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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09:28:01

간도 참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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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farm.resources.ebs.co.kr/VOD_20120206_00223_THM.jpg

1. 개요2. 상세3. 여담4. 같이 보기

1. 개요

간도 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도 칭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인 중국 옌볜(延边) 훈춘[1]의 지명을 따서 훈춘 참변(琿春慘變)이라고도 부른다.

2. 상세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과 교전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군을 강제로 동원하여 토벌 작전을 실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맹부덕의 중국군이 먼저 독립군과 비밀리에 교섭해 버려 독립군은 1920년 8월부터 지린성으로 떠났다. 중국군은 빈 주둔지를 불태운 뒤 일본군에겐 이미 독립군이 도주해서 토벌에 실패했다고 변명했다.

중국의 손을 빌려 독립군을 토벌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일본은 아예 간도의 조선인들을 초토화시켜 버리기로 하고 8~9월에 계획을 수립해 25,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간도에 투입하였다. 마침 훈춘 사건이 발생하자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구실로 삼은 일본은 중국 측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간도를 자기네 앞마당인 것처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19사단을 주축으로 한 일본군은 3개의 토벌 지역을 편성해 독립군 섬멸 작전을 펼쳤지만 이미 독립군은 피난한 상태였기 때문에 효과가 없었다. 이런 학살에 살인, 체포, 강간, 방화로 인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준으로 약 3,016명[2]이 사망했고 한인 지역들은 초토화됐다.

3. 여담

4. 같이 보기



[1] 한국 한자음으로는 혼춘이지만 만주어 hvncun에서 따온 것이라 훈춘이라고 읽는다.[2] 박은식, 독립 운동 지혈사[3] 하지만 얼마 안 있어 또 다른 참변이 기다리고 있었다.[4] 칼로 찌르고, 불에 태우고, 생매장시키고, 솥에 삶아 죽이는 등 잔인하기 그지없었다. 약탈, 방화, 구타, 고문, 강간 등 군대가 민간인에게 범할 수 있는 온갖 범죄가 함께 저질러졌음은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