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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정부개발원조, 공적개발원조)는[1] 1969년에 OECD 개발원조위원회(DAC)[2]가 규정한 개념이다. DAC는 ODA를 공적 기구(중앙․지방 정부 또는 그 실무기구)가 개발도상국의 경제개발과 복지의 증진을 위해 DAC의 수원국 명단에 있는 국가 또는 영토, 그리고 다자간 개발 기구에 제공한 증여(grant)와 양허성 차관(concessional loan)이라고 정의한다. 한국도 독립 이후 정부를 수립하고 6.25 전쟁을 겪고나서 1970년대까지 원조를 많이 받았다.크게 아래와 같은 4가지를 기준으로 분류한다.
- 협력주체 기준: 양자간 원조(공여국과 수원국간 직접원조), 다자원조(3개국 이상이 관여하는 국제기구를 통한 원조)
- 공여형태 기준: 자금협력원조(말 그대로 자본 공여 원조), 기술협력원조(기술, 노하우 등 지적자본 공여)
- 상환여부 기준: 무상원조, 유상원조(개발차관과 같이 상환이 전제된 원조)
- 구속여부 기준: 구속성 원조(공여국의 기업의 참여가 전제된 원조), 비구속성 원조(공여국에 상관 없이 입찰 등으로 참가 기업이 정해지는 원조)
예를 들어 한국이 1955년부터 1963년까지 미국으로부터 받았던 MSA 원조의 경우 양자간, 자금협력, 무상, 일부 구속성[3] ODA로 분류할 수 있다.
2. 문제점
2.1. 부패 문제
추적하고 사용처를 확인하기 힘들며 중간에 부패로 가로채는 자들이 많다는 주장이 있다. 심지어 전체의 30%만 전달되면 잘 전달된거라는 의견도 있다.2.2. 해외 원조의 실체
해외 원조가 외국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그것은 해외 원조의 명목상 구실이고 실상은 외국, 특히 독재국가들의 영향력과 정책을 "매수하는" 외교 도구이며, "천사같은 민주주의자"들이 자국의 이득을 위하여 "독재국가의 국민들을 악마적으로 착취하는" 방법이라는 냉소적인 견해도 있다. 주로 종속 이론을 근거로 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의 견해이다. 독재국가에 대한 선진국의 ODA는 때로는 수원국의 국민들이 공여국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원인이 되기도 하며 특히 몇몇 중남미, 중동 국가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반미 성향은 이곳에서 비롯되었다.그러나 사실 해외 원조 거래에도 나름의 논리가 있다. 근본적으로 빈곤이나 불행을 완화하기 위해 원조가 제공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기증자 국가의 구성 요소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주어진다. 원조가 빈곤 퇴치에 실패한 것은 기부자들이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너무 적은 돈을 기부한 결과가 아니었던 것.
대표적인 예시로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 조약은 미국이 이집트에 대한 원조량을 줄여서 얻어낸 결과이다. 당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 인정 정책은 아주 인기 없는 정책이었다. 그외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한 탈레반 측을 추적하기 위해서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를 늘렸다. 의회는 2009년 9월 말에 케리-루거 법안을 통과시켰다. 파키스탄에 대한 원조는 약 3배인 15억 달러로 늘어났다.
원조에 대한 이런 설명은 미국을 국제적 악당으로 묘사하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지만 미국은 유일한 원조 공여국이 아니다. 외세가 민주 지지자들에게 줄 수 있는 정책적 보상이 돈으로 직접 살 수 있는 보상보다 지지자들에게 더 가치가 있다면 민주주의자들은 원조를 지지한다. 다른 국가들과 기관들도 미국이 감당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규모는 아닐지라도 호의를 구매한다.
2.3. 반론
하지만 이러한 의견은 현대의 대부분의 ODA가 해당 국가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는 걸 간과하는 견해이다.부패 문제만 해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데 애초에 돈을 그대로 주는 경우는 드물고 기술이전, 교육, 인프라 건설의 형식으로 전달되며 선진국의 기관(한국의 경우 EDCF나 국제개발협력본부 등)에서 입찰 및 감리를 하기 때문에 현지 관료나 기업 문제로 ODA가 날라가는 부분은 오히려 적은 편이다.
쉽게 말해서 현금 얼마를 툭 던져주는게 아니라 다리, 병원, 댐, 공장을 지어주거나 트랙터 기술, 정수기술, 컴퓨터프로그래밍 교육 같은 식으로 지원하기 때문에 위 묘사대로 70%가 떼먹히는 일은 없다. 입찰담합이라던가 단가 후려치기 등 같은 문제는 있지만 그건 ODA의 문제라기보다는 국가 입찰사업의 문제점에 가깝다.
굳이 따지면 공사장 인력으로 선발되는 사람, 현지에서 교육 대상으로 선발되는 사람, 병원이 지어지면 해당 병원에서 근무할 간호사, 의사 선발 같은 부분에서 친인척 밀어주기, 돈 받고 자리 주기 같은 문제는 꽤 있다고 한다.
또한 긴급구호형식인 경우는 각국의 ODA 부서에서 알아서 보내는 경우가 많지만 인프라 건설, 공장 건설 같은 경우 ODA를 주는 기관에 해당 개발도상국이 신청하여 받는 경우가 이제는 훨씬 많다.
애초에 GDP 대비 ODA 액이 가장 많은 나라는 선진국이지만 세계적인 영향력은 별로 없는 북유럽국가들이라 본문의 주장대로 무슨 외교적 지렛대로 ODA를 활용하기도 어렵고 선진국들이 하는 ODA 상당 수는 구호 물자 지원 및 의료서비스, 교육, 인프라 개선 순으로 해당 국가들의 국가발전에 당연히 필요한 것들이지 빈곤타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사업은 거의 없다.
우리나라의 사례만 봐도 국립의료원 준공, KIST 설립, 최초의 직업훈련원 건설 등이 긴급구호+ODA 개발차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한국 경제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애초에 위 본문 사례들은 'ODA를 줄일까봐 외교정책 또는 탈레반 추적을 돕도록 바뀐 것'이다. 해당 국가들이 원조가 줄어들까봐 외교적 자존심을 내려놓은 사례는 맞지만 그게 어떻게 '독재국가의 국민들을 악마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화해하는게 이집트 국민을 착취하는 것인가?
애초에 일대일로 따위의 사업과는 달리 설령 유상원조+구속형이라 해당 인프라를 공여국에서 차관을 빌려 공여국 회사에서 짓는 방식이라고 해도 공여국의 인적 기반을 바탕을 통한 교육+ 수원국 주도로 개발계획 작성 및 공여국의 계획지원이 현대 ODA의 기본이라 착취하려고 해도 못한다. 계획을 수원국이 짜는데.
3. 국가별 공적개발원조
2019년 대외원조 현황에 따르면 OECD DAC 회원국 중 미국은 가장 큰 공여국이며,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 순으로 공여금액이 컸다. 한국은 15위에 머물렀다.
UN의 ODA/GNI 권고비율은 0.7%이다. 미국은 가장 큰 전체 공여국이지만 경제 규모의 비율로 볼 때 GDP의 약 0.2%로 상대적으로 적은 양을 제공한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무려 경제 생산량의 1% 이상을 해외 원조로 제공한다.
3.1.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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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의 ODA 사업 BI
대한민국 ODA 통합 홈페이지
2023년까지 사용한 ODA 사업 BI.
한국은 1950년대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주로 미국과 UN을 통해 무상원조를 받았다. 이때는 거의 원조에 의존하다시피 한 경제 체질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시 국가 예산의 40% 이상을 원조로 충당하였다. 긴급구호와 재건사업 용도였으며 무상원조와 증여의 형태였다. 무상원조 비율은 1957년을 기점으로 감소하였으며 1959년부터는 유상원조 형태로 전환되기 시작하였고, 1960년대 ~ 1970년대에는 양허성차관(유상원조)이 70%를 차지하였다.
1964년 한국은 서독을 비롯해 총 68개국과 투자보장협정을 체결하였다. 1970년대 후반 ~ 1980년대까지는 전체적인 지원 규모가 감소하는 한편 차관 제공자로 독일, IBRD등의 비중이 늘어났다[4]. 1995년[5]에는 세계은행의 ODA 협력대상국 리스트에서 제외되었고 2000년에는 OECD DAC의 ODA 협력대상국 리스트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런데 1960, 70년대라고 해서 한국이 원조를 받기만 했던 것은 아니며, 1960년대에도 개발도상국들을 상대로 훈련생 초청이나 전문가 해외파견을 시행했고[6] 1977년에는 최초로 9억원의 기자재를 해외 개도국에 공여하며 물자지원을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한국의 해외 원조가 더 활발해져서 1982년부터 한국개발연구원이 해외 개발도상국을 돕는 국제개발연찬사업을 시작하였고 1984년에는 건설부에서 무상 건설기술 용역사업을 시작하였다. 1987년 최초로 나이지리아에 EDCF 차관 지원을 승인했다.
1990년대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국제사회에서의 위상 상승으로[7] 한국이 ODA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본격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1991년에 무상협력 전담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 KOICA를 설치하고 ODA규모도 지속적으로 확대하였다. 1995년에 세계은행의 차관 졸업국이 되었고 2010년에는 DAC 회원국으로 가입하였다. 수원국에서 공여국으로 전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2020년 기준으로 한국은 개발원조위원회 평균 ODA 예산치인 GNI 대비 0.32%에 미달하는 0.14%만 ODA 예산으로 지출했다. 양적으로는 DAC 29개국중 16위이다.# 그래도 연평균 ODA 증가율은 다른 DAC 29개국들의 평균이 2.7% 수준인데 비해 한국의 경우 연평균 증가율은 9.7%로 최상위 수준(2위)으로 높다.
최순실이 이 ODA사업에서 이익을 얻기 위해 KOICA 인선에 개입한 사건이 있었다. 기사
동남아시아 같은 개도국 사람들 중에 한국의 발전을 폄하하기 위해 한국은 순전히 미국의 경제 원조 덕에 성장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8] 하지만 실제로는 한국 뿐만 아니라 그들 자신들의 나라를 포함하여 전세계 수많은 국가들이 이러한 원조를 받았으며 수령액의 절대 규모로 따졌을 때도 한국은 그 중 20위 정도 밖에 안되고 상대 규모(일인당 ODA 수령액이나 GDP 대비 ODA 수령액)로 따졌을 때는 중위권 수준 밖에 되지 않는다.#, 아카이브. 즉, 그런 주장의 논리대로라면 동남아를 포함한 수많은 원조 수혜국들이 여전히 발전하지 못하고 개도국에 머물러 있는 것이 설명되지 않는다.
3.2. 중국
중국의 경우 원조백서라는 이름으로 국제개발협력 원조 현황을 공개하고 있다.중국의 대외원조 주무부처는 중국 국가국제발전합작서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기관 문서 참조.
3.3. 미국
미국의 경우 냉전 시대 이후 국제개발원조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있다.미국 대외원조 주무부처 기관은 세개이다. 미국 국무부 산하에 USAID와 밀레니엄 개발 공사가 있고, 독립 행정기관으로 평화봉사단이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기관 문서 참조.
3.4. 영국
영국의 경우 식민지 시대의 피지국 지배 경험을 토대로 개발도상국의 발전에 가장 선두적인 국가로 변모하였다.영국의 대외원조 주무부처 기관은 2018년까지는 DFID(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였으나, 해당 기관이 FCO(Foreign and Commonwealth Office)와 통합되며, 현재는 FCDO(Foreign, Commonwealth and Development Office)에서 통합 관리하고 있다.
[1] 출처: 김두얼 등[2] Development Assistant Committee[3] MSA 원조금의 20%는 미국산 농산물을 구매해야 했다[4] 상공부장관 정내혁(丁來赫)이 독일을 방문, 한국경제 및 기술협조에 관한 협정서에 조인, 1억5000만 마르크의 장기 재정차관 수령[5] 한국의 경제력이 선진국 수준에 진입한(1994) 1년 직후다.[6]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닌 게 이는 한국이 당대 최빈국 중에서는 가장 인력 수준과 기술력이 우수했기 때문이다.[7] 1991년 한국은 '중진국의 최대'에 진입했으며, 1993년에는 GDP 세계 12위가 되었고, 1994년에는 경제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이르렀다.[8] 심지어 필리핀에서는 한국이 불과 몇년전까지만 해도 필리핀보다 가난했고 오로지 필리핀의 원조에 의해 성장했다는 유언비어가 광범위하게 퍼져있어 공중파 방송에서도 공공연히 거론될 정도다.(사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의 선거 운동만 봐도 알 수 있듯 필리핀 주민들은 가짜 뉴스에 취약한 편이다) 이는 필리핀 한인교민들과 관광객들이 주구장창 현지인들에게 과거에 필리핀이 한국보다 잘살았다며 수십년간 떠벌린 결과다. 하지만 세간에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 살던 나라'라고 알려진것과는 다르게 당시 필리핀도 가난한 동남아의 식민국가였을 뿐이며(오히려 과거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으로 잘 살던 나라는 싱가포르다) 한국전쟁 전 한국의 1인당 GDP는 필리핀보다 높았다. 한때 필리핀보다 낮아진 이유도 한국전쟁으로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된 결과였을 뿐이다. 심지어 1950년대 후반에는 다시 필리핀과 비슷해졌으나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며 수출지향 정책의 일환으로 달러대비 환율을 두배로 늘려버려(사실 이승만 시기 환율이 실질환율보다 2배나 고평가된 거라 환율을 현실화한 것이긴 했다) 하루아침에 1인당 GDP가 반토막이 나게 된 결과다. 하지만 한국 기성세대들이 "우리 덕분에 이렇게 잘살아졌다"라는걸 드라마틱하게 포장하기 위해 "한국이 세계 최빈국이었다"(엄밀히 말하자면 1968년까지 최빈국이었던 것 자체는 사실이지만 최빈국 '중에서도 하위권이었다'는 식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다), "한국은 가나, 필리핀보다 못살았다"는 등의 레퍼토리를 1990년대 이후 귀에 피가 나도록 써먹어 지금까지 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