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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2:31:21

고윤환(1845)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무현(武顯) / 장산(長山)
본관 개성 고씨[1]
출생 1845년
경상도 상주목 산남면 신전리
(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신전리)[2]
사망 1915년 8월 23일
경상북도 문경군
묘소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왕태리 이산마을
상훈 건국포장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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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고유훈은 그의 아들이다.

2. 생애

1845년 경상도 상주목 산남면 신전리(현 경상북도 문경시 산양면 신전리)에서 개성 고씨 신전파 8대 종손인 아버지 고일원(高一源)과 어머니 풍산 류씨(豊山 柳氏) 류순조(柳舜祚)[3]의 딸 사이의 5남 1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7월 정미 7조약의 체결로 일제의 국권침탈이 더욱 심화되어가자, 같은 달 5일 당시 충청북도 제천군에서 재차 의병을 일으킨 이강년의 의병진에 입대하였다. 좌종사(坐從事)에 임명된 그는 경상북도 문경군문경새재, 충청북도 연풍군 수안보(水安堡)[4]를 비롯해 제천군, 청풍군, 강원도 영월군 등지를 전전하면서 일본군과 싸워 큰 전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1908년 6월 4일 충청북도 청풍군 북면 성내리(현 제천시 금성면 성내리) 까치성[5] 전투에서 일본군과의 격전 중에 이강년 의병대장이 중상을 입어 결국 체포되고 의진이 무너지자, 그는 산 속으로 피신하여 훗날을 기약하고 동지들간에 연락을 취하며 복수의 뜻을 세웠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못하자 결국 이를 한탄하고 은둔했다.

이후 1915년 8월 23일 사망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 신전파(薪田派) 28세 윤(允) 항렬.[2] 산양면 일대가 개성 고씨 집성촌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 고원훈고우진 전 국회의원도 이 마을 출신이다. 고병익 전 서울대학교 총장은 녹문리 출신이다.[3] 서애 류성룡의 후손이다.[4]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5] 현재의 작성산(鵲城山). 이곳 사람들은 까치성산이라고 부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