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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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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국민대학(1946~1952)2.2. 해인대학(1952~1962)2.3. 마산대학(1961~1971)2.4. 경남대학(1972~1981)2.5. 경남대학교(1982~현재)

1. 개요

경남대학교의 역사, 주요연혁을 다룬 문서이다.

2. 상세

참고로 서울특별시에 있는 국민대학교와 창학 뿌리가 같다. 국민대학관이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기 위해서는 재단이 필요했고, 조선불교 총무부장이었던 최범술이 해인사 사찰재산을 기부하겠다고 나서면서 1948년 최범술을 재단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그런데 최범술 재단이 국민대학의 설립자이자 초대 이사장, 초대 학장이었던 신익희를 임의로 해고하자,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반발하여 '학장 유임운동'을 벌여 재단을 축출한다. 해공 신익희 학장의 국민대학에서 떨어져 나간 최범술 재단은 마포에 똑같이 '국민대학관' 간판을 달고 학교를 운영하다가 1952년 '해인대학'이라는 이름으로 변경, 현재의 경남대학교가 되었다. 관련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2.1. 국민대학(1946~1952)

194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을 계승하여 독립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육성한다는 건학이념으로 김구, 이승만, 김규식, 신익희 등의 독립지사들이 참여하여 1946년 12월 18일 실천궁행·구국독립·이교위가의 건학 이념으로 '국민대학관(國民大學館)'[1]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독립운동 지도자인 신익희 선생이 초대학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48년 8월 10일에 국민대학으로 승격된다.

2.2. 해인대학(1952~1962)

한국 전쟁으로 인해 1951년에 합천 해인사로 교사를 이전하고, 1952년 3월에 '재단법인 해인사'와 '해인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재단과 교명을 변경하였다.

전쟁 중 폭격으로 인해 해인사에 화재가 발생하자 진주 강남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60년에 문학부 종교학, 국문학, 영문학, 그리고 법상학부 법정학과, 상학과로 구성되어 학생정원 580명의 대학이 되었다.

1958년 씨름부 창단을 시작으로 복싱부, 배구부, 탁구부, 태권도부, 농구부, 수영부, 육상부가 창단되었다.

2.3. 마산대학(1961~1971)

1960년 이후 재단 분규가 심화되어 혼란기가 시작되었다.

1961년 2월, 고등교육기관을 희망하는 마산시의 유치노력으로 완월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마산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게 되었다. 하지만 같은 해 마산실업초급대학으로 강등되었고, 1963년에 관선이사로 구성된 상태로 3년간 지속되었다. 1966년에 흥국재단이 마산대학을 인수하고 1967년에 해인학원 재등장하였으나, 삼양학원이 다시 1968년에 마산대학을 인수하는 등 극심한 불안정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리고 1970년 5월 20일, 학교법인 경남학원이 삼양학원의 운영권을 인수하였다. 박재규 박사가 이사장 직무대리로 취임하였고 제2창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마산대학 시절인 이 당시에 '가라문화연구소'와 '산업경영연구소'가 설립되었다.

2.4. 경남대학(1972~1981)

1971년 12월 23일에 '경남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동시에 경영대학원을 설치하고 경남유치원을 개원, 현 고운관으로 불리는 1호관(인문관) 준공과 더불어 1973년 12월에 현 대학 부지인 마산시 월영동 449번지로 대학을 이전하여 현재의 월영캠퍼스 시대를 열었다.

1975년에 2호관이 준공, 1976년에 대학원이 설치되고 3호관 준공과 동시에 부속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1979년에 4호관이 준공, 교육대학원이 설립되었고 전자계산소가 설치되었다. 1980년에는 5호관이 준공되었고 중앙도서관 완공되어 종합대학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극동문제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된 통한문제연구소가 1972년에 설립되었고, 같은 해 법학문제연구소가 설립, 1973년에 농어촌개발연구소, 1975년에 시정문제연구소, 학생지도연구소, 1978년에 새마을연구소, 현 환경문제연구소로 명칭이 변경된 공해문제연구소, 1981년에 노동복지연구소가 설립되면서 한국사회 및 지역 공동체의 연구 수요 요구 부합하는 여러 연구소들이 설립되어 종합대학으로 승격이 가능한 체제가 완성되었다.

중앙도서관이 완공된 당시 1980년에 주간 31개 학과와 8개의 야간학과로 구성되어 졸업정원은 2,180명이였고 모집인원은 2,830명에 달했다. 1981년, 문교부의 졸업정원제 시행으로 대형 대학이 되었다.

1979년 10.26 사태의 기폭제가 된 부마항쟁(10.16-20)에서 마산 항쟁의 진원지로 민주화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경남대학 시절이던 1979년 당시 학생들의 10.18 학내 시위가 부산마산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어 경남대학 학생 1,000여 명이 기동 경찰 300여 명과 대치하였고, 이후 장소를 옮겨 3·15 의거탑에서 시민이 합세하여 1,000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유신 철폐와 독재 타도 및 언론 자유를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항쟁이 시작되었다.

1978년에 생긴 대학축제인 '월영축전'이 부마항쟁 당시 '한마축전'으로 개명되어 개최되었고 사마천 사기의 '汗血馬'에서 유래한 '한마'가 1981년에 학교 상징으로 월영지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오게 되었다.

2.5. 경남대학교(1982~현재)

1982년에 종합대학교로 승격하고,[2][3] '경남대학교'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어 39개 학과, 3처, 5개 단과대학, 3개 대학원, 8개 부속기관, 7개 부설연구소를 보유한 거대 지방 사학이 되었다. '진리·자유·창조'를 교육이념으로 지정하고 교가가 새로 제정되었다. 또한, 같은 해 실내체육관이 준공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 청와대 경호실장을 역임했던 박종규가 1대 총장(오너)으로 취임하였고, 1986년에 2대 총장으로써 그의 친동생인 박재규 박사가 취임하였다.[4] 그리고 다음해인 1987년에, '경남학원'에서 '한마학원'으로 재단 명칭이 변경되었다.

1984년에 산업대학원, 1987년에 행정대학원, 1997년에 북한대학원이 설립되었다. 1982년에 실내체육관이 준공되었고, 600명 수용의 한마생활관이 완공되었다. 1982년에 야구부가 창단되었고, 1986년부터 '한마대동제'로 축전이 개명되어 개최되었다.

1994년에 전국 대학 최초로 교원 연봉계약제가 도입되었고 동시에 급여 격차 문제가 발생되었다.

1998년에 과학영재교육센터가 설치되었고 2001년에 사회교육원이 평생교육원으로 개칭, 2004년에 산학협력단이 설립되었다. 2006년에 개교 60주년 기념관인 한마미래관을 기공하여 2008년 완공되었다.

1998년 문과대학 11개 학과, 자연과학대학 6개 학과, 사범대학 10개 학과, 경상대학 5개 학과 및 전공, 법정 대학 4개 학과, 공과대학 11개 학과 및 전공, 야간 강좌 12개 학과 및 전공으로 이루어져 총 학부 입학정원 3,650명을 달성하여 정점을 이루었다.

1999년에, 처음으로 학부제가 실시되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대학이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며 2004년에 프랑스언어문화전공, 독일언어문화전공, 러시아언어문화전공, 응용수학전공이 폐지되었고, 2005년에는 물리학전공, 생명과학전공, 화학전공, 에너지화학공학과, 신소재공학과, 산업공학과가 폐지되었다.

2009년 대학원 수요감소에 따라 석사과정은 3개의 통합학과, 박사과정은 4개의 통합학과만 남기고 석사과정 16개 학과, 박사과정 9개 학과를 폐지하였다.

2011년, 3,300명에 달하던 입학정원이 학령인구 감소로 2015년 3,000명, 2018년 2,900명, 2019년 2,875명, 2020년 2,840명, 2021년 2,740명, 2022년 2,195명으로 가파르게 축소되었다.

2021년 3월 기준, 4개 대학원, 7개 단과대학, 7개 학부(15개 전공), 44개 학과, 11개 부속기관, 17개 부설연구소 및 13만 여명의 동문, 1만 5,000명의 학생과 1,000여 명의 교직원으로 이루어져있다.

1946년 9월, 국민대학관으로 발족하여 2024년 기준 개교 78주년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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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렇기 때문에 국민대학교와 창학 뿌리가 같다.[2] 이는 당시 경상남도 소속이었던 울산광역시 소재 울산대학교에 비해 3년이나 앞선 시기다.[3] 여러모로 울산대학교와 비슷하다. 울산대학교는 현대그룹 후광을 업고 재계의 지원을 받고, 경남대학교는 정계의 전폭적 지원을 받아 역사를 시작했다.[4] 김대중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