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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23 20:43:46

길버트 3세 드 움프라빌

파일:길버트 드 움프라빌.jpg
이름 길버트 3세 드 움프라빌
Gilbert III de Umfraville
출생 미상
잉글랜드 왕국
사망 1307년 (향년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앵거스 백작령
아버지 리데스데일 남작 길버트 2세 드 움프라빌
어머니 앵거스 여백작 마틸다
배우자 엘리자베스 코민
자녀 길버트, 로버트
직위 제7대 앵거스 백작, 초대 움프라빌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잉글랜드 왕국에 걸친 대규모 영지를 경영한 귀족, 군인.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의 편에 서서 윌리엄 월레스로버트 1세를 적대했다.

2. 생애

아버지 길버트 2세 드 움프라빌은 리데스데일 남작으로, 노섬벌랜드 각지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했다. 그는 앵거스 여백작 마틸다와 결혼해, 마틸다의 남편 자격으로 앵거스 백작령을 관리했다. 그러다가 1245년에 사망했고, 아직 유아였던 길버트가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상속했다.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의 동생인 콘월의 리처드, 처남 시몽 드 몽포르가 연이어 그의 후견이 되겠다고 나섰다. 헨리 3세는 두 사람 중 1만 마크를 주겠다고 제안한 처남 몽포르에게 후견권을 주었고, 시몽 드 몽포르는 앵거스 백작령을 대신 관리해주는 대가로 연간 330 파운드의 수입을 올렸다.

길버트는 후견인의 영향으로 제2차 남작 전쟁 당시 헨리 3세에 맞서는 귀족들을 지지했다. 하지만 1265년 이브샴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에 진영을 바꿔서 헨리 3세의 후계자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다. 시몽 드 몽포르가 이브샴 전투에서 전사한 뒤, 그는 성인이 되었을 때 후견인에게 1,200 마크를 지불할 의무에서 해방되었다. 한편, 어머니 마틸다는 남편 길버트 사후 칠럼의 영주인 도버의 리처드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녀는 1267년 이전에 사망헀고, 길버트는 앵거스 백작이라는 스코틀랜드 작위를 물려받았다.

길버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양국에 대규모 영지를 두었지만, 자신을 잉글랜드 귀족으로 여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그의 심리는 그가 한 기부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는 스코틀랜드 내 자기 영지에 속한 수도원에 소액만 기부했지만, 잉글랜드 도싯의 로더스 교회에는 막대한 기부금을 납부했다. 또한 1277년 에드워드 1세의 웨일스 원정에 참여했으며, 1294년부터 시작된 가스코뉴에서의 프랑스-잉글랜드 전쟁에서 잉글랜드군에 배속되어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에 대적했다. 1295년 잉글랜드 의회에 소환된 뒤 초대 움프라빌 남작을 칭했다. 그렇지만 스코틀랜드에서의 칭호인 앵거스 백작도 종종 왕실 헌장에 사용했다.

1284년, 그는 앵거스 백작 신분으로서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가 스콘에서 소집한 의회에 참석해, 알락산더르 3세의 손녀이자 유일한 후계자인 마르그레트 에이릭스도티르가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등극하는 것에 동의했다. 1286년 알락산더르 3세가 사고사한 후, 그는 던디와 포파의 왕궁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1290년 버검에서 소집된 의회에 참석해, 마르그레트와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 에드워드 왕자 사이의 결혼 계약을 승인했다. 1290년 10월 노르웨이에서 스코틀랜드로 향하던 마르그레트가 오크니 제도에서 병사하자,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을 놓고 여러 경쟁자가 난립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왕위에 도전했고, 스코틀랜드 왕위를 결정할 권한을 스코틀랜드 의회로부터 부여받은 에드워드 1세에게 다른 수많은 경쟁자들과 함께 경의를 표했다. 1292년, 에드워드 1세는 존 발리올을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옹립했고, 길버트는 존 발리올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1296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길버트는 에드워드 1세를 지지했다. 그는 에드워드 1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존 발리올을 폐위하는 데 일조했고, 제7대 마치 백작 패트릭 4세 드 던바, 제6대 애넌데일 영주 로버트 브루스, 그리고 캐릭 백작 로버트 브루스 등 다른 스코틀랜드 귀족들과 함께 에드워드 1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받들었다. 이때 장남 길버트와 잉글랜드 왕족인 휴 로더 경 사이에 분란이 발생했다. 분란이 발생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아들이 휴 로더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한 것에 대한 보상금을 왕실에 지불해야 했다.

1298년, 에드워드 1세는 윌리엄 월레스의 스코틀랜드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로디언으로 깊숙이 진군했다. 그러나 윌리엄 월레스가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잉글랜드 장병들은 굶주림에 시달렸고, 스코틀랜드 반군이 숲속 깊숙이 숨었기에 그들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1세는 일단 에든버러로 철수해 군대를 재정비하려 했다. 이때, 길버트 3세와 패트릭 4세 드 던바가 찾아와서 스코틀랜드군이 폴커크 인근의 칼렌다 숲에 숨어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에드워드 1세는 즉각 그쪽으로 진군했고, 폴커크 전투에서 윌리엄 월레스를 격파했다. 1299년 7월, 요크에서 스코틀랜드에 주둔한 잉글랜드 수비대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개최된 잉글랜드 지휘관 회의에 참석했다. 1307년 앵거스 백작령에서 사망했고, 헥삼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