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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56:49

이강우(독립운동가)

파일:external/rokps.or.kr/27.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전주 이씨[1]
출생 1890년[2] 1월 10일
경상도 진주목 중안면 삼동
(現 경상남도 진주시 평안동)
사망 미상
북한 일대
학력 야마자키고등측량학교 (광산과 / 졸업)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졸업)
보성전문학교 (법과 / 중퇴)
니혼대학 (법학 / 학사)
상훈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선거 이력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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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이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0년 1월 10일 경상도 진주목 중안면 삼동(現 경상남도 진주시 평안동)에서 태어났다.

사립 야마자키고등측량학교 광산과와 관립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였다가, 재학 중에 반일연설로 인해 체포되던 도중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일본에 유학, 니혼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김재화(金在華)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계획, 독립선언문과 교유문(敎喩文) 수백매를 인쇄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시민들에게 사전에 배포한 뒤 3월 18일 진주군 진주면의 장날을 기하여 시장에 운집한 수천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 직후 그는 강달룡을 비롯한 30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이강우는 이른 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 니혼대학을 졸업했고, 곧 귀국하여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現 진주고등학교)에서 3년간 교편을 잡았다. 이후 진주시립근로학원장에 취임해 재직하다가 광복 직전에는 농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 잠깐 동안 광산업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며,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진주부에 출마해 당선되어 헌법급정부조직법 기초위원으로 선임되며 정부조직법을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동년 9월 22일 같은 동립운동가인 이동녕, 차이석의 장례식에 나용균, 신익희와 함께 참석하는것이 결정되었다.1949년 6월 18일 김약수 의원의 담화[3]가 너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10월 28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일어났던 진주습격사건에 대한 보고를 하였다.[4][5] 11월 12일에는 박찬현 의원과 진주습격사건 현장에 가서 시찰한 결과를 국회에서 보고하였다.[6]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유덕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납북당했고 이후 다른 납북인사들과 함께 연행되던도중 북한의 인민군이 신용훈을 심하게 때려 신용훈 머리가 깨져 피가 나가 그는 인민군들을 폭행하였다. 얼마안가 저지당하고 꽁꽁 묶였지만 납북인사들이 "이강우를 풀어주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고 말하여 다행히 풀려나게 되었다. 1954년경 황해도 과수원에 배치되어 노동을 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더이상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1989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남 진주부)

[[무소속(정치)|
무소속
]]
7,313표 (26.18%) 당선 (1위) 초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진주시) 2,383표 (8.11%) 낙선 (4위)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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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갑 문시환 사퇴 (1948.10.18.)
* 진양 황윤호 자격상실
* 함안 강욱중 자격상실
* 동래 김약수 자격상실
* 고성 이구수 자격상실
* 남해 박윤원 자격상실
* 합천 을 김효석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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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효령대군파 18세 강(康) 항렬. 손자 이정환씨는 20세 정(廷) 항렬이다.[2] 1977년 작성된 역대국회의원총람에는 1889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3] 「민주주의 방법에 있어 지방자치제는 자연 따르는 문제인데 그 핵심의 도지사는 지방선거로서 선출되어야 할 것은 전제조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를 분리시켜서 임명제로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의 사리사복임을 의의하므로서만 의미가 있는가. 이는 민주주의 법치국가에 있어 전혀 반역적 행동이라 아니 할 수 없다.」[4] 진주에서 폭도 70여명이 재판소와 사범학교, 경찰서에 불을 지른 사건이다.[5]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경상남도지사였던 문시환이 사임했다.[6] 폭도들의 대략적인 숫자와 폭도에 의해 사상된 사람들의 수를 보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