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01:45:17

김사미·효심의 난

김사미의 난에서 넘어옴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부흥운동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fff5d2,#ccc4a8> 연대 부흥운동
935년~
?년
마의태자의 항전 ( 마의태자? )1
1193년~
1194년
동경민란 김사미·효심의 난
1202년~
1204년
경주 별초군의 난
1202년~
1204년
이비·패좌의 난
1204년
동경 신라부흥모의2
1확실하지 않음, 2사전에 발각됨
}}}}}}}}} ||


파일:고려 의장기 문양.svg 고려시대 실패한 내란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내란 주도 세력
왕규의 난 <colbgcolor=#ffffff,#670000> 왕규
김훈 최질의 난 김훈, 최질
이자의의 난 이자의
이자겸, 척준경 암살 미수 사건 인종, 지녹연, 안보린
이자겸의 난 이자겸
묘청의 난 묘청
이고의 난 이고
철주민란 철주 농민들
창주민란 창주 농민들
성주민란 성주 농민들
김보당의 난 김보당
제1차 개경승도의 난 개경 승도들
조위총의 난 조위총
석령사의 난 석령사
망이 망소이의 난 망이, 망소이
손청의 난 손청
김순부·김숭의 난 김순부, 김숭
관성현·부성현 농민반란 관성현, 부성현 농민들
관노비의 난 죽동
조원정의 난 조원정
동경민란 이의민
김사미 효심의 난 김사미, 효심
만적의 난 만적
명주 민란 명주 농민들
김준거·김준광의 난 김준거, 김준광
금초의 난 금초
진주민란 진주 노비들
금주 잡족의 난 잡족인들
밀성 관노들의 난 밀성 관노비들
이비 패좌의 난 이비, 패좌
경주 별초군의 난 경주지방 야별초군들
신라부흥모의 동경 사람들
수창궁 사변 희종
최광수의 난 최광수
제2차 개경승도의 난 개경 승도들
이장대의 난 이장대
한순·다지의 난 한순, 다지
충주 노군의 난 충주 노군들
이통의 난 이통
필현보의 난 필현보, 홍복원
이연년 형제의 난 이연년
안열의 난 안열
애도·갈도 민란 애도, 갈도 백성들
원진의 난 원진
최탄의 난 최탄
삼별초의 난 삼별초
강윤명의 난 강윤명
숭겸의 난 숭겸
사용과 김성의 난 사용, 김성
서울 관악산 농민 봉기 서울 관악산 농민들
조일신의 난 조일신
정세운 암살 사건 김용, 안우, 이방실
흥왕사의 변 김용, 기황후
합주 사노들의 난 합주 사노들
김저의 난 김저
참고: 고려시대의 정변 }}}}}}}}}

1. 개요2. 설명3. 같이 보기

1. 개요

金沙彌·孝心─亂

1193년 7월 경상도운문, 초전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2. 설명

처음에는 김사미[1]는 운문, 효심은 초전에서 각기 유랑민들을 모아 세력을 따로 이루고 있었으며, 이 반란의 규모는 경상도 전역에 이를 정도로 상당히 컸다. 이 반란은 무신정권의 전횡과 부패로 인해 일어났던 것이며 각 고을을 노략질하면서 중앙 조정을 위협했다.

이 반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있다면 무신집권기 발생한 다른 흔한 민란들과 달리 서로 다른 지역에서 들고 일어나 상호 연대를 꾀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무신집권기에 발생한 반란들은 규모를 떠나서 특정 지역의 이해관계 만을 바탕으로 일어난 탓에 여기저기서 많이 벌어지긴 해도 상호 연계가 하나도 안돼서 중앙에선 어르고 달래거나 때로는 각개격파하며 쉽게 토벌할 수 있었다.

이 반란이 일어나면서 대장군 전존걸은 장군 이지순, 이공정, 김척후, 김경부, 노식 등과 함께 이 반란군의 토벌 작전에 나섰으며, 이들이 8월에 공격했지만 십팔자위왕이라는 소문에 의거해 신라를 부흥시킬 뜻을 가지고 있던 당시 무신정권의 수장 이의민이 이들과 내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순이 의복, 식량, 신, 버선 등을 제공하고 정보를 누설해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전존걸이 이끄는 군대를 패퇴시켰다.[2]

또한 이들의 세력은 이지순에게 노획한 금은보화를 제공했으며, 이지순이 적과 내통한 사실로 인해 법으로 이지순을 처벌할 경우 이의민이 죽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이 더욱 성할 것이라 탄식하면서 이들을 토벌하러 온 전존걸이 자살해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새로 상장군에 최인, 대장군에 고용지 등을 임명하고 병력을 보충하여 다시 토벌을 시작함으로써 농민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고, 결국 1194년 2월 점점 수세에 밀리던 김사미가 항복하여 처형된 뒤 효심이 반란을 이어갔다. 농민군은 같은 해 밀성(밀양) 싸움에서 7천명의 전사자를 내면서도 끝까지 치열히 싸웠으나, 결국 그 해 12월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효심은 생포되었다고 하나 그 후의 행적을 알 수가 없다.

고려 시대의 이름난 문인 이규보도 진압에 참여하였는데 종군 중에 나무 밑에서 난 버섯을 따서 구워먹었는데 맛이 좋았다는 기록을 남겼다.[3]

3. 같이 보기



[1] 보통 '사미'는 이름이 아니라, 견습 승려인 사미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대세다. (정식 승려는 비구. 여승은 비구니.) 즉 성이 김이요 이름이 사미인 인물이 아니라, 김씨 성의 사미라는 것. 그렇다면 김사미는 운문사 절에 소속한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2] 이에 대해서는 이의민이 진심으로 신라 부활을 꿈꾼 것이 아니라 후대에 최충헌을 비롯한 이의민을 몰아내고 권력을 차지한 이들이 이의민의 결점을 부각시킬 목적으로 패전 책임을 이의민 일파에게 떠넘긴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단 신라 부활을 꿈꾸는 것 자체보단 경주 출신인 이의민이 자신의 고향인 경주 세력을 기반 삼아서 아예 찬탈을 노렸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견훤이 지역의 민심을 얻기 위해서 후백제를 내세웠듯 이의민도 그냥 고향인 경주 사람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구심점인 명분으로 신라를 내세웠을 것이란 추측.[3]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2권에서 그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 저자의 지인인 스님이 교수로 있는 학인스님들의 학교에서 점심으로 표고버섯 무침이 나왔는데, 이야기를 들은 저자는 그들의 생각이 나 그날은 표고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