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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0 11:59:11

염동진

파일:염동진.png
1936년 6월 3일 고등과 수배자 명단에 오른 염동진의 1934년 낙양군관학교 생도 시절의 모습. 염동진의 모습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진이다.
이명염동진(廉東振)
본명염응택(廉應澤)
출생1909년[1] 2월 14일
평안남도 중화군 하도면 초현동 (現 중화군 중화읍)
사망1950년 7월 이후 (향년 41세 이후)

1. 개요2. 생애3. 밀정 논란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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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에 우익 조직인 백의사를 이끈 백색테러 지도자다. 본관파주 염씨 동정공파이며 본명은 염응택(廉應澤)이다. 이명으로 성씨를 다르게 기재하여 簾應澤·閻應澤 등으로 쓰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독립운동가이며 백의사의 리더로 잘 알려져 있으나 일각에서는 일제시기 동안에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채 일본의 밀정 노릇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이런 주장은 본래 《비밀결사 백의사》와 같이 사료적 가치가 떨어지는 자료에 근거를 두는 정도인지라 신빙성이 낮은 편이었으나 학계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의해 중국 측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가 실제로 일제의 밀정이었다는 주장이 다시금 제기되고 있다.

2. 생애

1909년 2월 14일 평안남도 중화군 하도면 초현동[2](현 황해북도 중화군 중화읍)에서 염도열(廉道悅)의 차남[3]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중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 4월 선린상업학교 본과 1학년에 입학하여 1931년 3월 졸업하였으며, 이후 파주군 임진면(현 파주시 문산읍) 문산리에 잠시 거주하다가 1934년에 인척이었던 염온동의 주선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한다. 곧 상하이시로 건너가 지청천 파벌[4]에 가담하여 남경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제1기 입학한다.# 이범석이 당시 생도 대표였다고 한다.

입교 자격 심사는 김구, 지청천, 김원봉이 했는데 신익희의 추천으로 입학한다. 신익희[5]와의 인연은 여기서 시작된다. 나중에 중국국민당임시정부를 지원해 생도들에게 11원 씩 주었는데, 여기서 말썽이 생겨 폭동이 일어나자 염동진은 가담했다가 난징에 있던 신익희에게 피신한다. 신익희는 염동진에게 '요춘택'이라는 가명을 지어주고, 난징 국민혁명군 헌병사령부 우편검사처에 취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얼마 후에 염동진은 남의사에 발탁되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남의사 단원들과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근무한다.

1943년에 조선으로 돌아온 염동진은 일본 나라여고를 졸업하고, 평양 서문여고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던 최성률과 결혼한다. 비슷한 시기 대동단을 결성하는데. 1919년 설립된 조선민족 대동단과는 다른 단체다. 임시정부 요인 박찬익의 동생이자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조선에 와서 스님이 된 박고봉이 여운형조선건국동맹에 대항할 조직을 만들자고 해서 만들었다. 노변야화 김두한 편제42화 이박사와의 관계 1969년 12월 5일 방송에 의하면 중국 공산당에게 고문을 당해서 실명됐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서울에는 어떤 단체가 있었으냐 하면, 함경남북도하고 평안남북도하고 황해도 일부에서 공산당한테 재산과 생명을 빼앗기고 학살당한 이북 5도 동포가 모여서 만든 ‘백의사’라는 단체가 있었어요. 장개석 총통 밑에 있는 건 ‘남의사’인데 이 단체는 군통국장(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장) 대립이라고 하는 육군 중장이 만들어 장개석 총통의 생명을 지킨 겁니다. 여기에서는 백의사라고 만들었는데 공산당 두목을 죽이려는 5도 단체의 청년들이 모였죠. 그 백의사가 사령부로 되어 있어요. 지하사령부인데 사령관이 누구냐면 염동진 씨라고 평양분인데, 장개석 총통 밑의 군통국에 있다가 육군 중장 계급장을 달고 평양에 들어왔지만 밀렸거든요. 항일 투쟁을 했으니 어떠랴 싶었는데 공산당 본부에 끌려가 척추뼈가 부러지고 장님이 됐어요. 중국이 항일 전쟁 할 때 모택동이가 염동진은 장개석 편이라고 두들겨 팼단 말이야. 그래서 옛날에 항일 투쟁하던 동지들이 그 분을 업고 38선을 넘어왔어요. 이름을 한국말로는 염동진 씨고 중국말로는 요 모씨라고 썼대요.그런데 백의사 사령부는 비밀 결성인데 남쪽 사람이라고는 나 하나예요. 그건 왜 그러냐면 독립 운동을 한 민족주의자로서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이고 항전총연합회 주석으로 있던 백야 김좌진 장군이 제 아버님 아닙니까? 아버님께서 국제공산당한테 암살을 당해서 돌아가셨으니까 일급 거물이거든요. 우리 한국의 거물이 국제공산당한테 제일 처음으로 암살당한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그 연유로 해서 백의사의 참모가 됐어요. 이북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돈이 없으니까 무기, 돈, 정보, 이걸 원하는 사람들이 나하고 합작을 원해요. 그런데 이박사와 뜻을 맞춘 염동진 씨가 나를 들어오라고 해요. 들어가니까 염동진 씨가 인사를 하고…

1945년, 현준혁 암살 혐의로 체포되지만, 부인 최성률이 소련군정 민정사령관 로마넨코의 부인에게 남편의 억울함을 탄원하여 석방된다. 이후 월남한 그는 신익희의 측근인 조중서를 만나서 대동단을 모태로 백의사를 조직한다. 백의사는 대동단의 후신이라지만 그와 연계된 정치공작대의 중앙본부장은 신익희, 행동대장에 조중서, 사령에 염응택(염동진), 부사령 박경구, 총무부장 유진산, 청년부장 조용진이었다고 한다. 염동진은 박용직, 유진산, 이규갑과 함께 좌익이었던 김두한을 설득하여 아버지 김좌진의 죽음을 알리고 공산당의 만행과 자유시 사변의 일도 알려 김두한을 우익으로 전향하게 했다. 다만, 이는 김두한 문서에도 있고, 백의사 문서에도 있지만 신뢰도가 낮다. 김두한이 좌익이었다는 부분도 그렇고, 과정에도 논란이 많다.

백의사 조직 이후 각종 백색 테러와 대북 정보활동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주한미군 방첩대(CIC)와 긴밀하게 협조한다. 미국 제1군사령부 정보참모부 운영과장 조지 실리는 이른바 '실리 보고서'에서 염동진을 '가장 악질적인 인물'로 백의사를 '남한, 북한, 만주와 중국 전역'에 걸쳐 '한국의 모든 계층을 망라'하는 지하조직으로 표현했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 역시 염동진에게 "명령만 받으면 누구든 암살하겠다"는 피의 맹세를 했다고 기술되었다.[6]

김일성을 암살하기 위해 요원을 보냈다. 김일성이 있는 평양의 연설장에 폭탄을 던졌으나 소련군 장교의 방해로 인해 김일성은 부상만 입었고 암살은 실패한다. 다시 암살하기 위해 김두한에게 정보를 보내 대한민청 정예 간부들을 산정호수의 김일성 별장으로 보냈지만 김일성이 없어서 실패했다. 휴가 끝나고 평양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탈출한 것인지 아에 안 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지인들이 피난을 권유하였으나 스스로 거부하였으며, 그대로 서울에 남아있다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백의사의 수장이었던 만큼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체포되어 피살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백의사의 본부로 사용했던 집은 궁정동에 있었는데, 6.25 전쟁 이후 국회의원 이인의 자택으로 사용하다가 5.16 군사정변 이후 중앙정보부에서 구입해서 안전가옥으로 사용했다. 이곳에서 훗날 10.26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그야말로 역사적 현장인 것이다.

3. 밀정 논란

일각에서는 염동진이 조사통계국 소속으로 만주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관동군에 체포된 후 관동군의 밀정으로 변절했다고 주장한다.[7][8] 하지만, 어디까지나 주장일 뿐 명확한 근거가 없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에는 등재되지 않았다.

金九 일파 특무대원 검거에 관한 건(1936년 8월 17일)에도 나온다.
簾應澤, 27 平南 中和郡 中和面草峴里82 소화 11(1936)년 3月 山城鎭(산성진) 憲兵(헌병) 분대 검거, 현재 同 부대의 밀정을 하고 있다함

1940년대 초 평양의 지하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에서 활동하였기에 '밀정설'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1937년부터 1940년까지의 활동공백만으로 장기간 독립운동에 투신한 인물을 배신자로 모는건 성급한 일이라는 의견이다. 아무튼 염동진은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2021년 6월 7일 그가 밀정이었다는 새로운 주장이 이번에는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다시금 대두되었다. 아래의 중국 공산당에게 고문을 당했다는 것은 자신의 친일 행적을 감추기 위한 거짓말이고, 사실은 일본 관동군의 고문을 못이겨서 밀정이 되었다는 것이다.

4. 대중매체에서

현재까지 염동진을 모티브로 한 인물들을 등장시킨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야인시대, 암살이 있다. 야인시대에서는 백색테러가 애국행위로 포장되어 당연히 그 수장인 염동진도 정의의 사도 수준으로 미화되어 문제가 된다. 그 외에 1973년작 <광복 20년과 백범 김구>에선 배우 강계식이 연기했다.

암살에서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진 않지만 그의 이름과 행적을 모티브로 한 가상인물인 염석진(이정재 분)이 등장한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김구와 같이 한국의 니콜라이 예조프역할이며 조지원이완용을 숙청할 때 등장. 이후 보위부에서 활동하며 나중에 세계대전 당시에는 진짜 예조프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죽이 잘맞는 모습을 보여준다.

4.1. 야인시대



[1] 1935년 낙양군관학교 졸업생 수배자 명단에는 1909년으로 기재되어 있었다.[2] 구한 말 평안남도 중화군 하도면 초현동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평안남도 중화군 중화면 초현리 → 1952년 군면리 대폐합, 평양시 중화군 중화읍 → 2010년 황해북도 중화군 중화읍.[3] 또는 3남[4] 민족혁명당 계열이라고도 한다.[5] 1892년생인 신익희가 형이었다.[6] 그런데 염동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몸 담았던 이력으로 백범 김구를 존경하고 해방 후에도 따랐다. 백범 김구와 경교장에서 자주 대화하는 장면이 목격되었다고 한다.[7] <비밀결사 백의사>, 이영신.[8] 염동진의 친일설을 내세우는 측에서는 염동진의 시력 악화도 관동군의 고문으로 인한 것이라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