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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 최영환(崔英煥) |
당호 | 금봉(錦峯) |
출생 | 1904년 5월 26일[1] |
경상남도 곤양군 서부면 금진리 (現 경상남도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 율포마을) | |
사망 | 1979년 7월 10일 (향년 75세)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보현암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585호 |
의원 선수 | 1 |
의원 대수 | 1 |
종교 | 불교 (법명 : 효당(曉堂))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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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승려, 정치인. 법명은 효당(曉堂), 본명은 최영환(崔英煥).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2. 생애
2.1. 해방 이전
1904년 5월 26일 경상남도 곤양군 서부면 금진리(現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 율포마을에서 아버지 최종호(崔鍾浩)와 어머니 광산 김씨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1915년 3월 곤양공립보통학교(現 곤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사천군(現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번지 다솔사(多率寺)에서 출가하면서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 그리고 1917년 합천군 해인사 지방학림에 입학해 환경(幻鏡)을 은사로 해 비구계를 받았다.해인사 지방학림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경성부 경성고등보통학교(現 경기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최원형(崔垣亨)으로부터 기미독립선언서를 입수했고, 등사판을 구매해 해인사에서 독립선언서 1만여 매를 인쇄했다. 이어 합천군·의령군·진주군·사천군 등 그 일대에 책임을 지고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또한 삼가면 장날을 이용해 일제 주요 기관을 습격하고 방화하는 등 만세시위를 지휘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혹사당했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방면되었다. 출옥 후에는 요양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해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그해 8월 박열·육홍균·박흥곤(朴興坤)과 함께 '불령선인회'를 조직하여 다이쇼 천황의 암살을 모의하고 계획하는 한편[2], 《불령선인지》를 간행했다. 이때 박열은 폭탄을 구매했고, 최범술은 중화민국 상하이시로 잠입해 그 폭탄을 입수해 일본 도쿄도까지 무사히 운반했다. 그러나 비밀이 일본 제국 경찰에 누설돼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결국 8개월간 구류형에 처해졌다.
이후 출옥했으나 3년간 29일씩 검거돼 구금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1925년 3월 도쿄도 릿쇼(立正) 중학교를 졸업했고, 1930년 3월 다이쇼대학 예과를 수료했다. 1930년 5월 한용운의 지도하에 조은택·박창두·김법린 등과 함께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해 경상남도 사천군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하여 비밀투쟁을 전개했다. 만당은 일제 식민지 정책 배척, 정교분리, 불교대중화, 불타정신의 구현 등을 행동강령으로 활동하였지만, 워냑 성향이 과격한 탓도 있고 애초부터 친일로 돌아선 조선 불교의 한계에 부딪쳐 별 활동을 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조선 불교를 관리하고 있던 관립 친일단체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예산 문제로 찍혀 있었다.
1933년 3월 다이쇼대학 불교학과 본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 조선불교청년동맹 중앙집행위원장, 삼십본산연합사무소[3]의 기초위원으로 활동했고, 1933년부터 1934년까지 사천군에 명성여자학교와 광명학원을 설립해 교장에 취임했다. 1936년에는 다솔사에 불교전수강원을 설립했다.[4]
1937년 12월 말부터 1938년 1월 18일까지 친일 단체인 '북지황군위문단'에서 단원으로서 관동군에 위문행렬을 열어[5] 친일 행적을 보이기도 했으나, 1938년 말 만당의 조직이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돼 곧 체포되었고,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검거되었다.
이후 1939년 8월 21일부터 8월 26일까지 사천군 다솔사에서 강원도 울진군 불영사 주지이자 밀교 의식의 권위자였던 영암 스님을 대표로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의 범해 스님, 경상남도 양산군 통도사의 구하 스님, 경상남도 동래군 범어사의 경산 스님, 합천군 해인사의 경하·고경·환경 스님 등 고승 40여 명과 일본 천태종 전수원 및 다이쇼대학 교수 등 유명한 불교학자아 스님 등 35명이 각각 참여한 하안거 법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42년 신채호의 문집을 출간하려 했다는 빌미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구금되었고, 1942년 7월 김법린 등과 함께 해인사·다솔사 등에서 수강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이 때문에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1943년 9월부터 13개월간 경상남도경찰부에 예비검속되어 고초를 겪었다.
2.2. 해방 이후
국회의원 시절 |
이후 1948년 8월부터 1949년 6월까지 재단법인 국민학원 제2·3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때 신익희 당시 총장의 해임을 주도하여 반발을 사기도 했다. 1949년 6월부터 1952년 3월까지는 재단법인 국민학원 이사를 역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한국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사천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정헌주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1951년 중동중학교 해인분교(現 해인중학교)를 설립했고, 이듬해인 1952년에는 해인농림고등학교(現 진주동명고등학교)와 국민대학교에서 분리된 해인대학(現 경남대학교)을 설립해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 이후로 일선에서 물러나 1960년부터 다솔사의 조실(祖室:사찰의 최고 어른)로 있으면서 원효·의천·초의·한용운 등의 사상을 연구하고, 사천군에 차밭을 가꾸어서 '반야로(般若露)'라는 정제증차(精製蒸茶)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한국 다도의 입문서인 《한국의 차도》를 집필하여 그동안 다수 소실되었던 한국의 다도를 복원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이후 196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훈받았고, 1979년 7월 10일 낮 12시 30분에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보현암(普賢庵)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 1986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유해는 1996년 10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사후
독립운동도 친일행각도 분명하여 친일파냐 독립운동가냐 하는 문제로 평이 엇갈리고, 불교계에선 대처승이라는 이유로 까이기도 한다. 2005년 3월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중 한 사람이었던 임명삼(林明三)[6]은 《친일승려 108인》이라는 책을 발간해 최범술을 '친일 승려' 중 한 사람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2005년 8월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잘못을 인정해 제1차 친일인사 명단에서 최범술을 제외했고, 2007년 4월 발표한 제2차 명단에서도 또한 최범술을 제외했다.추가적으로 만해 한용운의 《조선독립의 서》 원본을 소장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재 원본의 행방은 알 수 없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남 사천군)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6,685표 (34.96%) | 당선 (1위) | 초선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사천군) | [[대한국민당(1949년)| 대한국민당 ]] | 3,430표 (7.17%) | 낙선 (6위) |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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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양력 7월 9일.[2] 천황 암살모의 건은 일본의 조작이라는 말이 있다. 박열 문서 참조.[3] 조선불교중앙교무원의 전신. 역시나 관립 친일 불교단체였으며, 이것의 전신인 불교옹호회의 회장이었던 이완용이 평의원장을 맡은 곳이기도 하다.[4] 이 무렵 김법린과 김범부 등이 다솔사에 머무르며 은밀히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5] 이에 대해 김상현(金相鉉) 동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는 "당시 최범술 스님은 1934년 5월경부터 1937년 6월까지 무려 3회에 걸쳐 검거될 정도로 일제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문사 참여를 거절하는 것은 만당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을 것" "결국 최범술 스님은 항일운동의 '위장전략'으로 부득이 위문사로 중국을 방문했던 것" "방문기간 동안 친일적 언행이나 사건이 한 건도 없다는 점이 그 증거"라며 적극 변호했다.[6] 법명 혜봉(慧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