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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영화)/실제 역사와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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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줄거리명대사
평가흥행탐구실제 역사와의 비교

1. 개요2. 내용

1. 개요

영화 《서울의 봄》과 실제 역사와의 비교 및 차이점을 서술한 문서이다.

2. 내용





























[1] 장태완 장군 이름의 앞뒤 글자를 다르게 바꾼 건 충무공 이순신과 합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실제로 작중에서 이태신의 사령관실에 사즉생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으며, 전두광을 잡으러 출동하는 이태신이 광화문 앞 이순신 장군 동상 아래를 지나며 주시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면 정상호 참모총장을 연행하려는 보안사 요원들은 이순신 장군 동상의 뒷모습만 보고 지나갔는데, 이들이 군인정신에 맞지 않는 반란을 자행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2] 단, 김성수 감독은 이태신과 이순신의 직접적인 연관성에 대해 부정했다. 장태완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불같은 성격이었으나, 극중 전두광도 다혈질 캐릭터로 그려지기 때문에 이태신과 대립 구도를 만들기 위해 평소 자신이 생각한 배우 정우성의 이미지를 투영해 고요한 물 같은 새로운 캐릭터로 창조했다고 한다.[3] 이순자의 여동생 이정순과 결혼했다.[4] 전두환에게 보안사령관 자리를 넘겨주고 나중에는 12.12 군사반란 때도 2군사령관으로 반란에 가담은 안 했지만 애매한 태도를 보여 1/2/3군 군사령관 중 유일하게 자리를 지킨 뒤 대장 승진까지 했다.[5] 쿠데타 성공 이후 주역들의 기념 사진에 얼굴은 나왔지만, 이건 보안사 참모장 자격으로 찍은 것이었고, 실제로 전두환 측에서 우국일 장군에게는 쿠데타 계획을 전혀 알려주지 않아서 총격전 이후 장태완, 정병주, 김진기 세 장군들과 함께 원대복귀했다.[6] 실제 장태완 장군의 회고나 차후 공개된 녹취록에 따르면 그는 황영시와 유학성에게 반말로 욕설을 퍼부었단다. 사소한 워딩 차이는 있지만 욕설과 결사항전의 의지를 밝힌 점은 동일하다. 상급자이고, 선배고 뭐고 반란을 일으킨 개같은 자들이니 당연한 노릇이지만, 직속 상관에게조차 대놓고 욕을 하긴 좀 그랬던 듯 하다. 애초에 이들의 검은 속셈을 확인한 이상 더 할 말이 없기도 하고...[7] 이 에피소드는 작중에서 이태신은 33경비단 전차 중대를 출동시키려 하였지만, 중대장이 진영도랑 절친한 사이(작중 표현 '쫄따구')라 출동을 거부했다는 언급으로 간략하게 지나간다. 실제 역사에서도 김진영은 전차 중대장과 잘 아는 사이라 설득할 수가 있었다.[8] 김오랑 소령의 시신은 특전사령부 뒷산에 암매장됐다가 정병주 소장의 후임으로 온 정호용의 지시로 부대장이 거행되고 국립서울현충원 유골 안치소로 옮겨졌다. 이후 김오랑의 시신은 사건 3개월이 지난 1980년 2월 28일 국립서울현충원 제29묘역 - 2923호에 이장되었다. 그의 죽음 이후에 대한 이야기는 김오랑박종규 문서를 참조.[9] 두명 다 44년 생 동갑이지만 박종규와 김오랑이 각각 육사 23기, 25기 출신으로 2기수 차이나는 선후배 관계였으며, 생일도 2개월 빨랐기에 형/동생으로 가까이 지낸 듯 하다. 현재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군인 사회는 실제 나이보다 기수가 우선시되었으며, 1살 차이인 전두환과 노태우 역시 서로 반말을 하며 편하게 지낸 사이였다. 그래서 박종규 역시 김오랑의 아내 백영옥을 '제수씨'라고 호칭했다.[10] 영화 내에서 공수혁(정병주) 소장이 최후의 저항을 준비할 때 착잡하게 벽에 걸어둔 4공수 김창세(실제 3공수 최세창), 2공수 도희철(실제 1공수 박희도)와 같이 찍은 사진들을 바라본다. 벽에 사진을 걸어둘 정도로 아끼던 부하들이 등에 칼을 꽂은 것이다. 특히 박희도가 준장이 된 것은 정병주가 뒤를 봐 준데다 위수지역에 간첩이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가는 사건이 벌어져 옷까지 벗겨질 마당에 정병주가 당시 육군참모총장 이세호 대장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어서 강제전역의 위기를 벗어나기도 했다. 목숨을 걸고 살려준 은혜를 배신당했기 때문인지 신사협정을 반대하는 통화 당시 도희철을 언급할 때 유독 언성이 높아진다.[11] 애처가임을 드러냄과 동시에 암울한 결말을 향한 서사가 강조된다.[12] 사실 이미 대세가 결정된 상황에서 아무리 성격이 불같았다던 장태완 장군이라 하더라도 저렇게 원색적인 비난을 대놓고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13] 사실 아무리 정밀타격을 한다고 해도 155mm 야포를 서울 시내에 사격한다면 작중 전두광의 언급처럼 수많은 인명피해가 불가피했을 것이다.[14] 전차 무전은 엔진 소음 때문에 소리가 굉장히 크게 설정되는 관계로 연병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었다.[15] 당시 전두환의 옆에서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은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서영춘.[16] 이후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전보된다. 신군부5.17 내란 때도 5월 17일 오전 11시 국방부 제 1회의실에서 열린 신군부 세력의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관철하기 위해 열린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도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시기상조다. 국민의 합의와 총화에 따라야 한다."라고 끝까지 반대 의견을 내지만 묵살당했다.[17] 이후 수경사에서 진압회의 중 하나회 소속 수경사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이 이끌고 온 병력의 총격에 폐를 다쳐 중상을 입은 후 3개월의 치료 끝에 겨우 살아남고 하나회에 의하여 80년 2월 강제 예편조치된다. 영화에선 이 부분이 등장하지 않는다.[18] 박희도는 당시 공로를 인정받아 반란 당시 자신과 달리 이미 소장이었던 12기 동기들인 박세직과 박준병을 제치고 먼저 대장 진급을 이뤄내며 전두환 정부에서 육군참모총장에까지 승진하며 승승장구한다. 이후 2020년대에도 계속 전두환을 칭송하는 개소리를 하는 등 변함없는 전두환의 충견으로 남았다.[19] 이후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훗날 강창성을 뇌물수수 혐의로 감옥에 보내 후환을 없앤다.[20] 영상의 29:58에 쓰인 하나회 말이지요는 (진도개) 하나 (추임새) 말이지요의 오기이다.[21] 이태신이 8공수 여단장이 하나회가 아니란 것을 아는 것은 해당되지 않는다. 갑종 출신인 박지홍 준장이 육사 출신들로 이뤄진 하나회일 리가 없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추론이므로... 영화에서는 이태신 소장이 가장 먼저 박기홍 준장의 출동을 바라고 이후 출동을 망설이는 그를 직접 설득하는데, 실제로는 장태완 소장이 병력이 부족함을 호소하자 정병주 특전사령관이 자신의 휘하 여단장 중 윤흥기 준장이 갑종 출신이라 하나회와 연이 없다며 윤흥기 준장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윤흥기 준장이 출동을 망설였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없다.[22] 1995년 12월 16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있었던 검찰 수사에서 신현확 당시 총리는 검사의 질의에 "위와 같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이미 결재를 하여 가져온 재가서류의 내용을 대략 검토하신 후 일자와 시간을 기입하고 사인을 하는 방법으로 재가했습니다."라고 얘기했다. 출처: 전남대 5.18 연구소가 공개하고 있는 조사 당시의 조서. #[23] 제5공화국에서 이 장면이 묘사되는데, 장태완 사령관이 선제적으로 사령부 내 보안부대를 진압할 것을 김기택 참모장에게 지시한다. 또 육군본부 지휘부가 수경사로 이동하면서 함께 넘어 온 육군본부 보안부대장 변규수 준장도 체포해 감금했다.[24] 합참의장이 군령권을 보유한 실권직이 된 때는 1991년 노태우 정부 때였다.[25] 촬영은 실제 장소였던 국군기무사령부 본관 건물이 아닌 원광대학교 생명과학부 건물 앞에서 촬영했다. 국군기무사령부 본관 건물 자체는 현존하나,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으로 개관함에 따라 미술관의 일부로써 사용되고 있다. 외장재 또한 리모델링 과정에서 교체됐다. 외벽은 CG로 처리할 수는 있겠지만, 당시에 있던 바닥 재질이나 앞에 심었던 나무들까지 현재는 다 없어지거나 바뀌었기 때문에 일일이 CG로 처리하는데는 힘들기에 그 대신 비슷하게 생긴 건물에서 촬영하기로 대체한 걸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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