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 실제 역사와의 비교 |
1. 개요
영화 남산의 부장들과 실제 역사와의 비교 및 차이점을 서술한 문서이다.영화 시작 전 픽션을 가감했다는 자막이 나오며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이 실제 인물과는 바뀌어 나온다. 이는 재현 오류에 대한 의혹을 피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사실 이렇게 논란이 있는 역사 소재를 영화화할 때는 명예훼손과 모욕죄 등이 걸릴 위험한 측면이 있기 때문에 반대로 의도적으로 역사와 떨어뜨려놓기 위한 작업이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동일한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개봉 당시에 관련자들이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이나 소송을 진행한 사례가 있었다.[1] 실명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우민호 감독은 '실제 사건과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였으나 영화가 실제 사건에만 갇혀있지 않고, 인물들의 내면, 심리, 감정을 파헤치며, 10.26 사건을 다른 시각과 시선으로 영화적 확장성을 가지고 표현하고 싶었다'고 GV를 통해 밝혔다.
실제 역사와 보다 가까운 드라마로는 제4공화국[2][3]과 제5공화국이 있으며,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은 장르가 블랙 코미디이기 때문에 실제 역사와 다르게 희화화한 부분도 있지만 이 작품에 없는 실제와 인물들도 있기 때문에 함께 비교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다.
이하 서술은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등장한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할 경우 [사실], 아닐 경우 [허구], 사실을 차용해 다르게 묘사한 경우 [각색]이라 표기한다.
2. 실제 역사와의 비교
- [각색] 등장인물들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은 각각 김규평 ≒ 김재규, 박통 ≒ 박정희, 곽상천 ≒ 차지철, 박용각 ≒ 김형욱, 전두혁 ≒ 전두환, 김계훈 ≒ 김계원, 장승호 ≒ 정승화, 데보라 심 ≒ 수지 박 톰슨이다.
- 박용각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하원의 청문회에 나가서 한국의 대통령과 정권의 실상에 대해 증언을 한 때가 '암살 사건 40일 전'이라고 소개된다.
[각색]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코리아게이트 관련 미국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선 것은 1977년으로 '암살 사건의 2년 전이다. 이에 대해 우민호 감독은 제작 보고회에서 실제 2년이라는 시간을 영화의 제한된 시간 안에 담기엔 연출상 문제도 있고 원작의 분량 또한 방대하기 때문에 핵심 사건에 포커스를 두고 40일이라는 시간에 맞췄다고 말했다. 김형욱 실종 사건은 1979년 10월 7일이므로 10.26 사건 직전에 발생했다.
- 박통이 김규평과 서로 친밀하다가[4] 회고록이 유출되는 시점부터 사이가 틀어진 후 곽상천과 더 가깝게 지내며 김규평은 다른 부하들처럼 이용하려는 듯한 모습도 나온다.
[허구] 박정희와 김재규는 서로 동향 출신에 군에서의 인연이 깊다보니 사적으로 굉장히 친밀해서 사석에서 김재규를 이름으로 부르고 말을 놓을 정도였다. 김종필과 김계원의 증언에 따르면 '박정희는 하급자라도 잘 하대하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김재규만 동생처럼 불렀다'고 하며 김재규도 최후 진술에서 '박정희와는 친형제 간도 그럴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였다고 말했다. 다만 이 친밀함이 지나치니 다른 부하에 비해 김재규는 야단쳐도 괜찮다고 많이 혼낸 경향은 있었다. 영화처럼 차지철과 동급으로 여겨질 관계가 아니었다. 다만 실제로 차지철이 당시 박정희의 신임을 무기로 장관급인 자신보다 한 급 높은 부총리급 중정부장 김재규에게 "김 부장"이라고 부르는 등 맞먹으려고 들었고 당시 거의 2인자에 가까운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면 곽상천(차지철)의 입지를 과하게 묘사했다기 보단 김규평(김재규)의 당시 입지를 과하게 작게 묘사했다고 볼 수 있다. 차지철이 무섭게 떠오르던 것, 최태민 처우 관련해서 박정희와 갈등을 빚은 것과 별개로 김재규가 당시 낙동강오리알일 정도로 입지가 위태로웠던 것까진 아니었다. 이러한 친분은 김재규의 재판 당시, 범행이 사적인 원한이 아니었음을 보충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영화로서는 차지철의 무례함, 박정희에 대한 충성 경쟁 등 여러가지 요인들과 이설들을 제한된 상영시간에서 압축해 놓기 위해서 픽션을 첨가했다고 볼 수 있다.
- 박용각이 회고록 원고 원본을 김규평에게 건네 준 후 일본에서 회고록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면서 황당해 한다.
[허구] 김형욱은 돈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5] 일본 출판사로부터 미리 거액의 계약금을 받고 나서 회고록 내용을 요약하여 몰래 출간을 했다.[6]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정희는 펄펄 뛰며 분노했고, 김형욱은 결국 프랑스 파리로 갔다가 의문사를 당했으며 시신조차 찾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 김규평이 박용각과 함께 5.16 군사정변에 가담했었다고 나온다.
[허구] 김재규는 5.16에 가담하지 않았다. 당시 김재규는 국방부 총무과장으로 재직하던 중 오히려 '반혁명 세력'으로 몰려서 수감당했다가 박정희가 동향 후배라는 이유로 보증해줘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 호남비료 사장에 임명되고 보안사령관, 3군단장 등 군부 요직으로 중용하면서 박정희의 선거운동을 도와주는 등 직간접적으로 정권에 협력해주었고, 군에서 중장으로 예편한 뒤 유신정우회 국회의원 9개월, 중앙정보부 차장[7] 9개월 등 한직을 떠돌다 1974년 건설부 장관 취임 이후 본격적으로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올라섰다. 그럼에도 영화에서는 5.16 혁명 주체 중 하나였던 김규평이 박 대통령에게 "이러려고 혁명했습니까? 혁명의 배신자를 처단하겠습니다!"라고 암살의 주요 동기까지 그러한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마치 김재규가 5.16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8] 10.26 사건 현장에 있던 인물 중 5.16 군사정변에 가담한 사람은 차지철이다. 김형욱은 육군 중령으로 군사정변에 가담했었다. 정승화, 김재규, 김계원은 참여하지 않았으며, 전두환은 당시 대위로 5.16 직후에 육사 생도들의 지지 시위를 조직하면서 박정희의 눈에 들게 된다.
영화에서 김규평은 혁명의 목적을 배반한 박통을 배신자로 처단한다는 말을 하며 암살하는데, '김재규가 혁명에 가담했었다' 는게 결정적인 허구이기 때문에 전제 자체가 허구인 영화의 묘사는 결코 10.26 사건의 실제 원인이 될 수 없다.[9][10] 물론 영화에서는 김규평의 내면의 생각을 뚜렷하게 묘사하지 않으면서, 이에 따라 관객들이 그가 사적인 감정 때문에 했는지, 진짜 나라 걱정 때문에 저질렀는지, 아니면 이 모든게 복합적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해 다양하게 스스로 평가할 수 있게 여지를 두었다.
- 김규평과 박용각이 사적으로 매우 친한 친구로 그려진다.
[허구] 실제 김재규와 김형욱은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같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에다 김형욱은 1925년생, 김재규는 1926년생[11]으로 나이가 엇비슷하긴 하지만, 실제 군경력이나 전역 이후의 행보를 보면 딱히 겹치는 부분은 없다.[12] 작중 모습은 픽션에 가까운 내용으로, 실제로는 육사 선후배에 정권 고위직으로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이 정도였던 걸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육사 기수로는 김형욱은 8기고 김재규는 2기이기 때문에, 김재규가 김형욱보다도 한참 선배다. 공화국 시리즈 드라마에서도 김형욱이 김재규한테 '선배님'이라고 부른다.
- 곽상천이 김규평 들으라고 "우리도 저 남산 쳐들어가자! 돈가스 맛 좀 한 번 보자!"라는 대사를 한다.
[각색] 사실 남산돈가스는 1992년에 개점했기 때문에[13] 사실에 맞지 않는 대사로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전 중정부장 김형욱이 비대한 체형 때문에 '날으는 (나는) 돈가스'라는 별명이라 불렸던 것에서 따온 대사일 수도 있다. 즉, 남산돈가스 상호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곽상천은 김규평을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는 박용각 이야기를 꺼내며 비꼬는 것(동시에 현시대 관객들에게는 남산돈가스와 연결되는 재미를 추구)라고도 볼 수 있다.
- 김규평이 곽상천과 언쟁하며 "요즘 중정은 그런거(고문 등 강압수사) 안 해"라고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고문을 암시하는 취조 장면이 등장한다.
[사실] 당시 남산의 고문실은 폐쇄되고 강압수사가 금지중인 상태였지만[14] 남산 외에도 고문실은 도처에 존재했으며[15] 교수, 학생 등 신분이 명확한 자들에 대한 정치적 강압수사만 중단하였을 뿐 간첩 수사에 의한 고문은 여전히 하던 대로 하고 있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수사중 가혹행위가 있었음이 인정된 사건으로 1977년 재일교포 간첩조작 의혹 사건이 있다.[16] 이러한 행적 때문에 김재규에 대한 재평가가 어느정도 이루어진 현 시점에서도 김재규를 기회주의자, 이중인격자로 바라보는 시선도 적지 않다.
- 김규평의 지시로 현지 외국인 용병들과 암살조를 조직하여 박용각을 총으로 쏴서 죽인 뒤, 그 시신을 믹서에 넣고 갈아버린다.
[???] 실제 김형욱 실종 사건은 누가 지시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여전히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공식적으로는 2005년 국정원의 조사로 '김재규의 지시 하에 외국인 용병들로 꾸려진 암살단에 의해 권총사살당했다' 고 결론이 내려졌지만, 김형욱의 유족들은 말도 안 된다며 부정하였고 부실조사 논란을 낳았다.
김형욱의 최후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영화는 전직 중정요원이 시사저널[17][증언록]과 그것이 알고싶다에 증언한 '양계장 암살설'[19]을 일정 부분 따랐긴 하지만 완전히 따르지는 않고 '죽인 뒤에 사체를 갈아 은폐했다'고 절충해 묘사했다.
원작을 집필한 김충식 전 기자도 이 설을 긍정하며 "정부의 입장으로 그걸 발표할 경우에 프랑스와의 외교 관계에서 일종의 부채를 공식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냥 사체를 낙엽에 파묻고 말았다라고 처리를 발표한 것으로 추정한다"라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 김영삼은 영화 내에서 실명으로 언급되지만 막상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적 덜 조심스러운 부분이라 실명을 그대로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10.26 사건의 도화선이 되는 부마민주항쟁 발발까지 상당히 긴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김영삼의 역할이 무척 컸지만, 박정희 주변의 인물 관계에 집중했기 때문에 극중에서는 부산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매우 단순화되어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김영삼을 영화에 집어넣게 되면, YH무역 사건이나 김영삼의 뉴욕 타임스 인터뷰,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 등 다뤄야 할 내용이 너무 많아지기는 한다.
- 김재규와 차지철의 가장 큰 갈등 원인 중 하나는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원작 '남산의 부장들' 책에서도 이를 언급하였으며, 원작 작가 역시 이 부분을 주목한다. 작가 인터뷰 내용 그러나 영화 속에선 일절 언급이 없다.
- 작중 대사가 존댓말이 거의 없고 대부분이 반말이다. 곽상천이 첫 등장시 김규평과 잠시 존댓말로 대화한 것을 제외하면, 협박을 당하는 데보라 심과 박용각도 반말로 일관하고 심지어 주한미대사와의 영어 대화도 자막이 반말로 표시된다. 극중 항상 존댓말을 듣는 인물은 박통 밖에 없다고 봐도 될 정도. 실제로 박정희는 김재규와 굉장히 친밀해서 시종일관 반말을 했다고 한다. 반면 김재규는 10.26 사건 때에조차 박정희에게 반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 부마항쟁 대책 회의가 열리자 곽상천이 캄보디아[20]에서는 300만 명을 밀었는데 부산·마산 시민 100만~200만 명 쯤 희생시켜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말로 설득하고, 박통이 4.19 혁명과 곽영주를 거론하며 사태가 심각해지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고 말하자, 김규평이 크게 흔들린다.
[사실] 김재규는 실제로 그와 같은 대화를 듣고 이러다 큰일나겠다 생각해 자신이 거사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밝혔다.박정희: "오늘 가보니 삽교천 공기는 좋고 공해도 없는데 신민당은 왜 그 모양이요. 오늘 삽교천 준공식 광경을 왜 KBS TV에 보도하지 않지? 정보부장, 신민당 상황은 어떻소?"김재규: "공화당 발표 때문에 다 틀렸습니다. 사표 내겠다고 한 친구들이 다 강경으로 돌아섰습니다. 아무래도 당분간 정 대행체제[21]의 출범은 어렵겠습니다. 그리고 주류가 강해져서 다소 시끄럽겠습니다."차지철: "그까짓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전차로 싹 깔아뭉게 버리겠습니다."
- 김규평이 김영삼을 두둔하자, 곽상천은 "그렇게 민주주의가 좋으면 미국에 가." 라고 말한다.
[사실] 실제로 김재규는 장준하의 측근이나 유가족을 돕거나, 김대중을 풀어주고 김영삼과 만나게 하는 등 알음알음으로 야권 인사를 도왔고, 1979년 봄부터 10.26 사건 직전까지 '민주민권 자유평등, '자유민주주의' 등의 붓글씨를 남기기도 했다. 반면 해직된 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YH 사건에 강경진압을 지시하기도 하는 등 이중적인 면모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김재규 문서 참고.
- 로버트 주한미국대사가 김규평을 불러 "사람을 납치해 죽이다니, 당신들이 시카고 갱인가?"라고 힐난하며 "박통은 이제 끝났다. 그런데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라고 압박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당시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는 인권 문제를 계속 거론하면서, 박정희 정권과 심각한 갈등 관계였다. 공공연히 주한미군 철수[22]를 거론하면서 한국을 압박하였고,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하려 했다는 주장도 유력하다. 아울러 김재규는 10.26 사건 이전에 주한미국대사[23]를 자주 만났고, 박정희 대통령을 죽인 이유에 대해서도 법정에서 "우방인 미국과의 사이가 너무 나빴다."고 거론했다. 이는 김재규가 미국의 사주를 받고 10.26 사건을 일으켰다는 음모론의 근거로도 자주 활용된다.
-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 일반에도 잘 알려진 이 대사는 김재규가 10·26 사건 당시 박정희에게 했다고 자신의 변호인에게 전한 말로, 동아일보의 비공개 수사 기록을 통해 공개된 말이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김계원과 심수봉은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10.26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 심수봉은 자신의 회고록 '사랑밖에 난 몰라'에서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나 "버러지 같은 놈" 등 김재규가 했다고 알려진 발언들에 대해서 "그런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총 쏘는데 급했지 여유를 부리면서 말을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양쪽 발언이 어긋나는 상황이므로 판단은 알아서. 그래서 그런지 이 발언은 그간 10.26을 다룬 픽션들에서도 여러 가지로 바리에이션되어 쓰였다.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암살 당시 이 발언을 하지 않으며 이 영화에서도 암살 당시가 아니라 부마항쟁에 대해 의논하던 중에 이 말이 나오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 이후의 내용은 합수부 결과인 다수설과 동일하게 흘러간다.
- 10.26 사건 이후에 전두혁이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비밀 금고에서 금괴와 스위스 비밀은행 계좌 목록이라 적힌 종이들 더플백에 넣고 빠져가나는 모습이 나온다.[24]
[사실] 실제로 당시 보안사령관이자 합동수사본부의 전두환은 대통령 집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 금고를 열어 보았고, 이 과정에서 나온 약 9억 원 상당의 현금과 수표를 발견했다. 그리고 권순정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보좌관에게 박 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자금이라는 진술을 듣자 일부를 사적으로 박근혜에 전달하였는데,[25] 얼마 후 10.26 사건의 진상조사를 밝혀달라며 3억 5000만원을 합수부에 전달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임의로 합동수사본부 수사 자금 명목으로 가져갔다. 다만 월간조선에서는 '프레이저 보고서에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비자금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반박을 하였다.
- 극 중 김규평이 손목에 염주를 차고 다니는 불교 신도로 보인다.
[각색] 실제 김재규는 10. 26까지만 해도 종교가 따로 없었지만, 감옥에 갇힌 후 불교에 입교했고 재판 과정에서 잦은 압박과 스트레스 때문인지 위안을 얻기 위해 자주 불경을 읽었다. 심지어 사형 판결이 나자 부하들 목숨은 살려달라고 부처님께 빈 구절이 옥중 수양록에 있으며 사형 당일, 염주를 끝까지 손에 쥐고 있었다. 참고로 김재규의 모친 권유금이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감옥에 갇힌 김재규를 면회한 자리에서 "부처님에게 네 죄를 대신 빌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 김규평은 조용하고 차분한 표준어를,[26] 곽상천은 대구경북 사투리 억양이 강한 말투를 구사한다.
[허구] 김재규는 경북 구미(선산)출신, 차지철은 경기도 이천 출신에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즉, 둘이 바뀐 셈.[27] 극중 인물의 성격과 박통과의 친밀도 등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적인 비틀기로 보인다. 곽상천 역의 배우 이희준이 대구 출신이라 사투리 억양이 편하기도 하고. 사실 호전적인 성격으로 나오는 곽상천과 달리 차지철은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였다고 한다.[28] 오히려 극 중 등장하는 인물 중 곽상천과 실제 성격이 가장 비슷한 인물은 전두환인데 극 중에서는 상당히 점잖은 인물로 나온다.[29]
- 박통이 군 시절에 마시던 막사(막걸리+사이다)가 정말 맛있었다며 오래된 음주 습관인 것처럼 나온다.
[각색] 박정희는 분식 장려 정책 이후 쌀막걸리가 심심하게 느껴질 때부터 막사(막걸리+사이다)나 비탁(비어+탁주)을 마셨다.[30]
- 탱크가 청와대 근처의 도로를 주행하고, 김규평이 분노한다.
[사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차지철이 박정희에 대한 충성을 표시한답시고(...) 매일 밤마다 탱크를 청와대 주변 도로에 빙빙 돌리게 하면서 무력 시위를 하는 바람에, 인근 동네 주민들이 전쟁이 일어난 줄로 알고 겁을 먹었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주민이 탱크 소리에 김일성이 내려온 줄 알고 놀라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는 보고가 나온다.
- 도입부에서 이발사가 박통의 면도를 해 주는 장면이 있다.
[허구] 청와대 이발사였던 박수웅은 면도를 하다가 상처를 낼까 두려워했던 탓에 박정희 대통령은 면도는 스스로 하고 주로 전기 면도기를 애용했다고 말했다.
- 프랑스 현지 암살조가 김규평에게 유선전화로 보고를 한다.
[허구] 1979년 기준 유선전화는 보안이 완전하지 않은 통신 방식이었다. 일례로 12.12 군사반란 당시 군 장성들의 모든 통화들이 전부 보안사에 의해 녹음되어 나중에 언론을 통해 공개되기도 하였다. 닭모이설을 증언한 전직 중정 요원 역시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철저히 대면보고 방식을 고수했다고 증언했다.
- 김규평이 삽교천 방조제 완공식에 참석하여 박통을 모시려고 헬기장까지 직접 나왔다가 곽상천의 제지로 헬기에는 탑승하지 못하고 퇴짜를 맞는다.
[각색] 김재규는 삽교천 완공식 참석을 위해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서울을 지키라는 명목으로 퇴짜를 맞고 아예 나가지조차 못했다. 이후 박정희는 KBS 당진 송신소[31] 시설에 참석한다. 이 부분은 드라마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에 묘사된다.
- 곽상천이 중앙정보부장과 대통령 사이의 직통전화로 김규평에게 만찬 참석을 통보한다.
[각색] 당시 차지철이 김재규에게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안가에서 열릴 만찬에 참석하도록 하라는 이야기를 전화로 통보한 것은 실제 사실과 일치한다. 다만 중앙정보부장과 대통령 사이의 직통전화로 통보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어쨌든 김재규가 전화로 저녁식사 참석 통보를 듣고 격분했다는 대목은 제5공화국 등 다른 작품에도 나왔다.
2.1. 10월 26일, 안가
- 중앙정보부장 김규평이 육군참모총장만을 궁정동 안가에 부른다.
[각색] 김재규는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함께 김정섭 중앙정보부 제2차장보도 같이 불렀다. 김정섭은 사전에 포섭한 사람은 아니었고 자신을 대리해 정승화를 상대하기 위해 부른 인물이었다. 다만 국내정치 파트를 맡고 있는 사람이었던 만큼 계획적으로 불렀다는 평이 많다. 김재규의 거사가 실패로 끝나자 사태를 파악, 자신의 수하들을 이끌고 안가를 점거하고 경비원들을 무력화시켰다.
- [사실] 사건 직전 김규평 외 중앙정보부 요원 두 명이 작전을 모의하는 장소는 실제와 똑같으며 거기서 하는 대화도 실제와 거의 일치한다. 드라마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에도 나온다.
[허구] 다만 영화와 달리 거사 이후의 후속조치에 대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고, 지시를 받은 의전과장 박선호[32]는 그저 육군참모총장이 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김재규의 의중을 추측만 할 뿐이었다. 박선호는 훗날 재판과정에서 김재규가 후속조치에 대해 한 마디라도 해 줬으면 여기까지는 안 왔을 거라는 투로 한탄했다. 박흥주[33] 역시 남산(중앙정보부)과 용산(육군본부)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선택을 잘못한 게 원통해 두 딸에게 유서로 '선택을 잘해야 한다'고 거듭 당부했다.
- 초대된 여가수가 '황성옛터'를 부른다.
[허구] 심수봉이 '그때 그 사람'과 '눈물젖은 두만강'을 부른 후 차지철이 '도라지 타령'과 '나그네 설움'을 부른다. 이후 차지철은 신재순을 지목하고 신재순은 심수봉의 기타 반주로 혼성 듀오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34]를 부르고 박정희는 간간이 흥얼거리며 신재순의 가락에 장단을 맞춘다. 신재순이 중간에 한 번 틀려서 다시 부르던 중 김재규는 신재순이 1절 후렴을 막 시작하려는 차인 7시 40분에 바지 주머니에 숨겨둔 권총을 꺼내 노래를 끊으며 옆에 앉아 있던 차지철을 향해 고성을 지르며 첫 발을 쐈다. 드라마 제4공화국에는 심수봉이 감수를 맡아서 그런지 신재순이 노래 사랑해를 부르다 틀려서 다시 부르는 것까지 상세하게 묘사되고,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각색이 조금 되어 신재순이 사랑해를 부를 때 김재규가 술을 마시는데 이때 심장 소리가 두근두근 거리고, 첫 번째 때에는 계획을 실행하려다 김계원이 술을 권해서 마실 때까지 중간에는 긴장감을 주다가 두 번째 때 계획을 실행하게 되어 실제와 이를 바탕으로 한 제4공화국에서는 노래 1절 후렴구 때 사건이 일어났으나, 여기에서는 2절 후렴구(하지만 2절 초반 가사가 나오다가 1절 가사가 반복된다) 때 사건[35]이 일어난다.
허구긴 하지만 약간의 제작자의 의도가 있는 것으로, 이 자리에서 박통은 김 부장과 마시던 막사 대신 양주를 따라 마시는 등 초심을 잃은 듯한 모습을 보인다. 영화 전개상 인트로에서 이 노래가 잔잔하게 깔리다가 총성이 울리고 유신 정권을 결사 옹호하며 절대 권력을 누리던 남산 중앙정보부와 그 위상에 대한 소개가 잠시 나오는데 이 노랫말과 이 영화의 결말을 비교해보면 이 노래가 더 허망하게 들린다.[36]
- 대통령 저격 직전 김규평은 박 대통령에게 "너도 죽어봐" 라고 말한다.
[사실] 김종필의 회고록인 '소이부답' 구술 과정에서 김재규가 실제로 한 말이라는 것이 처음 공개되었다. 이전의 10·26 사태를 다룬 영상매체들은 대통령에게 반말을 해서 그런지 이를 제대로 재현하지 않았는데 작중에서는 정확하게 재현했다. 또한 박통이 죽어가면서 하는 말인 "난 괜찮아"는 박정희의 유언으로 알려져 있는 말이다.
- 김규평이 박통에게 곽상천을 가리키며 "이딴 버러지 같은 새끼를 옆에 두고 정치를 하시니까 나라가 이 모양 이 꼴 아닙니까!" 라고 소리친다.
[???] 김재규가 차지철에게 한 '버러지' 발언은 워낙 유명해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인용된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김재규 자신이 군사법정 비공개 진술에서 '김계원에게 "각하를 똑바로 모십시오" 라고 말하고 차지철에게 "이 버러지 같은 새끼."라고 말했다'고 발언했고, 신재순도 그렇게 증언했기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신재순이 2011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이 지휘한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측의 강압에 못 이겨 위증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이 발언이 조작되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실제로 그 당시 계엄사령부 합수부가 어느 정도 신군부에게 유리하게 사건을 조작했을 거라는 의견은 당대부터 꾸준히 있었는데, 그렇다고 정말 조작된 것인지 역시 명확한 근거는 없다. 그럼에도 대사 자체가 주는 임팩트 때문인지 이 영화를 포함해 다양한 영상 매체들에서 해당 대사를 사용한다.
- 김규평이 저격 후 총이 고장나고 불이 꺼지는 소동이 일어난다.
[사실] 실제로도 그랬다. 당시 김재규가 박정희의 오른쪽 가슴을 쏜 후 발터 PPK총이 고장나버리는 바람에 잠시 사건 현장을 이탈하였고 이 과정에서 안가 영선[37] 담당 강무홍이 총소리를 전기 합선으로 오해하고[38] 두꺼비집을 내려 전기를 차단하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암전이 되었다.[39] 김재규의 권총은 그가 군에 있을 당시 선물 받은 것이었으며 군을 떠난 이후에는 경찰서에 보관하다가 중정부장이 되며 다시 가져왔는데, 자동권총은[40] 탄창에 탄을 삽입한 채로 오랜 시간 방치하면 탄창의 스프링 장력이 약해져 급탄이 안될 확률이 높아진다. 영화에서도 궁정동 집무실 금고에서 권총을 꺼내 탄창을 삽입할때 이미 탄이 삽탄된 상태로 금고에 보관되어있었다. 이 대목은 여러모로 당시 차지철이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작태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한데 총이 발사가 안 되는 바람에 김 부장이 일시적으로 무장해제 상태가 되었음에도 대통령 경호실장이 이를 제압하기는 커녕 화장실로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상황을 반전시킬만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총기 고장으로 곽상천과 박통에게 추가로 격발을 하지 못하고 급하게 총을 찾던 김규평에게 권총을 넘겨주는 모습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에서 따왔다. 한편 영화에서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로 소개된 강창수는 실제 당시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이자 10.26 사건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박흥주를 모티브로 했다.
- 김규평이 문갑을 들고 저항하는 곽상천의 복부에 총을 한 발 발사해서 쓰러트리고, 쓰러진 곽상천의 저항하는 팔을 비켜서 한 발 더 발사해 확인사살한다.
[각색] 중요한 차이는 아니지만 김재규는 차지철에게 한 발 발사했고, 차지철은 이 한 발로 인해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차지철/생애 문서에 적혀있듯이 이후 중앙정보부 경비원이었던 김태원이 M16소총으로 사망자들을 하나씩 확인사살할때 차지철 역시 확인사살 당했다고한다.
- 김규평이 사건 발생 후 구두도 제대로 신지 못한 채 맨발로 허둥지둥한다.
[사실] 김재규의 수행비서였던 박흥주 대령은 사건 직후 당황한 상태로 맨발로 대한민국 육군본부에 도착한 김재규가 윗옷과 구두를 달라고 하자 마침 사건 당일 오후 광화문 에스콰이어 매장에 들러 산 새 구두를 벗어 주었다. 이 내용은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나왔고 이때 박흥주는 운전기사의 신발을짬때리기빌려 신었다.[41]
- 사건 직후 김규평이 장승호 육군참모총장과 같이 차를 타고 가면서 엄지를 위로 세운 뒤 옆으로 꺾으면서 "각하가 저격 당하셨다"고 말한다.
[각색] 김재규는 엄지만 위로 세운 채 "이 분이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이와 똑같이 엄지를 세우고 이 분이 돌아가셨다고 한다.
- 김규평이 사탕을 꺼내 자기가 먼저 먹고서 다른 사탕을 건네주자 장승호는 그 사탕을 몰래 차 바닥에 버린다.
[사실] 이것은 장승호의 모티브가 되는 인물인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에 나와있는 실제 사실이다.[42] 그는 건네 받은 사탕에 혹시 독이 들어 있을까봐 일부러 먹지 않고 몰래 차량 바닥에 흘렸다고 한다. 정승화가 김재규와 인연이 있는 관계였음에도 이미 그 상황에서 김재규와 거리를 두고 '대통령이 저격 당한 막중한 순간에 김재규 부장이 주는 것을 확인도 하지 않고 먹는 것은 현명하지 못 한 처사'라고 증언했다는 정보도 있다.
3. 오류
당시 시대상의 재현과 오류에 관련한 항목을 분리해 서술한다.- 김규평의 영어 발음이 매우 딱딱하고 어색한, 전형적인 쌍팔년도 영어교사식 발음인데, 시대상을 고려할 때 당시의 국내파 인물이 현재의 배우 이병헌[43][44]만큼 유창한 영어 실력을 구사하기는 힘들 것이므로, 나름 당시 현실에 맞는 의도된 연출이라 할 수 있다.
- 복식은 잘 재현된 편으로 주조연급들의 복장을 클래식 수트인 쓰리피스와 커프스 셔츠로 구성했고 넥타이도 당대 유행했던 사이즈와 무늬의 넥타이를 매고 나오며 박통의 정장은 과거 박정희 대통령이 정장을 맞췄던 맞춤 정장점에서 실제 박 대통령이 입던 패턴의 정장을 의뢰해 맞췄다고 한다.[45] 박용각의 복장은 모티브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청문회 등 미국 생활을 할 때 입던 스타일을 참고해 재현해냈다.
- 청와대 구 본관[46]과 궁정동 안가[47]의 재현이 꽤 훌륭한 편에 속한다. 외관과 구조, 건물들의 배치가 실제와 거의 같으며 경호원들이 기거하던 1층의 주방은 인테리어까지 실제와 완전히 똑같게 재현되었다. 또한 실제로 김재규의 집무실이 연회가 있던 궁정동 나동의 바로 옆에 있었는데, 작중에서는 연회 중에 잠시 자리를 비운 김규평이 도보로 집무실까지 가서 권총을 가지고 복귀하는 묘사도 있다. 다만 궁정동 안전가옥 2층으로 가는 계단은 실제로는 각이 없는 나선형이었고, 2층 연회실은 영화가 더 넓게 묘사되었으며, 실제로 있었던 브라운관 TV와 옷걸이가 영화 상에는 없다. 오류는 아니고 감독의 말로는 일부러 촬영 동선이나 영화 전개 상 화면의 이동 등의 이유로 다르게 했다고 한다.
- 김부장이 주불한국대사를 만나러 차량에서 내린 후 차량 측면이 비춰지는데, 당시에는 없었던 지금의 한국타이어앤테크놀로지 마크가 선명하게 보이는 점이 옥에 티다.
- 유동훈은 육군특수전사령부 출신이라고 언급되는데, 이때 잠시 비춰지는 유동훈의 신상기록부를 보면 해병대 출신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 박용각이 프랑스에 도착한 후 데보라 심이 뒤이어 파리 샤를 드 골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등장하는 항공기가 에어 프랑스 구도색을 한 A320이다. 샤를 드 골 공항은 1974년에 개항되었고 해당 구도색도 1983년까지 적용되었던 걸 보면 나름대로 우수하게 재현했으나, 항공사 로고는‘France Air’가 아닌‘Air France였으며, A320은 영화 배경인 1979년에서 9년 뒤인 1988년에 에어 프랑스를 시작으로 상업운항을 시작했다. 비슷한 체급의 유럽산 기종인 다쏘 머큐리는 1974년 에어 인터에 최초 인도되었기에 시대가 맞아 비슷한 A320을 사용했을 수도 있지만, 1979년 당시 에어 프랑스에는 머큐리가 1대도 없었고 에어 프랑스가 에어 인터를 인수했을 당시 머큐리는 전량 퇴역하였다.
[1] 외국에서는 불과 10년도 되지 않은 정권의 내부 이야기를 그대로 실명까지 쓰면서 비판적으로 다룬 바이스 같은 영화들도 나오는 것과 대조적이다.[2] 10.26 사건 당시 상황을 심수봉에게 직접 감수받았다. 당시 심수봉의 남편이 MBC에 재직하고 있어서 가능했다고. 촬영 당시 처음에 금테 안경을 쓰던 박근형(김재규 역)은 조언을 들은 뒤 검은 안경으로 바꿔 썼고, 이 밖에도 문갑의 위치나 높이, 대통령의 의자 모양까지 설명해 제작진이 소품을 다시 준비했다고 한다.[3] 동시대에 방영했던 드라마 코리아게이트는 심수봉이 감수를 맡지 않아 실제 역사와는 조금 다르다.[4] 초반에는 박통이 다른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단 둘이서 김규평과 논의하는 모습 등 곽상천보다는 김규평을 총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궁정동 안가에서 단 둘이 술을 마시며 그 시절이 좋았다며 일본어로 대화하는 장면도 보여준다.[5] 박정희 시대 한국 정치계의 고위 인사들을 오랫동안 취재했던 문명자 기자에 의하면, 당시 김형욱은 이른바 회고록 출판 문제로 박 정권과 막판 거래를 하고 있었는데, 박정희 측에서는 김형욱에게 "회고록을 출판하지 않는 대가로 5백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고 실제로 김형욱한테 1백만~1백 50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명자 기자가 김형욱의 미국 뉴저지 저택을 직접 가보니, 화장실 손잡이는 18금으로 되어 있었고 쓰레기통은 은제품이고 수도꼭지도 금제였다고 한다. 그렇게 김형욱은 자기 집을 호화롭게 꾸며놓고 2천만 달러를 쌓아놓고 살았으며, 그것도 모자라 회고록 출판을 하지 않는 대가로 받을 돈 5백만 달러를 더 탐내다 최후를 맞은 것이다.[6] 이 당시 김형욱이 구술한 내용을 갖고 회고록을 대필한 인물이 후일 동교동계를 거쳐 친박 정치인으로 변신하는 김경재다. 민주화 운동 중 미국에 망명했고, 회고록 집필 덕분에 김형욱과 가까워졌다. 회고록 집필때는 박사월이란 가명을 사용했다.[7] 이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신직수였는데 신직수는 과거 김재규가 5사단장 박정희 밑에서 5사단 참모장을 하던 시절에 법무참모를 맡았던 인물로 상하관계가 역전되면서 김재규가 불쾌해했다는 후문이 있다.[8] 한편 김규평이 5.16 당시 자신이 대령이었다고 묘사했는데, 실제로는 5.16 당시 준장(국방부 총무과장)이었다.[9] 다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영화 내에서도 나라 돌아가는 꼴에 대한 우려, 미국의 압박에 대한 두려움, 박정희에 대해 깊어지는 서운함, 차지철에 대한 분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처럼 그려진다. 특히 은근히 박용각을 죽이게 유도해놓고 정작 일을 해치우자 자신은 박용각 죽든 말든 상관없다고 하거나 '친구 죽인 백정'이라고 모욕하는 박통에 대한 원망이 커보인다.[10] 죽이기 직전에도 혁명에 대한 얘기("우리가 백 이백만 탱크로 밀어버리려고 혁명한 게 아니다")뿐만 아니라, 굳이 박용각을 언급하고 박통을 원망하는 말을 늘어놓는다. 실제 김재규가 한 말인 "너도 죽어봐"나 "넌 너무 건방져" 역시 감정적인 말이며, 위에 탱크 운운 대사도 한 숨 돌리고 나서 새 총으로 박정희를 최종적으로 살해할 때 한 말이다.[11] 참고로 김재규는 최후진술에서 자신이 1924년생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에도 호적과 실제 출생연도가 다른 경우가 꽤 많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성 있긴 하다.[12] 김형욱이 중정부장으로 한참 잘나가던 시절에 김재규는 현역으로 야전을 돌고 있었다. 그나마 김형욱이 3선개헌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동분서주하던 중정부장 끝물 시절과 김재규가 육군방첩대장에 취임해서 한참 조직을 키우던 시점이 약간 겹친다. 하지만 3선개헌이 성사되자 박정희는 자신 주변의 권력핵심들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하는데, 곧 김형욱은 토사구팽 되면서 밀려났고, 그 즈음부터 김재규는 보안사령관으로 권력핵심부에 진입한다.[13] 남산에서 돈가스를 파는 식당들 중 오래된 곳들은 1970년대에도 영업을 하긴 했으나, 이 때는 평범한 기사식당이었고 돈까스가 아닌 순두부를 주로 팔았다고 한다. 이들 식당들 중 일부는 2020년대에도 순두부를 판매한다.[14] 강압수사 금지 조치는 김재규가 중정부장 취임사에서 언급했고 박흥주가 증언하였다. 1978년 교육지표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던 송기숙 전남대 교수는 "당시에는 정보부에 붙들려가면 초주검이 되어 나온다고 여기던 때였다. 죽을 고문을 당할 각오를 했는데 수사관이 상부 지시라며 의외로 부드럽게 조서를 받더니 그냥 풀어줬다. 한동안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는데 이듬해 10.26이 나자 아하 싶었다."라고 그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15] 이후에는 철거되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식 취조실이 아닌 사적인 곳에서 취조를 했을 가능성도 크다. 모텔이나 소형 호텔에서 취조를 했을 가능성도 크다. 당시에는 호텔 수사가 행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건너편에 있는 15층짜리 세종호텔과 현재는 리모델링 된 아스토리아호텔도 예전에 남산 중정-안기부의 주요활동지였다. 중앙정보부는 남산뿐만 아니라 성북구 쪽(이문동. 이후 안기부로 재편되면서 2청사가 됨.)에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덕수궁 쪽(조선일보 본사 뒤쪽)에도 중앙정보부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현재 국정원도 마찬가지이지만 중정/안기부의 경우 전국 도처에 출장소/보안분실 형태의 시설들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경찰이나 검찰과는 다르게 보안상의 이유로 시설 자체가 민간에 공개되지 않아 소재파악 자체가 불가능하고 특히 중정/안기부 시절에 만들어진 시설 중 일부는 현재까지도 사용 중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소재파악 자체부터가 국가보안법 위반 소지가 있는 불법행위로 간주될 가능성이 높다.[16] 또한 중정과는 별개로 김재규 본인 역시 정보부장 취임 이전부터 고문수사나 정치공작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기도 한데 보안사령관을 지내던 시절부터 수경사령관 윤필용 등을 도청하여 발각되거나 고문수사를 자행했던 사실이 있었고 정보부장 시절에도 김종필 등을 도청하거나 야당인사들을 감찰한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그 악명높은 보안사 서빙고 분실을 만들어 보안사가 중정/안기부와 경찰 이상으로 막나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17] 후일 <시사저널>에서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의 전신) 부장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지 25년 만에 김형욱 부장을 위와 같이 처치했다고 털어놓은 현장 암살 실행조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현장 암살 실행조는 중앙정보부가 양성한 특수 비선 공작원. 그는 당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 파견되어 김형욱을 암살했다고 말했다.[증언록] "우리는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1979년 10월7일 밤 파리 시내의 한 카지노 근처 레스토랑에서 납치했다. 김형욱이 한국 여배우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레스토랑 입구를 지키고 있다가 그 여배우가 보낸 안내자 행세를 하며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 캐딜락 승용차 안에서 김형욱을 마취시킨 다음 밤 11시께 파리시 서북 방향 외곽 4km 떨어진 외딴 양계장으로 가서 분쇄기에 그를 집어넣어 닭모이로 처리했다."[19] 중앙정보부의 개입 없이 단독적으로 국내 요원들로 꾸려진 암살조가 마취되어 의식을 잃은 상태의 김형욱을 인적 드문 양계장으로 납치해 산채로 닭모이 믹서에 넣어 갈아버렸다는 설.[20] 1976년 캄보디아에서 벌어진 대학살극 킬링필드를 말하며, 불과 3년밖에 안된 시점이었다.[21] 여기에서 정 대행체제라는 것은 9월 7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이,‘김영삼이 불법으로 총재가 되었다’며 신민당 조일환 등 3명의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이 낸 “총재단집무집행정지가처분신청”을 정당한 사유로 받아들인 결과 김영삼의 총재직을 박탈하고 정운갑을 총재로 하는 대행체제를 출범시키라고 법원이 판결한 것을 의미했다.[22] 주한미군 철수는 카터의 대선 공약이기도 하였다. 실제 카터 행정부는 내부적으론 주한미군 축소 계획까지도 세워두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한민군 철수 취소를 공식화하지는 않으면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압박용 카드로 계속 사용하였다.[23] 윌리엄 헨리 글라이스틴 주니어(William Henry Gleysteen Jr.)[24] 영화 초반 '이아고'라는 박통의 스위스 계좌 전담 인물에 대해 CIA와 박용각이 의문을 품고 이것을 김규평에게 말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이아고는 김규평이 박통을 의심하고 관계가 틀어지는 시발점을 제공하는 역할만 하고 사라지는 맥거핀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마지막 에, 전두혁이 이 금고를 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아고=전두혁(하나회 수장)이라는 해석이 나올 수 있게 되었다.[25] 1979년 당시 금액으로 6억 원이었다. 현대 시세로 치면 수십억원 이상의 거금이었다.[26] 부산경남 사투리 억양이 살짝 섞였다는 의견도 있다.[27] 또한 영화 끝자락의 김재규의 육성을 들어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로는 외모와 매치가 잘 안되는 허스키한 하이톤의 빠른 목소리였다. 이 역시 극중 김규평과는 많이 다르다.[28] 다만 어렸을 때는 서자 출신이라 설움을 많이 받아 내성적인 성격이였다가, 군사정변에 참가 후 박통의 측근으로 출세가도를 달리자 사람이 갑자기 오만해지고 저돌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피스톨 빼들고 수틀리면 사람을 겨누거나 총대로 사람을 팼던 전 경호실장 박종규만큼은 아니여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안하무인으로 대했으며 이는 당대 증언으로 확인이 된다. 오죽하면 박통의 피격 소식이 들려오자 당시 자리에 있던 내각 각료 대부분이 차지철의 평소 행동이나 성격을 근거삼아 진범으로 오판했을 정도였다.[29] 전두환이 호전적인 성격인 것은 생전에 출연한 여러 방송자료에서도 잘 볼 수 있는 대목인데, 1980년대에 개최된 새마을 사이클 대행진에서는 자전거를 타면서 초등학생과 농담을 주고받는가 하면, 교도소에서 출소할 때도 기자들에게 교도소 가지 말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30] 한편, 박통과 김부장이 막사를 마시며 일본어로 대화를 하는 장면은 확인되지 않은 픽션이다. 이렇듯 박정희를 다룬 매체에서는 왜색을 강조하려는 시도가 많다. 궁정동 안가에 일본식 가옥 구조인 다다미를 깔아놓은 것도 사실과 다르며, 동일한 사건을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엔카를 부르는 장면 역시 사실과는 다르다.[31] KBS 당진 송신소 시설 보강 준공식이었는데 왜 중앙정보부와 관계가 있냐면, 이 당진 송신소의 진짜 목적은 북한 등 당시 공산권에 대한 심리전 방송(대북방송)을 하는 시설이어서 중앙정보부가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2]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한석규 캐릭터.[33]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 김응수 캐릭터.[34] 2015년 당시 한화 이글스의 감독이었던 김성근의 응원가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의 원곡이다. 그 응원가 관련으로는 인터넷 방송인 케인의 밈이 되기도 했다.[35]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에서 노래가 나오는 풀영상은 유튜브에는 없어서 중국 동영상 사이트 빌리빌리로 대체. 중국에서는 그 곡이 밈이라 인기가 많다.[36] 한 때 황제국을 칭하며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중심에 있었던 고려왕조가 몰락하여 폐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황성옛터 가사의 내용인데 유신정권 역시 10.26 사건 이후 박 대통령과 비롯한 핵심인물들이 모조리 죽거나 권력에서 밀려났고 헌법까지 씹어먹던 중앙정보부 역시 김 부장을 비롯한 간부들이 모조리 숙청되고 이름 또한 국가안전기획부로 바뀌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37] 營繕, 건축물을 신축하거나 수선함.[38] 전기가 갑자기 합선되면 펑 하는 폭발음이 난다.[39] 밖에서 계속 이어지는 총소리와 고함 소리에 합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강무홍은 다시 차단기를 올린 후 보일러실 문을 잠근 채 몸을 숨겼다. 만약 불이 조금 일찍 꺼졌더라면 박선호는 오히려 정인형과 안재송에게 역습을 당할 수도 있었다.[40] 리볼버는 구조상 해당없음[41] 한편 육군본부로 가는 차 안에서 보여주는 김규평의 피에 젖은 양말은 박용각이 프랑스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에게 암살되기 직전 맨 발로 도망치느라 땀에 절은 발을 보는 모습과 흡사한 장면으로 2인자였던 박용각과 김규평의 처한 현실을 비유적으로 보여주는 연출이다.[42] 당시 중앙정보부장 운전담당 사무관도 차를 정리하려고 봤을 때 사탕이 껍질도 까지 않고 그대로 떨어져 있었다고 증언했다.[43] 실제 이병헌은 지 아이 조 시리즈 등 여러 편의 헐리우드 영화 출연 경력에 2016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시상한 적도 있을 만큼 영어 대화나 인터뷰도 잘하는 편이며, 발음도 매우 좋은 편이다.[44] 여담으로, 이병헌은 2016년에 이미 영화 마스터에서 동남아식 영어를 일부러 구사한 전례가 있다.[45] 다만 박정희 대통령은 쓰리피스 정장을 잘 입진 않았다.[46] 일제강점기 조선 총독의 관저로 쓰이던 건물이었는데 해방 이후에도 1993년까지 대통령의 집무실 및 관저로 계속 사용되었다. 건물 자체가 워낙 작고 내부가 협소하여 1970년대부터 청와대 신축이 계속 거론되고 또 무산되다가 1991년 현재의 청와대 본청을 신축하였고 구 본관은 1993년 완전히 철거되었다.[47]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전부 철거한 뒤 시민공원을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