 하는 6명의 조사단이 파견되었다. 비영리 독립기관으로 설립할 것, 국제개발처(AID)로 하여금 민간연구소인 바텔기념연구소(Battelle Memorial Institute)의 자매기관으로, 산업계-정부로부터 연구를 위탁받고 운영되는 계약연구체제를 이식할 것 등을 담은 '호닉 보고서'를 냈다.
- 1965년 9월, 바텔기념연구소가 AID와 용역계약을 맺고 대한민국에 조사단을 파견했다. 12월 15일 양국에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설립 및 조직에 관한 조사보고서'를 냈다.
- 최형섭 초대 원장 (1966~1971)
- 1966년 2월 16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가연구시설으로 설립되었다. 당시 명칭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였다. 처음엔 건물이 없어 종로구 청계천6가 한일은행 지점과 기독교청년회(YMCA) 두 곳에 임시로 사무실을 얻었다.
- 1966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바텔기념연구소가 추천한 홍릉임업시험장[1]을 직접 돌아보고, 5월 2일 부지로 결정했다. 10월 6일 기공식을 열었다.
- 1966년 11월, 미국 존슨 대통령이 답방 형식으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했다. 양국 정상은 공동성명으로 "한국에 있어 생활과 공업의 현대화에 기초적이고 중대한 공헌을 할 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설립한 힘찬 전도에 대해서 만족히 생각하였다"고 밝혀, KIST 설립이 양국의 중요 협력사업임을 강조했다.
- 1967년 3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육성법(안)'이 법률로 통과되었다. 이로서 법적 정체성과 안정적 재정확보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정부로부터 사업계획승인 및 회계감사를 받지 않고, 사업계획서 및 공인회계결산서를 주무장관에게 제출하는 것으로 행정을 간소화했다.
- 1966~1967년 2년간 28명의 해외 한국과학자를 1차로 유치했다. 원내 아파트를 제공하고, 당시 한국에 없던 의료보험을 미국과 계약해 받게 했고, 급여 수준은 국내 대학교수의 2~3배로 책정하고, 바텔기념연구소에 6개월~1년 파견하여 시스템을 배우도록 했다.
- 1969년 10월 23일, 종암동 연구소 건물이 준공되었다. 종암 연구원 한복판의 본관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했으며, 강당 이름은 미국 대통령 이름을 따서 "죤슨" 강당으로 지었다.[2] 박정희 대통령은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진흥, 경제개발 및 국력증강을 위해 실로 막중한 사명을 차질없이 수행할 것"을 당부했다.
- 1970년 3월 6일, 사이언스지가 개도국 연구소의 성공가능성을 타진하는 분석기사를 게재하며, KIST가 성공하면 타 개도국에도 좋은 모델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 #
- 1971년~1978년, 최형섭 원장이 과기처 장관이 되며 퇴임했다.
- 심문택 소장서리(2대 원장 취급) (1971~1972)
- 1972년 10월, 나유다마 모델 vs KIST 모델 논쟁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의 연구체계 구축을 두고 인도의 과학자이자 과학정가인 나유다마(Yelavarthy Nayudamma)는 "개도국의 연구소는 선진국의 연구를 수입하고 받아들이기보다 해당 국가의 천연자원과 원자재를 연구해야, 전통문화를 유지-발전하며, 고용증대-수입대체 효과가 생긴다"는 나유다마 모델을 주장했다. 반면 KIST 초대 원장 최형섭은 "개도국의 연구소는 선진기술을 빠르게 도입해 국내 산업계에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개도국은 과학기술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부족해 정치지도자들의 관심과 의지로 극복해야 한다" 등 한국형 발전 모델인 KIST 모델을 주장했다. 2박 3일의 고민 끝에 인도네시아는 한국 모델을 선택했다. #
- 한상준 3대 원장 (1972~1978)
- 이정오 5대 원장 (1980)
- 취임 12일만에 과기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 임관 7대 원장 (1982~1984)
- 전학제 8대 원장 (1984~1986)
- 이정오 원장 (1986~1988, 재취임)
- 전학제 원장 (1988~1989, 재취임)
- 1988 서울 올림픽 당시 남자 육상 100m 경기의 간판 스타였던 벤 존슨의 약물 복용을 적발해 낸 사건이 유명하다. 벤 존슨은 약물 복용이 적발되어 금메달을 박탈 당했고, 한국의 도핑테스트 기술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도핑방지위원회 소속의 연구소인 도핑컨트롤센터가 위치해 있다. 신뢰성을 인정받아 국제대회 유치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는 기구.
- 이상수 원장 (1989)
- 박원희 13대[5] 원장 (1989~1992)
- 1989년 5월 10일, 경제장관회의가 두 기관의 분리-독립 계획서를 검토했다.
- 1989년 6월 30일, 원래대로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으로 다시 분리되었다. KAIST는 학/석/박 과정을 갖춘 교육기관이고, KIST는 연구기관이다. 이후 KAIST는 대전으로 본원을 이전하고, KIST는 서울에 남았다.
- 서정욱 14대 원장 (1992~1993)
- 김은영 15대 원장 (1993~1996)
- 박원훈 16대 원장 (1996~1999)
- 1999년 1월, '정부출연연구기관 등의 설립ㆍ운영 및 육성에 관한 법률'(정부출연기관법)이 제정되어 법적 근거를 갖춘다.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며 국무총리실 산하에 연구회 체제를 갖추었고[6] KIST는 기초기술연구회 소속이 된다. 대통령이 원장을 임명하는 정부 공공기관과 달리, 이후 정출연들은 연구회가 원장을 임명하게 되었다.
- 박호군 17-18대 원장 (1999~2003)
- 김유승 19대 원장 (2003~2006)
- 2003년 5월, 강원도 강릉에 분원을 설치했다.
- 2006년 4월, 강릉분원 천연물연구소를 준공했다.
- 금동화 20대 원장 (2006~2009) / 문길주 직무대행 (2009)
- 2008년 1월, 전라북도 완주에 분원을 설치했다.
- 2009년 9월, 세계 최초 차세대 반도체 스핀트랜지스터 기술을 개발했다.
- 한홍택 21대 원장 (2009~2010) / 김명수 직무대행 (2010)
- 2010년 11월, 영어교사 보조로봇 '잉키'가 미국 타임지 세계 50대 발명품으로 선정되었다.
- 문길주 22대 원장 (2010~2013)
- 2012년 11월, 전북분원에 복합소재기술연구소를 준공했다.
- 2013년 2월, 녹색기술센터가 부설기관 형식으로 독립했다. KIST 원장이 소장 임명권을 가진다.
- 2013년 11월, 세계 최초 플렉서블 메모리를 개발했다.
- 이병권 23-24대 원장 (2014~2020, 연임)
- 윤석진 25대 원장 (2020~2024)[7]
- 오상록 26대 원장(2024~)
3. 조직도
연구단 명칭이나 직제가 수시로 변하니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것. 2023년 3월 시점의 조직도.본원
- 연구본부
- 뇌과학연구소
- 차세대반도체연구소
- AI·로봇연구소
- 기후환경연구소
- 바이오·메디컬 융합연구본부
- 첨단소재기술연구본부
- 국가기반기술연구본부
- 청정신기술연구본부
- 연구자원·데이터지원본부
- 기타
- KIST 스쿨 - KIST가 운영하는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를 지칭한다.
- 홍릉강소특구사업단 - 경희대학교에 위치. #
- 감사부, 연구기획위원회, 연구심의위원회
- 연구기획조정본부
- 기술정책연구소
- 기술사업전략본부
- 경영지원본부
- IT자원운용본부
- 융합연구정책센터 - 안전증강융합연구단 등.
- 안보재난안전기술단
분원
4. 기타
-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 중 가장 먼저 털린다(...).
- 과기정출법 직제순으로 제일 처음에 올라와 있어서 실무자 입장에서는 피(?)를 많이 보는 편이다.... 거의 모든 자료포맷이 KIST 기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뭔가 새로운 정부정책이 시행되면 KIST가 시범케이스를 항상 얻어맞는다든가.(...)
산업기술연구회 시절에는 생기원이랑 ETRI가 그랬지 - 국정감사 때마다 이런저런 일로 차출되는 수도권 5개 연구기관 중 한 곳이다(...)
서울에 있는 게 죄지에트리처럼 현장국감 차출은 안하잖아요 - 과학분야에서 뭔가 이슈가 터졌다 하면 거의 대부분의 언론사가 KIST부터 턴다(?). 식품(식품연), 철도(철기연), 전자(ETRI) 등 뚜렷한 전문분야가 있는 경우에는 그 쪽으로 문의하지만 뭔가 분류가 애매한 이슈의 경우에는 일단 키스트에 문의해본다고...
- 2021년 10월 국정감사에서 KIST 직원의 폭행 사건, 성희롱 사건, 연구수당 부당지급, 결과 중복 보고, 허위 출장 보고 등이 무더기로 지적되었다. #
이건 털릴만하다
- 개원일 순서로는 최초가 아니다.
- 웬만한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들은 KIST의 부설기관이나 연구 파트가 커져서 분리되는 형식으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아서, KIST가 최초의 연구기관인 것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국가과학기술연구회 홈페이지가 보여주듯, 한국지질자원연구원/한국건설기술연구원(1948년), 한국철도기술연구원(1949년), 한국원자력연구원(1959년),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1962년) 등이 앞선다.
- 한국건설기술연구원은 1948년 정부출범과 동시에 설치된 내무부 건설국(현 국토교통부의 전신) 산하 토목시험소가 그 유래다. 1962년 국립건설시험소가 설립되었고, 일본의 PWRI를 벤치마킹하여 1983년 출범한 재단법인이 이를 합병하며 연혁을 계승했다.
다만 인지도는... - 한국철도기술연구원도 1949년 교통부 교통기술연구소를 모태로 한다. 1963년 철도청 철도기술연구소로 소속이 옮겨졌다가, 1994년 주식회사로 법인화한 뒤 1996년 출연연으로 출범했다.
- 한국원자력연구원은 1959년 별도의 국가연구소로 출범했지만 이후 출연연으로 형태가 변경된 케이스다.
- '가' 급 국가중요시설로 분류된다. 임용 시 당연히 신원조사도 거치고, 연구동 내에서의 사진 촬영은 금지된다.
- 성북구 종암동의 제2동대 예비군
고려대와 카이스트 복학생들이 9할은 여기서 향방작계 훈련을 하게 되는데, 연구시설들은 완만한 낮은 곳들에 있지만 산기슭의 국유림을 따라 경계가 형성되어 있어 예비군 병력들은 은근히 등산(?)을 한다. 그런데 국가중요시설이라 그런지 훈련 때마다 57사단[8] 현역들이 풀 안면위장에 완전군장을 하고 출동하며, 대항군으로 오는 병력이 무려 특전사(...)로, 목격자에 따르면 사람 키높이만한 윤형 철조망에다가 담요를 덜렁 걸치고 날다람쥐처럼 튀어올라 넘은 후 사라진다고...그리고 40분 후 강당에 "폭파"라고 쓰인 붉은 딱지가 붙었다카더라훈련이 끝난 후에는 여비 대신 빵과 우유를 준비하는데 KIST 동대장이 사비를 털어 마련해주는 듯.
- 본원 방문은 두 방향에서 가능하며, 둘 다 대중교통으로 걸어 들어가기에는 좀 멀다.
- 지방 이전 가능성은 낮다. 다음 이전 논의들은 대부분 기관과 과기부는 얘기도 꺼낸 적 없는데 지자체가 언론사에 슬그머니 카더라를 풀어서 여론을 조성하려는 시도다. 게다가 KIST의 경우 이미 강릉분원, 완주분원, 독일분원이 있다.[11]
- 대구 신서 이전론 - 2018년 9월 주장. #
- 대전 연축 이전론 - 2020년 6월 주장. 타 지자체와 달리 진지하게 논의되었다.[12] 연구동-본관동을 최근 리모델링했다 #, 인센티브가 부족하다 #, 이전비용을 수조원 들이느니 분원을 짓자 #, 이전비용과 기대효과를 재계산해보자 #, 홍릉의 유기적 관계를 해칠 수 있다 # 등. 2021년 제20대 대선 당시 원희룡 국민의힘 대선경선후보가 KIST를 대전으로 이전시키겠다고 공약했다.# 2023년 3월 이전설이 다시 언론에 나왔다. 대전광역시 측에서 KIST와 접촉한 것으로 나타났다.#
- 경남 창원 이전론 - 2022년 1월 주장. #
- 충남 내포 이전론 - 2022년 6월 주장. # 2023년 3월 또 주장. #
5. 노동조합 현황
- 전국과학기술노동조합 한국과학기술연구원지부: 미가맹.
[1] 오늘날에도 국립산림과학원이 있다.[2] 이런 협업관계는 세월이 흘러 이제는 한국이 미국 포지션에서(!) 개도국들을 지원하는 모델로 쓰이고 있다. 베트남에 세워진 V-KIST는 이름에서 보듯 KIST의 베트남판이며, 그 외 케냐와 파라과이 등에도 연구소를 지어주고 협력하고 있다. (이 중 파라과이는 ODA 사업으로 KOICA와 KICT, 한국도로공사가 지분을 갖고 있다.)[3] 이 당시 후덜덜한 에피소드가 많다. 전두환의 신군부가 멋도 모르고 싹 통폐합시키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인데, 원래는 KIST 자체가 상당히 축소될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과학기술계에서 그야말로 목숨 걸고 전두환에게 개겼다고... 다행인 것은 전두환이 문외한인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가의 말을 수긍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덕분에 통폐합되었지만 외려 5공정권 출범 이후 투자 자체는 더욱 공격적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심지어 외국 박사들 유치를 위해 정부에서 아파트까지 지어줬을 정도라고... 이 때 지어준 아파트를 추후에 처분하여 마련한 기금이 현재 몇몇 출연연이 갖고 있는 사내근로복지기금이다. 이것은 정부출연금이 아니기 때문에 온전히 연구원 사유재산이며, 연구원 근무자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된다.[4] KIST의 성공 이후 이를 본떠 과학기술처 외 다른 부처에서도 정부출연연구소를 만들게 되었고, 전두환 정부 이전까지 이러한 정부출연연구소들을 중심으로 국가 연구개발이 이루어졌다. 5공화국이 들어서고 난 이후, 전두환 정부는 이러한 정부출연연구소들을 통폐합시키고 주무부처를 과학기술처로 통일시킨다. 그 과정에서 KIST와 KIAS가 통합된다. 이러한 통폐합 과정은 정부출연연구소들에 대한 관리 체제를 일원화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국가 전반의 연구개발 체제가 신군부세력에 의해 재편되었다는 의미도 가진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가 KAIS와 KIST의 통합시켜 기존에 연구개발의 주 세력인 KIST출신 인사들의 세력을 축소시킨 것이다.[5] 이 중간에 원장 기수가 좀 꼬였다(...).[6] 기초기술연구회, 공공기술연구회, 산업기술연구회. 현재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로 일원화되었다. 인문·사회 분야 정출연들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으로 변경되어 오늘날에 이른다.[7] KIST 원장 최초 비서울대, 국내 박사 출신. 2020년 7월 17일부터 3년간 임기 예정.[8] 현재는 2020 국방개혁의 일환으로 부대가 통폐합되어 해체되었고 위수지역은 인근 모 사단이 승계했다.[9] 상월곡역의 병기역명이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다.[10] '남문'이 아닌 이유는 해당 문의 도로에 글로벌지식협력단지, 한국경제발전전시관, 홍릉바이오헬스센터, 첨단의료기기개발센터, 한국국방연구원 등과도 연결되어서, KIST만의 남문이라 부르기 어려워서로 추정된다.[11] 정직원 수 비율로 따지면 본원 85% (970여명) - 분원들 15% (강릉60여명, 완주60여명, 독일50여명) 가량이다.[12] 연축지구 바로 인근에 과학기술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동생들이 밀집한 대덕연구개발특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