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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봄(영화)/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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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줄거리명대사
평가흥행탐구실제 역사와의 비교

1. 개요2.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3. 반란 모의와 준비4. 반란의 시작5. 반란군과의 전쟁6. 주도권을 잡은 반란군7. 진압군의 마지막 저항, 최후의 5분8. 반란군의 승리와 결말9. 여담

1. 개요

영화 《서울의 봄》의 줄거리를 정리한 문서.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79년 10월 26일부터 12월 14일까지, 즉 10.26 사건부터 12.12 군사반란 직후까지 다룬다.

2. 갑작스러운 권력 공백


파일:서울의 봄_인트로_그해 겨울 철저히 감춰졌던 그 이야기다.png

1979년 10월 26일 밤, 국무위원 및 정부 고위관계자, 수도권 및 전방 군부대의 지휘 책임자들이 모두 육군본부로 소집된다. 소집 대상자이자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인 이태신(정우성) 소장 역시 어리둥절해하며 육본에 도착한다. 이 소장은 육군 헌병감 김준엽(김성균) 준장과 인사를 나누며 무슨 일인지 묻지만, 김준엽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자리를 피한다.[1] 잠시 후, B-2 벙커에서 최한규 국무총리가 박정희[2] 대통령의 서거(10.26 사건) 소식을 전하고 일시 묵념 이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비상국무회의를 개최한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지난 27일 새벽 4시, 비상국무회의 의결로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계엄사령관으로 육군참모총장 정상호(이성민) 대장이 임명된다. 정 대장은 계엄법에 따라 국군보안사령관 전두광(황정민) 소장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해 대통령 시해 사건을 조사하게 한다. 전두광은 합수부에 체포되어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을 받는 대통령 시해범 김동규 중앙정보부장을 향해 '세상은 그대로'라며 조롱조로 빈정댄다.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으로 장면이 전환되어 눈물을 훔치는 전두광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내의 옆에 앉아있는 이태신이 차례로 비춰지고, 동시에 거리에서 장례 행렬을 지켜보는 시민들의 모습과 함께 영화가 시작된다.

대통령경호실중앙정보부가 수장인 대통령과 대통령경호실장 및 중앙정보부장의 공백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자, 합동수사본부장인 전두광은 대한민국의 모든 정보를 독점하게 된다. 그러면서 각 정부부처 차관들을 보안사령관실로 불러 모아 보고하게 하고, 차관들의 보고 순서를 제멋대로 바꾸는가 하면, 청와대 비밀금고에서 나온 9억 원을 개인적으로 유용하는 등 온갖 월권행위를 자행한다.[3] 전두광의 도를 점점 넘는 이런 행보를 곱지 않게 보던 정 총장은 전군 지휘관 회의에서 군인은 군인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고 정치와는 멀어지라는, 하나회를 겨냥한 경고성 발언을 한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전두광은 회의가 끝난 뒤 정 대장에게 이태신은 갑종장교 출신이라 너무 경직되어 있고, 수경사에는 좀 더 세련된 사람이 필요하다며 서울을 지키는 육군 최고 요직 중 하나인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직에 그의 친구인 제9보병사단노태건(박해준) 소장을 추천한다.[4]그러나 정 총장은 '인사권은 참모총장의 고유 권한'이라고 일갈하고 내가 인사권까지 보안사령관에게 재가받아야 하느냐며 이를 거절하고, 이윽고 하나회를 뿌리뽑기로 마음먹는다.

전두광은 정 총장으로부터 엄청난 모멸감을 느끼며 하나회 멤버들과 회의 장소를 떠나려 하는 중, 이태신과 복도에서 마주치자 오히려 이태신을 자신의 쪽으로 회유하려는 시도를 한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이태신의 단호한 거절과 하나회에 대한 경고였다.[5]

한편, 정 총장은 하나회 숙청의 일환으로 국무총리 공관에서 오국상 국방부장관에게 하나회의 핵심 인물인 전두광, 노태건을 각각 동해안경비사령부제56보병사단으로 보직이동, 사실상 좌천시킬 것을 건의한다.[6] 하지만 오 장관은 이에 머뭇거리다가 정 대장의 추궁 끝에 하나회에게 뇌물을 받았음을 실토하며 정 총장의 군 인사를 그냥 흘려넘기듯이 허락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퍼져 있는 하나회 군인들을 통해[7] 이 소식은 전두광에게로 그대로 흘러들어간다.

3. 반란 모의와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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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모총장의 움직임을 알게 된 전두광은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는 동해안으로 좌천당하는 것도 모자라 군복을 벗게 될 위기에 처한다. 궁리 끝에 전두광은 사관학교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던 친구인 노태건 소장을 연희동 자택으로 불러, 계엄사령관 정 총장이 10.26 사건 당시 궁정동 안가에 중앙정보부장과 있었다는 걸 빌미로 그를 체포할 것을 제안한다. 계엄사령관을 끌어내리자는 친구의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노 소장은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했으나, 전두광의 설득으로 끝내 마음을 열고 만다.

그렇게 전두광의 대담한 계획이 점점 구체적으로 커져가는 그 시각, 정 총장은 이태신 소장을 공관으로 불러 수도경비사령관을 직접 제안한다. 당시 시점에선 혐의점을 찾지 못한 상태였으나 어쨌든 정 총장은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사건에 얽힌 몸이었기에, 전두광의 상급자임에도 사건 수사의 총책임자인 그를 적극적으로 압박하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또한 이태신은 정규 육사가 아닌 갑종장교 출신으로 정치엔 관심없는 우직한 인물이었다. 중령 시절에 수도경비사령부 군사연구실장으로 재직하며 보안사령부의 과도한 권한 없애고 오직 군사 안보 지원 임무만 하게 해야 한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실은 논문을 작성할 정도로 보안사령부의 막대한 권한을 예전부터 경계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이런 시국에 수도경비사령관이 갖는 의미[8]를 잘 알던 이태신은 이를 사양했으나, 정 총장의 간청 끝에 수도경비사령관직을 수락한다. 이 소장은 취임 즉시 작전참모 강동찬 대령을 시켜 하나회의 통제를 받는 직할부대를 파악한다. 그 결과 수경사 직할부대 중 제30경비단, 제33경비단, 헌병단은 사실상 하나회 소속이고, 야전포병단과 방공포병단만이 지휘가 미치는 부대임이 드러난다.[9]



한편 절친한 친구의 마음을 얻은 전두광은 연희동 자택에 하나회 회원과 하나회를 후원하던 선배 장성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계엄사령관 체포 계획'에 함께할 것을 종용하며 대통령의 재가만 받으면 충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하나회 일동은 노태건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아연실색했지만, 이들 역시 계엄사령관이 자신들을 가까운 시기에 축출할 것임을 이미 짐작하고 있던지라 결국 뜻을 함께하기로 한다. 이들은 새 내각이 들어서기 전인 12월 12일을 거사 날짜로 정하고, 수도권 방위를 책임지는 수도경비사령관 이태신 소장, 육군특수전사령관 공수혁 소장, 육군 헌병감 김준엽 준장이 힘을 쓰지 못하도록 거사 당일에 한곳에 모아두기로 한다. 이후 전두광은 비서실장 문일평 대령을 수경사 야전포병단 화력시범장으로 보내 이태신을 초대한다. 문 대령은 '전 장군님이 동해경비사령부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식사를 대접하고 싶어한다.'면서 연회에 올 것을 요청한다. 이태신은 이를 탐탁찮게 여기고 애써 무시하려 했으나 마지못해 수락한다.[10]

4. 반란의 시작

12월 12일. 작전명 '생일 잔치'. 하나회 일당들은 경복궁에 주둔한 제30경비단에 집결한다. 이들은 최한규 대통령이 임시로 머무르는 국무총리 공관에서 대통령 재가를 받는 동시에, 한남동 공관촌에 위치한 육군참모총장 공관에서 정상호 총장을 납치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때, 국무총리 공관으로 향하던 전두광에게 정 총장의 호출이 온다. 전두광은 보안이 샌 건 아닌지 우려하며 참모총장 집무실로 차를 돌렸고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집무실로 들어가자 정 총장은 '당신이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다'면서 그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정 총장은 한직으로 발령날 전두광을 달래며, 거기에 더해 김동규가 최후 진술에서 용공세력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진술을 하게 만들어서 수사를 마무리 지어 보라고 부른 것이었다. 한시름 놓은 전두광은 정 총장과 직접 대면한 이 기회를 오히려 이용해 '보고할 게 있으니 보안사 인원을 저녁에 보내겠다'고 덧붙여 행동할 명분을 확보하게 된다. 당일 저녁, 이태신이 도착한 약속 장소는 가정집의 모습을 한 연희동의 번지르르한 고급 요정이었다. 수경사 헌병단장 원경 대령이 마중을 나오자 이태신이 네가 왜 여기서 나오냐고 다그치고, 전두광 장군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원경의 대답에 그냥 떠나려 한다. 하지만 마침 도착한 공수혁의 차와 마주치고 그냥 머물기로 한다.[11] 같은 시각, 총리공관에 도착해 최 대통령을 독대한 전두광은 계엄사령관을 즉시 수사해야 한다며 정 총장 구속에 대한 재가를 요청한다. 하지만 철저한 원칙주의자인 최 대통령은 아무리 급한 사안이라도 국무회의를 거쳐 임명된 계엄사령관을 함부로 수사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며, 내일 날이 밝거든 국방장관과 함께 정식으로 절차를 거치자는 말을 끝으로 재가를 거부한다.

전두광의 속이 타들어가는 와중, 윤우명 대령과 하창수 대령을 비롯한 보안사 인원들은 30경비단 병력들을 은밀히 동원해 총장 공관에서 정 총장과 만난다. 정 총장은 전두광이 낮에 말했던 건으로 부하들을 보낸 줄 알고 처음에는 이들을 편히 대하나, 보안사 인원들은 박 대통령 시해 사건에 대해 더 조사할 것이 나왔으니 상부의 명을 따라 녹음 가능한 곳으로 모시겠다고 말한다. 방첩부대장을 역임했던[12] 그 정 총장은 "지금 내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줄 아느냐?"라고 격노하며 다그친다. 이에 보안사 요원들이 대통령의 재가까지 떨어졌다고 하자 정 총장은 부관들에게 당장 대통령에게 전화를 돌려서 사실인지 확인해 보라 하나,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보안사 인원들은 바로 총을 빼들어 부관들을 사살하고 정 총장의 납치를 감행한다.

경호장교 권형진 준위는 M16까지 꺼내와 정 총장을 지키려 하지만 다리와 귀에 총을 맞고 쓰러진다. 그 와중에 밖에서 상황도 모르고 총을 난사한 보안사 요원에게 윤 대령과 하 대령까지 죽을 뻔한다. 우여곡절 끝에 보안사 요원들이 정 총장을 끌고 나온 순간, 공관 경비를 담당하는 해병대 병력들이 도착하고 정 총장은 힘을 쥐어짜 "해병! 해병!"이라 외친다.[13] 일이 잘못됐음을 직감한 30경비단은 해병대에 선제사격을 가해 총장 공관을 전쟁터로 만들었고, 그 혼란을 틈타 보안사 일당은 정상호 총장을 자동차에 태워서 납치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총장 공관 근처 국방부장관 공관에 거주하던 오 장관은 난데없는 총격전에 놀란 나머지 잠옷 위에 코트 하나만 걸친 차림으로 가족들과 함께 급하게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도망가버린다.

5. 반란군과의 전쟁

연희동에서 공 소장, 김 준장과 함께 전두광을 기다리던 이태신은 그가 올 낌새가 보이지 않는 데다가 원 대령이 자꾸 이리저리 사라지는 걸 의아해한다. 그러다가 한쪽 구석에서 몰래 통화하던 원 대령을 발견하고 수상함을 직감해 그를 다그치나, 원 대령은 얼버무리다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14] 이후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발생했고, 정 총장이 납치됐다는 강동찬 대령의 보고를 들은 세 장군들은 각자 자신들의 부대로 서둘러 향하기로 한다. 수경사령부로 간 이태신은 만신창이가 된 채 피신해 온 권형진 준위에게 이 모든 일이 보안사의 소행임을 파악하고 이를 김 준장에게 알린다. 육군본부로 간 김 준장은 마침 대통령 재가를 못 받고 일단 물러나려는 전두광의 위치를 신속히 파악하고, 그를 국무총리 공관 정문 앞에 붙잡아두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육군참모차장 민성배 중장은 전두광을 너무 자극하지 말자며 전두광을 곧장 체포하려는 김 준장을 만류한다.이 영화 최고의 트롤링[15]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전두광은 운전병에게 정문을 열라고 지시하고, 하차해 있던 임학주 중령에게 바로 출발하라며 슬쩍 지시한다. 이윽고 임 중령 또한 경계가 소홀해진 틈을 타 같이 하차한 운전병에게 문을 열라고 지시를 내린 뒤 운전석에 대뜸 올라타 문을 잠가버린다. 갑자기 벌어진 소동에 초병들의 주위가 쏠린 사이 운전병은 정문에 걸린 빗장을 뽑아내고, 전두광이 탄 차는 정문이 열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운전병을 그대로 쳐서 밀어버리고 공관을 탈출한다. 초병들은 도주하는 차의 뒷 유리창을 뒤늦게 사격하지만, 전 소장과 임 중령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은 채 위기를 무사히 벗어나 30경비단으로 복귀한다.[16] [17]


얼마 뒤, 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한 반란군 측 장성들은 크게 동요하고, 더군다나 사태를 파악한 진압군 쪽에서 전군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하는 방송에 경악한다.[18] 때마침 전두광이 돌아와 대통령 재가 실패를 알리자 절망에 빠진다. 전두광은 오히려 국방장관 소재만 알아내면 모두 해결될 거라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한다. 선배 장성들은 실패할 것을 우려하며 반론을 제기하자 전두광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할 거냐며 이들에게 오히려 큰소리친다.

한편 공관을 빠져나온 오국상 장관이 숨어든 곳은 한미연합사였다. 주한 미 대사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Are you ok?(괜찮습니까?)"라고 묻자 오 장관은 "Yes. I'm fine, thank you. And you?(예, 괜찮습니다. 당신은요?)"라는 판에 박힌 영어를 내뱉고[19] 국어 반 영어 반의 희한한 말("If this is Coup d’État, North communist 걔네가 'Right now!'하고 도발할 가능성도 있지 않습니까?")을 써 가며 자신이 도망친 이유를 변명조로 주워섬기는 등,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된 듯한 모습을 보인다. 주한미군 사령관은 이를 한심해하고, 대사는 막막한 표정으로 한국 내부 문제는 자신들이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데다가 북한의 특이 동향도 관측되지 않으니 육본으로 가야 한다고 오 장관을 설득한다. 어쩔 수 없이 오 장관은 미군이 운전하는 차에 타 육본으로 향한다.

반란군은 오 장관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던 중, 그들의 본거지인 30경비단에 이태신 소장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 소장은 반란군에게 '총장님을 육본으로 모실 것', '30경비단에 있는 반란 세력은 즉시 원대 복귀할 것', 그리고 '직속 부하인 장민기 대령, 원경 대령, 진영도 대령은 지금 당장 수경사령부로 올 것'을 요구한다. 뻔뻔한 태도를 보이며 통화를 거부하는 전두광을 대신해 한영구 중장과 배송학 중장이 이태신을 회유하려 들지만, 이들의 뻔뻔한 모습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이태신은 "니들 거기서 꼼짝 말고 그대로 있어. 내가 탱크 몰고 밀고 들어가서 니들 대가리를 뭉개버릴 테니까!"라고 호통치며 반란 진압을 선언한다. 반란군은 긴급히 세종로에 30경비단 병력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전두광은 이태신을 비웃으며 제9보병사단 노태건 소장과 제2공수특전여단장 도희철 준장에게 출동을 지시한다.[20] 당연히 반란군들은 기겁하며 출동 지시에 반대했으나, 전두광은 이태신이 탱크 몰고 오는데, 가만히 있을 거냐고 항변하며 역정을 낸다.

끝내 분에 찬 전두광이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자 이를 노태건이 따라가는데, 따라온 노태건에게 이럴 때 조금만 도와달라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호소한다. 이에 노태건은 "친구야, 내는 겁 안 뭇데이. 니 알제?(친구야, 나는 겁 안 먹었다. 너도 알지?)"라고 화답한 뒤 회의실로 돌아가 자신은 결정 내렸다며 "열차가 앞만 보고 달리는데, 여기서 뛰어내릴 사람 있습니까?"라고 말한 후 9사단은 2개 연대를 출동시키겠다고 밝혔다. 거기에 전두광이 회의실 문을 열고 지금이라도 집에 갈 분들은 안녕히 가시고, 여기 남는 순간부터는 모두 함께라며 승부수를 띄운다. 잠시 정적이 흐른 후 한 중장이 조용히 문 쪽으로 다가간다.

허나, 문을 닫으며 "전 장군, 우리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소?"라며 결의를 다진다. 이윽고 나머지 반란군 측 장성들은 최 대통령에게 다시 한번 재가를 요청하러 총리공관으로 가고, 노 소장과 도 준장은 각자의 병력에 서울 출동 명령[21]을 내린다. 한편, 특전사령부에 도착해 부대 현황을 점검하던 공수혁 소장에게 이태신 소장이 전화를 걸어 8공수 출동을 부탁하며 대응책을 강구하는 와중에 한 통의 소식이 날아든다.

2공수여단이 서울로 출동했다는 소식이 육본, 수경사, 특전사에 전해진다. 육군본부 장성들은 이에 아연실색하게 되고, 특전사에선 계속 2공수에게 통신을 넣지만 병력을 끌고 나오던 참모장은 이를 무시한다. 서울까지 남은 거리는 17km, 수경사령관 이태신은 3군사령부로 연락해 26사단과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출동을 부탁한다. 하지만 수기사는 이동속도가 느려 2공수가 먼저 서울로 들어올 것은 기정사실인 상황이었다.[22] 이에 이태신은 수경사 관할의 모든 한강 다리를 전면 봉쇄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양쪽 차선이 꽉 막혀 버리자 출동하던 2공수는 어쩔 수 없이 행주대교로 우회하게 된다. 거기에 이태신은 반란군의 마지막 진입로인 행주대교를 틀어막기 위해 관할 부대장인 30사단장 모상돈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행주대교 봉쇄를 요청하고 모 소장은 이에 응한다.

하지만 전군의 통신망을 보안사가 감청 중이었다. 30사단장과 수경사령관의 통화를 감청한 문일평 대령은 이 소장의 전화가 끝나는 즉시 모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전군 통신망은 보안사가 감청하고 있고, 9사단이 내려오고 있다'고 협박을 한다. 이를 들은 모 소장은 노발대발하지만[23] 문 대령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30사단 통신망을 감청하겠다며 행주대교 개방을 종용한다. 긴박한 밤의 시간은 22시, 33헌병단이 국무총리 공관을 장악하고 반란군 장성들이 총리공관에 도착해 협박도 해보고, 간청도 해보지만 최 대통령의 대답은 한결같이 국방장관을 찾으라는 말뿐이었다.

한편 행주대교에 직접 도착한 이태신은 통제되지 않고 있는 초소 상황에 모 소장과 즉각 통화한다. 파주에 위치한 장곡검문소에서 9사단이 오고 있다는 걸 보고 받은 모 소장은 문 대령의 협박이 허풍이 아닌 걸 확인하고 30사단 병력[24]이 9사단 2개 연대와 2공수여단의 충돌을 우려해 행주대교를 통제하지 않았다. 이태신은 행주대교가 뚫리면 바로 서울이라고 읍소하지만 결국 모 소장은 행주대교 통과를 묵인한다. 이에 이태신은 전군이 듣는 통신망에 대고 반란주동자들을 발견할 시 즉각 사살하겠다고 선언하고 행주대교 앞에서 직접 바리케이드를 치고 달려오는 2공수 차량 앞에 서서 길을 홀로 막아서는 기백을 선보인다. 2공수에게 즉각 철수하라는 육본의 정식명령이 무전으로 전달되고 공수혁 소장 또한 즉각 원대 복귀하면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이고 서울로 진입하는 순간 전쟁으로 간주 된다는 무전을 통해 2공수여단을 원대복귀 시키는 데 성공한다.[25]

2공수가 철수했다는 소식은 최 대통령에게 질려 총리공관을 나오던 반란군 장성들에게도 전달되고, 전두광이 격분하며 30경비단으로 질주했다. 그런데 전두광은 도희철을 격하게 껴안으며 친근하게 "직접 2공수를 데리고 나오라" 말한다. 웃어넘기는 도희철 준장에게 총을 꺼내 쥐어주며 병력을 돌리지 않을 거면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라며 겁박한다. 결국 도희철은 여단으로 직접 출발하고 이 시간부로 하나회 조직망이 일제히 가동된다. 육군본부, 수경사, 특전사에는 물론이고 출동하던 진압군 병력들과 8공수여단, 3군사령부까지 학연, 지연, 혈연 가리지 않고 모든 연줄이 총동원되어 회유를 시도한다.

한편 도 준장은 회군하던 참모장 이 대령을 직접 찾아 전두광이 자신에게 했던 것을 똑같이 이 대령에게 시전해 주고, 2공수여단을 다시 서울로 진격시킨다. 이태신은 3군사령부로 직접 항하던 도중에 전화를 넣어봤으나 이미 3군사령관도[26][27] 보안사의 전화를 받은 상황. 이태신은 26사단과 수기사가 안 된다면 3군 직할대대라도 보내달라고 하지만 3군사령관이 2공수 재출동 소식을 전해준다.

다시 장소가 바뀌어 부평. 출동이 중지된[28] 8공수여단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이태신은 반란군보다 앞서 서울로 진입할 수 있는 제8공수특전여단의 힘을 빌리고자 여단장 박기홍 준장에게 연락한 것이었다. 박 준장은 비록 하나회 소속은 아니나[29], 승산이 없다고 생각해 지원을 거절하려 한다.[30] 그러나 이 소장의 끈질긴 요청과 진심 어린 태도에 감화되어 결국 8공수여단을 출동시키기로 결정한다.

8공수여단의 출동은 반란군에게도 큰 위기였다. 이에 위기에 빠진 전두광은 민 중장에게 8공수여단과 2공수여단을 동시에 회군시키자는 신사협정을 제안한다. 당연히 이는 전두광의 기만전술에 불과했으나, 민 중장은 어리석게도 이를 믿고 8공수에게 회군 명령을 내리고 만다. 서울을 코앞에 둔 박 준장은 일단 정지하고 근처에서 대기라도 하고 있으면 안 되냐고 반발하고 김준엽 준장 또한 격렬히 반대하나, 민 중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식을 전해 들은 공수혁 소장은 김준엽 준장이 연결해 준 육본 상황실 스피커에 뭔 개소리냐고 소리치지만 민 중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공 소장의 전화를 끊어버린다. 신사협정 소식을 들은 이태신 또한 분통을 터트린다.

결국 8공수여단이 물러난다. 하지만 2공수여단은 근처에 잠복 중이었고, 2공수 홍혁범 중령 [31]의 부대원들이 행주대교 아래로 도강해 초소를 제압하고 행주대교에 무혈입성한다. 드디어 오국상 국방장관이 육군본부 B2 벙커에 도착한다. 김준엽 소장은 즉각 전두광 체포를 명령해달라 요구하지만 계속해서 민 중장이 제지하고 오 장관 본인 또한 대화로 해결하자는 한심한 소리만 뱉어댄다. 그런데 2공수가 온다는 소식이 육본에 전해지자 진압군 수뇌부들은 어이없게도 육본을 버리고[32] 이태신 소장이 있는 수경사로 피신하기로 한다. 반란군조차 이 소식을 듣고 비웃었으며, 수경사에선 강동찬 대령이 자신의 상관 뒤에 숨으러 오는 똥별들의 답답한 행보에 이태신 사령관에게 '전두광이 정말로 장악하게 된다면 사령관님만 희생양이 되는 게 아니냐'며 직언한다. 이태신은 이를 제지 하였지만 자신도 분통을 못 참고 지휘봉이 부서지도록 작전 지도를 때리고 주먹으로 내리친다. 이에 부관들이 이 소장을 말린다.

똥별들의 무능하고 바보들만 있는거 같은 답답한 모습에 울화통이 터진 김 준장은 아무도 나갈 수 없다며 소총까지 들고 제발 자리만 지켜달라는 위협에 가까운 애원을 하지만, 오 장관은 직위를 내세우며 "아니, 국방부 장관이 육본 지키는 자리야?"라고 외치는 등 무능의 끝만을 보여준다.[33] 결국 김 준장의 결의가 무색하게도 민 중장을 비롯한 진압군 수뇌부들은 수경사로 모조리 도망가고, 오 장관은 갑자기 행방불명되며, 오직 김 준장만이 육본에 외로이 남는다.

6. 주도권을 잡은 반란군

한편 공 소장은 사령부 건물 바깥에 집결한 4공수여단 병력을 보고는 최후를 직감하고 휘하 장교들에게 건물 밖으로 나가 항복하여 살아남을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사령관 비서실장인 오진호 소령은 사령관님을 외롭게 혼자 두지 않겠다며 사무실에 있는 온갖 가구들로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사령관의 곁에 끝까지 남기로 한다. 이윽고 김창세 준장과 박수종 중령이 이끄는 4공수여단이 사무실 문 앞까지 당도하자 오 소령은 공 소장과 함께 총격전을 벌이며 최후의 저항을 벌이다가 무차별 사격으로 끝내 전사한다. 목숨은 건졌지만 피투성이가 된 공 소장은 김창세 준장에게 내가 너를 15년 동안 데리고 친자식처럼 대했는데, 전두광 똘마니 짓이나 하냐고 절규하다가 4공수여단 장병에 의해 끌려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 준장 휘하 2공수여단은 빈집이나 다름없는 육본과 국방부를 습격해,[34] 끝까지 남아 있던 김 준장을 체포하고 벙커 출입구를 지키는 헌병들을 전부 무장해제시켜 연행한다. 그 와중에 조민범 병장 한 명만이 여기만은 안 된다며 필사적으로 저항하나 2공수 중사가 M16을 난사하여 사살한다. 한편 의문스럽게 사라졌던 오 장관은 2공수여단의 수색 끝에 국방부 청사 지하 환풍구에 숨어 있었음이 밝혀지고, 그렇게 반란군은 국방장관의 신병을 확보한다.

그렇게 마지막 진압군이 된 수경사. 김준엽 준장에게 육본 함락을 전해들은 이태신 소장은 수경사로 모여든 육본 지휘부를 바라보며 강동찬 대령에게 가용할 수 있는 전 병력을 연병장에 집합시키라 지시한다. 하지만 수경사 대부분의 전투병력은 30,33경비단, 헌병단에 있었고 이들은 하나회와 한패였기에, 직접 지휘할 수 있는 병력은 전차 4대, 장갑차 4대, 그리고 행정병, 취사병 같은 비전투병력과 극소수의 전투병력을 끌어모은 총 104명의 장병뿐이었다.[35]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황에 강동찬 대령은 저항을 만류하지만 이태신은 자신이 맡고 있는 수경사령관이라는 직책을 완수할 것이며, 오늘 밤 서울은 끝까지 수경사가 지킬 것이라 일갈한다. 완강한 이 소장의 의지에 '상관의 잘못된 판단으로 부하들을 희생시킬 수 없다'며 권총까지 겨눴으나, 이태신 소장은 아내가 준 목도리를 메면서 '시간 없으니 쏠 거면 빨리 쏘고, 안 쏠 거면 연병장으로 나오라'는 대답으로 받아친 후 연병장으로 와 최후의 연설을 시작한다.
이태신 : 우리 육군의 최고 지휘권자인 참모총장님을 납치한 반란군 무리가 현재 30경비단에 모여 있다. 국가권력을 찬탈할 목적으로 내란을 일으켰고, 수경사 일부가 이에 동조한 것은 사령관으로서 정말 제군들을 볼 면목이 없다. 하지만 이놈들을 이대로 묵인한다는 것은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용서할 수가 없다. 오늘 밤은 정말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자리를 떠나고 싶다면 가도 좋다.[36] 제군들은 수경사의 명예 하에 임무를 지키는 방패부대의 용사들이다. 나는 수경사령관으로서 나의 용감한 용사들과 함께 반란군 무리를 제압하러 갈 것이다.
강동찬: 살아방패!
장병들: 죽어충성!![37]
강동찬: 사령관님께 대하여 경례!
장병들: 충!성!
이태신: 충성.

7. 진압군의 마지막 저항, 최후의 5분

이태신은 광화문 광장에 들어서며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이순신 장군 동상을 올려다본다. 30경비단 방어선 앞까지 간 이태신 소장의 진압군은 전차를 앞세워 겹겹이 쳐진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려 시도하며, 동시에 반란 주동자들에겐 즉각 투항하라 외치고 30경비단 병력들에겐 상관에 의해 억지로 끌려나왔음을 알고 있으니 무장을 해제하라고 권유한다. 아직 9사단 도착까지는 10분도 더 남은 상황. 방어선을 지휘하는 장민기는 시간을 끌기 위해 절대 선제사격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전두광도 시간을 끌기 위해 마이크를 잡고 진압군에 비해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우세한 전두광은 이태신을 조롱한다. 하지만 이내 이태신의 한 마디가 세종로에 울려퍼지며 반란군 전원이 아연실색한다.

이태신은 수경사 야전포병단에 30경비단을 조준하라고 지시하고 5분 안에 투항하지 않으면 정밀타격을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한다.[38]

전두광이 협상을 시도하려 하지만 이태신은 "대화는 사람끼리 하는 거야."라고 뚝 끊어버린다. 결국 전두광도 직접 현장으로 나가게 된다. 전두광은 진압군 병력들을 향해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즉시 섬멸할 것이고, 지금 이곳에 155mm 포탄을 쏴 버리면 진압군도 피해를 입는 건 물론이고 서울 한복판에 화력을 동원하면 북괴가 얼씨구나 좋다고 쳐내려 올 거라고 을러댄다.[39] 이태신은 포격이 시작되면 즉각 돌격한다고 지시하며 시간은 촌각을 다툰다.[40] 와중에 반란군 수뇌부들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져 너도나도 이탈하려는 난장판이 벌어진다.

그렇게 제한 시간이 끝나가는 찰나, 야포 사격까지 단 15초를 남긴 상황에서 2공수에게 발각되어 30경비단으로 끌려오고 있었던 오 장관이 먼저 도착해 반란군의 마이크로 야포단에 사격 중지, 모든 부대원들에게 복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41] 그럼에도 이태신은 마지막까지 오 장관에게, 반란군 일당의 체포 명령을 전군에 하달해 줄 것을 요청하나, 오 장관은 오히려 그 자리에서 이태신을 직위해제해 버린다.[42]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공수 병력이 세종로에 진입하여 후방을 포위하고,[43] 한밤중의 소란에 놀란 시민들까지 하나둘 길거리에 나오면서 본의 아니게 반란군의 인간 방패가 되고 만다. 발포 즉시 애꿎은 민간인들만 전부 희생당할 상황이 되자 결국 야포단은 이태신에게 명령을 이행할 수 없다며 죄송하다는 무전을 보낸다.[44][45]

국방장관의 말 한마디에 보직을 잃은 이태신은 부하들에게 "대한민국에서 제일 무능한 사령관"인 자신을 따라준 데에 감사를 표하고 원대복귀 명령을 내린다. 이후 이태신은 아무도 따라오지 말라며 혈혈단신으로 권총 한 자루를 차고 반란 진영에서 확성기를 들고 자신을 조롱하는 전두광에게 향한다. 이제까지 외롭게 반란군에게 맞선 것을 나타내듯 홀로 바리케이드와 철조망을 헤치며 전두광에게 다가가고, 중간에 한 번 넘어지고 "전두광 이놈의 자식... 내 가만두지 않는다!"라고 중얼거리며 권총을 빼들지만 철조망을 헤치다 그마저 떨어뜨리고도 끝까지 간다. 이런 이태신을 장민기 대령을 비롯한 반란군이 저격하려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다며 노태건이 말려 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태신이 철조망을 넘는 동안 지켜보던 부하들은 도희철의 2공수여단 부대원, 헌병들에게 잡혀 무장해제당하고 포로가 되어버리고 만다. 미소 짓던 것도 잠시 전두광도 할 말 있으면 해보라는 듯 앞으로 나서 헬멧을 벗는다.

이태신은 삼중 철조망 너머의 전두광을 향해 "넌 대한민국 군인으로도... 인간으로도...! 자격이 없어."라는 마지막 한 마디를 무감정하게 내뱉으며 체포된다.[46] 그렇게 5.16 군사정변 이후 18년. 대한민국에 다시 찾아온 기나긴 밤은 또 한 번 반란군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반란 성공 이후 후배들은 웃으며 환호하나, 웬일인지 전두광은 웃지 말라며 정색한다. 뒤이어 마중 나온 노태건의 지프를 타고 이동하던 중 혼자 걷고 싶다는 이유로 승리 소식 전달을 노태건에게 맡기고 차에서 내려 경복궁 옆을 쓸쓸하게 걷는다. 한편 30단에 홀로 도착한 노태건은 우리가 이겼다며 샴페인을 터뜨리고, 반란군 수뇌부는 일제히 환호성을 즐기며 술에 취한다. 얼마 뒤 전두광이 들어오자 노태건은 당신이 해냈다며 전두광을 치켜세우지만 전두광은 씁쓸하게 웃으며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이를 따라온 노태건이 전두광에게 "우리 아직 친구 맞제(맞지)?"라고 묻자 전두광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그걸 말이라고 하냐며 웃고는 소변을 보러 화장실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폭소를 터뜨리면서 미친 듯이 웃어댄다.[47][48] 한편 체포되어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구금된 이태신은 옆 방에 정상호 총장이 있는 걸 깨닫고 무력감에 눈물을 흘린다.

8. 반란군의 승리와 결말


반란에 성공한 하나회는 국방장관을 앞세워 마침내 대통령 재가를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다만 최 대통령은 재가안을 가져가려는 전두광을 잠깐 붙잡은 다음, 재가 서류에 날짜와 시각을 명시하며 사후재가임을 조용히 읊조린다.[49] 그리고 다음 날 13일 아침부터 보안사에서는 거하게 파티가 벌어진다. 앞으로 죽었다 생각하고 국민을 위해 일하자는 전두광의 연설을 시작으로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를 부르며 손을 흔드는 전두광, 술에 취해 미친 듯이 웃는 노태건, 흥에 겨운 듯 웃으며 춤을 추는 한영구, 배송학, 현치성, 술주정을 부리며 소리를 지르는 도희철과 김창세, 가발을 쓰고 탬버린을 흔들며 분위기를 띄우는 장민기, 원경, 문일평의 모습이 차례로 비춰진다. 동시에 얻어맞으며 물고문을 당한 듯한 이태신 소장, 상처투성이가 되어 조사실로 끌려가는 김준엽 준장, 총상으로 병원 신세를 지는 공수혁 소장, 고문당해 만신창이가 된 정상호 대장의 모습이 교차되어 비춰진다.


파일:서울의봄_신군부.jpg
다시 다음 날인 1979년 12월 14일, 전두광의 안내를 받으며 반란군 지휘부는 단체 사진을 찍는다. 반란군 장성들이 하나하나 클로즈업되며 그들의 이후 이력들이 하나둘씩 명시된다. 마지막으로 노태건와 전두광의 이력까지 보여준 뒤 신군부가 이후 자행한 행적을 자막으로 띄우고, 플래시가 한 번 더 터짐과 동시에 사진이 흑백으로 변한 뒤 화면 전체가 암전되며 영화는 끝난다.
'신군부'로 불린 이들은
군조직을 장악 후 정권 탈취를 노렸다

80년 봄, 대학생들의 민주화 시위
공권력으로 짓밟았고

5.18 민주화 운동으로 확산되자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진압했다

마침내 신군부는 대한민국을 송두리째 삼켰다

찬란했던 '서울의 봄'은 그렇게 끝났다
아웃트로에 나오는 자막 내용
엔딩 크레딧이 나오는 도중 모티브가 된 하나회 인사들의 실제 사진을 비추고,[50] 전선을 간다의 커버 버전이 흘러나온다.[51]

9. 여담


[1] 이때까지만 해도 박정희의 사망 사실은 1급 기밀이었기 때문이다.[2] 작중에서는 계속 '박 대통령'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리고, 오프닝 자막에 한 번, 2공수의 회군 이후 반란군 측에서 때로 전화를 거는 장면에서 한영구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동규(김재규)를 옹호하느냐"며 실명을 호칭하는 장면에서 한 번 나온다.[3] 실제 역사처럼 전두광은 정 총장에게 6억 원은 큰 영애, 1억 원은 합수부 수사비, 2억 원은 계엄사령부에서 쓰라고 내민다. 정 총장은 수사 과정에서 나온 돈은 국고로 환원하는 게 규칙 아니냐며 전두광을 질책하고는 앞으로는 합수부 수사 과정에서 들어온 신규 정보를 3시간 단위로 계엄사령부에 보고하라며 엄포를 내린다.[4] 실제 노태우는 장태완 소장의 후임으로 수도경비사령관에 취임한다.[5] 이태신은 이 과정에서 전두광의 대답을 거의 다 얼마 되지도 않는 단답으로 끊어 버리며, 저렇게 패거리들끼리 몰려다니는 모습이 별로 보기 좋진 않다며 그를 에둘러 까는 등 전두광의 속을 제대로 긁어 놓는다.[6] 지금이야 동해안경비사령부가 제7기동군단으로 개편되고 56사단 역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해 있어 그렇게까지 한직은 아니지만 당시 동해안경비사령부는 군단급 기능사령부인 주제에 휘하에 꼴랑 연대 하나에 지원단 1~2개 밖에 없는 열악한 곳이었으며 56사단 역시 9사단에 비하면 중요도가 한참 떨어지는 곳이다.[7] 당장 국방장관과 정 총장이 서 있던 그 자리에도 하나회 소속 장교가 같이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8] 시국을 떠나서도 당시 수경사는 대통령 친위부대라는 특성을 가져 정치적으로 엮일 수밖에 없었다.[9] 사실 헌병단이야 그렇다 쳐도 30경비단이나 33경비단은 직제상 수경사 소속인 건 맞으나 실제로는 대통령경호실의 지원부대로 편성되어 유사시에는 수경사령관이 아닌 대통령경호실장의 통제를 받게 되어 있었다. 따라서 대통령경호실장이 죽고 경호차장과 작전차장보가 모두 궐석인 상태에서 30경비단과 33경비단은 사실상 모든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던 셈이다.[10] "생일을 기념해 대접하고 싶어하신다"고 하자 단칼에 거절했으나 문일평이 재차 초대하면서 저렇게 밝히자 언뜻 대답을 못하다가, 이후 (자세한 내용은 안 나오나 문일평이 전두광에게 참석 확정이라 보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참석을 결정한다. 아무리 전두광이 싫어도 한직으로 쫓겨가는 판에 식사 한 번 정도는 하는 게 예의라 여긴 듯. 정상호 총장 역시 일부러 전두광을 불러 "전 장군 마음 내가 다 압니다"하고 위로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참고로 공교롭게도, 반란군이 세운 이 정 총장 연행 작전의 이름이 바로 생일집 잔치였다.[11] 영화에서는 "네가 왜 여기 있냐" 물어보는 정도였지만 실제 장태완 장군은 직속부하가 허락도 없이 멋대로 온 것에 대해 크게 혼을 냈고, 조홍이 "전두환 장군이 준장 진급주를 사준다고 해서 왔다"고 둘러댔다. 이에 장 장군은 '내가 직속 상관인데 그걸 건너뛰고 술을 대접하겠다는 전 장군이고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 마시는 네놈도 문제다'라면서 그를 질책했지만 동행한 정병주 장군이 겸사겸사 조홍 대령의 준장 진급을 축하해주자고 장태완을 달래서 조홍이 동석할 수 있었던 것.[12] 실제로 정승화 참모총장은 보안사령부의 전신인 육군 방첩부대 당시 방첩부대장으로 역임했었다. 그리고 당시 보안사령관을 맡던 전두환이 역대 기무사령관 중 20대, 정승화 총장이 13대로 정승화는 1962.7.12~1964.1.8 기간동안 근무했고, 전두환이 12.12사태를 일으킨게 1979년이니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의 까마득한 선배이자 군 선배를 상대로 내란을 일으킨 것이다.[13] 실제로는 참모총장 공관 관리관이었던 반일부 준위가 보안사 요원들과 공관 병력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틈을 타 몰래 바깥으로 빠져나가 공관촌을 경비하는 해병들을 불러들인다.[14] 실제 조홍은 장태완 장군과 수경사로 복귀하던 도중 슬그머니 사라진다. 사실 원경이 몰래 숨어서 통화하는 너무나 수상한 짓을 하다 들키지만 않았어도 급하게 도망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이 시점까지 이태신은 아무리 전두광이 수상해도 설마 총장 납치란 무리수를 둘 거라곤 예상치 못했으므로.[15] 임의로 전두광 체포 명령을 내린 이태신을 질타하며 "보안사령관 체포는 계엄사령관 동의가 있어야하는거 몰라요?"라고 하자 이태신이 "그 계엄사령관을 보안사령관이 연행했는데 동의를 어떻게 받습니까?"하고 황당해한다. 생각해보면 계엄사령관이 납치당해 고문을 당하는 와중에 어떻게 체포 명령을 내릴수 있는가?[16] 당시 총리공관 경호를 육군본부 헌병대가 맡고 있었기에 헌병감 김준엽이 체포 명령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정은 극적으로 각색된 것으로 실제론 김진기(작중 김준엽) 준장이 체포 명령을 내렸으나, 전두환의 짓인지 확신하지 못해 총리공관에 있을 때에는 아직 대기하라고 명령을 했다. 반란군 측에서 하나회 멤버인 정동호 당시 대통령실 상황실장(경호실장 직무대행)을 주축으로 대통령경호실 병력을 움직여 헌병들을 기습 제압하고 최규하 대통령을 사실상의 구금상태로 만들었다. 즉 이 시점에 반란군은 이미 총리공관과 대통령까지 사실상 확보한 상태였던 것이다. 정동호는 군사반란 당시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영화에서 강 실장은 전두광과 친분은 있지만 반란에 대해 모르고 있다가 사건 당시 뒤늦게 알고 전두광을 피신시키면서 가담하게 된 것으로 묘사된다.[17] 그러나 운전 했던 보안 요원이 정문을 열다가 전두광이 타고 있던 차에 치었지만 헌병특별경호대에 의해 체포된걸로 추정된다.[18] 이때 욕설까지 나올 정도였다.[19] 이때는 자막도 띄우지 않는다.[20] 9사단은 전방부대인데 당시 전방부대의 이동은 한미연합사령부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군법 위반이다. 혹여 무력 충돌이 일어나더라도 진압군을 제압할 수 있는 병력들이 필요해서였는데, 이는 그야말로 정신 나간 발상이었다. 공수부대는 그렇다 쳐도 서부전선 방어를 담당하는 9사단을 빼 오라는 소리는 북한이 이 사태를 틈타 침공하든 말든 본인들의 반란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21] 9사단은 중앙청, 2공수는 삼각지 육군본부[22] 수기사는 그렇다쳐도 26사단도 아무리 빨리오려해도 김포에서 들어오는 2공수를 양평에 주둔하는 26사단이 먼저 들어오기엔 무리가 있다.[23] "야, 이 미친 새끼야! 9사단은 전방 병력인데, 서울로 불러들여!"[24] 완전무장 2개 중대를 배치하겠다고 했었는데 아무리 일직선 다리라도 이는 무리다. 당시 보병연대 2개라면 합해서 3천명 이상이고, 2개중대면 몇백 수준이라 규모가 비교가 안된다. 공수여단이라도 천명 이상이며, 이들은 일반병이 대다수인 일반 부대에 비해 전투력이 막강하다. 2개중대 밖에 동원하지 못한 것은 30사단은 다른 사단급 부대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지역에 병력이 나뉘어져있기 때문이다.[25] 다만 여단을 끌고 오던 참모장 이 대령도 여단장은 서울로 진입하라고 하고 사령관은 철수하라고 하는 상반된 명령을 내리는 상황에 매우 혼란스러워했다. 갈팡질팡하던 상황에 막아선 이태신과 이 틈을 탄 진압군의 회유가 먹혀든 셈.[26] 2공수가 다시 서울로 들어온다고 하자 3군이 더는 개입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3군사령부는 개전시 경기도 전선을 방어해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이미 9사단이 2개 연대를 빼갔는데, 더 이상 3군 병력을 전방에서 빼내면 9사단 방면으로 공격이 들어왔을때 서부전선 자체가 뚫려버릴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실제 역사에서도 3군에 요청한 병력출동은 대부분 거절당했고, 그나마도 보안사에 회유당했다.[27] 최전방 부대가 2개연대를 빼낸 것은 GP와 GOP 경계에 들어간 1개연대를 제외하면 전 병력을 다 빼버린 것이다. 사실상 북한 침공 시 주력부대 전부를 빼버리는 미친 짓을 저지른 것.[28] 공수혁 특전사령관이 8공수에 지시를 내렸으나, 8공수에 걸려 온 보안사 전화를 받고 개입을 주저한 것으로 추정된다.[29] 갑종 출신[30] 2, 4, 6공수여단은 물론이고 9사단까지 오는 마당에 잘못 나서면 본인이 독박 쓰는 수준이 아니라 8공수가 전멸할 위기에도 처할 수 있었다.[31] 홍혁범 이라는 이름이 군복에 부착되어 있다.[32] 애초에 B2 벙커는 적의 습격을 가정하고 이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군사시설이다. 방어할 시도조차 하지 않고 육군의 심장부를 넘겨주자는 것이다.[33] 국방장관의 역할에 대해 논하자면 국방부 장관은 모든 군인들의 상급자로서 군부를 통제할 의무가 있는 인물이다. 그가 전두광, 노태건, 황영구 등의 직속상관은 아니라도 군부 자체에 대한 책임이 있기에 군이 폭주한다면 당연히 장관으로서 책임이 있다. 도의적으로 보더라도 그는 반란군들의 군 선배이자 얼마 전까지 저들을 지휘하던 육군참모총장 출신이기도 하니, 군 후배들이자 하급자들이 군사반란을 일으킨다면 앞장서서 막아야 될 인물이다.[34] 여기선 옥상 청사에서 발칸포를 쏘는 건 생략된다. 대신 헌병들이 국방부 건물 밖으로 나와 2공수여단에게 사격을 퍼붓지만 압도적인 화력에 중과부적으로 밀리다가 결국 건물 안에서 구타 및 제압당하고 만다.[35] 당장 30경비단과 33경비단 자체 병력만 하더라도 합쳐서 전투병력 2천명 이상이었다. 수도경비사령부는 산하 경비단을 대령급인 단장들이 통솔하고, 그 경비단들을 사령관이 통솔하는 구조였는데 경비단장들인 장민기(장세동)와 진영도(김진영)가 휘하 병력을 데리고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태신이 데리고 있는 병력은사령부를 경호하는 소수의 병력 뿐이었던 것이다. 9사단에서 출동한 2개 연대와 2공수가 합류하지 않아도 승산은 없었다.[36] 이 말을 들은 군인들이 서로를 보지만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는다. 이들은 실제 역사와 마찬가지로 행정병, 취사병 등 비전투인원이 다수 포함되었고, 나중에 출동할 때 긴장해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참된 군인정신을 갖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37] 수도방위사령부의 방패구호. 현재까지도 사용 중이다.[38] 상술했듯 수경사 야포단은 하나회의 인맥이 닿는 곳이 아니었기에 전두광은 이를 통제할 수 없었고 야전포병단이 30경비단을 조준 중이라는 이태신의 말을 듣자 제대로 당황해서 표정까지 굳어졌다.[39] 그 북괴가 쳐들어오면 당장 막을 전방 병력을 서울까지 빼 온 게 어느 쪽인지 잘 생각해 보자.[40] 이때 화면에 타이머가 나오며 시간이 흘러가는 연출이 압권[41] 야포단장은 국방장관의 무전이 오자마자 포병부대들에게 사격중지 명령을 내린다.[42] 반군에 의해 붙잡힌 이상 반군 제압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방장관이 국방부에 숨어 있음에도 반군들이 찾지 못하거나q 상황을 제대로 조치를 취하거나 한미연합군사령부에 나가지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다면 전군에게 반란군 일당들을 체포, 사살 명령을 내렸을 것이다.[43] 이태신의 야포부대에 위협당하자 마자 전두광이 이태신을 상대로 대립하는 동안 노태건이 도희철에게 도움을 요청한 걸로 추정된다.[44] 야포단장은 30경비단뿐만 아니라 거주하는 민간인들까지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해 포탄 사용 전 조명탄으로 시도해 봤다.[45] 시민들이 나오지 않았어도 사실상 이건 불가능한 선택지에 가까웠다. 당시 기술로는 포로 목표물만 정확하게 포격하는 게 불가능하고(미사일도 아닌 포라면 현재도 이건 힘들다), 진짜 포격을 했다면 높은 확률로 주변의 민가들, 그리고 총리공관이나 청와대까지 휘말렸을 것이다. 30경비단이 위치한 경복궁이 파괴되는 건 당연하고. 실제로 장태완 장군은 어디까지나 위협의 의미로 포를 겨냥했고 사격 명령을 내리진 않았으며, 영화에서도 야포단에서 이태신에게 "사령관님... 포격 명령을 재고해 주실 순 없으십니까?"라고 물으며 작전 지도의 주위 민가, 총리공관, 민가까지 불길에 휩싸이는 연출이 나온다.[46] 현실로 있었던 일이 아니지만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국민들이 실존인물 전두환에게 가졌던 감상을 픽션으로나마 본인 면전에 던져주는 장면이다. 감독도 속 시원한 일침이나 욕설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당연히 들어야 할 말을 그저 감정 없이 내뱉길 주문했다고 한다. 그리고 작중에서 여지껏 그래왔듯이 자신에 대한 면박을 듣고도 그저 웃어넘길 것만 같던 전두광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표정은 경직된다.[47] 해당 장면을 통해서 전두광이라는 인물이 군인의 본분과 인간임을 망각하고 문자 그대로의 '악마'로서 타락해가는 모습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마침 화장실의 조명과 전두광이 떨어트리는 군모, 분위기의 삭막함이 더해져서 섬뜩한 느낌이 극대화된다. 감독 역시 그 전보다 더 한 악인이 되는 장면이라고 밝힌 바 있다. 콘티와 시나리오 상에도 디테일한 묘사가 생략되어 있었던 이 장면을 어떻게 연기하고 찍을지, 배우와 감독이 치열한 난상토론을 벌였다고 한다. 장시간 동안 촬영이 멈췄음에도 스태프들은 앞다투어 두 사람의 모습을 관찰하고 사진을 찍으며 지켜보았다는 후문이다. 또한, 김성수 감독은 이 신을 어떻게 찍기로 했는지 논의가 끝난 후에도 촬영 감독에게도 말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전두광이 본격적인 악으로 가는,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는 순간의 생생한 순간을 처음 만난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기길 원했기 때문이다. 이모개 촬영감독은 황정민이 갑자기 미친 듯이 웃으면서 카메라 앞으로 들어오는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온 그 순간 촬영하면서 ‘저 마귀는 뭐지?’라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48] 실제 현실의 전두환이 말년에 화장실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과 연관지어져 보인다는 반응도 있다.[49] 실제로 이를 본 신현확 국무총리가 전두환과 노태우의 재판 때 증언을 해줄 수 있었고, 이는 12.12가 군사반란임을 입증하는데 중요한 증거가 된다.[50]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노태우와 전두환의 얼굴이 특히 선명해진다.[51] 사실 전선을 간다의 노랫말은 피 흘리며 죽어간 전우를 생각하며 적에게 돌진하라고 외치는 처절하고 한이 서린 내용인데 전두광과 신군부가 일으킨 군사반란과 이를 막기 위해 군인정신을 지키다가 고난을 겪은 이들, 그리고 신군부의 총칼에 짓밟혀 희생당한 수많은 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적절한 선곡이라고 할 수 있다.[52] 이때 오류가 있는데 반란 직후가 아니었으며, 실제 전두환은 군복이 아니라 정장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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