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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9:49:04

강태원(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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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원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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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6.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7.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8.svg파일:해태 타이거즈 우승 엠블럼 V9.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반지
1991 1993 1996 1997

파일:KBO 퓨처스리그 엠블럼.svg
1993 KBO 퓨처스 남부리그 최우수 평균자책점

{{{#fff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51번}}}
결번 강태원
(1989~1990)
김성훈
(1991~1993)
해태/KIA 타이거즈 등번호 20번
기영록
(1990)
강태원
(1991~2001)
오봉옥
(2002~2003)
}}} ||
파일:강태원 신안산.jpg
<colbgcolor=#f27024><colcolor=#ffffff> 신안산대학교 야구부 감독
강태원
姜泰遠 | Kang Tae-won
출생 <colbgcolor=#fff>1971년 5월 15일 ([age(1971-05-15)]세)
전라남도 순천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해남옥동초 - 화순중 - 순천상고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 입단 1989년 고졸 연고구단 자유계약 (해태)
소속팀 해태-KIA 타이거즈 (1989~2001)
지도자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17)
광주동성중학교 야구부 코치 (2018)
세한대학교 야구부 코치 (2019)
덕수고등학교 야구부 코치 (2020)
안산 U-16 클럽팀 코치 (2021~2022)
신안산대학교 야구부 감독 (2022~)
프런트 KIA 타이거즈 스카우트 (2002~2009)
삼성 라이온즈 스카우트 (2010~2016)
kt wiz 스카우트 (2017)

1. 개요2. 선수 경력3. 은퇴 후4. 플레이 스타일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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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안산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이자 前 해태-KIA 타이거즈의 좌완투수. 해태에서 보기 드문 왼손잡이로 주로 마당쇠로 전천후 등판하며 활약을 했다.

여담으로, 80년대~2000년대까지 타이거즈에서 팀을 한 번도 옮기지 않고 원클럽맨으로 뛴 유일한 선수다.

2. 선수 경력

광주상고에 입학했으나 순천상고로 전학하여 졸업한 뒤[1] 1989년에 입단한 후, 두각을 보이진 못했으나 꾸준히 실력을 키워 오다, 1994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축선수로서 활약했다. 최고 구속이 135km/h로 야구 선수로서는 다소 불리했으나, 타자와의 수싸움에[2] 진가를 발휘하며 자리를 잡아갔던 것. 1995년부터는 선수 달력에서도 제법 크게 사진이 실리는 등 비중이 부쩍부쩍 늘어났다. 2001년 은퇴할 때까지 '왕조'의 최전성기 막바지에 데뷔하여 후기 왕조에 기여하고 해태의 쇠퇴기를 함께한 선수.

통산 성적은 16승 24패 6세이브 6홀드 평균자책점 4.39. 커리어하이는 1995년. 십년을 넘게 뛰었음에도 차명석이나 방수원, 송유석처럼 홀드가 늦게 집계되어 성적에서 꽤 손해를 본 케이스. 여담으로 김응용 감독 참외 사건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3. 은퇴 후

현역 은퇴 후 KIA 타이거즈, 삼성 라이온즈, kt wiz 등 다수의 프로야구단에서 스카우트로는 활동했으나 지도자의 연과는 닿지 못했다. 2017년 kt wiz의 스카우트를 그만둔 후 전주고등학교 야구부 코치를 시작으로 광주동성중학교, 세한대학교, 덕수고등학교, 안산 U-16 클럽팀 등 코치를 역임하다가 2023년 새롭게 창단된 신안산대학교 야구부의 초대 감독으로 선임됐다.

4. 플레이 스타일

인터벌이 역시 느린 공 투수였던 당시 삼성의 성준과 맞먹는 '공포의 투수'이기도 하다. 한동안 농담소재로 곧잘 쓰였던 박한이 vs. 성준은 성준이 1999년에 은퇴한 후 박한이가 입단하면서 상상으로 남았지만, 강태원 vs. 성준 두 '라이벌' 간의 대결은 이미 수 차례 펼쳐진 바 있다.[3][4]

구종이 별로 많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LG 트윈스에서 이적해 온 이병훈[5] "구종도 많지 않으면서 왜 그리 포수 사인을 자주 거부하느냐?"고 묻자, "그렇게 하면 상대가 내 구종을 쉽게 짐작못할 것"이라 답했다고 한다.[6]

5. 여담

6. 관련 문서



[1] 당시 동기생이 이경복, 조웅천이었고, 조웅천과는 둘 다 팀의 간판 미들맨이었던지라 현대와 해태가 맞붙은 1996년 한국시리즈홀드 제도가 처음으로 도입된 2000년에 조웅천과 강태원을 라이벌로 엮은 기사가 종종 나오곤 했다.[2] 상단의 사진에서 보듯 표정 변화가 별로 없다. 1류 도박사처럼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타자들과 머리 싸움을 할 수 있는 선수였다는 것.[3] 이병훈 해설위원이 "강태원과 성준이 맞대결을 펼치면 경기 막바지에 어느새 수염이 덥수룩하게 나 있더라"라는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고 2004년 브레인 서바이버에 나와 추가로 썰을 풀기를, 경기 시작 전에 경기 끝나고 가질 지인과의 술 약속을 잡고 시간까지 정해놨다가 선발 매치업이 강태원 vs 성준이면 그 지인에게 다시 전화해 "야 그냥 전화하면 나와"라고 얘기했다고 한다.[4] 전설의 타이거즈에서도 김정수의 증언으로, 성준과 강태원은 인터벌이 길어서 장점을 발휘한 투수였는데, 그 당시에는 지루하고 루즈한 플레이를 같은 야구선수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힘들었다고 말했다.[5] 이 무렵이 김응용 감독이 "타자로 대성할 선수"라며 이 선수에게 애정어린 갈굼을 시전하던 시기. 나중의 갈등과는 별개로 "대성할 수 있었는데, 술이 그를 망치고 말았다."며 인터뷰에서 안타까움을 표시한 바 있다.[6] 이병훈이 해설가로 활동할 무렵 이 일화를 얘기하며, "우리 마누라도 강태원 구종이 2개인거 다 알아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7] 최종 성적은 이승엽 32개, 이종범 30개로 딱 두 개 차이였다. 이종범은 스톡킹에 출연해 '차라리 볼넷을 내주지 홈런을 맞냐고 농담삼아서 욕을 살벌하게 했다'고 술회했다.[8] 강태원이 은퇴하던 시기, 해태 투수코치였다.[9] 서양식 모자는 실내에서 벗고 실외에서만 착용하는게 모자 착용 예의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