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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10 20:57:58

로버트 드 움프라빌

성명 로버트 드 움프라빌
Robert de Umfraville
생몰년도 1277년 ~ 1325년 8월
출생지 스코틀랜드 왕국 엥거스 백작령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움프라빌 남작령
아버지 길버트 드 움프라빌
어머니 엘리자베스 코민
형제 길버트
배우자 루시 카임, 엘레노어
자녀 길버트, 엘리자베스, 로버트, 토머스. 안노라
직위 제8대 엥거스 백작, 움프라빌 남작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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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엥거스 백작, 잉글랜드 왕국의 움프라빌 남작. 제1차 스코틀랜드 독립 전쟁 시기에 잉글랜드 왕국의 편에 서서 로버트 1세에 대적했다.

2. 생애

잉글랜드-스코틀랜드에 걸쳐 영지를 소유한 움프라빌 가문의 일원이다. 아버지는 제7대 엥거스 백작 길버트 드 움프라빌이고, 어머니는 제2대 뷰컨 백작 알렉산더 코민의 딸 엘리자베스 코민이다. 아버지 길버트 드 움프라빌은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3세 사후 스코틀랜드 왕위를 놓고 다툰 13명의 대귀족 중 한 명이었으며, 1298년 스코틀랜드 원정을 단행한 에드워드 1세에게 패트릭 4세 드 던바와 함께 윌리엄 월레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의 위치를 알려서 폴커크 전투에서 잉글랜득둔이 완승을 거두는 데 일조했다.

1303년 형 길버트가 사망한 뒤 유일한 상속인이 되었고, 1307년 아버지가사망한 뒤 스코틀랜드 작위인 엥거스 백작과 잉글랜드 작위인 움프라빌 남작을 상속했다. 1306년 외삼촌인 제3대 뷰컨 백작 존 코민과 함께 스코틀랜드 국왕을 칭한 로버트 1세에 대적했으며,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가 1307년 7월에 즉위했을 때 즉시 찾아가서 경의를 표했다.

1308년 스코틀랜드 총독이 되었고, 1310년 스코틀랜드 변경의 수호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로버트 1세가 잉글랜드 세력을 스코틀랜드에서 몰아내는 걸 막지 못했다. 1307년부터 1313년까지 스코틀랜드와의 휴전 협정을 협상하는 사절단의 정규 구성원이었으며, 1312년 로버트 1세에게 함락될 때까지 가족이 관리하던 던디 성을 지켰다. 한편, 에드워드 2세가 스코틀랜드에서의 전쟁 수행을 무기력하게 이어가는 것에 분개한 그는 1311년 개혁 위원회 설치를 촉구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를 지지했다.

1314년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해 배넉번 전투에서 로버트 1세와 대적했지만, 패전을 면치 못하고 제4대 헤리퍼드 백작 험프리 드 보훈이 이끄는 기병대와 함께 전장에서 도주했다. 그들은 보스웰 성으로 피신했지만, 그곳의 성주인 월터 피츠길버트가 로버트 1세에게 귀순하기로 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로버트 1세는 움프라빌 가문의 스코틀랜드 영지를 몰수했고, 1314년 11월 캠버스케네스 수도원에서 열린 의회에서 그의 앵거스 백작위가 몰수되었다고 선언했다. 로버트의 재산 대부분은 본킬의 알렉산더 스튜어트에게 넘어갔으며, 알렉산더의 아들 존 스튜어트는 나중에 엥거스 백작이 되었다. 로버트는 1년이 넘게 지나서야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그 후 잉글랜드로 향한 그는 에드어드 2세에 의해 깃발 기사로 선임되었고, 스코트랜드 국경에서 복무했고, 1318년까지 잉글랜드 의회에 여러 차례 소환되었다. 그는 잉글랜드에서 제2대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의 측근이 되었고, 부하 20명을 거느리며 토머스의 전쟁에 참여했다. 1319년 토머스로부터 공적을 인정받아 100마크를 받았다. 1319년 에드워드 2세의 베릭 탈환전에 참가했다. 그 해 9월 베릭 공방전이 실패로 돌아간 후, 왕은 그에게 존 크롬웰과 함꼐 1320년 여름까지 스코틀랜드 변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는 병사 30명을 자체적으로 거느렸고, 왕의 급여를 받는 병사 140명을 추가로 거느렸다.

1321년 6월 세르보너에서 랭커스터 백작 토머스가 주관한 잉글랜드 북부 귀족과 웨일스 귀족들간의 합동 회의에 참석했다. 랭커스터 백작은 이 자리에서 두 집당이 동맹을 맺어서 휴 르 디스펜서 더 엘더휴 르 디스펜서 더 영거 부자를 타도하는 데 전념하게 했다. 그러나 랭커스터 백작 본인이 왕에게 반기를 들자, 로버트는 에드워드 2세 편으로 완전히 돌아섰다. 1322년 3월 버러브리지 전투에서 참패한 뒤 생포된 랭커스터 백작을 반역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 판사 7명 중 한 명이었다. 이후 에드워드 2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참여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325년 8월에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뉴민스터 시토회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