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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사 ~ 중세
나미비아 국가의 기원을 알 수 없으며, 인종적으로는 코이산 부족의 거점이다. 최초로 이곳에 정착한 부족은 유목 민족인 산족이었다. 이후 코이코이족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산족과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코이코이족은 산족을 몰아내거나 흡수하면서 나미비아를 지배하는 부족이 되었다.이후, 반투족들이 남아프리카 일대로 이주 및 정착하면서 코이산 부족들은 나미브 사막으로 거주지역이 줄어들었다. 반투족들은 코이산 부족들을 정복하면서 반투족들과 코이산 부족간에 통혼이 이뤄지기도 했다. 그리고 나미비아 일대의 반투족들은 코이산 부족들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유럽인이 이곳에 최초로 발을 들인 것은 15세기 말, 포르투갈인이 이곳을 방문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나미비아는 거의 황무지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곳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19세기 중순이 되어 독일인이 이곳에 진출하면서 비로소 유럽 열강들의 본격적인 진출이 시작되었다.
2. 독일 제국 ~ 남아공 통치까지
19세기 후반 독일 제국의 식민지 침략 결과 1884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 식민지가 되었다. 나마족과 헤레로족은 독일 자본으로 건설된 광산에서 혹사당해야 했다. 이 당시 식민지 총독을 역임했던 독일의 군인인 로이트바인이 "나미비아 원주민들은 놀라울 정도로 독일의 새 질서에 적응하고 있다"고 선전하자 많은 독일인들이 나미비아로 건너왔다. 나미비아인들은 광업을 비롯한 저임금 중노동에 시달렸다. 이러한 식민제국의 차별에 나미비아의 부족인 헤레로족과 나마족 등이 봉기를 일으켰으나 독일군에 의해 잔혹하게 학살당하기도 하였다(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헤레로 족은 무려 70%에 달하는 사람들이 무차별로 학살당하거나 그냥 사막에 맨 몸으로 내버려져 사막에서 아사하거나 하이에나나 사자 등 맹수들에게 포식당하며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와 같은 독일 제국의 악랄한 식민통치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이 패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나미비아에서는 독일에 대한 앙금이 꽤 남아있으며, 당시 학살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에서 모든 해외식민지를 포기했고, 독일령 남서아프리카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남서아프리카는 1920년부터 1990년까지 무려 70년동안 남아공의 위임통치를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국제연맹을 대체하여 설립된 UN에서는 모든 위임통치령의 독립을 권고했고, 남아공 치하의 남서아프리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아공에서는 이러한 권고를 무시했고, 나미비아의 독립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당시 나미비아는 인구도 적고 산업도 낙후되어 남아공의 경제에 종속되다시피 했고, 사실상 독립할 자체적 힘도 부족했다.
남아공의 백인정권에서는 자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남서아프리카에도 적용했으며, 영토 내에 반투스탄도 세워졌다. 이러한 남아공의 지배에 항거하여 나미비아인들은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나미비아 인민해방전선이라는 조직은 앙골라등지에서 지원을 받아 싸우는 등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독립전쟁은 무려 1966년부터 1989년까지 23년간 지속되었다. [1] 한편, 남아공이 인종차별 정책으로 인해 점차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기 시작하자 반대급부로 나미비아의 독립운동은 국제적 동정과 지지를 받게 되었다.
결국 남아공의 백인정권이 붕괴되고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함에 따라 남서아프리카의 독립을 인정했다. 남서아프리카는 1990년 남아공으로부터 완전한 분리 독립을 달성하였다.
3. 독립 이후
1990년 3월 1일 독립한 남서아프리카는 국명을 나미비아로 정하고, 샘 누요마를 대통령으로 하는 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는 나미비아를 재건하기 위해 혼합경제를 장려하였다.남아공의 지배를 받던 1970, 80년대 당시 케냐, 잠비아, 탄자니아 등 과거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의 지원을 많이 받았던 인연에 따라 영국의 직접 통치를 받지 않았음에도 영연방에 가입했다.[2]
독일과 나미비아 정부가 독일제국 당시 있었던 나미비아 학살 사건을 집단학살(genocide)로 명확하게 규정하는 공동 선언을 놓고 양자 회담 중이며 이를 2016년 연말까지 마무리할 계획이다.
그러나 독일 측 대변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사과로 인한 배상조치나 법적 결정이 도출될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고, 사과 이후 관련한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서의 태도 전환을 취할 여지 또한 부인하고 있다. 여기서 배상 부분에 대해서는 나미비아의 독립 이후로 수억 유로의 원조를 해왔다며 배상하지 않으려 했으며, 대신 담수처리 시설 등의 인프라 건설을 돕겠다고 하였다. 아무래도 유럽 국가들에게는 확실한 배상 조치를 취한 것과는 반대로 조금은 미적지근한 방식이기 때문에, 결국 어물쩡어물쩡 넘어갔다는 평. 그나마 과거사 청산에 한발짝은 다가갔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볼만 하다.
2016년 독일 정부는 헤레로족 학살 행위를 인정하고 사과하였다. 이후 독일은 나미비아를 식민지배했던 당시 연구에 사용하겠다는 명목으로 가져갔던 두개골을 2018년 8월 29일 3번째로 열린 행사를 통해 나미비아로 되돌려주었다. 또한 2019년 5월 17일에 독일 정부는 120여년전에 약탈해간 유물을 나미비아에 반환했다.# 문제는 이 두개골들은 사냥꾼들이 사슴이나 호랑이 박제하듯 기념품으로 가져간 것들이고, 가져가선 별 분류 없이 박물관에 쌓아뒀다는 것이다. 당연히 살해당한 이들의 이름도 고향도 모르고, 쌓아둔 두개골 더미를 보여주며 '이 중 하나가 당신들의 선조다.' 하는 수준이었다.
2019년에 재건되는 프로이센 왕궁 내에 헤레로족 학살을 비롯한 식민지에서 자행된 만행을 반성하는 전시 공간을 마련한다고 하니 아주 나몰라라 손놓고 있지는 않다.
2020년 12월 3일에 나미비아 북부 옴푼자 지역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아돌프 히틀러 우노나라는 이름의 정치인이 지방의원에 당선(!)되자 화제가 되었다.#
[1] 이 전쟁은 '나미비아 독립 전쟁', '남서아프리카 국경 분쟁'으로 불린다. 이 전쟁은 아프리카 국가들과 소련을 포함한 제2세계국가들이 나미비아 인민해방전선을 지원하였으며, 당시 식민지들의 독립 전쟁에서 남아공의 도움을 받은 포르투갈 독재 정권이 남아공을 지원하였다.[2] 물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도 모잠비크나 르완다처럼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은 적이 없으면서도 영연방에 가입한 나라들도 일부 존재한다. 다만 독일 제국의 패망 이후에 영어를 사용하는 영어권 아프리카 국가인 남아공의 지배하에 있었던 나미비아와 달리 이들은 포르투갈과 벨기에의 식민지였다는 게 차이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