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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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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김용만(2) 장진범
조종규
(4명)
강정남
김윤환
조도연
문희수
(7명)
김기철
김태업
선동열
신태순
이순철
최상주
허세환(1)
(10명)
강상진
김경호
김대현
김정수
김평호
백재우(1)
신동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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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채근
차동철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백인호
박철우
김만후
송영복(1)
조계현
한경수(1)
이광우
이강철
장호익
정회열
이호성
오희주
1992년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박재홍 이종범 최재영 김동호 김종국
(고졸)
김상훈
김상진
서재응(1)
1997년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오철민
(고졸)
김병현(1)
김원(1)
김준희(1)
최희섭(1)
(고졸)
강철민
김정진(1)
이현곤
정성훈
(고졸)
류찬
김성호 정원
2002년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김진우 고우석 김주형 곽정철 한기주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정영일(1)
오준형
전태현 정성철 심동섭(2) 한승혁(2)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박지훈(2) 손동욱(2) 차명진 이민우 김현준
2017년 2018년 2019년 2020년 2021년
유승철 한준수 김기훈 정해영 이의리
2022년 2023년 2024년 2025년
김도영 윤영철(2) 조대현(2) 김태형(2)
(1) 지명 후 미입단 / 지명 거부
(2) 1차 지명 미시행 연도 (1라운드 지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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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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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oeiwjnFKre1sqk8veo7_r1_540_2.jpg 1984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 MVP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2번
최상주
(1985~1988)
<colbgcolor=#000> 이광우
(1989)
오희주
(1991~1992)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0번
김준환
(1982~1989)
이광우
(1990~1991)
박노준
(1992)
OB / 두산 베어스 등번호 11번
계형철
(1982~1991)
이광우
(1992~2001)
김덕용
(2002)
LG 트윈스 등번호 17번
최경환
(2000~2001)
<colcolor=#fff> 이광우
(2002)
우규민
(2003)
KIA 타이거즈 등번호 76번
차영화
(1996~2000)
이광우
(2006~2009)
조규제
(2011~2013)
두산 베어스 등번호 83번
황병일
(2013)
이광우
(2014~2021)
정진호
(2022)
두산 베어스 등번호 77번
박웅
(2021.5.5.~2021)
이광우
(2022)
이승엽
(2023~)
두산 베어스 등번호 87번
박철우
(2015~2022)
이광우
(2023~2024)
결번
}}} ||}}} ||
파일:23이광우코치.png
이광우
李光雨 | Lee Kwang-Woo
출생 1965년 3월 14일 ([age(1965-03-14)]세)
전라북도 익산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군산초 - 군산중 - 군산상업고 - 원광대 (체육교육학 / 학사)
신체 182cm, 83kg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입단 1989년 1차 지명 (해태)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1989~1991)
OB-두산 베어스 (1992~2001)
LG 트윈스 (2002)
지도자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3)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4~2005)
KIA 타이거즈 2군 재활코치 (2006)
KIA 타이거즈 1군 투수코치 (2007)[1]
KIA 타이거즈 재활코치 (2007~2009)[2]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투수 인스트럭터 (2010)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11~2013)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 (2014)[3]
두산 베어스 1군 투수코치 (2014)[4]
두산 베어스 2군 재활코치 (2015)
두산 베어스 잔류군 투수코치 (2016~2017)
두산 베어스 2군 트레이닝 코치 (2018~2024)
본관 경주 이씨[5]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KIA 타이거즈3.2. 아마추어3.3. 두산 베어스
4. 연도별 성적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해태 타이거즈, OB 베어스, LG 트윈스의 투수.

현역 시절엔 쓰리쿼터 투구폼으로 패스트볼-슬라이더의 투피치 투수로, 주로 미들맨과 임시 선발을 오고가던, 돋보이진 않지만 소속팀에 소금과 같은 역할을 했던 투수였다. 포크볼을 던지기 위해 검지와 중지 사이를 5mm가량 찢는 수술을 감행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수술 부위가 아물어서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한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1984년 청룡기에서 군산상고가 우승할 때 최우수 선수도 그였으며, 청소년 대표로도 발탁되는 등 고교 최고의 투수 중 하나로 각광을 받았다.[6]

당연히 초고교급 투수였던 그에게 서울의 유명 대학교들이 스카웃 제의를 했지만, 동기들과 지역 대학교 동반 진학으로 압력을 넣은 지도자와 학부모 때문에, 결국 고교 동기 8명을 데리고 원광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했는데, 함께 입학한 선수로는 정명원도 있다. 원광대에 진학해서도 고교시절의 명성을 이어가며 1학년때부터 에이스이자 지역을 대표하는 정통파 우완투수로 인정받아 국가대표에 발탁되었다. 대학 2학년인 1986년에는 춘계리그에서 팀 창단 처음으로 우승[7]이라는 영광을 모교에 안겼다.

이광우는 원광대 1학년 때부터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당대를 대표하는 아마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었으며, 대학 4년내내 태극마크를 달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도 국가대표로 참가하여 최다투구이닝 (12이닝)을 기록하고 캐나다전에서 1승을 올리는 등, 그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2.2. 해태 타이거즈

원광대학교 졸업 후 해태 타이거즈는 연고 지역내 최고 선수로 평가받던 그를 1차 1순위로 지명했는데, 88올림픽 때문에 한해 더 아마추어로 발이 묶인 군산상고 1년선배 조계현, 동기인 국가대표 언더핸드 이강철과 함께 국가대표 신인투수 3인방으로 꽤나 화제가 되었다.

당시 짠돌이 구단 해태로서는 파격적인 4,1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했으며, 아마 시절 엄청난 명성을 떨친 선배 조계현의 3,500만원보다도 더 많은 액수를 지급했을 정도로 특급신인으로 기대가 엄청나게 컸다. 물론 조계현의 이름값은 이광우나 이강철보다 높았지만, 고교 시절부터 엄청난 혹사로 팔이 이미 망가져서 예전의 강속구를 못 던진다는 평가가 나왔고, 조계현의 연세대 재학시절 중 2, 3학년때는 아예 타자로 나올 때가 더 많아서 기대치가 많이 떨어져 있던 상황인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 때문에 당대 최강팀에 선동열을 위시한 투수진도 풍족했던 해태 타이거즈는 뭘 해도 잘 풀린다는 부러움 섞인 시샘을 받았는데, 정작 구단 관계자들은 '거물급이 한꺼번에 3명이나 들어와서 계약금이 부담스럽다'는 배부른 소리를 해대서 욕을 먹기도.[8]

당시 1차지명급 대졸 신인 계약금이 1,500~2,000만원선, 국가대표급 투수들도 3천만원에 근접하면 꽤 수준이 높은 선수에게나 지급하던 금액이었으며, 같은해 입단한 좌완특급 송진우가 당해 신인 최고 계약금 4,200만원을 받았으니, 이광우는 완전히 무명이던 정명원과 함께 이야기될 차원의 선수가 아니었다는 증거.[9]

다만 입단 동기인 이강철은 첫해부터 15승을 거두며 한희민의 뒤를 잇는 잠수함 투수로 각광을 받았고, 조계현도 우려를 딛고 비록 승수는 7승으로 적었지만 174이닝을 던지며 평균자책점 10위 (2.84)에 올라 이름값을 어느 정도 해낸 반면, 이광우는 1989년 입단 초부터 발가락부상, 어깨부상 등이 연이어 발생하는 고초 끝에 22게임에 등판, 5승 4패,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여 명성에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고 말았다. 이듬해에도 자잘한 부상으로 인해 투구 밸런스가 무너지며 부진은 계속되었고, 결국 세 시즌 동안 8승 12패 3세이브의 초라한 성적으로 전혀 이름값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자신감을 잃은 이광우는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1992년 박노준과 맞트레이드 상대가 되어 OB 베어스로 이적한다. OB는 이광우가 과거 국가대표 에이스급 투수였으니 페이스만 찾으면 몫을 해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투수는 포기하고 타자에만 전념하여 3할 타율을 기록한 거물 박노준을 과감하게 트레이드 카드로 내미는 강수를 두었다.[10][11]

2.3. OB 베어스

파일:OB 베어스 이광우 투수.jpg

OB 베어스 이적 첫 해 중간, 마무리, 선발을 전천후로 오가며 31경기에 등판 7승 6세이브를 올렸는데, 당시 투수진의 부족으로 곤란을 겪던 팀에 박철순과 함께 불펜의 중심을 잡고 소금같이 필요한 존재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다.

1993년 32경기 7승 6패 2세이브, 2.96의 평균자책점, 1994년 23경기 8승 4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2.29로 전천후 역할을 수행했고, 이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이광우에게 따라붙는 'LG 킬러'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90년대 LG는 좌타라인을 중심으로 빠르고 공격적인 야구를 전개하여 인기몰이 중이었는데, 쓸만한 좌완투수가 없어 늘 LG 좌타자들의 봉쇄에 곤란을 겪던 OB측에서 잠실 라이벌전에 내밀 수 있는 필승카드가 되었다. LG전만은 엄청난 구위를 가지고도 유독 큰 경기에 약해 새가슴 소리를 듣던 에이스 김상진보다 더 든든한 존재였으며, LG전에는 아예 표적등판 비슷하게 선발로만 고정으로 출장해 완봉승을 거두는 등, 93년부터 대 LG전 9연승을 올리기도 했다.

프로야구 원년 이후 OB가 13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던 1995년은 부상과 부진으로 거의 경기에 나오지 못했고, 이듬해에도 17경기에 나와 1승 8패로 별다른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 1997년에는 조금씩 선발로 나오는 경기가 많아졌으며 29경기 8승 7패 2세이브, 4.54의 평균자책점으로 투수진의 한 축을 담당했고, 1998년에도 28경기 5승 6패 4.33으로 하위 선발과 롱맨을 오가는 역할을 해 주었다.

이 시점에 화제가 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포크볼을 던지기 위해 손가락 사이를 찢는 수술을 받은 것!

1998 시즌이 끝나고 이광우는 본인 요청으로 정형외과에 가서 검지와 중지 사이를 5mm 가량 찢는 수술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외국인 선수들이 들어오면서 주무기인 슬라이더 하나만으로는 버티기가 힘들다는 판단하에, 종으로 떨어지는 포크볼을 연마하겠다는 마음으로 수술을 강행한 것이었다. 당시 30대 초반이면 은퇴하는 선수가 많았던 상황을 고려한다면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손가락이 짧아 포크볼 그립을 잡기 힘들어 고민 끝에 결심을 내렸다고 한다. 이 일은 스포츠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나오며 잠시 화제가 되었는데, 워낙 이광우의 눈빛이 매서워 조폭이 오줌 지릴 만한 수준인 덕분에, OB팬들 사이에서는 '이광우가 조폭이 휘두르는 칼을 손가락 사이에 끼워 제압하고 치료 받으러 간 거다' 라는 황당한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12]

그 덕분인지 팀명을 OB에서 두산으로 바꾼 1999년에는 선발로 32경기에 나와 9승 8패를 기록했는데, 이는 본인의 역대 최다승이었다. 손가락을 찢어가며 터득한 포크볼이 효자 노릇을 제대로 하면서 선발진의 한 축으로 자리잡아 줬고, 두산은 그 해 리그 승률 1위에 올랐으나 플레이오프에서 구대성, 정민철, 송진우 3인방에 댄 로마이어, 제이 데이비스, 장종훈을 앞세운 한화에 완패했다.

2000년, 35세가 된 해에 드디어 선발투수로서 최고의 시즌을 보내게 되었는데, 29경기 11승 3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70의 성적으로 데뷔 첫 10승을 거두고 사실상 두산 베어스의 에이스 역할을 하게 되었다. 2000년도는 전년과 함께 사상 최고의 타고투저였던 해로 기억되는데, 구원과 선발을 오가던 구대성이 2.77로 유일하게 2점대 방어율을 기록했을 뿐, 2위가 3.12의 데니 해리거였을 정도였던 시즌에, 35세의 이광우는 타 팀 중심 투수들에 밀리지 않는 좋은 성적을 기록했던 것이다. 특히 친정팀인 해태 전에서 6년만에 완봉승으로 첫 승을 올린 이후 4개월 남짓한 기간에 11승을 거둬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2000년도는 '미라클 두산'으로 기억되는 포스트 시즌 명승부로 엄청난 화제를 불러오기도 했는데, 해태 입단 동기이자 고교 1년선배 조계현이 포스트 시즌 맹활약으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등 묘한 인연이 있기도 했다.

2001년에는 선발로 부진하여 중간계투로 29경기에 나와 2승 3패 평균자책 5.40으로 전년도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했다. 이 해의 두산은 선발투수가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고, 중간, 선발을 가리지 않고 전천후로 등판한 이혜천과, 무적 포스는 조금 떨어졌어도 여전히 특급 중무리였던 진필중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투수를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오죽하면 10승 투수 한 명도 없이 한국시리즈에 우승한 유일한 팀이었을 정도로 엉망인 투수진에서, 이미 36세의 이광우가 큰 역할을 맡기엔 구위나 체력이 버거웠다.

팀의 3번째 우승 이후 조계현최훈재 등 노장들을 정리하던 분위기에서 이광우도 은퇴하고 구단 스카우트로 진로를 결정한 상태였는데[13] 이 당시 LG 감독이던 김성근의 노장 수집으로 LG에서 1년 더 선수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2.4. LG 트윈스

물론 LG 킬러 이광우가 LG로 갔으니 별반 기대는 없던 상황이었는데, 역시나 김민기, 장문석, 이동현, 최향남, 신윤호 등 쓸 놈만 쓰는 분위기에서 37세가 된 그가 나올 일은 거의 없고 4경기 등판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통산 성적은 66승 65패 15세이브, 평균자책점 4.46.

해태 입단 당시의 명성이나 기대치에 비해서는 평범한 성적이긴 하지만, 보직을 가리지 않고 팀에 소금처럼 꾸준히 기여했던 점이나, 30대 중반 이후 새로운 구종(포크볼)을 습득해서 뒤늦게 좋은 성적을 거두는 등, 베어스의 역사에 충분히 기억 될만한 투수였다.

3. 지도자 경력

3.1. KIA 타이거즈

2003년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의 코치로 선임되어 2007년까지 잔류군 투수코치를 맡았다. 2007 시즌 중 재활코치로 보직이 변경됐고, 2009 시즌 후 김종모 수석코치와 같이 계약 해지 통보를 받는다.

3.2. 아마추어

그 후 성균관대학교 야구부의 투수 인스트럭터를 거쳐서 화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을 2013년까지 맡았다.

3.3. 두산 베어스

2014년 두산 베어스 2군 투수코치로 복귀했으나, 시즌 중 권명철과 자리를 바꿔 불펜 투수코치로 올라온 가득염과 같이 1군 투수코치를 맡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항명 파동에 연루된 선수들 중 두산 베어스에서 코치를 해 본 적이 있거나 하는 사람은 박철순, 권명철, 이광우 이 세 사람이 전부이다.

하지만 시즌이 끝나고 다시 보직을 바꿔, 재활코치로 내려갔다. 반대 급부로 올라온 건 권명철. 재활군에서는 주로 이현승을 담당한다고 한다. 그리고 2009년 이후 내리막을 타던 이현승을 살려 내면서 좋은 평을 듣기도 했다.

이후로도 2군과 재활군에서 트레이닝 전담 및 재활 코치로 장기 근속하다가 2024 시즌이 끝나고 재계약에 실패했다.

4.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89 해태 22 75⅔ 5 4 1 - 4.52 81 6 32 3 22 1.49
1990 20 56⅓ 2 5 0 - 5.91 75 9 13 6 27 1.56
1991 16 38 1 3 2 - 6.16 48 3 6 1 10 1.42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92 OB-두산 31 101⅔ 7 6 6 - 4.51 106 8 35 4 40 1.39
1993 32 124⅔ 7 6 2 - 2.96 126 5 21 4 51 1.18
1994 23 82⅔ 8 4 1 - 2.29 77 5 19 1 32 1.16
1995 6 12 0 2 0 - 12.00 26 2 3 2 7 2.42
1996 17 53⅓ 1 8 0 - 5.06 62 6 12 3 19 1.39
1997 29 119 8 7 2 - 4.54 124 8 27 10 86 1.27
1998 28 99⅔ 5 6 0 - 4.33 101 14 23 3 43 1.24
1999 32 112⅔ 9 8 0 - 5.43 135 22 28 5 66 1.45
2000 29 150⅔ 11 3 1 0 3.70 169 18 30 6 76 1.32
2001 29 58⅓ 2 3 0 0 5.40 70 9 25 7 22 1.63
<rowcolor=#ffffff>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2002 LG 4 5⅓ 0 0 0 0 11.81 9 3 1 1 3 1.88
KBO 통산
(14시즌)
318 1090 66 65 15 0 4.46 1209 118 275 56 504 1.36

5. 여담

6. 관련 문서



[1] ~6월 17일[2] 6월 18일~[3] ~8월 11일[4] 8월 12일~[5] 경주 이씨 38세손 '雨'자 항렬이다. 현재 이 연령대의 경주 이씨 사이에서 항렬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아버지뻘, 이건희 회장의 할아버지뻘,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증조할아버지뻘이다.[6] 1982년에도 우승했는데, 이 당시 MVP는 그의 1년 선배 조계현.[7] 춘계리그에서 원광대가 우승한 해는 1986년과 2010년 두 번이다.[8] 물론 당시 엄청난 짠돌이 구단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해태 입장에서는 거물 신인 계약금을 한꺼번에 3명이나 지출하는 게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오죽하면 이강철의 계약금을 실제 3,500만원 지급해놓고 4,200만원이라고 부풀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당시 가격 200원짜리 브라보콘 100원짜리 누가바 300원짜리 맛동산에 오예스 한통 12개들이에 1,200원였으니 힘들 만도 했다.[9] 물론 해태에서도 190의 장신에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연습 경기에서 엄청난 구위를 보인 정명원을 다크호스로 생각은 했지만, 아마 시절 비교 불가능한 경력과 서울올림픽 대표로서도 출중한 기량이 입증된 이광우를 놔두고 무명의 정명원을 지명하는 무리수를 둘 이유가 전혀 없었다.[10] 당시 여론은 OB가 아무리 급해도 5승 투수와 천하의 박노준을 바꿔먹느냐는 비난 일색이었다. 물론 이광우도 국가대표로 화려한 경력을 쌓았지만, 아마야구 역사상 최고의 스타였던 박노준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이미 투수로는 생명이 끝났지만 타자에만 집중해도 워낙 탁월한 베이스러닝과 뛰어난 수비, 천재적인 센스와 타격기술 덕분에 3할에 40도루는 언제든 할 수 있다는 박노준이었다. 물론 해마다 부상을 달고 다녀서 건강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했지만... 게다가 고등학교 때부터 구름같이 여성 팬을 몰고 다니던 박노준이 사라지면서, 90년대초 하위권을 맴도는 성적과 맞물려 OB의 팬덤은 오로지 박철순의 등판 때만 열광하여 잠실 구장을 찾는 처지가 되었다.[11] 다만 트레이드의 결과는 OB의 완승이라 할 수 있는데, 정작 박노준은 해태에서는 부상과 김응용 감독이 선호하지 않는 스타일로 인해 중용되지 못했고, 1994년 쌍방울로 다시 트레이드 되고 나서야 골든글러브와 도루 2위, 3할 타율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보여줬다. 게다가 그것도 한해 뿐...계속된 부상으로 1997년 초라하게 은퇴하고 말았다. 이광우는 OB 입단 후 화려하진 않아도 10년간 꾸준히 자기몫을 해주고 2번이나 우승반지를 획득했으니 OB의 이득이 맞다.[12] 코치 시절인 지금도 강렬한 인상과 눈빛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외모인데, 선수 시절에는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꽤 미남이었지만, 눈매와 눈빛만으로 조폭 두목 무릎을 꿇릴 만큼 눈에서 거의 레이저를 뿜는 수준이었다. 선수들과 사석에서 모임이 있을 때 팬들을 저절로 공손해지게 만들던 분.[13] 1994년 OB 베어스 항명파동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것도 컸으며 이광우 뿐 아니라 당시 이 사건의 주동자 중에 속했던 박철순, 장호연, 김형석, 김상호, 권명철 등이 쓸쓸히 은퇴했거나 타 팀으로 떠났지만 안경현은 오랫동안 베어스에서 선수생활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