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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13:16:18

민중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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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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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 십자군을 이끄는 은자 피에르

1. 개요2. 발단3. 민중 십자군의 행렬4. 민중 십자군의 최후5. 유대인 학살6. 유사 사례7. 평가8.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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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십자군 전쟁의 첫 번째 십자군. 전쟁의 서막을 올린 사건이자 은자 피에르가 이끈 '민중 십자군' 혹은 '빈자의 십자군'이 0차 십자군 원정으로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은자 피에르가 유명할 뿐이지 그가 민중 십자군의 확실한 지도자라고 할 수도 없고 온갖 종류의 잡다한 민중 십자군이 결성되어 어떻다 정의를 내리기도 어려우며 그냥 동유럽에서 약탈만 벌인 십자군들이 많았고 얼마 안 있어 십자군 본대가 출발한 턱에 존재감도 약해서 거의 언급이 안 되는 편이다. 민중 십자군, 군중 십자군, 농민 십자군, 빈자의 십자군 등의 표현이 쓰인다.

2. 발단

동로마의 힘만으로는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이민자들과 맞서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의 손을 빌리기로 하였다. 문제는 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알렉시오스 1세에게 파문을 선고하면서 동로마의 군주와 로마 교회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는 것.

그러나 새로 교황으로 즉위한 복자 우르바노 2세가 알렉시오스 1세의 파문을 취소하고 동로마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 후, 알렉시오스 1세는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모색하면서 교황의 초청을 받아 1095년 3월 피아젠차 공의회에 사절을 파견하였다. 사절은 동로마의 어려움과 성지회복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종교적인 명분을 내세워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투르크 인들에게 대적하기 위한 원조를 요청하였다.

우르바노 2세 역시 전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교황권의 신장을 꾀하면서 이를 공고히 할 필요성이 생겨나고, 신성 로마의 하인리히 4세와 노르만의 로베르 기스카르 사이에서 교황 자체의 기반이 약화되자 동로마와의 화합을 꾀하는 동시에 원조를 통한 입지 강화 및 동방 교회 확보를 의도하였기 때문에, 이는 쉽게 수락되었고 나아가 알렉시오스 1세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부름에 전 유럽에서 15만 명이 넘는 여자, 노인, 장애인, 거지, 소녀, 처녀, 커플, 부부 등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기사와 제후들뿐만 아니라 구원을 바라는 여자와 노인들의 수도 엄청났고 사제들도 몰려들었다. 교황은 병사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의 성지 순례 서약을 파기하고 사제들에게 교구에 남을 것을 명령했고 스페인 사람들에겐 고향을 지키라면서 십자군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한 것을 보면 많은 숫자이다.

엄청난 숫자의 십자군들의 결집에 유럽 전역에선 조만간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성지를 수복할 것이란 자신감이 퍼졌다. 이런 자신감의 중심에는 은자 피에르가 있었다. 남루한 차림의 은수자 피에르는 병을 낫게 하고 마귀를 물리친다고 명성이 자자했는데, 그의 이름만 듣고도 많은 사람들이 십자군에 참여했다. 결국 은자 피에르는 1차 십자군 본대를 무시하고 남녀들을 선동하여 자기들끼리 먼저 출정했다. 오늘날로 치면 사이비 교주같은 자였다. 주로 프랑스 출신이었지만 쾰른에 들러서 많은 숫자의 독일인 십자군들을 보충했다. 프랑스의 귀족 고티에 상자부아를 비롯한 일부 제후와 기사들도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은 집도 절도 없고 성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거지들이 많아 거지 십자군, 빈민의 십자군이라 부른다.[1]

3. 민중 십자군의 행렬

이들은 수가 10만에 이를 정도로 엄청났다고 하는데, 이들의 예고없는 출정에 당연하지만 이들을 위한 식량이나 보급품이 준비되어 있을리가 없고 규율이 존재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 '무일푼' 월터가 지휘하는 민중 십자군 1대는 1096년 부활절에 출발하여 얌전하게 5월 8일 헝가리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헝가리 왕 칼만의 출입 허가를 받은 이들은 얌전하게 헝가리를 통과하여 6월이 될 즈음에 동로마의 변경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민중 십자군의 기강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원래부터 기강이란게 없었긴 했지만 실제로 제후들이 이끄는 십자군 본대는 경제적 문제, 법적 문제,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랜 준비를 거쳤다. 민중 십자군을 본 베오그라드의 니케타스는 얼이 빠졌고 빨리 알렉시우스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알렉시우스는 민중 십자군의 등장에 당연히 놀랐지만 이들을 잘 호위해서 콘스탄티노플로 데려올 것을 명령했다.

한편 굶주린 민중 십자군을 위해 따뜻한 식사와 숙소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었고,[2] 준비도 자금도 없던 민중 십자군은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규율이라곤 없는 이들은 당연히 밥이나 식량을 빼앗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월터의 1대 뒤로는 낙오된 수많은 백성 십자군들이 헝가리 왕국에서 떠돌고 있었는데 헝가리-동로마 변경 마을인 셈린에서 이 민중 십자군들의 여자들이 도둑질을 시도했다.

셈린 사람들은 여자들을 잡아 무장 해제시킨 다음에 벌거벗겨서 내쫓았다. 그런데 6월 20일 피에르가 이끄는 2만 명의 민중 십자군 본대가 도착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이들은 성벽에 걸린 월터의 낙오자들의 무기를 보고 분노했고 신발 가격을 흥정하는 과정에서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결국 몸싸움으로 번졌다. 민중 십자군은 셈린을 점거하고 4천 명의 헝가리인들에게 폭력을 가했다.

한바탕 난리를 친 민중 십자군은 헝가리인들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 두려워하였고 허겁지겁 동로마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6월 26일 민중 십자군들이 동로마로 몰려들었다. 베오그라드의 니케타스는 저번보다 더 많은 십자군의 출현에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민중 십자군은 자신들의 앞을 막는 동로마 제국군들을 죽이고 베오그라드를 불살랐다. 니케타스는 중과부적으로 니시로 퇴각했다.

사실 동로마 제국의 농민들이 민중 십자군들에게 적대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신앙심 하나에 이 먼곳까지 온 십자군들을 보고 많은 농민들이 감동했고 일부 동로마 농민들이 민중 십자군에 가담했다. 하지만 이 짧은 우호적인 분위기는 십자군들이 약탈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사라졌다. 십자군은 니시에서 큰 소동을 벌였고 니케타스와 동로마 제국의 농민들의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버렸다.

마침내 동로마 군과 주민들은 민중 십자군을 막기 위한 반격을 개시해 섬멸에 나섰고 은자 피에르는 500명의 생존자들과 함께 허겁지겁 달아났다. 많은 십자군이 죽었고 포로가 된 십자군들은 동로마의 감옥에서 죽어갔다. 피에르는 매우 의기소침해졌지만 불과 다음 날에 7천 명의 생존자들이 합류하면서 매우 고무되었다. 생존자들이 자꾸 합류하면서 피에르는 다시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어쨌거나 동로마의 뜨거운 맛을 본 은자 피에르와 십자군은 의기소침하게 콘스탄티노플로 입성하여 먼저 도착해있던 월터와 합류했다. 피에르는 자신들이 벌인 소동 때문에 황제가 분노할 줄 알았지만 알렉시우스는 십자군을 환대해주었고 은자 피에르는 감동받아 눈물을 흘렸다. 또한 시골에서 자란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의 화려함에 압도되었다.

한편 알렉시우스 황제는 이 민중 십자군들의 사기가 똥판인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고 곧 이들이 행패를 부릴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들을 소아시아에 보내주면 학살당할 것이 뻔했다. 하지만 이들의 원정 의지는 확고했고 또 이들이 콘스탄티노플과 인근 지방에서 기어코 노략을 자행하자 결국 알렉시우스 황제는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여 소아시아로 보내버렸다. 알렉시우스는 이들에게 십자군 본대를 기다릴 것을 권고했지만 십자군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4. 민중 십자군의 최후

한편 룸 술탄국의 17살의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1세가 이들 민중 십자군에 대해서 들은 것은 1096년 7월 즈음이었다. 그간 서유럽인 순례자들이 룸 술탄국을 거쳐 성지에 간 일이 하루이틀은 아니었지만 정보에 따르면 그 수가 평소보다 훨씬 많았으며 젊은 20대 여자들과 노인들도 수천 명이나 섞여 있다는 보고였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하진 못했지만 사람들을 보내 민중 십자군을 감시하게 했고 니케아의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8월에 들어서 점차 많은 정보가 들어왔다. 은자 피에르란 이름도 보고가 되었고 이들이 무슬림을 멸망시키기 위해 왔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또한 알렉시우스 황제가 보낸 해군과 용병들이 이들을 호위하고 있었다. 룸 술탄국은 놀랐다. 하지만 십자군의 노략 행위는 룸 술탄국 전체를 둘러볼 때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룸 술탄국은 민중 십자군들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룸 술탄국에 도착한 민중 십자군들은 니코메디아 지역의 기독교도 주민들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이들은 시비토트 지역의 동로마의 옛 군사 기지들을 점거하여 보급 문제를 해결했다. 동로마의 해상 보급도 가능했고 주변이 비옥한 지역이라 약탈로 식량을 확보할 수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 힘입어 독일과 프랑스 출신 민중 십자군들의 행보는 날이 갈수록 대담해졌다. 마침내 프랑스 출신 민중 십자군들은 룸 술탄국의 수도인 니케아를 공격하기로 했다. 이들은 니케아 자체에 공성전을 벌이진 않았지만 니케아 주변을 약탈했다. 민중 십자군들이 아이들을 꼬치에 꿰어 불에 굽고 저항하는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등의 소식을 접한 킬리지 아르슬란은 경악하여 기마병을 보냈지만 민중 십자군들에게 격퇴되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신하들을 본 술탄은 흥분하여 보복하려 했지만 막료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니케아를 공격한 프랑스 민중 십자군들은 약탈한 재물을 동로마 장사치들에게 팔아 짭짤한 수입을 얻었고 이에 눈이 뒤집힌 이탈리아 출신 레이날드가 지휘하는 6천 명의 독일 민중 십자군들이 2주 후에 제리고르돈[3] 요새를 점령하고 그 인근을 노략질했다. 이 소식을 들은 킬리치 아르슬란은 9월 29일 재빨리 병졸들을 이끌고 제리고르돈으로 달려갔다. 투르크 병사들은 요새로 가는 수원을 끊었고 십자군들은 목마름에 미쳐 죽어갔다. 무더운 서부 아나톨리아에 고립된 수천명의 십자군에겐 소변조차도 사치스러운 음료였다. 결국 민중 십자군들은 투르크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무참하게 섬멸되었다. 대부분의 민중 십자군은 개종을 거부하고 장렬히 죽어갔지만 애초에 자업자득이었다. 하지만 레이날드는 항복하고 개종했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레이날드가 개종은 물론이고 민중 십자군 동료들에 맞서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자 매우 놀랐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시리아와 중앙아시아로 보내졌다.

한편 투르크 척후꾼들은 시비토트의 은자 피에르와 프랑스 민중 십자군들에게 레이날드가 제리고르돈과 니케아를 점령하고 막대한 약탈품을 얻었다고 헛소문을 퍼트렸다. 십자군들은 매우 흥분했고 당장이라도 니케아로 달려갈 기세였다. 그런데 제리고르돈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몇몇이 제리고르돈의 최후를 알렸다. 십자군들은 크게 놀랐지만 곧 순교자들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 다시 흥분했고 2만 명의 십자군들이 니케아로 가기 시작했다. 10월 21일에 이들은 매복해있던 킬리치 아르슬란의 투르크군과 조우하여 처참하게 박살났다. 노예로 팔 수 있는 젊은 남자들과 아름다운 여자 성노예들을[4]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살육되었다. 2천 ~ 3천의 생존자들이 근처의 성으로 탈출하여 농성했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동로마 해군을 두려워하여 무리하여 이 성을 공격하지 않았고 덕분에 이들은 살 수 있었다. 한 유력한 십자군 인사가 콘스탄티노플로 달려가 구원군을 요청했고 알렉시우스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들을 구해주었다. 투르크군은 동로마의 등장에 돌아갔다. 은자 피에르는 이 살아남은 극소수 생존자들 속에 있었단 기록과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마침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다는 기록이 공존한다. 킬리치 아르슬란은 수만 명의 민중 십자군을 섬멸하고 얻은 막대한 재물에 의기양양하여 니케아로 철수했다.

5. 유대인 학살

파일:Burning-Jews.jpg

그리고 이들이 독일에 들렀을 때에 자발적으로 소규모 십자군들이 많이 구성되었는데 고트샬크, 폴크마르, 그리고 더러운 라이징겐의 백작 에미코(에미히)의 십자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미 은자 피에르는 루앙에 들러서 유대인 우두머리들에게 십자군에 먹을 것을 달라고 구걸했고 이후 고드프루아 드 부용의 십자군 본대가 출발하자 고드프루아가 유대인을 괴롭힐 것이란 소문이 돌았고 이에 겁에 질린 유대인들은 먼저 고드프루아를 찾아가 많은 돈과 먹을 것, 여자들을 바치고 안전을 요청했다. 고드프루아는 그들의 돈, 먹을 것, 여자들을 받고 유대인들을 보호해주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독일 십자군들의 만행은 피에르와 고드프루아의 금전적 갈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일찍이 유대인 보호령을 내린 바가 있었지만 이들 독일 십자군은 황제의 말도 무시했다.

1096년 5월 3일 스피어의 유대인 공동체가 에미코 백작에 의해 불타올랐다. 지방 주교가 재빨리 중재에 나섰지만 이미 12명의 유대인이 범죄를 당한 후였다. 주교는 살인자들을 잡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보름스에서 유대인들이 가톨릭 교인을 살해했단 소문이 퍼지자 독일 십자군들이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유대인들을 잡았다. 유대인들은 주교 관저로 달아났지만 십자군들은 주교관저까지 몰려와서 유대인들을 잡았다. 이어 마인츠가 잡혔다. 마인츠의 대주교 로타르트는 문을 닫고 에미코 백작을 받아주지 않았지만 반유대 감정에 불타오르던 주민들이 문을 열어주었고 유대인들은 개종을 강요당했다. 많은 유대인들은 개종을 거부하고 죽었다. 이어 칼로니모스란 랍비가 대주교에게 보호를 요청했는데 대주교가 그저 개종할 것을 요구하자 분노한 그는 대주교에게 화풀이 하려고 돌을 던졌고 반유대감정에 부채질을 한 격이 되었다. 이어 트리어, 쾰른, 메스에서도 유대인이 범죄를 당했다. 많은 재물을 얻은 에미코의 신하들 상당수는 이때 집으로 갔고 에미코와 일부만이 동쪽으로 행렬했다.

한편 폴크마르와 고트샬크의 병졸은 에미코가 많은 돈과 여자들을 벌었단 소식을 듣고 프라하의 유대인을 괴롭힌 다음에 헝가리로 이동해서 같은 짓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헝가리의 왕 칼만은 자기 땅 안에서 그런 범죄를 묵인하지 않았고 폴크마르의 사람들을 박살냈다. 이어 고트샬크의 사람들이 헝가리인 어린애를 붙잡아 말뚝에 박아 죽이는 짓을 저지르자 고트샬크도 조져버렸다. 에미코 백작은 많은 신하들이 집에 갔음에도 고트샬크나 폴크마르보다도 많은 병졸을 거느리고 있었다. 칼만 왕은 에미코 백작이 아예 헝가리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지만 에미코 백작은 근성있게도 다리를 건설하여 헝가리에 들어갔다. 에미코 백작은 바이셀부르크를 범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지만 바이셀부르크 사람들이 오히려 역으로 성문을 열고 반격에 나서자 놀란 에미코는 순식간에 박살났다. 에미코의 신하 대부분이 죽었지만 에미코는 기사들과 함께 살아남아 독일로 튀었다. 그의 신하들이었던 프랑스 기사들은 계속 동쪽으로 갔지만 좋은 꼴은 보지 못했다.

중세 유럽에서 유대인은 예수를 모함해 죽게 만든 사악한 족속이자 마녀의 앞잡이로 간주되었고, 이는 곧 로마 교황청의 입장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민중들이 유대인을 곱지 않게 보는 마당에 종교적 열의에 심취한 십자군이 유대인에 대해 가진 증오는 불 보듯 뻔했다.[5]

6. 유사 사례

이들 말고도 별별 짝퉁 십자군들도 많았다. 양치기 십자군[6][7] 등등.

7. 평가

규모만 쓸데없이 컸을 뿐 말 그대로 여자, 장애인, 노인, 빈자들로 구성된 오합지졸들이라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만 냈지 아무런 영향도 남긴 게 없다. 인명 피해도 정작 때려잡으라고 보낸 무슬림 쪽에서는 몇 나오지도 않았고 대부분 유대인이나 같은 기독교도들만 엄청나게 피해를 봤다. 게다가 이들의 노략질 행위 때문에 이후에 출발한 십자군 본대는 지역 주민들의 적대감과 겪지 않아도 될 식량 문제까지 겪어야 했다. 그래도 굳이 찾자면 헝가리인들의 십자군에 대한 경계를 키운 것과 이들을 손쉽게 섬멸한 룸 술탄국에서 십자군을 만만하게 보고 수도 니케아를 황당하게 내준 단초를 내준 것이랄까. 이슬람에게 박터지고 후퇴한 생존자들은 이후 동로마 제국으로 귀환했다가 도착한 1차 십자군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이들을 정식 병졸 취급해주지도 않았고, 싸울 때는 싸우게 하고, 별다른 취급해주지도 않다가 안티오크 공성전 등 혹한기에 대다수의 탈주자들을 내는 등[8] 뒤로 가도 그다지 좋은 이야기는 없다.

8. 참고 문헌


[1] 실제로 민중 십자군에 참가한 민중들은 낮선 도시를 발견할 때마다 그 지역 주민들한테 "저 곳이 하늘의 도시인 예루살렘인가?"라고 물어볼 만큼, 예루살렘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무지한 집단이었다.[2] 애초에 동로마 측은 십자군의 도착 시기를 추수기인 가을 정도로 보고 있었다. 추수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준비된 식량도 별로 없었다.[3] 크세리고르돈이라고도 한다.[4] 민중 십자군에는 많은 숫자의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5] 로마 교황청의 공식 입장도 "모든 유대인들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예수를 모함해 죽게 한 일) 때문에 영원히 벌을 받을 족속이다."였고, 이런 시각은 1967년에 교황청에서 공식적으로 폐지하기 전까지 거의 1400년 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미국 하버드 대학 출신의 저자인 래리 고닉이 그린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3권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다루면서 교황청 인사가 "우리의 공식적인 방침은 유대인들을 살려는 두되, 그들이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을 잊지 못하도록 계속 왕따를 시키는 거래두!"라고 말하자, 십자군 기사가 "난 그런게 어려운 거 몰라요(...)"라고 말하며 유대인 학살을 저지르는 장면이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었다.[6] 정말로 양치기들로 구성된 십자군들인데 아랍 지역에 가긴 커녕, 프랑스에서 도적질이나 하다가 열불난 프랑스 기사단들에게 끔살로 토벌당했다.[7] 양치기라고 해서 알퐁스 도데에 나오는 순수하고 양순한 양치기를 생각하지만 실제론 전혀 아니다. 중세 유럽의 양치기는 기본적으로 을 노리는 늑대 같은 맹수나 도둑 혹은 강도에게 대응이 가능해야 했기에 무장을 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폭력에 대해서는 이미 접어주고 보는 게 옳다. 멀리 볼 거 없이 골리앗 잡은 다윗이 목동 출신이다. 현대인들이 각종 미술품을 통해 접한 미소년 양치기의 모습은 귀족 자제 분들이 양치기 코스프레하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실제로 역사적인 유럽의 양치기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중부 스페인 카스티야 지방의 양치기, 소치기들이나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의 역시 양치기, 소치기들이 신대륙으로 건너가 진화한 카우보이가우초들의 생활상에 더 깊숙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이들은 보통 어른 손만한 보위 나이프와 권총이나 사냥 총으로 중무장하지 않던가?[8] 이들 중 은둔자 피에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