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시데스 기지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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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카디오 벤투리 (1953~1957) | 알시데스 기지아 (1957~1958) | 에기디오 구아르나치 (1958~1959) |
알시데스 기지아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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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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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연도 | 등록인물 | |
2012 | 프랑코 탕크레디 (GK), 카푸, 자코모 로시, 아우다이르, 프란체스코 로카 (DF) 풀비오 베르나르디니, 아고스티노 디바르톨로메이, 호베르투 파우캉, 브루노 콘티 (MF) 로베르토 프루초, 아메데오 아마데이 (FW) | |
2013 | 아틸리오 페라리스 (MF), 세바스티아노 넬라 (DF), 주세페 잔니니 (MF), 빈첸초 몬텔라 (FW) | |
2014 | 알시데스 기지아 (MF), 뱅상 캉델라 (DF), 카를로 안첼로티 (MF), 루디 푈러 (FW) | |
2015 | 귀도 마제티 (GK), 세르조 산타리니 (DF), 다미아노 톰마지 (MF),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FW) | |
2016 | 조르조 카르피[1] (MF), 토니뉴 세레주 (MF), 잔카를로 데시스티 (MF), 아르카디오 벤투리 (M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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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320><table bordercolor=#003768> | FIFA 월드컵™ 전 경기 득점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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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헝가리 | 우루과이 | 프랑스 | 브라질 | |
대회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 |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 |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 | |
성적 | 준우승 | 우승 | 3위 | 우승 | |
득점 경기 | 1라운드 4경기 vs 네덜란드령 동인도 28',89' | 4조 1경기 vs 볼리비아 87' | 2조 1경기 vs 파라과이 24',30',67' | 3조 1경기 vs 체코슬로바키아 61',83 | |
8강 3경기 vs 스위스 40' | 결승 리그 2경기 vs 스페인 29' | 2조 3경기 vs 유고슬라비아 4',85' | 3조 4경기 vs 잉글랜드 59' | ||
4강 2경기 vs 스웨덴 65' | 결승 리그 4경기 vs 스웨덴 39' | 2조 5경기 vs 스코틀랜드 44' | 3조 5경기 vs 루마니아 22' | ||
결승 vs 이탈리아 70' | 결승 vs 브라질 79' | 8강 1경기 vs 북아일랜드 55',63' | 8강 3경기 vs 페루 75' | ||
4강 1경기 vs 브라질 9' | 4강 1경기 vs 우루과이 76' | ||||
3,4위전 vs 서독 16',36',78',89' | 결승 vs 이탈리아 71' | ||||
집계 | 4경기 5골 | 4경기 4골 | 6경기 13골 | 6경기 7골 |
}}} ||
우루과이의 전 축구인 | ||
이름 | 알시데스 기지아 Alcides Ghiggia | |
본명 | <colbgcolor=#fff,#191919>알시데스 에드가르도 기지아 페레이라 Alcides Edgardo Ghiggia Pereyra | |
출생 | 1926년 12월 22일 |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
사망 | 2015년 7월 16일 (향년 88세) | |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 ||
국적 | [[우루과이| ]][[틀:국기| ]][[틀:국기| ]] | [[이탈리아|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69cm / 체중 62kg | |
직업 | 축구선수 (라이트윙 / 은퇴) 축구감독 (은퇴) | |
등번호 | 7 - AS 로마 | |
소속 | 선수 | 수드 아메리카 (1945~1947) CA 페냐롤 (1948~1953) AS 로마 (1953~1961) AC 밀란 (1961~1962) 다누비오 FC (1962~1968) |
감독 | CA 페냐롤 (1980) | |
국가대표 | 12경기 4골 (우루과이 / 1950~1952) 5경기 1골 (이탈리아 / 1957~19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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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오로지 세 사람만이 마라카낭을 고요하게 만들 수 있었습니다. 교황[2], 프랭크 시나트라[3], 그리고 저입니다.
(Solo tres personas fuimos capaces de silenciar el Maracaná; el Papa Juan Pablo II, Frank Sinatra y yo.)
알시데스 기지아, 마라카낭 대첩을 회상하며
(Solo tres personas fuimos capaces de silenciar el Maracaná; el Papa Juan Pablo II, Frank Sinatra y yo.)
알시데스 기지아, 마라카낭 대첩을 회상하며
우루과이의 전 축구 선수이자 축구 감독. 위 어록대로 마라카낭 대첩 당시 결승골을 넣으면서 브라질을 침몰시킨 사나이로 유명하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1950년 마라카낭에 강림한 사신.
2. 생애
2.1. 선수 경력
2.1.1. 초창기
기지아는 1926년 몬테비데오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운동에 관심이 많았던 기지아는 축구와 농구를 모두 좋아했는데 안타깝게도 키 때문에(...) 농구는 취미로 즐길 수밖에 없었다.기지아는 1945년부터 수드 아메리카에서 축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지아의 데뷔 시즌에 수드 아메리카는 2부 리그로 강등을 당하고 말았고, 1947년까지 기지아는 2부 리그 생활을 했다. 이때 기지아는 아르헨티나 진출을 위해 입단 테스트를 받기도 했는데 이 테스트에 합격하고 아르헨티나에서 계속 뛰었다면 마라카낭의 비극은 어쩌면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루과이 대표팀은 1970년대까지 우루과이 리그가 아닌 다른 리그에서 뛰던 선수들은 소집 대상에서 제외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다 1948년, 기지아는 오스카르 미게스와 함께 우루과이의 양대 명문팀 중 하나인 CA 페냐롤에 들어가게 되었다.[4] 하지만 페냐롤에는 말 그대로 이름값하는 수많은 스타들이 즐비했고 미게스와 달리 입단 첫 시즌의 기지아는 그들에 밀려 벤치만 달굴 수밖에 없었다.
페냐롤에서의 첫 시즌은 선수들의 파업으로 인해 리그가 파행되었고, 그 다음 해에서야 리그가 정상화되었다. 이 때 새 감독 에메리코 히르츨(Emérico Hirschl)이 취임하면서 기회를 잡은 기지아는 8골을 넣으며 페냐롤의 리그 우승에 일조했고, 그 다음 해에는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소집되었다.
2.1.2. 1950년 월드컵
23살의 젊은 선수였던 기지아는 1950년 월드컵에 참가할 대표팀에도 선발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7번을 달고 주전 라이트 윙으로 필드를 누볐다.첫 경기이자 단판 승부였던 조별리그에서 우루과이는 볼리비아를 상대로 8:0이라는 기록적인 스코어를 내며 완승했다. 기지아는 이 경기에서 1골이자 우루과이의 8번째 골을 기록했고 개최국 브라질, 유럽의 스페인, 스웨덴과 결선 리그를 치르게 되었다.
기지아는 수비적인 움직임 위주로 플레이하면서도 매 경기마다 골을 기록했지만 우루과이는 스페인과 스웨덴을 상대로 간신히 이기거나 비기는 등 졸전을 펼쳤다. 반면 브라질은 스페인을 6:1, 스웨덴 7:1로 떡실신시켜 버린지라 우승의 가능성은 누가 봐도 브라질이 절대적으로 높았다. 그런데 브라질 사람들은 아직 경기가 시작하지도 않았음에도 자기들이 이미 우승이라도 한듯 신문 기사에 ★경★ 브라질, 1950년 월드컵 우승 ★축★ 이라고 써 놓은 데다가 우승 메달, 우승 표창장, 우승 기념 노래까지 만드는 등 온갖 설레발을 쳐놓았다.
우루과이를 식민지로 만들어 탄압했던 전적이 있는 브라질이 저렇게 설레발을 치니 우루과이 선수들이 머리 끝까지 빡친 건 당연지사. 결국 기지아는 설레발이 써져 있는 신문을 한 부 구해 놓고 동료 선수들을 불러모아 그 신문 기사를 향해 단체로 소변을 본 뒤 결의를 다졌다. 저 망할 브라질 새끼들을 밟아서 으깨버리자고![5]
브라질과의 마지막 승부 |
브라질은 역시 초반부터 우루과이의 골문을 사정없이 두들겼고, 후반 2분 프리아사가 선제골까지 터뜨리자 브라질 국민들의 환호성은 하늘을 찔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루과이 선수들은 굴하지 않았다. 선제골을 얻어맞자 더 크게 분노한 기지아는 그때부터 불같이 맹렬하게 만회골을 노렸고 기적의 시작은 기지아의 발끝에서 나왔다.
기지아는 후반 21분 측면에서 스키아피노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했고, 34분에는 본인이 측면으로 돌파하면서 기습적인 타이밍에 니어포스트를 노려 직접 슛을 날렸다. 그의 발을 떠난 공은 브라질의 골문을 지키던 바르보자 골키퍼의 손을 지나 역전골이 되었다. 순간 열광하던 브라질 팬들은 일제히 공황에 빠졌고, 우루과이 팬들은 기지아의 이름을 외치며 환호했다.
그렇게 10분이 더 흘렀고, 경기가 종료되었다. 우루과이의 팬들조차 반신반의했던 기적의 드라마가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기지아는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우승 팀 선수 중 전 경기 득점을 기록한 주인공이 되었고[6] 이것이 축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경기 중 하나인 마라카낭의 기적이다.[7]
이 덕분에 우루과이는 광란의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반면 당연히 우승을 거두리라고 굳게 믿었던 브라질은 거의 다 잡았던 우승을 홈 관중들이 보는 앞에서 놓쳐버려서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자살했고 거대한 홍역을 치러야 했다. 64년이 지난 2014년, 브라질은 마라카낭의 비극을 잊고자 다시 한 번 자국에서 월드컵을 치르고 4강까지 올라가면서 이제 4강만 지나면 마라카낭의 비극은 잊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마라카낭의 비극보다 더한 비극을 겪으며 무너지고 말았다(...)[8][9]
2.1.3. 이탈리아
월드컵 우승의 영웅은 소속팀으로 돌아왔지만 기지아는 잠깐 소속팀에서 주전 자리를 뺏겼고 스키아피노도 부상으로 빠지며 팀도 라이벌 나시오날에 우승을 내줬다. 1951년에 정상화된 페냐롤은 우루과이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거칠 것이 없어보였다.하지만 그의 선수 생활에 큰 위기가 닥쳤는데 1952년 리그 경기에서 8개월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먹은 것이었다. 사유는 심판 폭행(...). 기지아는 경기 중 심판이 자신의 골을 무효처리하자 이에 격분하여 심판을 폭행했고[10] 그 징계로 인해 우루과이 리그에서 더 이상 뛸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다. 결국 이로 인해 유럽 팀을 알아보게 되었고, 징계가 끝난 1953년 시즌부터 세리에 A의 AS 로마에서 뛰게 되었다.
월드컵에서 큰 활약을 했던 선수였기에 AS 로마의 팬들은 기지아를 크게 환영했고, 기지아 역시 그 환영에 걸맞게 8시즌 동안 200경기 넘게 출전하면서 남미 축구의 높은 수준을 이탈리아 팬들에게 선보였다. 1954년 월드컵을 앞두고 우루과이 대표팀은 해외에서 뛰는 선수들을 대표팀에 부르지 않던 관례를 깨고 기지아를 스위스에 부르려고 했다. 그러나 이는 소속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로마는 비록 기지아가 활약하는 동안에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기지아는 1957년 로마의 주장이 되면서 이탈리아의 국적을 얻기도 했고, 우루과이 시절 동료였던 후안 스키아피노와 함께 이탈리아 대표팀에서 뛰었다. 그는 1958년 월드컵 지역예선에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참가했지만 이탈리아는 본선 진출에 실패했다.
1959년부터 기지아는 노쇠의 기미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고 결국 1961년에 AC 밀란으로 팀을 옮기게 되었다. 새로운 팀에서 35세의 나이에 결국 스쿠데토를 차지했지만 기지아 본인은 그 해에 4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는 실망스러운 활약을 펼쳤고, 그 해를 끝으로 기지아는 이탈리아에서 나와 다시 우루과이로 돌아갔다. 그는 군소 클럽 다누비오 FC에서 5년을 더 뛰다 은퇴했다.
2.2. 이후
기지아는 세리에 A에서 뛸 때 꽤 많은 돈을 벌었지만 관리를 잘 못했고 아내의 미용실 수입에 의존해 소박하게 살았다. 그러다 1980년 잠시 친정팀 CA 페냐롤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2012년 6월 15일, 기지아가 타고 가던 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그는 혼수 상태로 2주간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트럭 운전사는 경찰에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2013년 12월 7일,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조 추첨 식에 참가했다. 87세의 노인이라 그런지 볼을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정정한 모습을 보였다.[11]
기지아의 조추첨 |
2015년 7월 16일, 기지아는 라스 피에드라스의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 그리고 이 날은 195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우루과이 대표팀이 마라카낭에서 브라질을 꺾은 지 정확히 65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임팩트에 비해 국가대표 경력이 다소 적은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우루과이 역대 최고의 윙어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빠른 스피드, 정확한 크로스, 정교한 드리블, 양발 슈팅, 수비능력까지 윙어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춘 선수였다.4. 여담
미국 대통령을 죽인 저격과 기지아의 슛은 똑같은 극적인 패턴, 똑같은 움직임, 멈출 수 없는 궤적의 똑같은 정확성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소총이 있고 저기에는 기지아의 오른발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호베르투 무이라에르트
호베르투 무이라에르트
- 기지아가 우루과이 대표팀에서 뛴 정식 A매치 12경기 중 우루과이에서 치른 홈경기는 단 한 경기도 없었다.
- 1996년 우루과이의 밴드 Casa de Jardineria[12]는 로스 델 리오의 히트곡 마카레나를 우루과이식으로 녹음하면서 노래의 가사를 바꿨는데 노래의 제목 마카레나를 Maracanã Macarena로 바꾸었다.[13] 게다가 기지아에게 노래 끝부분의 스캣을 맡겨 우루과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 기지아는 마라카낭 대첩 이후 직접적인 위해는 없었지만 여러 차례 브라질인들의 뒤끝을 겪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그 시합 후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기지아는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가 배가 고파 레스토랑에 들렀는데 뒤에서 시선이 느껴지더라는 것. 뭔가 평범해보이지만 기지아보다 훨씬 어려보이던 남자가 기지아를 응시하고 있었는데 계속 기지아를 바라보던 남자는 기지아에게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기지아임을 확인한 그 남자는 기지아에게 "저는 그 때 매우 화가 났었어요. 왜냐하면 당신이 두 번째 골을 넣었을 때 제 아버지께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죠."라고 밝혔다. 남자는 말을 마친 후 기지아를 강하게 끌어안았고 말문이 막혔던 기지아는 남자의 비극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 다른 예로는 50년 정도 지나서 브라질로 여행을 갔다가 겪은 더 기막힐 일도 있었다. 어떻게 봐도 20대 정도밖에 안 돼 보이는 여성 세관원이 기지아를 알아본 것. 기지아가 놀라서 "그건 50년 전의 일이다."라고 하자 세관원은 "브라질의 우리들은 아직도 그때의 일을 오늘 일어난 일인 것처럼 느낀다."고 했다고... 이쯤 되면 정말 무서울 지경이다.
- 은퇴 후 기지아는 마라카낭 대첩 당시 우루과이 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하곤 했다. 가끔 이 파티에 브라질인들을 초대할 때가 있었는데 마라카낭의 기억만큼은 그때 기지아를 포함한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브라질인들이 겪은 슬픔에 공감해서였는지 기지아는 아들에게도 그 경기에 대해 자세히 언급을 꺼렸다고 한다. 아들이 그 경기에 대해 물어봐도 아주 간결하게 "월드컵 경기인데 나도 거기서 한 골을 넣었다."정도로만 답을 했다고 나중에 아들이 밝혀서 세상을 놀라게 했다.
- 2009년 브라질의 초청으로 마라카나수의 일등 공신 기지아는 마라카낭에 거의 60년 만에 발을 디뎠다. 이곳에서 기지아는 펠레, 에우제비우, 프란츠 베켄바워 등과 함께 행사에도 참석했고, 풋프린트가 새겨지는 영예도 안았다. 기지아는 이후 브라질 사람들에게 공식적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 문명 6에서 불가사의로 등장한 이스타지우 두 마라카낭의 인용구로 이분의 명언이 수록되었다(...) 문서 상단의 바로 그 명언이다.
- 니우통 산투스가 2013년에 사망한 후 기지아가 최고령 생존 FIFA 월드컵 우승 선수가 되었다. 기지아의 사망 이후 최고령 월드컵 우승 선수는 한스 셰퍼가 되었다.
5. 수상
5.1. 우승
- CA 페냐롤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1949, 1951
- AS 로마
- 인터-시티 페어스컵: 1960-61
5.2. 개인 수상
[1] 시쿠, 에스타니슬라오 바소라, 텔모 사라와 공동 득점 3위.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는 1982년부터 수여했으므로 비공식 수상.[2] 1997년 10월 6일, 브라질을 공식 방문한 요한 바오로 2세가 마라카낭 경기장에서 집전한 장엄미사 당시 경기장 안에서만 18만 명이, 경기장 바깥으로는 무려 150만 명의 시민들이 미사에 참석했다.[3] 1980년 1월 26일 프랭크 시나트라의 첫 브라질 콘서트가 열린 마라카낭 경기장에 175,000명의 관중이 입장했는데, 그 당시 단일 콘서트로는 가장 많은 관중수를 동원한 콘서트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이 기록은 10년 후인 1990년 5월 18일 같은 경기장에서 18만 4천명을 동원한 폴 매카트니에 의해 깨졌다.[4] 페냐롤의 영원한 라이벌 나시오날도 비슷한 시기에 기지아의 영입을 시도했지만 기지아의 가족들이 나시오날 입단을 거부해서 성사되지 못했다.[5] 사실 이 제안은 옵둘리오 바렐라가 먼저 했다. 그리고 기지아를 포함한 선수단 전원이 이에 동의했다.[6] 현재까지 월드컵 본선 전 경기 득점 기록을 가지고 월드컵에서 우승한 선수라는 기록은 기지아와 자이르지뉴만이 가지고 있다. 또한 이들 외에도 월드컵 우승은 실패했지만 월드컵 본선 전 경기 득점 기록을 가진 쥐스트 퐁텐이 있다.[7] 우루과이 기준이며 브라질에게는 비극이다.[8] 그보다 더 비참한 건 마라카낭의 비극 때의 기지아 한 명보다 여러 선수들에게 무려 7골이나 먹었다는 점에서 브라질로서는 정말 참담하기 그지 없었다.[9] 그리고 브라질에 그 비극을 안긴 유럽팀은 다음 대회에서 동아시아의 어느 국가에 자국 역사상 최악의 졸전을 기록하면서 22위로 조별 리그에서 광탈하는 치욕을 겪었고 또 그 다음 대회에서는 동아시아의 어느 섬나라에게 끔찍한 역전패를 당하는 등 불행이 이어지다 끝내 조별리그 17위로 16강 직전에서 월드컵 커리어를 마치는 참사를 당한 뒤로 전 세계에서 온갖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10] 정작 기지아와 그의 아들 아르카디오는 기지아가 심판을 때린 적이 없다고 계속 주장했다. 누가 심판을 때렸는지는 알지만 알려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왔고 그의 아들은 지금까지도 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11] 여담으로, 마라카낭의 비극 당시 경기에 참가한 22명의 선수 중 기지아가 마지막 생존자였고 조추점 시점에서는 기지아만이 유일한 생존자였다.[12] 한국어로 번역하면 집과 정원[13] 참고로 뒤의 Macarena는 영어식으로 읽는 마카레나지만, Maracanã는 Estádio do Maracanã같은 지명처럼 마라카낭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