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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5 10:13:52

김세연/정치

1. 개요2. 정치 활동
2.1. 2008년~2020년2.2. 2020년 이후2.3. 정치적 노선2.4. 아젠다 20502.5. 의정 활동

1. 개요

김세연 前 국회의원의 정치 경력이다.

2. 정치 활동

2.1. 2008년~2020년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에 공천을 신청하였으나, 현역 국회의원이자 친이계였던 박승환에 밀려 탈락하였다. 이에 무소속으로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64.76%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그의 부친이 바로 직전 대수를 제외하고 금정구에서 5선을 한 김진재 제11·13-16대 국회의원이었기 때문이다.[1] 대표적인 2세 세습 국회의원 남경필 부자를 뛰어넘는 지역구 세습으로[2], 이 부자는 약 40년간 이 지역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된다. 당선 후 한나라당에 복당하였다. 이후 당에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등 개혁적인 성향으로 분류되어 2008년 한나라당 내에서 개혁 성향 초선의원들의 모임인 민본21에서 간사직을 지냈다.

2011년 홍준표 당대표 체제가 붕괴되면서 박근혜를 중심으로 한 비상대책위원회가 구성되면서 비대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개정하고 당의 노선과 정강정책을 바꾸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때 내걸었던 제1공약이 바로 국회선진화법이었다. 황우여, 남경필 등과 함께 국회선진화법 입법을 주도하였다. 새누리당 내에서 국회선진화법에 대한 반대와 개정이 주장될 때마다 이를 반대해왔다.

2015년 논란이 된 국회선진화법의 발의자 중 한 사람으로 현재까지 국회선진화법의 개정을 강경하게 반대하고 있다. 결국 2016년 5월 26일 헌법재판소에서 국회선진화법 유지하도록 하는 판결을 내리자, 김세연은 "헌재의 각하 결정은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이라며 "무리하게 헌법소원을 진행하다 여의치 않자 편법적인 방법을 찾아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면서 결국 망신을 자초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김세연은 "스스로 지키지 못한 의사 절차에 대한 국회 권한을 헌재가 존중해줬으니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매우 자괴감을 느낀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김세연은 "앞으로 선진화법을 정쟁의 대상으로 삼아 에너지를 헛되이 낭비하지 말고 대화와 타협이라는 선진화법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보다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국회가 되기 위한 개선방안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을 앞두고 진행된 사전 여론조사에서 공표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줄곧 부산광역시장 지지도 1위를 달렸다. 결국 불출마 선언을 했지만 당시 40대 초반의 나이에 부산 지역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는 대목이다.

새누리당 내에서 개혁 성향이다. 과거에는 본인의 뜻과 무관하게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때의 한나라당 공천 탈락으로 인하여 친박으로 분류되었으나[3], 제19대 국회의원 임기 중에 다시 비박계로 소개되었고, 그 가운데 친유계로 분류된다. 평소에 유승민 의원과 긴밀하게 의견을 나누는 사이로 알려져 있다.

2016년 친유계가 공천 탈락하는 파동이 휩쓴 마당에서도 공천을 따내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다. 두 야당 후보들과의 3자대결에서 56.58%의 득표율로 3선의 고지에 올랐다. 지역구인 금정구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김세연에 대적할 만한 경쟁자가 전무한 상황이라고 알려져 있다.

2016년 친유계가 공천 탈락하는 파동이 휩쓴 마당에서도 공천을 따내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다. 두 야당 후보들과의 3자대결에서 56.58%의 득표율로 3선의 고지에 올랐다. 지역구인 금정구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김세연에 대적할 만한 경쟁자가 전무한 상황이라고 알려져 있다.

2016년 5월부터 새누리당 부산시당 위원장을 권한대행 형식으로 잠깐 맡았다가 2016년 7월에 국회 정치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당위원장직은 이헌승 의원에게 넘겨주었다. 2016년 12월에는 새누리당 비박계의 대표주자로서 원내대표에 출마한 나경원 의원과 정책위의장에 출마하였지만 낙선했다.

12월 말에는 새누리당을 탈당하여 개혁보수신당[4]에 합류하였고 정강정책 및 당헌당규 팀장을 맡아 신당의 정체성을 정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바른정당의 부산시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았다. 2017년 4월에는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바른정당에서 유승민이 대선후보로 최종 결정됨에 따라 당이 선거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당의 사무총장에 임명되었고, 선대위에서는 조직과 자금을 총괄하는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참여했다. 바른정당의 싱크탱크 격인 바른정책연구소 소장도 겸임하고 있다. 6월 27일 사무총장직에서 물러났고, 7월 3일 바른정당 정책위의장 선거에 단독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2017년 10월부터 바른정당 내 통합파들을 중심으로 정계개편 논의가 이어지는 과정에서 11월 1일 남경필 경기지사가 제안한 자유한국당 및 바른정당 통합 전당대회 개최안에 대해 의사를 내비췄다. # 여러 가지 사안을 두고 줄곧 입장을 같이 했던 유승민의 기존안[5]에 대해 이견을 드러냈다. #

바른정당과 국민의당의 합당이 진행되는 와중이었던 2018년 1월 9일 입장문을 통해 "지역구 국회의원으로서, 그간 지역에서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저와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해 온 당원동지들의 뜻을 받들어 자유한국당으로 복귀하겠다."고 밝힌 후 당시 경기도지사였던 남경필과 서울특별시 송파구 갑 국회의원이었던 박인숙과 함께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였다. # 복당의 배경을 두고 여러 가지 얘기가 나오고 있는데 지역구인 금정구의 정치적 지형이 매우 보수적이기 때문에[6] 6월 지방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지역당원들을 비롯한 지역구 조직 구성원들의 복당요구가 매우 거셌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구 바른정당에서 자유한국당으로 넘어간 국회의원[7] 중 상대적으로 욕을 덜 먹는 국회의원이다.[8] 사실 김세연이 자유한국당으로 넘어간 건 다른 의원들과 달리 지역주민들과 소속 지방의원들의 강력한 요구 때문에 거의 어쩔 수 없이 입당한 것이라 다른 의원들과 비교하기가 애매하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유한국당 복당 스타트를 끊은 친무계를 빼고는 각자의 정치적 혹은 지역구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친무계와 김무성을 제외하면 무작정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다고 비난하는 것 또한 적절치 못한 부분이 있다. 자한당홍준표는 "들어오려는 분 배척하는 정당 아냐" 라며 일단 복당을 인정했다. #

다만 6월 펼쳐진 7회 지선에선 자유한국당에 대한 비토정서가 팽배해지면서 원정희를 위시한 수족라인들이 죄다 갈려나가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본인의 지역구인 금정구의 정치구도가 바뀌었음이 증명되었기에 기껏 만들어놓은 바른정당을 떠나고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간 것이 허사로 돌아갈 위험이 있다. 지지자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야 좋지만 자기 지역구 내에서 지지층 자체가 축소된 것에 대한 대처가 시급한 상황이다.

이후 자유한국당 부산시당위원장 및 중앙연수원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지난 7회 지선에서 자유한국당이 부산에서 참패를 겪으면서, 부산시당을 전면적으로 개혁, 수습하고 있으며 새로운 인물 영입 및 부산시당 개편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다.

2019년 3월 황교안 신임 당 대표는 김세연 의원을 여의도연구원장에 임명했다. 이를 두고 친박계의 지지를 받는 황교안이 당 통합을 위해 비박 성향을 끌어안으려 한다는 해석이 나왔다.

그런데 2019년 7월 여의도 연구원장을 # 명목상의 이유는 김세연이 맡거 있는 보건복지위원장과 여연 원장 일을 병행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는 것. 그러나 김세연의 겸직 의사가 커서 없던 일이 되었다고 한다.

2019년 11월 17일, 자유한국당에 대해 자유한국당은 이제 수명을 다했습니다. 이 당으로는 대선 승리는 커녕, 총선 승리도 이뤄낼 수 없습니다. 무너지는 나라를 지켜낼 수 없습니다. 존재 자체가 역사의 민폐입니다. 생명력을 잃은 좀비같은 존재라고 손가락질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창조를 위해서는 먼저 파괴가 필요합니다. 깨끗하게 해체해야 합니다. 완전한 백지 상태에서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라고 하고 21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19년 12월 2일, 자유한국당에서는 당직자 총사퇴로 쇄신하기로하고, 김세연 의원도 동의해서 이날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 원장직을 내려놨다. # 하지만 이후 일괄 사퇴 의사를 표시한 당직자 중 김세연 의원을 제외한 상당수가 유임됐다. 이에 ‘김세연 찍어내기’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며칠후에 신동아와의 인터뷰 #에서 당시 상황도 설명했다.

2.2. 2020년 이후

2020년 1월에는 자유한국당의 공천관리위원회에 관리위원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김세연 의원 본인은 원래 당의 완전한 해체를 주장했으나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다가올 총선에서 소위 개혁공천을 통해 당이 쇄신하는 길이 차선책이라고 생각해서 관리위원직을 받아들였다.

2020년 2월 미래통합당이 출범하고 난 이후에도 공관위원직을 계속해서 역임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행보를 오랫동안 같이해왔던 유승민과 재회했다.[9][10]

공관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강남구 병에 김미균의 공천을 주도하는 등, 황당한 공천 퍼레이드를 벌였다. # 애초에 김미균을 영입한 것이 김세연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 또한 자신의 지역구인 금정구 선거구를 두고 황교안측 백종헌과 갈등도 있었다. # 본인이 지역구를 포기한다고 해놓고서는 영향력은 행사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퓨처메이커'라고 하여 청년 공천 지역을 정해 청년들을 공천했다가 번복되는 일도 있었다. 거창하게 말은 지어두었지만 사실상 험지에 청년을 내 모는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1 #2 또한 의왕시·과천시를 퓨처메이커라 해놓고는 해당 지역에 연고가 없는 광명시의원 출신을 공천하는 등의 사례도 있었다.

그렇게 2020년 4월 21대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이 역대급 참패를 당하는데 일조했다. 물론 100% 김세연의 귀책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가 잘못된 공천에 크게 관여한 것도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2019년 11월에 당의 몰락을 미리 예측했다. # 또한 재차 정당 해체하고 새로 시작하는 게 근본 처방이라고 주장했지만, # 또한 보수 정치 세대 교체에 40대도 노쇠하다며 당내 개혁을 훤했다. #

2020년 4월 23일 오거돈 시장이 성추행 사건을 인정하고 부산광역시장에서 전격 사퇴하면서 미래통합당의 차기 부산시장 후보 중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11] 여론조사에서 줄곧 부산광역시장 지지도 1위를 달렸다. 다만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주식백지신탁제도에 의해서 그가 보유한 동일고무벨트 주식 전부를 매각해야 하는 상황인게 걸림돌인지라 출마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견해도 많았으며[12] 결국, 9월 4일 부산광역시장 보궐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2021년 8월부터 유승민의 대선캠프인 희망22의 미래전략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22년 오랜만에 언론에 모습을 드러냈다. # "어떻게 왕을 탄핵할 수 있는가"라는 당원들의 의식 수준이 문제라고 비판하며 현 여당과 정부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밝혔다.

2023년 황보승희의 가족사 폭로전 와중에 공천 관련 수뢰 리스트에 김세연 前 국회의원의 이름도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

2.3. 정치적 노선

국민의힘 또는 우파 계열 정치인들 중에서 상당히 개혁적인 성향의 소장파 국회의원이다.[13] 유승민과 정치적 의견을 수시로 주고 받는 측근으로 분류된다.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바른정당을 탈당했었다. 탈당하기까지 고심을 거듭하다가 자신의 지역구 당원들과 지방의원들의 강력한 요청으로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공천을 책임져야할 문제가 있었기 때문.[14][15]

하지만 유승민에 대한 신뢰와 지지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으며, 유승민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그를 이해하고 동정하는 분위기가 존재하며, 탈당 당시 거의 유일하게 훈훈하게 헤어진 편이다.[16] 이 때문에 향후 몇 년 이내에 바른미래당으로 복당하지 않겠느냐는 일부 친유 지지자들의 견해도 있다. 바른미래당으로 복당할 지는 불투명할지라도, 적어도 유승민과 재결합 가능성은 충분히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새로운보수당자유한국당이 다시 합당하면서 둘은 미래통합당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국회 폭력과 강경한 투쟁과 갈등을 방지하기 위해서 국회선진화법을 만든 국회의원으로, 끝까지 국회 선진화법에 대한 소신을 지켰다. 박혜자 전 의원, 이용섭 전 광주광역시장[17]과 더불어 '지방대학육성법안'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18]

2.4. 아젠다 2050

20대 국회에서 여야, 보수와 진보를 초월한 입법 연구모임인 ‘아젠다 2050’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모임의 명칭은 독일의 노동개혁 모델 ‘어젠다 2010’에서 착안했다. 여야에서 중도통합적, 중도개혁적 의원들, 당내 주류에 속하지 않는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참여하였으며, 참여자들이 무게감있는 인물들이라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김종인, 유승민, 김성식, 이철희 등.

2.5. 의정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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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지역구 15개 중 14개를 모두 김영삼통일민주당이 차지하는 동안 유일하게 민정당이 차지한 곳이 바로 금정구의 김진재였을 정도였다.[2] 남평우 - 남경필 부자는 22년간 수원시 팔달구(수원시 병) 지역구를 차지했었다.[3] 게다가 박근혜의 사촌형부가 한승수였고, 그 한승수의 사위였기에 인척관계가 성립되기도 했다는 점도 어느 정도 이렇게 보이는데 있어서 작용했을 것이다.[4] 2017년 1월 8일 공식적인 당명을 '바른정당'으로 채택했다.[5] 바른정당 전당대회를 예정대로 11월 13일에 개최.[6] 김세연과는 별개로 부친인 김진재는 민정계 출신이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보수성을 띠었다. 게다가 소선거구제로 환원된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이 부산을 쓸어갈 때에도 민주정의당 후보 중에서 김진재 혼자 생존에 성공했을 정도.[7] 이종구, 이은재, 박성중, 박인숙, 김용태, 김성태, 정양석, 홍일표, 주호영, 강길부, 홍문표, 이진복, 장제원, 김무성, 김세연, 박순자, 홍철호, 김영우, 김학용, 권성동, 황영철, 이군현, 여상규, 김재경[8] 이는 손학규의 뜻을 위해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고 손학규를 따라 구국민의당으로 넘어간 이찬열 의원도 마찬가지.[9] 그러나 본인은 아직 공관위원으로 있는데다 유승민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해서 둘이 같이 활동하는 모습은 총선이 끝난 뒤에야 볼 수 있을 듯 하다.[10] 유승민김성동 마포구 을 후보를 지원하러 왔을 때 김세연 의원도 김성동 후보를 지원하러 오면서 드디어 두 의원이 재회했다.[11] 미래통합당 내 부산시장 후보군들 중, 조경태하태경은 21대 국회의원이기 때문에 21대 국회에서 100석이 조금 넘는 의석수를 가진 미래통합당은 의원직 사퇴를 만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서병수도 마찬가지로 현재 21대 국회의원인데다가 예전 부산시장 시절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었고, 당내 중진의원으로서 국회부의장 또는 원내대표 등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어서 출마가능성이 매우 낮다.[12] 동일고무벨트 창업주인 김도근의 손자이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군 회사를 자신의 손으로 남에게 넘길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13] 국민의힘 정치인 치고는 기본소득에 대해 긍정적이고,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서도 논의해야 한다고 할 정도다. 국민의힘 내에서 온건 보수주의자인 남경필, 원희룡, 유승민, 정병국 등보다 더 온건한 성향을 가진다.[14] 21대 총선 불출마한 뒤 언론에 보도된 일화에 따르면 사석에서 자신이 다음 총선에 도전하는 것이었다면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하지 않았을 거라 말했다고 한다.[15] 국민의당 통합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통합 문제는 전혀 아니고 지역구 문제 때문이라고 본인이 밝혔다. 김세연 의원 역시 국민의당과 통합하는 데에는 찬성했다.[16] 김세연 의원이 탈당을 선언한 다음날 유승민 대표와 바른정당 의원들을 공식석상에서 만났는데, 김세연 의원은 울먹임을 참는 표정을 하고 있고 유승민 대표와 다른 의원들은 환한 표정으로 격려해주는 모습이 언론에 나왔었다.[17] 19대 국회 당시 광주 광산 을 의원. 2018년 광주광역시장으로 당선.[18] 김세연의 지역구인 금정구에는 부산대학교가 위치해 있어서 이 법안을 제안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