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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리볼로 보는 가나의 고대&중세 역사.
1. 고대
1.1. 민족들의 정착
16세기 말까지, 현대 가나 인구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민족 집단은 현재 위치에 정착했으며 해안 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유적은 그 지역이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원전 2000년경, 광범위한 석호와 강에서의 낚시를 기반으로 했던 사회는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다만 고고학 연구는 숲 지대 북쪽의 중부 가나가 빠르면 3,000년에서 4,000년 전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이주는 부분적으로 서부 수단[1]의 일련의 큰 주들의 형성과 붕괴로 인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가나는 왕의 칭호였지만, 왕국의 기록을 남긴 아랍인들은 왕, 수도, 국가에 그 용어를 적용했다. 9세기 베르베르 역사가이자 지리학자인 알 야쿠비는 고대 가나를 이 지역에서 가장 조직화된 세 국가 중 하나로 묘사했다[2].
통치자들은 금의 부, 궁정의 풍요로움, 그리고 전사와 사냥 기술로 유명했다. 또한 통치자들은 북아프리카 상인들을 서부 수단으로 끌어들인 금 무역의 주인이었다. 이들과 나중에 서부 수단 통치자들의 군사적 업적과 그 지역의 금광에 대한 그들의 통제는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의 상인과 통치자들과의 역사적 관계의 연관성을 구성했다.
1.2. 고대 가나의 모습
가나는 11세기에 이웃 국가들의 공격에 굴복했지만, 그 이름과 명성은 지속되었다. 1957년, 골드 코스트의 전 영국 식민지의 지도자들이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한 최초의 흑인 아프리카 국가인 새로운 독립 국가에 대한 적절한 이름을 찾았을 때, 고대 가나의 이름을 따서 새로운 나라의 이름을 지었다. 그 선택은 단순한 상징 그 이상이었다. 왜냐하면 현대 가나는 그 이름을 딴 것과 마찬가지로 부와 금 무역으로 똑같이 유명했기 때문이다.
서부 수단의 주 중 어느 것도 현대 가나 지역의 영토를 통제하지 않았지만, 보노만과 같이 나중에 발전한 몇몇 왕국은 그 지역에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귀족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서부 수단의 왕국 확장에 기여한 사하라 사막 횡단 무역은 또한 현대 가나 북부와 남쪽의 숲 지역과의 접촉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무역의 성장은 남쪽의 삼림 지대에 있는 금광으로 가는 무역로에 위치한 초기 아칸 주의 발전을 자극했다. 숲 자체는 인구가 적었지만, 아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산림 조건에 적응할 수 있는 동남아시아와 신세계의 작물이 도착하면서 15세기 말에 그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작물에는 사탕수수, 바나나, 카사바가 포함되었다. 16세기 초까지, 유럽 소식통은 오핀 강 계곡에 금이 풍부한 아칸과 트위푸의 존재에 주목했다.
몰-다그본 왕국은 현대 가나의 초기 정치 왕국이다. 나 게브와가 발견한 다그본, 그맴프르구, 나누그 등과 같은 수많은 왕국이 등장했다. 이 왕국들은 가나의 북동쪽 지역, 북서쪽 지역, 북동부 지역, 가나, 북부 지역에 퍼져 있다. 다그본 왕국은 노예제와 식민지화에 맹렬히 저항했고, 인간 무역보다는 상품 무역을 선호했다.
2. 중세
2.1. 다그본 왕국
구전 전통과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다그본 왕국는 빠르면 11세기에 오늘날의 가나에서 등장한 최초의 왕국이었고, 16세기 말에 확립되었다. 다그본 통치자들은 보통 무슬림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무슬림을 서기관과 의료인으로 데려오거나 환영했다. 그들의 존재의 결과로, 이슬람은 북부에 영향을 미쳤고 무슬림의 영향은 상인과 성직자들의 활동에 의해 퍼졌다.
무슬림의 영향을 받은 다그본 주의 북쪽 경계와 모시 왕국[3]의 최남단 전초 기지 사이의 울퉁불퉁한 나라의 넓은 벨트에는 다그본 실체에 통합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람들 중에는 카세나 농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위 세분화된 사회에서 살았고, 친족 관계로 묶여 있었고, 그들의 씨족의 우두머리에 의해 통치되었다.
2.1.1. 건국
다그본 왕국은 다곰바[4] 사람들의 고향이며, 서기 1200년에 건국되었다. 왕국의 기원, 통치자 및 정복 전쟁에 대한 설명은 드럼 역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역사는 툰가를 떠난 "붉은 사냥꾼" 토하지에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차드 호수 동쪽, 작은 기병 무리와 함께 말리로 이동하기 전에 오늘날의 나이지리아 잠파라로 향한다. 토하지에는 말리 제국의 왕 페그 와비가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크포기누곰보를 낳았다.
말리에서 잠시 복무한 후, 크포기누곰보와 그의 추종자들은 서아프리카에서 떠오르는 송가이 제국과 충돌했고, 송가이 제국의 보복 공격은 크포기누곰보와 그의 추종자들을 남쪽으로 이주하도록 강요했다.
그렇게 남쪽으로 내려간 크포기누곰보는 권력을 장악하고 걸마의 비운을 통치했다. 그의 아들 나 가바와[5]는 그의 추종자들 중 일부와 함께 비운을 떠나 가나의 북동쪽 구석에 있는 푸시가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그는 장님이 될 때까지 통치했다.
크포기누곰보의 무덤은 현재 북동쪽 지역의 푸시가에 있다. 나 가바와의 아들 지릴리가 그를 계승했지만, 지릴리의 세 명의 남동생인 토하구, 시토부, 그리고 그만탐보 사이의 왕위 계승 분쟁은 그들을 각각 밖으로 여정을 떠나게 만들었고 그렇게 다그본 왕국의 국경을 확장했다.
나 가바와는 다그본 왕국과 맘프루그 왕국과 나눔바 왕국의 역사 기록에도 남아 있으며, 다그본 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 그의 아들들을 통해 통치 왕조를 설립했다.
2.1.2. 전성기
그의 아들 시토부가 이끄는 나 가바와의 아이들은 그가 다그본 주를 설립한 카라가 근처의 남부루구루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감바와 마을에 잠시 정착했다.
정착하면서 왕은 "힘의 왕"을 의미하는 와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시토부가 더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그는 텡다나 또는 틴다나의 사무실을 제외하고는 중앙집권화된 정치 구조가 없는 콘콤바, 나페바, 바사레, 참바와 같은 토착민 집단을 만났다.
지구 사제는 문자 그대로 "땅의 소유자"로 번역되었다. 텡다나는 의식 의식을 주재하고 사람들과 그 땅의 신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했다.
시토부의 아들 나 나가시[6]는 그를 계승하고 정복 전쟁에 착수하여 많은 텡다나를 죽이고 토착민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나 나가시는 타믈 근처의 다이얄리 지역에 위치한 야니 다바리에 수도를 설립했고, 그의 아들, 형제, 삼촌을 정복된 사람들의 통치자로 임명함으로써 안정적인 정치 조직을 발전시켰다. 살아남은 텡담바는 지구 사제로 계속 기능했고, 콘콤바의 일부 구성원은 군대에서 역할을 맡았다.
2.1.3. 무역의 중심지
1700년경, 수도는 곤자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인해 야니 다바리에서 동쪽의 새로운 도시[7]로 이전되었다. 다보야에서의 주요 대결은 다곰바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나 투투구리 는 야니 다바리 근처에서 곤자를 물리치고 보복했으며, 그의 후계자인 나 루르도 후에 전투에서 곤자를 이겼지만 지속적인 전쟁을 견딜 수 없었고 수도를 옌디로 옮겼다.
나 자기나는 다그본의 첫 번째 무슬림 통치자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외교와 무역을 장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도를 옌디로 이전하고 평화의 귀환과 함께, 옌디에 있는 야나의 궁전에 무슬림 공동체가 나타났다. 사바리 야르나가 이끄는 만데 출신의 다유라와 나 카마시가 이끄는 하우사족 무슬림은 왕국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사발리, 야르나, 그리고 나 카마시를 시작으로, 이 사람들은 야나의 보호 기도에 대한 책임이 되었다. 야나의 궁전에서, 무슬림 장로들이 정치 구조로 통합되었다는 표시인 무슬림 칭호에는 야나가 "코란을 마시다"는 것을 확실히 한 나 와르구가 포함되었다; 야나의 이맘인 나릴 니만과 이단 캄발리도 이맘으로 인정되었다.
다울라족, 그리고 하우사족과의 무역 확장은 다그본을 페잔, 이집트, 그리고 배넹과 같은 이웃 왕국과 연결시컸으며 이는 문화적으로 다른 사헬 왕국, 특히 모시 왕국, 말리 제국, 송가이 제국, 하우사족에 더 가까웠으며, 다그본은 소금, 콜라 너트, 노예의 주요 무역 중심지었다.
이후 18세기 중반, 다그본은 아샨티 제국에 종속국으로 흡수되었고, 그렇게 멸망했다.
다만 아샨티 제국의 다그본 정복은 일부 연구자들에 의해 반박되는데, 그중 학자 칼 J. 하스는 "식민지 이전 시대에 다그본에 대한 아산티 제국의 지배에 대한 주장은 크게 과장되었다"고 주장한다.
2.2. 보노만 왕국
보노만은 현재 가나 남부에 위치한 보노 사람들이 만든 무역 국가였다. 보노만은 트위어를 사용하는 아칸족이으머 11세기경에 설립되었다. 보노만은 현재 보노, 보노 동부, 아하포에 있는 중세 아칸 왕국으로, 각각 보노, 아하포, 동부 코트디부아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금을 찾기 위해 새로운 아칸 주를 만들기 위해 여러 번 주에서 이주한 아칸 사람들의 하위 그룹의 기원으로 받아들여진다.
12세기 초에 보노만에서 호황을 누리기 시작한 금 무역은 중세부터 이 지역의 아칸 권력과 부의 기원이었다.
이런 아칸 문화의 다양한 측면은 왕, 국가의 칼, 의자 또는 왕좌, 금세공, 대장장이, 켄테 천 직조 및 금 계량에 사용되는 우산을 포함하여 보노 주에서 비롯되었다.
2.2.1. 건국
아칸족들이 세운 나라들은 이미 9세기에 수단 지역에 있는 강력한 왕국 가운데 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11세기 초에 이르러 아칸족들은 무역국가인 보노만을 세웠다. 북부 가나 지방에서는 나이지리아 지방의 북쪽에 살던 민족들이 남서쪽으로 이동해 모시족의 기원이 돼 나라들을 세웠다.
2.2.2. 몰락
보노만의 몰락은 주변에 더 많은 아칸족 국가들이 형성되는 과정 중, 보노만에서 아칸족 인구들이 대거 유출되는 가운데 일어났다. 보노만의 국력이 약해진 요인으로는 지도층 간의 갈등, 세금 문제, 그리고 황금 해안으로 직접 접근하지 못하면서, 주변의 다른 아칸족 국가들이 무역으로 영향력이 많아진 것에 있다.3. 근세
3.1. 덴키라 왕국
덴키라는 현재 현대 가나에 1500년경부터 존재했던 아칸족들의 강력한 국가였다.
3.1.1. 건국
모든 아칸족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보노만에서 유래했다. 1620년 이전에, 덴키라는 아고나라고 불렸다.
덴키라의 통치자는 덴키라헤네[8] 라고 불렸고 수도는 자크와 였다. 첫 번째 덴키라헤네는 무무넘피였다.
3.1.2. 전성기
나중에, 덴키라의 수도는 아반케세소로 바뀌었다.[9] 덴키라는 금 생산과 유럽과의 무역을 통해 강력해졌다. 이후 1690년대에, 덴키라는 다른 아칸족 소국들과 전쟁을 벌였다. 이러한 투쟁의 목표는 해안으로 가는 무역로를 계속 개방하고 판테 국가와 유럽인들과 무역하는 것이었다.그렇게 덴키라는 판테족과 함께 서부 가나에서 유럽인과의 무역을 지배했고 아크와무는 동부 가나에서 유럽인과의 무역을 지배했다.
덴키라는 판테, 아크와무, 아킴을 제외한 이웃 국가들을 지배했다. 그중 아샨티는 1701년까지 덴키라 왕국 종속국이었으며, 오콤포 아노키예의 도움으로 아샨티는 페이야세 전투에서 덴키라를 물리쳤고, 덴키라는 역으로 아샨티 제국의 종속국이 되었다.
3.2. 아샨티 제국
17세기 말을 시작으로, 아샨티 왕 오세이 투투와 그의 조언자이자 현자인 오콤포 아노켸는 유일한 통일의 상징인 아샨테의 황금 왕좌와 함께 아샨티 왕국을 세웠다. 오세이 투투는 아샨티의 방대한 영역을 보게 되었고, 새로운 조직 체제를 도입하고 훈련된 왕실 및 준군사 조직들을 효율적인 전투 기계로 바꿔내며, 군대를 양성했다. 아샨티 군대는 덴키라를 정복해내고, 야산티에 유럽인들, 특히나 네덜란드인들과의 기니만과 대서양 해안 무역으로 향한 길을 열어주었다.3.2.1. 건국
아샨티족은 원래 최고 추장 오만헤네가 이끄는 씨족을 중심으로 했다. 그 중 한 씨족이었던 오요코는 아샨티의 아열대 숲 지역에 정착하여 쿠마시에 수도를 설립했다.
아샨티는 다른 아칸족이었던 덴키라의 지류가 되었지만 17세기 중반에 오티 아켄텐 추장 휘하의 오요코는 아샨티 일족을 덴키라에 대항하는 느슨한 연합으로 통합하기 시작했다.
아샨티 제국의 문화유산으로 가장 유명한 황금 의자의 도입은 오세이 투투 하에서 중앙 집중화의 수단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덴키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기 직전에 각 아샨티 정착촌의 모든 씨족 수장들의 회의가 소집되었다고. 회의 도중 황금 의자는 아샨티헤네 오세이 투어 1세의 수석 사제(또는 현자 고문)였던 오콤포 아노키에 의해 하늘에서 내려와 하늘에서 오세이 투우 1세의 무릎으로 내려갔다. 오콤포 아노키에는 의자가 새로운 아샨티 연합의 상징이라고 선언했고, 의자와 오세이 투투에게 아산테헤네로 충성을 맹세했다.
그렇게 새로 선언된 아샨티 연합은 그 후 덴키라와 전쟁을 벌이고 패배시켰으며 황금 의자는 아샨티 사람들의 정신 또는 영혼인 선섬을 포함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에 아샨티에게 신성하게 남아 있다.
3.2.2. 독립
1670년대, 오요코 일족의 수장이었던 오세이 코피 투투 1세는 외교와 전쟁을 통해 아칸족의 급속한 통합을 시작했다. 오세이 코푸 투투 1세 왕과 그의 수석 고문인 오콤포 콰메 프림퐁 아노키예는 아샨티 왕국을 장악한 상호 압제자인 덴키라에 맞서 영향력 있는 아샨티 도시 국가의 연합을 이끌었다.
아샨티 제국은 페야즈 전투에서 피지배국 덴키라를 완전히 물리쳤고, 1701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그 후, 무기의 강경한 힘과 노하우 외교를 통해, 그 듀오는 다른 아샨티 도시 국가의 지도자들이 아샨티 수도인 쿠마시에 대한 충성과 충성을 선언하도록 유도했다.
처음부터, 오세이 투투 왕과 아노키에 신부는 팽창주의자와 제국주의적인 지방 외교 정책을 따랐다. 민속에 따르면, 오콤포 아노키는 아고나-아크로폰소를 방문한 것으로 여겨진다.
3.2.3. 전성기
아칸 주의 느슨한 연합의 강점을 깨달은 오세이 투투는 주변 아칸 그룹의 중앙 집중화를 강화하고 중앙 정부 내에서 사법 제도의 권한을 확장했다. 그렇게 이 느슨한 작은 도시 국가 연합은 왕국으로 성장했고 결국 국경을 확장하려는 제국으로 성장했다.
새로 정복된 지역은 제국에 합류하거나 종속국이 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다. 오세이 투투의 후계자인 오포쿠 웨어 1세는 가나 영토의 대부분을 정복하며 국경을 확장했다.
한편 17세기 중반에 다양한 유럽 세력들이 금 무역에 진출했고, 대표적인 것이 포르투갈이였다. 그렇게 하여 건설된 것이 포르투갈령 골드코스트. 한편 포르투갈이 쇠망하자 네덜란드는 네덜란드령 골드코스트를, 스웨덴 제국과 덴마크-노르웨이는 각각 스웨덴령 골드코스트와 덴마크령 골드코스트를 세웠다. 또한 17세기에 들어서 금 무역과 함께 대서양 노예 무역이 이루어졌다.
3.2.4. 식민지들의 등장
그렇게 포르투갈을 시작으로 골드 코스트는 유럽 밖에서 유럽 군사 건축물의 집중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다. 때때로 아칸족들은 또한 유럽인들이 지역 정치 당국과 상업적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에 빠졌다.
종종 복잡한 이러한 동맹은 가장 가까운 동맹국을 입대하거나 설득하여 라이벌 유럽 항구와 아프리카 동맹국을 공격하거나, 반대로 유럽인을 국가 간 전쟁에서 용병으로 모집하거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외교관으로 모집하려는 다양한 아프리카 강대국을 포함했다.
요새는 건설되고, 버려지고, 공격되고, 점령되고, 팔리고, 교환되었고, 많은 장소들이 유럽 국가들과 경쟁함으로써 요새화된 위치를 위해 한 번에 선택되었다.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18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운영되었다. 1750년에 설립된 '상인들의 영국 아프리카 회사'는 이러한 유형의 여러 초기 조직의 후계자였다.
이 기업들은 기업들이 무역 활동을 추구하고 다양한 수준의 정부 후원으로 각각의 관할권을 방어함에 따라 새로운 시설을 건설하고 유인했다. 스웨덴과 프로이센의 단명한 모험이 있었다.
덴마크인들은 1850년 철수하기까지 골드코스트에 머물렀다. 영국은 19세기의 마지막 분기까지 모든 네덜란드 해안 요새를 소유했고, 따라서 그들을 골드 코스트에서 지배적인 유럽 세력으로 만들었다.
17세기 후반, 골드 코스트의 정치 내의 사회적 변화는 전쟁의 변화로 이어졌고, 금 수출 및 노예 수입 경제에서 주요 지역 노예 수출 경제로의 전환으로 이어졌다.
일부 학자들은 골드 코스트의 통치자들이 수출 시장을 위한 노예를 획득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확장 전쟁에 참여했다는 전제에 도전했다. 예를 들어, 아샨티 제국은 주로 제국의 통제 하에 있던 영토를 진정시킨 후 하위 왕국으로부터의 공물 지급을 요구하고, 무역로, 특히 내륙과 해안을 연결하는 무역로에 대한 접근을 확보하기 위해 전쟁을 벌인 것이다.
골드 코스트에 대한 노예 공급은 전적으로 아프리카의 손에 있었다. 노예 무역에 종사하는 다양한 아칸 족의 왕과 같은 대부분의 통치자들과 개별 지역 상인들도 노예 무역에 종사했다. 상당수의 노예들도 그 지역의 여러 나라에서 데려와 중개인에게 팔렸다.
3.3. 포르투갈령 골드코스트
최초의 유럽 식민지 개척자들이 15세기 후반에 도착했을 때, 골드 코스트 지역의 많은 주민들은 새로 획득한 영토를 통합하고 안전하고 영구적인 환경에 정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처음에, 골드 코스트는 수출 노예 무역에 참여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나의 주요 식민지 역사가인 이보르 윌크스가 지적했듯이, 아칸족은 이 시기의 특징인 국가 형성에 필요한 노동력을 늘리기 위해 콩고와 베냉을 포함한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는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노예를 구입했다.
3.3.1. 포르투갈의 골드코스트 정복
포르투갈인들이 골드 코스트라고 불렀던 현대 가나의 대서양 해안을 따라 상아와 금이 풍부한 어촌 마을을 만났다. 골드 코스트 지역의 무역 전망은 성 호르헤 다 미나 요새 건설에 박차를 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이후 광산의 조지는 곧 엘미나 성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포르투갈어 용어 '엘 미나'에서 파생되었다. 그 성은 엘미나라고도 불리는 인구가 많은 아프리카 마을 근처에 세워졌다. 골드 코스트의 다른 주요 포르투갈 정착지 목록은 다음과 같다.
- 산토 안토니오 데 아심 요새, 현대의 아심: 1515년 설립
- 상 프란시스쿠 자비에르 요새, 현대의 오수, 아크라 지구: 설립 1557년 ~ 1578년 설립
- 상 세바스티앙 요새, 현대의 샤마: 1558년 설립
3.3.2. 엘미나 성
엘미나에 요새를 건설하기로 한 포르투갈의 결정은 그 지역의 원주민 엘미인과 포르투갈 상인들 사이의 사전 확립된 무역 시스템의 영향을 받았다. 대서양과 베냐 강으로 둘러싸인 자연 반도는 방어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엘미나 성의 건설 장소로 선택되었다.
그중 디오고 데 아잠부자라는 귀족은 포르투갈 왕 요한 2세에 의해 해안 요새를 건설하기 위해 임명되었다. 하지만 엘미나 원주민과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아잠부자는 엘미나 성을 건설하려는 계획에 대해 원주민 지도자 카라만사와 협상에 들어갔다.
포르투갈 상인이 촉진하고 원어민 번역가의 도움을 받은 토론에서, 카라만사는 성 건설을 시작하러면 아프리카의 여러 주택이 파괴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 제안에 회의적으로 반응했다.
그러나 포르투갈이 폭력으로 카라만사를 위협하자, 카라만사는 포르투갈의 요구에 응했다. 그러나, 그는 원주민에게 코코보로 알려진 신성한 지역 바위의 사용을 금지했고, 포르투갈인들이 원주민의 담수 공급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정착민들은 카라만사의 요구를 무시하고 건설 목적으로 코코보 바위를 채굴했다. 결국 이는 지역 주민들을 화나게 했지만, 포르투갈이 원주민 엘미인들에게
이웃 아프리카 국가들과 좋은 무역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포르투갈인들은 종종 엘미나가 속한 에구아포 국가를 포함하여 내부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러나 해안을 따라 그들의 전략은 아프리카인들이 유럽 경쟁자들과 거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는 것을 수반했다.
그렇게 해안을 따라 있는 포르투갈의 전투와 전쟁은 이웃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따라서, 포르투갈은 기니만 전체에 통치를 시행할 충분한 인력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결국 포르투갈의 영향은 골도코스트부터 서쪽의 현대 가나 뉴타운 근처의 지역에서 동쪽의 아다[10]의 역사적인 정착지까지 확장되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를 포함한 걸프에서 무역을 수행하는 다른 유럽 국가들은 포르투갈보다 더 낮은 가격의 상품을 제공했고,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무역에서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포르투갈의 보복의 위험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3.3.3. 네덜란드와의 대립
1600년대 초 포르투갈의 경제력 쇠퇴와 함께 골드 코스트 지역에서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기니만에서 성공적인 포르투갈 금 무역에 대한 보고에 자극을 받아, 네덜란드군은 그 지역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금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포르투갈에 대항하여 동원하기 시작했다.
1625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서아프리카에서 포르투갈의 무역 중심지였던 상 호르헤 다 미나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네덜란드 함대는 잔 드릭스 램 선장의 연합군과 살바도르에서 스페인과의 전투를 패배한 바우드 위즌 핸드릭스의 나머지 선박으로 구성되었다.
1625년 10월 25일, 네덜란드는 포르투갈군과 아프리카 동맹국들에 의해 매복당했고, 포르투갈군이 그들에게 보상을 약속한 후 전투에 참여하도록 설득되었다. 큰 손실을 입은 후, 네덜란드인들은 1625년의 엘미나 전투로 인해 추방되었다.
1637년 8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다시 엘미나를 목표로 삼았는데, 그들은 엘미나를 기니 만에 있는 포르투갈 권력의 자리이자 아프리카 노예 무역에 대한 잠재적인 발판으로 보았다.
그렇게 1637년의 제2차 엘미나 전투를 돕기 위해, 네덜란드는 엘미나, 코멘다, 에푸투 국가의 구성원들이 포르투갈에 대항하도록 장려했다.
지역 국가들의 지원을 얻은 후, 네덜란드는 반대하는 포르투갈군을 상대할 수 있는 신식 장비를 갖추었고 엘미나 요새를 마주보고 있는 언덕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대포 사격을 견뎌낸 후, 포르투갈은 후퇴했으며 엘미나 성은 1637년 8월 29일에 공식적으로 네덜란드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엘미나에 있는 그들의 요새가 없어지면서 포르투갈인들은 1642년에 그 지역에서 완전히 추방되었다.
4. 근대
4.1. 네덜란드령 골드코스트
한편 1598년, 네덜란드도 골드 코스트에서 무역을 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는 1612년에 코멘다와 코르만치에 요새를 짓기도 했다.
1637년에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로부터 엘미나 성을, 1642년에는 악심[11]을 점령했다. 주로 영국인, 덴마크인, 스웨덴인 등의 다른 유럽 상인들은 17세기 중반에 합류했다.
해안선에는 주로 다른 유럽인들이 무역을 독점 하기 위해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상인들이 지은 30개 이상의 요새와 성이 세워졌다.
4.1.1. 다른 식민지와의 경쟁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1621년에 골드 코스트를 포함한 서인도 제도의 무역 독점권을 부여받았다. 잘못된 관리는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환멸을 느낀 몇몇 직원들이 다른 유럽 강대국을 위해 일하기 위해 회사를 떠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예를 들어, 헨드릭 칼로프는 1649년 왈론-네덜란드 기업가 루이 드 기어가 설립한 스웨덴 아프리카 회사에 합류한 회사의 전직 고위 장교였다. 결국, 칼로프는 또한 스웨덴 회사를 떠나 덴마크 아프리카 회사에서 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직원인 아이작 코이맨스와 니콜라스 판크라스와 함께 일했다.
한편 점점 강대국이 되어가던 스웨덴은 아시아에 이어 아프리카에도 식민지를 만들었으며 그렇게 네덜란드령 골드코스트의 일부를 점령했다. 스웨덴령 골드코스트가 건국된 시점이었다.
하지만 스웨덴령 골드코스트는 13년만에 덴마크령 골드코스트에게 점령되었고 그후 독일령 골드코스트도 점령되었다.
결국 그렇게 골드 코스트에서 스웨덴의 지배는 일시적인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영국과 덴마크 정착은 영구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1694년부터 1700년까지,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에구아포 왕국과의 무역권을 놓고 영국과 코멘다 전쟁에서 싸웠다.
게다가, 브란덴부르크는 또한 1717년에 네덜란드에 의해 매수될 때까지 1682년부터 그 지역에 요새를 가지고 있었다. 포르투갈인들은 그 지역을 완전히 떠났지만, 여전히 골드 코스트는 유럽 밖에서 유럽 군사 건축물이 가장 많이 집중되어 있었다.
4.1.2. 원주민과의 교류
유럽인들이 지역 정치 당국과 상업적 동맹을 발전함에 따라 유럽 열강들은 때때로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에 빠져들었다. 종종 복잡한 이러한 동맹은 가장 가까운 동맹국을 입대하거나 설득하여 라이벌 유럽 항구와 아프리카 동맹국을 공격하거나, 반대로 유럽인을 국가 간 전쟁에서 용병으로 모집하거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외교관으로 모집하려는 다양한 아프리카 열강을 포함한다.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을 피하는 또 다른 방법은 결혼을 통해서였다. 유럽 남성들은 종종 "결혼"을 의미하는 포르투갈 카사르에서 파생된 카사레 또는 칼리사레로 알려진 관행을 통해 지역 아프리카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다. 네덜란드 남성과 다른 유럽인들은 대서양 노예 무역과 관련이 있는 아프리카 여성과 결혼한 것이다.이런 식으로, 아프리카인과 유럽인 모두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었고 평화로운 무역 파트너십을 허용했다. 아프리카 아내들은 유럽 남성들이 낳은 아이들을 위해 돈과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아내들은 또한 유럽으로 돌아가거나 죽었을 때 남편으로부터 노예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
판테 같은 아프리카의 많은 해안 민족 집단은 경제적, 정치적 이점을 얻기 위해 이 시스템을 사용했다. 이 아프리카 민족 집단들은 다른 민족의 낯선 사람들과 함께 유럽인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 관행을 사용해 왔으며, 1400년대 후반까지 유럽 남성들에게 동일한 특권을 확장했다.
카사레는 아프리카인들이 무역 네트워크 내에서 거래할 때 유럽인과 같은 낯선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카사레는 낯선 사람과 무역 파트너 사이의 전환을 훨씬 더 원활하게 만들었다.
엘미나에서, 네덜란드는 포르투갈로부터 가나의 지배적인 세력이었던 덴키라에게 공물을 바치는 시스템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아샨티 독립전쟁 이후, 아샨티 제국은 덴키라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는 덴키라 대신 아샨티에게 경의를 표하기 시작했다.
소위 "엘미나 노트"의 존재에 대해 종종 의문이 제기되지만, 네덜란드인은 일반적으로 아샨티에게 공물로 한 달에 2온스의 금을 지불했다. 엘미나 항구를 통해 네덜란드와 나머지 세계와의 무역에 접근할 수 있었던 네덜란드와 아샨티 사이의 이 유대는 네덜란드, 다른 지역 사람들, 영국 간의 관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후자는 덴키이라와 엘미나가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 가까운 판테와 점점 더 촘촘해졌다. 몇몇 아샨티-판테 전쟁이 뒤따랐고 두 민족 간의 경쟁은 1872년 네덜란드 골드 코스트를 영국으로 이전하는 것을 둘러싼 사건에서 핵심이었다.
네덜란드가 부트레에서 스웨덴을 몰아내어 그 장소에 바텐슈타인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한 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의 지도자들은 그 지역에서 평화로운 장기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지역 정치 지도부와 조약을 협상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했다.
지역 아샨티 지도자들은 그러한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똑같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1656년 8월 27일에 부트레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그 지역에 네덜란드 보호령을 설립했고, 네덜란드 공화국과 아한타 사이에 외교 관계를 맺었다.
조약의 협정은 매우 안정적이어으며 213년 이상 네덜란드-아샨티 외교 업무를 규제했다. 1872년 골드 코스트가 영국령이 된 후에야 부트레 조약의 조항이 폐지되었다.
1782년 2월 18일,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일환으로, 영국은 엘미나를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영국은 네덜란드로부터 나소 요새, 암스테르담 요새 등의 여러 요새를 점령했으며 네덜란드 공화국은 영국으로부터 세콘디 요새를 점령할 수 있었다. 다만 1784년 파리 조약에서, 모든 요새는 전쟁 전 소유자에게 돌아갔다.
4.1.3. 노예 무역의 종결
1791년, 네덜란드 서인도 회사는 해체되었고, 1792년 1월 1일, 회사가 보유한 모든 영토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의 통치로 되살아났다. 1810년에서 1814년 사이에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점령하는 동안, 골드 코스트의 네덜란드 영토는 일본의 데시마 섬과 함께 프랑스나 영국이 점령하지 않은 유일한 네덜란드 영토라는 다소 특이한 위치를 유지했다.
1807년 영국 노예 무역법은 골드 코스트의 모든 노예 무역을 효과적으로 종식시켰다. 네덜란드의 윌리엄 1세가 1814년 6월에 왕실 법령을 발표하고 1818년 5월에 영국-네덜란드 노예 무역 조약에 서명했을 때 이 폐지를 인수했다.
노예 무역의 폐지는 헐만 윌렘 덴델스가 총독으로 도착한 것과 결합되었다. 덴델스는 바타비아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애국자였으며, 그 후 1807년에 바타비아 공화국의 네덜란드 동인도 총독이 되었다. 이 공화주의와 혁명가의 배경은 1815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왕국에서 그를 논란의 여지가 있게 만들었고, 1815년에 그에게 다소 모호한 골드 코스트의 주지사직을 부여함으로써 사실상 그를 나라에서 금지했다.
덴델스는 다소 낡은 네덜란드 소유물을 합법적인 무역에 의해 주도되는 아프리카 농장 식민지로 재개발하려고 노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의 자바 섬에 '그레이트 포스트 로드'를 건설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아샨티의 엘미나와 쿠마시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가 있는 포괄적인 도로 시스템을 포함한 매우 야심찬 인프라 프로젝트를 생각해냈다.
네덜란드 정부는 그에게 그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자유와 상당한 예산을 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덴델스는 그의 주지사직을 네덜란드 골드 코스트에서 민간 사업 독점을 확립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다.
하지만 단델스가 1818년 5월 8일 네덜란드 정부 소재지인 조지 델미나 세인트 성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 그 계획 중 어느 것도 결실을 맺지 못했다. 그의 시신은 엘미나 마을의 네덜란드 묘지에 있는 중앙 무덤에 묻혔다. 그는 그 나라에 온 지 2년이 채 되지 않았다.
4.1.4. 쇠퇴와 몰락
19세기부터 네덜란드 골드 코스트는 서서히 혼란에 빠졌다. 이 기간 동안 유일한 실질적인 발전은 네덜란드 동인도 군대의 군인 모집이었다. 소위 벨란다 히탐[12]의 모집은 네덜란드 군대가 자바 전쟁(1825-1830)에서 수천 명의 유럽 군인과 훨씬 더 많은 수의 "원주민" 군인을 잃었음 과 동시에 벨기에의 독립(1830)으로 인해 자체 인구 기반이 감소한 비상 조치로 1831년에 시작되었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군대의 원주민 수가 원주민 군대의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총 병력의 약 절반으로 제한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골드 코스트에서 군대를 추가하는 것은 군대의 힘과 충성심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회로 보였다. 또한 아프리카 군인들이 유럽 군인들보다 네덜란드 동인도의 열대 기후와 열대 질병에 더 저항하기를 바랐다.
1836년, 네덜란드 정부는 아샨티헤네를 통해 군인을 모집하기로 결정했다. 얀 베르비어 소장은 1836년 11월 1일 이 목적을 위해 엘미나에 도착했고, 약 900명의 대표단과 함께 쿠마시의 아샨티 수도로 갔다. 오랜 협상 끝에, 콰쿠 두아 왕과의 합의에 도달했다.
그렇게 쿠마시에 모집 창고가 설립되었으며 왕은 젊은 아샨티 왕자 콰시 보아치와 콰메 포쿠를 베르비어 장군과 함께 네덜란드로 보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콰시 보아치는 나중에 델프트 대학교의 선구자에서 교육을 받았고 네덜란드 동인도 최초의 흑인 네덜란드 광산 엔지니어가 되었다.[13]
4.2. 영국령 골드코스트
영국령 골드코스트는 1821년부터 1957년 가나로 독립할 때까지 서아프리카의 기니만에 있는 영국의 왕실 식민지였다.골드 코스트라는 용어는 또한 골드 코스트 주지사의 관리 하에 있던 네 개의 개별 관할권을 모두 설명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이들은 골드 코스트 전테, 아샨티, 북부 영토 보호령 및 영국령 토고를 지배했다.
4.2.1. 영국의 골드코스트 점령
19세기 후반까지, 영국은 정복이나 구매를 통해 해안을 따라 있는 대부분의 요새를 점령했다. 두 가지 주요 요인이 영국 통치의 기초와 결국 골드 코스트에 식민지 설립을 마련했는데, 이는 아산티 전쟁에 대한 영국의 반응과 그에 따른 무역의 불안정과 혼란, 그리고 노예 무역의 억압과 제거에 대한 영국의 집착 증가였다.
19세기의 대부분 동안, 아칸족 내부의 가장 강력한 국가인 아샨티 제국은 영토를 확장하고 무역을 촉진하고,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주변 지역에 대한 첫 번째 아산티 침공은 1807년에 일어났는데, 아샨티는 1811년의 가판테 전쟁과 1814-16년의 아샨티-아킴-아콰핌 전쟁에서 다시 남쪽으로 이동했다.
이러한 침략은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깃털, 상아, 고무, 팜유와 같은 제품의 무역을 방해했고, 유럽 요새의 안전을 위협했다. 현지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당국은 모두 아산테와 합의해야 했다. 1817년에 아프리카 상인 회사는 아산테가 해안과 그 사람들의 넓은 지역에 대한 주권을 주장하는 것을 인정하는 우정 조약에 서명했다.
아프리카 상인 회사의 자산은 주로 9개의 교역소 또는 공장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 Fort William
- Fort James
- Fort Sekondi
- Fort Winneba
- Fort Apollonia
- Fort Tantumquery
- Fort Metal Cross
- Fort Komenda
- Cape Coast Castle[14]
해안 사람들, 주로 판테의 일부와 주로 가였던 아크라의 새로운 마을의 주민들은 아산테 침입에 대한 영국의 보호에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상인 회사들은 그러한 보안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적이었다. 결국 영국 왕실은 1821년에 회사를 해산하여 시에라리온 식민지의 주지사인 찰스 맥카시에게 골드 코스트의 영국 요새에 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영국 요새와 시에라리온은 세기 상반기 동안 공동 관리 하에 남아 있었다. 맥카시의 임무는 평화를 강요하고 노예 무역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는 해안 사람들이 쿠마시 통치에 반대하도록 장려하고 해안으로 가는 큰 도로를 폐쇄함으로써 이것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사건과 산발적인 전쟁은 계속되었다. 1824년에 맥카시는 사망했고 그의 군대의 대부분은 아산테 군대와의 전투에서 전멸되었다. 영국은 1826년에 판테와 아크라 사람들을 포함한 영국군과 지역군의 연합군으로 해안의 아산테 침공을 물리칠 수 있었다.
4.2.2. 아샨티 제국과의 전쟁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샨티 제국이 1823년 2월 1일 왕립 아프리카 군단의 아프리카 군인을 납치하고 살해했을 때 발생했다. 몇몇 영국 군단이 함정에 빠졌으며. 그 결과 영국군은 10명이 사망하고 39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를 안 아샨티는 협상을 시도했지만 영국 주지사 찰스 맥카시 경은 해안의 판테 지역에 대한 아샨티의 영유권 주장과 아샨티의 협상 제안을 거절했다.
맥카시는 케이프 코스트에서 두 개의 기둥으로 침략군을 이끌었다. 영국에 맞서기 위해 이동한 것은 "롱 데인" 머스킷으로 무장한 10,000명의 아샨티 부대였다.
아샨티 군대는 매우 잘 훈련되어있었다. 완벽한 순서로 행진했고, 총은 적을 향해 돌아서서 명령에 따라 일제사격을 발사하기 전에 정확히 같은 각도로 운반되었다. 아샨티는 일반적으로 "롱 데인" 머스킷을 위한 총알이 없고 대신 못을 사용했는데, 이는 효과적인 대체품으로 판명되었다.
아샨티 제국의 군대가 행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맥카시는 현명하지 않게 그의 군대를 나누었다. 맥카시는 그가 직면하고 있던 아샨티 군대가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전진경비대 대신 주요 아샨티 군대였다는 것을 깨닫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주지사는 1824년 1월 22일 니사만코 전투에서 약 10,000명의 아샨티 군대와 마주쳤을 때 두 번째 대열과 헤어진 500명의 첫 번째 대열에 있었다.
그렇게 영국군은 탄약이 다 떨어졌고, 손실을 입었고, 아샨티 제국에게 압도당했다. 거의 모든 영국군은 즉시 사망했고 20명은 겨우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맥카시는 소위, 그리고 비서와 함께 후퇴를 시도했지만, 그는 총격으로 부상을 입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총에 맞은 후 결국 사망했다.
소위는 또한 맥캐시의 시신을 방어하려다가 살해당했다. 비서 윌리엄스는 몇 달 동안 오두막 포로로 잡혔고[15] 다행히 석방되었을 때 아샨티 부국장이 윌리엄스가 그에게 보여준 이전 호의로 인해 그의 생명을 인정하고 구했을 때 그는 죽음을 면했다고 이야기했다.
맥카시의 두개골은 금으로 장식된 후 아샨티헤네의 술잔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목격자는 "맥카시와 가까이 누워 있는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이는 소위를 보았다"고 말했다. 아샨티족 중 일부는 그의 머리를 자르려고 시도했고, 이미 그의 목 뒤쪽에 상처를 입히기도 했다.
운 좋게도 이 위기에서 권위의 아샨티가 다가와 그가 약간의 친절을 받은 소위를 인정하여 영국군의 손을 들었다. 소위가 감각을 회복할 때, 그는 맥카시, 버클, 그리고 위더렐의 머리 없는 트렁크를 보았다.
목격자는 그가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그는 어떤 독특한 과정으로 인해 완벽한 보존 상태에 있는 머리와 같은 방에 있는 초가 창고 아래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알렉산더 고든 랭 소령은 그들의 운명에 대한 소식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아샨티는 해안으로 휩쓸렸지만, 질병은 그들을 되돌렸다. 골드 코스트의 새로운 주지사인 존 호프 스미스는 주로 아샨티의 많은 전통적인 적인 덴키라스를 포함한 원주민으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1826년 8월, 주지사는 아샨티가 아크라를 공격할 계획이라고 들었다. 아크라에서 북쪽으로 약 15킬로미터(10마일) 떨어진 평야에 방어 위치가 준비되었고 11,000명의 남자들이 기다렸다.
8월 7일, 아샨티 군대가 나타나 일부 왕립 해병대, 민병대 및 콘그레브 로켓 포대를 포함한 최고의 군대가 있는 영국 전선의 중심을 공격했다. 전투는 일대일 전투로 녹았지만 아샨티 군대는 중앙에서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측면에서 잘하지 못했다. 그리고… 로켓이 발사되었다.
신식 무기, 폭발, 로켓 흔적, 그리고 날아다니는 금속 파편으로 인한 심각한 상처로 인해 아샨티는 결국 후퇴했다. 곧 그들은 현장에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도망쳤다. 1831년에, 프라 강은 조약의 국경으로 받아들여졌다.
2차 영국-아샨티 전쟁은 1863년에서 1864년 사이에 일어났다. 1863년, 대규모의 아샨티 군대는 제국의 도망자 퀘시 기아나를 찾아 영국과의 국경이었던 프라 강을 건넜다.
영국군은 이에 대응했지만, 질병으로 인해 양측이 실제 전투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어느 쪽도 승리를 주장하지 않았다. 결국 2차 전쟁은 1년만인 1864년에 끝났고 그 결과는 많은 사상자 뿐이었다.
그렇게 국경 분쟁 정도에 가까웠던 2차 전쟁 이후 약 10년동안은 영국과 아샨티 제국 사이에 아무 분쟁이 없었다. 그런데…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으니...
4.2.3. 네덜란드령 골드코스트 합병
네덜란드 요새는 19세기에 식민지의 역류였던 반면, 영국 요새는 특히 1850년 영국이 덴마크 골드 코스트를 점령한 후 천천히 완전한 식민지로 발전했다. 영국에 의해 점점 더 영향을 받은 지역에서 네덜란드 요새의 존재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1850년대 후반에 영국은 더 일관된 영향력을 창출하기 위해 네덜란드 요새의 인수 또는 요새의 무역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정치 환경에서, 인수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요새 거래가 협상되었다. 1867년, 아프리카 골드 코스트의 영토 교환을 위한 영국과 네덜란드 간의 협약이 체결되었고, 엘미나 동쪽의 모든 네덜란드 요새는 영국에 넘겨졌고, 엘미나 서쪽의 영국 요새는 네덜란드에 넘겨졌다.
강력한 내륙 아샨티 제국과의 오랜 동맹이 영국과 동맹을 맺은 그들에게 할당된 새로운 요새 주변의 해안 판테 인구와 잘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무역은 네덜란드에게 재앙으로 판명되었다. 코멘다 요새 주변의 지역 주민들을 지배하기 위해, 네덜란드인들은 지역 수도인 크와시-크롬에 원정군을 보내야 했다. 한편, 판테 연합은 네덜란드와 그들의 아샨티 동맹국들을 엘미나에서 몰아내기 위해 설립되었다.
동맹은 1868년 3월에 엘미나로 진군한 군대를 설립했다. 비록 군대가 4월에 마을을 포위할 만큼 충분히 강한 것으로 여겨졌지만, 동맹에서 연합된 다양한 부족들 사이의 투쟁은 5월에 포위가 해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6월에, 연방과 엘미나 사이의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엘미나는 아샨티와 판테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연방에 의한 마을의 봉쇄는 해제되지 않았고, 엘미나와 아샨티 사이의 무역은 절대 최소로 떨어졌다. 엘미나가 동맹에 가입하도록 설득하려는 시도는 소용이 없었다. 엘미나와 네덜란드는 아샨티헤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샨티 제국의 군대는 1869년 12월 27일 엘미나에 도착했다.
놀랍지 않게도, 아샨티 군대는 판테 라이벌들에게 타협하지 않는 태도를 취했고, 아샨티가 지원하는 엘미네즈와 네덜란드로 이전된 새로운 판테가 지배하는 요새 사이의 타협의 전망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한편, 네덜란드에서 진행 중인 갈등은 식민지 전체를 영국으로 이전할 것을 요구했고, 점점 더 커졌다. 네덜란드의 엘미나 주지사인 코넬리스 나그글라스는 엘미네스가 그들의 도시를 영국에게 포기하도록 설득하려고 했다. 이것은 물론 마을에 아샨티 군대의 존재로 인해 복잡해졌으며, 심지어 1871년 4월에 잠시 동안 나그글라스를 체포했다.
그 해 2월, 영국과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 조약에 따라 식민지 전체가 총 46,939.62 네덜란드 길더에 양도되었다. 1872년 4월 6일, 의회가 조약을 비준한 후, 엘미나는 공식적으로 영국에 넘겨졌다. 네덜란드 골드코스트가 영국령 골드코스트로 합병되는 순간이었다.
4.2.4. 아샨티 원정
한편 '제1차 아샨티 원정'으로도 알려진 제3차 영국-아샨티 전쟁은 1873년부터 1875년까지 지속되었다. 1869년, 독일 선교사와 스위스 선교사가 토고에서 쿠마시로 끌려갔다. 그들은 여전히 1873년에 구금되어 있었다.영국령 골드코스트는 1867년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으며, 1872년에 영국은 아샨티가 영유권을 주장한 엘미나를 포함한 네덜란드 골드 코스트를 구입했을 때 영토를 확장했다.
네덜란드는 1656년에 아한타와 부트레 조약에 서명했다. 그 조약의 합의는 213년 이상 동안 매우 안정적이고 규제된 네덜란드-아샨티 외교 문제임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네덜란드 골드 코스트의 판매와 함께 바뀌었다. 아샨티는 새로운 영국 보호령을 침공했다.
가넷 울슬리 장군은 2,500명의 영국군과 수천 명의 서인도 및 아프리카 군대[16]와 함께 아샨티에 대항하여 파견되었고 그 후 영국에서 가명이 되었다. 그 전쟁은 헨리 모튼 스탠리와 G. A.를 포함한 전쟁 특파원들에 의해 다루어졌으며 군대와 의료 지침이 인쇄되었다. 영국 정부는 양측에 판매한 영국 무기 제조업체에 간섭하라는 항소를 거부했다.
울슬리는 1873년 8월 13일에 임명되었고 1874년 1월에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계획을 세우기 위해 골드 코스트로 갔다. 1873년 9월 27일 왕립 엔지니어 팀이 케이프 코스트 성에 착륙했다. 그들의 임무는 160마일(260km) 떨어진 쿠마시로 이어지는 단일 파일 트랙을 병력 이동에 적합한 도로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매일 행진이 끝날 때, 대략 10마일(16km)마다 요새화된 캠프는 적대적인 원주민에 대한 보호를 제공하기 위해 나무와 덤불을 제거한 지역의 창고 안에 70피트(21m) 길이의 오두막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다.
4.3. 기타
한 편, 1860년 가나 북부에는 자르마족계 다민족국가였던 자바르마 토후국이 세워져 서아프리카의 패권을 쥐기도 했었다.그러나 독일, 프랑스, 영국의 위협을 받았다가 결국 1897년 및 1898년, 영국과 프랑스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5. 현대
5.1. 콰메 은크루마
은크루마는 아프리카의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범아프리카주의를 주창했다. 은크루마는 미국의 링컨 대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범아프리카주의를 접했고, 1960년대에 마커스 가비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윌리엄 에드워드 부르크하르트 두 보이스 등의 주장을 국정 운영 방침으로 삼았다. 또한 은크루마는 비동맹 운동의 결성을 이끌었으며, 콰메 은크루마 사상 연구소를 세우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을 가르쳤다. 오늘날 가나에서는 은크루마의 생일인 9월 21일을 설립자의 날로 공휴일로 지정하고 은크루마를 기린다.5.2. 콜드촙 작전과 그 이후
1966년에 쿠데타가 일어나 은크루마 정부(가나 제1공화국)가 전복되고 국가자유위원회(National Liberation Council)가 이끄는 군사 정부가 들어섰다. 은크루마가 중국을 방문해 저우언라이와 만나고 있을 때, 가나군은 1966년 2월 24일 이매뉴얼 콰시 코토카 대령을 중심으로 콜드촙 작전(Operation Cold Chop)을 펼쳐 쿠데타를 일으키고 은크루마 정부를 무너뜨렸다. 가나군은 국가자유위원회를 구성했으며 조지프 아서 안크라 중장이 의장을 맡았다. 그 후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아쿠포 아도가 민족해방위원회(NLC) 정권에 의해 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헌법 위원회 의장(1969년 제7차 공화당 헌법 초안)으로도 임명되었다. 그는 또한 같은 기간 동안 NLC 정치 위원회의 수장이었고 1970년부터 1972년 쿠데타로 퇴위 할 때까지 아쿠포 아도는 가나의 대통령직을 수행했다.(가나 제2공화국)1972년 1월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최고 군사 위원회의 의장 이그네이셔스 쿠투 아쳄퐁 중령이 정권을 잡았다. 1979년 6월에 다시 쿠데타가 일어나 새로운 최고 군사 위원회가 세워졌고, 민간 통치로 이행하기 위한 조치로서 대통령 선거를 진행하고 9월 24일에 민간 행정부로 정권을 이양했으나(가나 제3공화국) 1981년에 공군 대위 제리 롤링스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임시 국방 평의회 의장으로 정권을 잡았다. 임시 국방 평의회는 헌법을 정지하고 정당 활동을 금지했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자 롤링스는 경제 개선 정책을 펼쳐 1980년대 중반까지 경제성장을 활성화시켰다.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다당제를 다시 도입했으며, 롤링스는 국민민주회의 후보로 나서 대통령으로 뽑혔다.(가나 제4공화국) 롤링스는 1996년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도 당선됐다.
5.3. 21세기
21세기에는 2000년에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뽑힌 신애국당의 존 쿠푸오르는 2001년 1월 7일에 가나의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2004년에 다시 당선되며 가나에서 적법하게 당선된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은 최초의 인물이 됐다.2009년 1월 7일 국민민주회의의 존 아타 밀스가 대통령으로 올랐고, 2012년 7월 24일에 밀스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죽자 부통령이었던 존 드라마니 마하마가 대통령이 됐다.
2013년 1월 7일에 존 드라마니 마하마가 대통령으로 올랐고, 2017년 1월 7일에 나나 아쿠포아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1] 니제르 강에 의해 배수된 현대 가나의 북쪽 지역[2] 다른 국가는 중앙 수단의 가오와 카넴이다[3] 현재 북부 가나와 남부 부르키나파소. 위키백과 링크[4] ‘다그밤바’라고도 불린다[5] 바와라고도 알려져 있다.[6] 1416년–1432년[7] 야니 또는 옌디라고도 함[8] 아샨티헤네와 비슷하다. 아샨티 제국이 피지배자였던 덴키라를 정복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부분.[9] 다만 덴키라 주의 수도는 현재 던크와온오핀이다.[10] 현재 가나의 데누 근처.[11] 현재의 성 안토니 요새.[12] "흑인 네덜란드인"을 뜻하는 인도네시아어[13] 여담으로 1997년 네덜란드 작가 아서 자핀은 콰시 보아치의 두 마음으로 두 왕자의 삶에 관한 소설을 썼다.[14] 행정 중심지였다.[15] 여담으로 그 오두막에는 맥캐시와 소위의 참수된 머리도 있었다고…[16] 일부 판테 왕국군이 동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