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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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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일본]]에 대한 감정'''
혐일 반일 극일 지일 친일 일뽕

1. 개요2. 극일의 사례3. 극일과 정치4.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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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극일(克日)이란, 일본을 극복하겠다는 사상이나 신조, 용어, 운동, 사회적 분위기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경쟁력을 키워서 일본을 앞섬으로서 일본을 이기겠다는 사고방식이다.

2. 극일의 사례

파일:일본-한국 GDP비교(2018).jpg
1948년부터 2018년까지 대한민국과 일본의 1인당 GDP 비교
근대 국가가 성립한 이래 일본은 언제나 대한민국보다 부유한 나라였으며, 양국이 모두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1980년대까지도 1인당 GDP에서의 격차는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플라자 합의 이후 잃어버린 30년을 겪으며 침체하는 사이, 대한민국은 1997년 외환 위기 등 몇 차례의 위기를 맞닥뜨리긴 했으나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 대한민국은 1인당 GDP에서 일본을 근소한 격차로 추격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2021년도 10월 1인당 명목 GDP 기준 일본은 사만불, 대한민국은 삼만 오천불로, 50년 전에는 7배 넘게 차이 나던 소득 수준을 1.15배까지 그 간격을 좁히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2024년광복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이 일본의 1인당 GDP를 역전했다. 1인당 총생산의 경우는 동년 기준 일본은 사만 오천불, 대한민국은 사만 팔천불로 오히려 대한민국이 1.08배로 앞서 있다. 다만 구매력 평가 기준의 경우 대한민국이 일본을 뛰어넘었다고 단정짓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대만의 PPP가 5만불에 육박한다지만, 평균적인 대만인이 한국인이나 일본인보다 부유하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산업 부문에서도 20대 기업으로 볼 시 일본 기업의 매출 총액은 대한민국의 1.9배이며 시가총액의 경우 차이가 조금 더 커지긴 하지만 삼성전자가 압도적 1위를 유지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통계가 입증하듯 이같은 산업 부문에서의 선전은 삼성의 기여가 지대하며, 여기에는 이건희 전 회장의 극일에 대한 의지가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

한편 자동차업계로 국한했을땐 현대자동차가 극일의 대표적인 예시라 할 수 있다. 현대자동차가 기술력이 부족했던 창사 초기엔 일본의 미쓰비시 자동차로부터 엔진이나 프레임 등 많은 기술을 제공받았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 이하 현대의 경영개발진들은 이러한 종속관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독자 플랫폼과 엔진 개발을 위해 노력해왔다. 이러한 독자기술 개발 과정에서는 현대차에 기술을 제공하던 해외 기업들의 압박과 회유가 존재했지만 현대는 끝끝내 밀어붙여 독자기술 개발에 성공해냈다. 이러한 노력 끝에 2000년대 초반 들어서는 미쓰비시 자동차와 현대 에쿠스를 공동으로 개발하기도 하고, 급기야 현대 세타 엔진을 미쓰비시가 기술이전료를 주면서 미쓰비시 4B1 엔진의 베이스로까지 사용한다. 기술 종속관계가 완전히 역전된 것. 심지어는 미국 법인의 성추행 스캔들과 각종 결함 은폐 의혹 등으로 2000년대 초반 미쓰비시 자동차가 경영난에 처하자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를 인수하려 한다는 설이 돌기도 했었다. 시간이 흘러 2020년대 현재 현대자동차는 생산량과 기술 등 모든 측면에서 시장을 선도하는 세계 3위의 자동차기업으로 성장했고 미쓰비시 자동차는 몰락에 몰락을 거듭해 르노-닛산 얼라이언스에 병합되어 과거의 영광으로 뱃지 엔지니어링에나 이용되며 자체 생산모델도 드물게 내기 어려워졌다.

3. 극일과 정치

보수계열쪽에서 처음 사용하였고 민주,진보계열 쪽에서도 극일을 주장한다.#,#

4. 같이 보기


[1]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초기의 이승만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는 아니었고, 박헌영 등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나름 협상을 시도하기도 했다. 물론 이승만이 온건파는 아니었고 좌익세력에 대한 정치 탄압을 일삼기도 했지만, 적어도 어쨌든 같은 한민족 국가철천지 원수 가운데 양자택일해야 한다면 기꺼이 전자를 택할 인물이었다. 당시에는 북한이래봐야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완성되기 전이기도 했고.[2] 참가국이 대한민국일본 뿐이라 홈 앤드 어웨이 승부로 결정되었다.[3] 당시 동북아에서 대한민국이 수교한 국가는 중화민국 단 하나였다. 북한, 중국, 소련, 몽골 인민공화국 모두 공산권이었고, 일본과는 독립 후 쭉 단교 상태였으니. 게다가 국제연합 가입국도 아니었으니, 우리의 외교적 처지는 지금으로 치면 대만보다도 못한 수준이었다.[4] 오늘날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주의를 제창한 정권이 옆 나라의 군사주의를 견제하기는커녕 조장하는 것이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박정희 정권은 구 일본군 소속으로서의 유대감 때문인지 보고 배운 게 그런 거라서 그런지 일단은 일본 극우와의 관계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우파 국가주의자로서의 명분은 충돌하더라도 정치적 유사점이 있는 우리는 우호적으로 대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인데, 오늘날 좌파 일각에서 (인권, 민주 등 좌파적 기치의 측면에선 타협 불가의 독재 국가인) 중국 수뇌부에 꽤나 우호적인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5] 예컨대 박정희 정권은 비록 (코리아게이트 같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끝나긴 했지만) 무려 미국에 공작원을 보내 초강대국의 여론을 조작하려 할 정도였고, 냉전이 한창이던 시기 북한과 첫 대화를 여는 한편으로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터지자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식으로 강온전략을 구사할 줄 알았다. 반면 전두환 정권은 전반적으로 대내적으로는 반공 보수를 외쳤지만 대외적으로는 끌려다니는 외교를 했다. 대한민국의 핵무장을 두고도 박정희는 미국이 우릴 지켜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지키겠다며 핵개발을 강행했지만, 전두환은 쿠데타로 집권한 자신의 정권을 용인받기 위해 핵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미사일 정보도 팔아넘겼다. 박정희 정권은 비록 우선순위가 국익보다는 정권의 이익 아니냐는 논란은 있지만 국력에 비해 상당히 주체적인 외교를 펼쳤으며, 요즘으로 치면 미치광이 전략을 구사하며 답이 없는 국력으로도 주변국들을 쥐고 흔드는 북한의 외교력에 비할 만하다.[6] 이는 한일관계에서 이례적으로 양국의 손뼉이 잘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대중은 분명 민족주의자였지만 피해망상적 민족사관에 빠진 민족우월주의자는 아니었고, 민주 일본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일본의 우경화우려하는 발언도 그런 맥락에서 한 것이고... 반대로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 총리 역시 한일관계 개선에 의지를 보인 몇 안 되는 총리 가운데 하나였다. 다른 예를 보자면, 박정희나 전두환 시절의 대한민국은 일본과 잘 지내고 싶었어도 일본 측에서 군부 독재국가인데다 후진국인 대한민국을 무시했고, 노무현과 이명박 초기의 카운터파트였던 고이즈미는 대한민국을 이용하는 성향이었다. 여기에 데인 이명박은 한미관계도 잘 관리하고 칼을 갈며 준비해서 임기 막바지에 화끈하게 한 방을 날렸는데, 하필 이때 일본의 집권당이 대한민국에 상대적으로 유화적이었던 일본 민주당이었다 보니 실익은커녕 오히려 일본 내 여론에 역효과만 불러오며 꼬이기 시작했다. 아베의 경우 초창기에는 나름대로 한일관계 개선 의지를 보였지만 박근혜나 문재인이나 반일친중 기조가 워낙 뚜렷했고, 문재인이 일본과 논의를 할 마음을 품었을 시점엔 역으로 아베 쪽에서 빈정이 상할대로 상한 상황이었다.[7]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이후 일본 내 대중들에게 대한민국은 진보정권 뿐 아니라 보수정권에서도 일본에 친화적인 입장은 나오기 힘들거란 인식이 크게 널리 퍼지고만다. 이로인해 앞으로 한일관계 개선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지적이 잇따랐다. ##[8] 실질적으로 자고나란 고향은 경상북도 포항[9] 지소미아의 실질적 체결은 이명박 정부 시기였다.[10] 지금까지의 행적이 극일이면서 더불어 반일에 가깝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