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정식명칭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라고 한다.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이후 김구는 장제스의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지원을 받아 한국 청년들의 군사간부 양성을 요구했다. 이에 장제스는 한국인 청년들을 낙양군관학교 특별반에 입학을 허가하여 1934년부터 초급간부 양성 과정에 한국인 청년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1]
난징본교에 있었던 김승곤지사의 증언에 따르면 중앙육군군관학교는 난징에 본교가 있었고 뤄양분교가 있었는데, 일본의 감시와 침탈로 인하여 낙양군관학교로 이전하게 된다. 1년 과정으로 독일식으로 군사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중국 사람이 만주사변 나기 전에 일본식을 사용했던 것은 사실이나. 1932년 만주를 잃고 나서는 장제스 교장이 이제는 일본식을 떨쳐버리고 독일식으로 교육받았는데 힘들었다고 한다.[2]
이를 운영하기 위해 한국측에서는 이청천 등 한국독립군 출신 장교들이 교관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2. 황포군관학교와 연관성
황포군관학교 10기 이후부터는 중앙육군군관학교로 개칭되서 낙양에서 양성하게 된다.[3]제 1기에서부터 제 7기 까지만해도 몇 개월 정도로 졸업을 시켰다. 그러나 낙양군관학교로 통폐합제 8기에서부터 제 12기 까지는 만 3년 동안을 배워야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군관학교는 제 13기 이후 장제스 총통이 대만으로 간 뒤 폐교조치되었다.
3. 한국인 생도
『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출신 간부들을 적절하게 배출하였다. 11기로는 남목청 김구 피격을 한 이운한도 보인다.
8기[4] | 이근호(李根浩) · 나월환(羅月煥)[5] | |
10기 | 왕중량 나태섭(王仲良, 羅泰燮)[6] · 고일명(高一鳴, 高時福)[7] · 왕형(王衡, 安椿生)[8] · 왕신호(王信虎) · 조동윤(趙東潤) · 노태준(盧泰俊, 李無雄)[9] · 김동수(金東洙)[10] · 한대원(韓大源) · 김고두(金高斗) · 왕자인(王子仁)[11] · 이의흥(李義興)[12] · 김동일(金東一) · 진동명(陳東明) · 신계서(申繼瑞) · 진국동(陳國東, 金裕哲)[13] | |
11기 | 장병훈(張炳勳) · 조열광(趙烈光) [14] · 이지강(李志剛, 李相勳) [15] · 진낙삼(陳樂三) · 조황(曹晃, 千暻伊) · 최영빈(崔英賓) · 유장환(劉章煥) · 왕수의(王守義) · 유민(劉敏) · 최양성(崔陽成) · 김병화(金炳華)[16] · 이철중(李鐵重) · 이운산(李雲山, 張致文 · 李雲煥)[17] · 관건 김병일(關鍵, 黃載衍)[18] · 엽홍덕(葉鴻德) · 강지산(康志山, 蔣載福) · 이청산(李靑山, 金貞彩) · 오주국(吳柱國, 白贊基) · 이국화(李國華, 韓道源)[19] · 이철부(李鐵夫, 金世雄) · 김해석(金海石, 朴珍守 · 朴景一) · 서홍(徐洪) · 구양군 박기성(歐陽軍, 朴基成)[20] · 이현근(李炫瑾) [21] | |
12기 | 노복선(盧福善) [22] · 김용무(金用楙) [23] · 진경성 신송식 (陳敬誠, 申松植) [24] · 김태삼(金泰三) · 김철(金鐵) | |
15기 | 유해준(兪海濬) [25] | |
16기 | 이규학(李奎鶴) [26] · 김응삼 한도명(金應三, 韓道明)[27] | |
18기 | 송면수(宋冕秀) [28] · 왕영수(王永秀, 민영수閔泳秀) | |
19기 | 이윤장(李允章)[29] | |
20기[30] | 김중진(金重鎭) · 강홍모(姜弘模) [31] · 이건국(李建國) [32] · 장철부(張哲夫)[33] | |
21기 | 조동린(趙東麟) [34] | |
22기 | 김영훈(金英勳) · 박위택(朴胃澤) · 김현규(金現奎) · 박천마(朴天馬) · 이시엽(李時燁) · 김중달(金重達) · 김명규(金明奎) · 안창도(安昌道) · 오용필(吳用弼) · 정기엽(鄭基燁) · 장해덕(張海德) · 박윤호(朴允鎬) · 권필현(權必鉉) · 장정근(張定根) · 김정인(金正仁) · 안수성(安秀成) · 김시구(金是九) · 김치삼(金致三) · 이성만(李成滿) · 박성남(朴成男) · 허지수(許志秀) · 서삼철(徐三哲) · 이학서(李鶴瑞) · 김병철(金炳喆) · 김광진(金光進) · 문시욱(文時旭) · 이원곤(李元坤) · 김로(金露) · 김은석(金銀錫) · 강일영(康一永) · 이학률(李學律) · 조동희(趙東熙) · 백현일(白賢一) · 이시봉(李時奉) · 김대위(金大衛) · 김병선(金柄善) · 문창덕(文昌德) · 박재준(朴在俊) · 나태규(羅泰奎) · 한창섭(韓昌燮) · 최용산(崔龍山) · 김용호(金龍浩) · 문창흥(文昌興) · 김은령(金恩嶺) · 김백운(金白雲) · 김일건(金一鍵) · 배호원(裵豪元) · 오귀성(吳貴星) · 문인준(文仁俊) · 이원경(李元敬) · 양치호(楊致昊) |
4. 관련 인물
[1] 김원봉의 의열단은 1926년 황포군관학교 입교했는데, 그것보다 늦은 셈이었다.[2] 이현희 대담,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3] 일본의 간섭이 심하게 되자 황포군관학교와 난징육군군관학교와 합교시켜서 낙양군관학교로 전부 이전한 것으로 보이며 황포군관학교라고 부르기도 한다.[4] 여기서부터 난징중앙육군군관학교과 합교해서 뤄양중앙육군군관학교로 합교된다.[5] 광복군 제 5지대장 1942년 3월 1일, 박동운에 의하여 암살됨[6] 한인애국단, 한독당, 제 2징모분처 간부, 임시정부 군무부 간부[7] 광복군 제 2징모분처, 군무부원, 임시정부 내무부 총무과장, 민정과장, 심리작전연구실[8] 광복군 제 1징모분처, 광복군 제 2지대 1구대장[9] 광복군 제 2지대 제 2구대장[10]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부대장, 광복군 제 5지대 1구대[11] 조선의용군[12] 안춘생 증언엔 만미터 선수로 달리기를 아주 잘 했으며 조선의용대로 갔다고 전해진다[13]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총사령부 참모, 미 5공군 특파원 선전공작[14] 조선의용군[15] 조선의용군[16] 1936년 8월 14일, 군관학교 동기생 김순곤(金順坤)·김학무(金學武)·김파(金波) 등과 함께 중국 상해의 일본총영사관을 폭파하기로 계획하고 불란서조계 환룡로(環龍路) 태흥방(泰興坊)에서 폭탄 2개를 완성하고 3개째를 제조하다가 갑작스런 폭발로 순국하였다.[17] 남목청 김구 피격범[18] 조선혁명군, 조선의열단, 민혁당 통신 특파원[19] 이봉창에게 군자금과 권총 전달, 맹혈단(盟血團) 옥관빈 사살, 상해 일영사관 투탄, 일 유길명(有吉明)공사 암살계획 중 체포, 1937년 6월 5일순국[20]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광복군 제 5지대 2구대장[21] 의열단, 중국군 제 6사 제 17여 제 31단 제 2영 제 6연장, 한커우 전선에서 체포 순국[22] 제 1징모분처, 제 2지대 3구대장, 총무조장[23] 귀주(貴州)포병학교 교관, 1942년에는 연합군 사령부 제16연대 소교[24] 민혁당, 조선의용대 제 1지대, 광복군 제 3지대, 한광반 교관, 참모처 제 1과[25] 총사령부 참모, 제 2징모분처[26] 제 3징모분처 정보조장, 군무부원, 군무부 군사과장, 내무부 경무과장, 경위과장[27] 한인애국단, 제 3징모분처 훈련조장, 절동전투 란씨역에서 부상 후유증으로 1942년 란씨역 전투에서 전사[28]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주임 대한민국임시정부 문화부 및 선전부위원 1944. 8. 21 광복군 O.S.S. 정보파괴반[29]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제 2지대 산시, 허난지구[30] 1945년 8월 15일, 일본 패전 이후의 기수이다.[31] 광복군 제1지대 1구대 초모공작대원[32] 광복군 제 3지대 화중지구[33] 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에 입대, 한미전차훈련반 대기 중 광복을 맞이함[34] 광복군 제 3지대, 지하공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