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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어: Nürnberger Gesetze(뉘른베르크 법)/Nürnberger Rassengesetze(뉘른베르크 인종법)영어: Nuremberg Laws
...유태인의 이스라엘 추방 이래 나치 독일정부의 "순수"보존열은 이미 오래된 바 이 경향은 근래 점차 히스테릭화하여 빌헬름 프리크(Wilhelm Frick) 내무부 장관은 최근 전국 오백의 호적등기소에 대하여 "독일민족의 순수성을 외국인종과 혼합하지 않는 것을 보존하기 위하여 전 국민 사람사람마다 선조와 근친자에 반한 엄중차 상세한 조사를 하여 종족 카드를 작성할 것"이라고 반포하였다. 이 결과 금후 독일국민은 소위 "지펜블라트(Sippenblatt)"라고 칭할 혈통증명의 카드를 감찰로서 종시 몸에 갖고 선조의 혈통순수성을 어느 때나 증명하도록 되었다 한다.
1934.11.03. 동아일보. "전 독일인의 혈통카드"
1934.11.03. 동아일보. "전 독일인의 혈통카드"
1935년 나치 독일이 제정한 법률. 매년 정기적으로 열리는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시기에 라이히스탁을 특별 소집해 통과됐기 때문에 보통 '뉘른베르크 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법을 통해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결혼 및 성관계가 불법으로 규정됐고 유대인의 공무원 임용권도 박탈됐다. 이 법은 홀로코스트로 이어지는 나치의 반유대주의 움직임의 첫 걸음으로 여겨진다.
2. 배경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배와 그에 따른 배후중상설의 대두, 베르사유 조약의 배상금으로 인한 초인플레이션 사태, 그리고 1929년 대공황으로 생긴 경기불황 등 혼란을 죄다 유대인의 탓으로 넘기면서 1920년대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가 팽배해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1933년 평소 반유대주의를 소리 높여 주장하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수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취임했다. 히틀러의 총리 취임과 동시에 나치의 유대인 탄압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시나고그(유대교 회당) 방화, 돌격대의 유대인 상점 습격 등이 연달아 벌어진 후 1933년 4월 히틀러는 유대계 상점 보이콧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으며 이어 모든 비 아리아 인종이 전문직과 공무원직에서 사퇴할 것을 종용하는 법안이 통과됐고 괴벨스의 주도하에 유대인들이 저술한 책들에 대한 분서 행위가 독일 전역의 대학가에서 일어났다.[1] 기존까지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던 유대인에 대한 독일 국적 부여가 제한되기 시작했으며[2] 도시 곳곳에 유대인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구역이 생겨나기 시작했다.이런 상황에서 나치는 한층 더 유대인들에게 압박을 가해 그들이 자발적으로 독일을 떠나게 하려고 시도했다. 1934년이 되면 유대인들은 백주대낮에도 돌격대원의 폭력에 노출됐으며 유대인 기업이 정부의 계약을 수주하는 것도, 신문에 광고를 싣는 것도 금지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유대인에게 동정적이었던 몇몇 독일인들이 있었고 나치 정부도 탄압을 망설였다.[3]
3. 도입
1935년 7월 당시 독일 내무 장관 빌헬름 프리크에 의해 모든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성관계 및 결혼이 불법화 될 것이라는 정책이 발표되었다. 이어서 8월 내각회의를 통하여 이 정책이 최종적으로 승인된다. 1935년 9월 뉘른베르크에서는 매년 열리는 나치당의 7차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전당대회의 마지막 날이었던 9월 15일 히틀러는 라이히스탁을 소집했고 여기서 내각회의에서 작성된 법률안이 통과되면서 뉘른베르크 법은 공식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4. 내용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Gesetz zum Schutze des deutschen Blutes und der deutschen Ehre)과 '제국시민법'(Reichsbürgergesetz)이라는 두 개의 법률로 구성되어있다.- 독일인의 피와 명예를 지키기 위한 법
1조 1항: 모든 유대인과 독일 국민 혹은 독일 혈통 사이의 결혼은 금지된다. 이 법을 피해서 해외에서 이루어졌을 경우에도, 이미 이루어진 결혼은 무효이다. 1조 2항: 혼인 무효 절차는 오로지 검사에 의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 2조: 모든 유대인과 독일 국민 혹은 독일 혈통 사이의 혼외관계는 금지된다. 3조: 유대인은 독일 국민 혹은 독일 혈통의 45세 이하 여성을 집안의 가정부로 고용할 수 없다.[4] 4조 1항: 유대인은 독일의 국기를 흔들거나 게양할 수 없다. 4조 2항: 대신에 유대인은 유대인의 깃발을 게양하는 것이 허용된다. 이 권리는 국가에 의해 보호받는다. 5조 1항: 1조를 어길 시 강제 노동형을 선고 받을 수 있다. 5조 2항: 2조를 어기는 남성은 징역 혹은 강제 노동형을 선고 받을 수 있다. 5조 3항: 3조와 4조를 어길 시 1년 이하의 징역형 및 벌금, 또는 다른 처벌을 받을 수 있다. 6조: 국가 내무부 장관은 총통의 대리인과 국가 법무부 장관과의 협조하에 위 법의 실행과 완성을 위해 요구되는 법적이면서도 행정적인 규제를 발행할 수 있다. 7조: 193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발휘할 3조를 제외한 여타 조항은 위 법의 공표와 동시에 효력을 발휘한다. |
- 국가시민법
1조 1항: 시민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이를 위해 부과되는 특정한 의무를 결과적으로 가지게 되는 사람을 지칭한다. 1조 2항: 시민권은 국가와 국가시민법의 제공에 상응하여 부여된다. 2조 1항: 국가 시민은 독일 국민 혹은 독일 혈통으로, 독일 국민과 독일을 위해 충실히 봉사하기 위해 기꺼우면서도 적절히 행동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2조 2항: 국가 시민권은 국가 시민증의 획득을 통해서 부여된다. 2조 3항: 국가 시민만이 이 법에 상응하여 모든 정치적 권리를 가지게 된다. 3조: 국가 내무부 장관은 총통의 대리인과 국가 법무부 장관과의 협조 하에 위 법의 실행과 완성을 위해 요구되는 법적이면서도 행정적인 규제를 발행할 수 있다. |
4.1. 유대인 구분
다만 이미 2천 년에 걸쳐 혈통으로는 유대인과 유럽인이 섞일 대로 섞였으며[5]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권을 부여받고 유럽인 사이로 동화가 많이 진행되었으므로 나치는 독일인-유대인이라는 이분법적 구분보다는 혼혈 정도에 따라 6단계로 구분하고 대우도 달리했다.집안마다 족보를 만들어 계보를 비교적 중시하는 한국과 달리 유럽 사회는 애초에 자신의 조상이 누군지에 대해서 관심이 크지는 않으므로 유대인과 독일인을 가르는 혈통의 기준은 증조부모까지로 한정됐다.
<rowcolor=#fff> 분류 | 조상 | 정의 |
Deutschblütiger(독일 혈통) | 증조부모 8명 중 8명 모두 독일인 | 독일인으로 인정. 독일 시민권 부여. |
Deutschblütiger(독일 혈통) | 1/8 유대인(증조부모 8명 중 1명이 유대인) | 독일인으로 간주.[6] 독일 시민권 부여. |
Mischling zweiten Grades(2단계 혼혈) | 1/4 유대인(증조부모 8명 중 2명이 유대인) | 부분적으로 독일인으로 간주. 독일 시민권 부여. |
Mischling ersten Grades(1단계 혼혈) | 3/8, 1/2 유대인(증조부모 8명 중 3~4명이 유대인) | 부분적으로 독일인으로 간주. 독일 시민권 부여. |
Jude(유대인) | 3/4 유대인(증조부모 8명 중 5명 이상이 유대인) | 유대인으로 간주, 독일 시민권 박탈. |
Jude(유대인) | 유대인 | 유대인으로 간주, 독일 시민권 박탈. |
이 중 애매모호한 경계선상에 있던 '혼혈' 유대인들에 대한 기준이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1935년 9월 15일 | 유대교 신자이면 유대인으로 포함됐다.[7] 혼혈인 이들이 다른 유대인과 결혼했을 시, 유대인으로 포함했다. |
1935년 9월 17일 | '혼혈' 상황에 놓인 아이들의 경우 부모의 결혼일을 기준으로 1935년 9월 17일 이전이면 혼혈로, 이후면 유대인으로 분류했다. |
1936년 7월 31일 | 유대인과 성관계에서 태어난 사생아의 경우 유대인으로 분류했다. |
다만 저 법 시행 직후에 1936 베를린 올림픽이 열리고 유대인 탄압이 좀 느슨해지면서 저런 식의 인종 구분이 바로 엄격하게 시행되었던 건 아니었던 듯 하다. 그러나 그건 일시적이었고 올림픽이 끝나면서부터 다시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고 급기야 1941년 말 최종 해결책이 입안되면서 혼혈 유대인들의 처리문제도 도마 위에 올랐는데 이 때 알려진 한 분류법에 따르면
- 유대인 피가 반이 섞인 1단계 혼혈은 유대인으로 간주하되 독일인과 결혼하고 유대교를 버린 경우는 불임수술을 받는 조건 하에서 비유대인으로 간주. 그 2세는 뉘른베르크법 발효 이전에 결혼한 부부에게서 낳은 아이들만 비유대인으로 간주.
- 유대인 피가 4분의 1이 섞인 2단계 혼혈은 기본적으로 비유대인으로 간주하되 외형상 유대인의 외형을 하고 있거나 유대인의 정치, 종교적 견해를 따를 경우에는 유대인으로 간주.
- 국가나 당에서 신분을 증명받은 혼혈은 독일인으로 간주 가능하다.
였는데 딱 봐도 혼혈은 고무줄식의 유대인 분류가 가능했고 나치에도 유대인 혼혈이 있었다.[8] 혼혈 유대인은 홀로코스트를 어느 정도 피해갔다는 말도 있으나 한 조사에 따르면 전쟁 전 70만이었던 혼혈 유대인 인구가 전쟁 후에는 25만으로 줄었다니[9] 단적으로 말하긴 어려우나 홀로코스트에 다수가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무에서는 책임자들 기준에 따라 모든 게 고무줄처럼 바뀌곤 했다. 저 정도 수준의 구체성 있는 분류 기준이 중앙당에서 결정되지는 않았다. 조부모 중 한 명 정도가 유대인이라고 해도 게슈타포 맘에 안 들면 '이놈은 유대인이다' 라고 분류시키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10] 인종분류 재심사가 가능은 하다고 했어도 거기서 독일인으로 재분류된 경우도 거의 없었다. '유대인의 외형'이라는 것 자체가 굉장히 주관적인 요건이라서 히틀러나 힘러가 그냥 동네 아저씨라면 저걸로 걸고 넘어져도 아무도 부인 안 할 정도로 애매모호한 개념이었고 유대인의 정치, 종교적 견해는 유대인 피가 설령 하나도 안 섞인 독일인이 따라도 걸린다고 해도 곧바로 강제수용소행이었다. 강제수용소에는 유대인 말고 독일인 정치범들도 많았다.
여기서 가장 극적인 경우는 스페인계 독일군 사단인 청색사단에서 통역 겸 장교로 활동한 에리히 로즈의 사례다. 조부모 4명 중 한 명이 독일인이고 나머지 셋은 유대인이었다.(75%) 대신 생긴 것은 전형적인 게르만인 상이어서 드러나지는 않았다고 한다. 히틀러 집권 시점에서 본인들은 의식하지 않았지만 그의 부모에게는 유대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고 정치성향은 보수 성향이었다.[11] 에리히 로즈 본인은 한 때 독일군 소위였었다가 히틀러 집권 후 나치 기준 유대계 장교 들이 대부분 해고되던 중 운이 좋게도 스페인 주재 독일 대사관 직원으로 일자리를 옮겼는데 스페인 내전이 터질 때 공산주의를 증오하는 이념적 성향으로 인해 처음에는 콘도르 군단에서 교관으로 있다가 외인부대 병으로 재입대해서 나름 활약했고 이 활약을 근거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허락을 받아 스페인 국적을 취득했다. 1940년에 독일군 재입대를 시도 해봤는데 당연히 성공적이지는 않았고[12] 한동안 스페인으로 다시 가서 살다가 독소전쟁이 발발한 후 청색사단에 통역 겸 장교로 입대해서 러시아로 갔는제 동부전선에서 독일로부터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을 정도로 잘 싸웠다고 한다. 1942년에 부모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혈통증명서를 받으려고 했는데 히틀러는 일단 활약을 인정해 청색사단에 남게는 했지만 50%라면 모를까 75%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혈통증명서[13]를 주지는 않았다.[14] 1943년 청색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크라스니 보르 전투에서 전투 중 화재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다.[15]
5. 결과
이 법으로 독일계 유대인들은 물론, 유대인과 관련된 단체들이나 기업들이 크게 기울어졌으며 많은 유대인 사업체들이 독일인들에게 넘어가면서 유대인들은 상당수가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이러한 정부 차원의 탄압을 견디다 못한 상당 수의 유대인들이 해외로의 이주를 택했는데 이는 애초에 나치가 바라던 바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외로의 이주가 쉬웠던 것도 아니었는데 나치는 유대인이 해외로 이주를 떠날 때 그들의 재산 중 90% 이상을 특별세로 납부해야지만 이주를 허락해 주었으며 만약 유대인이 해외로 재산을 반출한 것이 걸리면 그대로 장기 징역행이였다.대다수가 하바라 협약[16](הסכם העברה)에 따라 안전성이 보장된 당시의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선호했으며 프랑스, 영국과 같은 인접국이나 멀리 떨어진 미국으로의 탈출도 많았다. 이러한 결과 1933년 당시 50만에 가깝던 독일에 거주하던 유대인 중 절반 이상인 25만 여 명이 독일을 떠났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충돌이 생기자 당시 팔레스타인을 통치하던 영국이 유대인의 이주를 제한했으며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반유대주의가 만연했던 터라 반유대주의 단체의 압력으로 인해 다른 유럽으로의 이주도 그리 쉽지는 못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면서 대재앙이 시작되었다. 이후 나치가 패망하면서 이 악법은 폐지되었다.
뉘른베르크 법과 그 뒤로 이어진 홀로코스트는 유대인들에게 그들만의 국민국가의 필요성을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만 해도 원래 유대인은 단순히 '유대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냥 개종하면 끝이었고, 유대인만의 국가를 만들자는 시오니즘은 대다수의 유대인들도 무관심했을 정도로 비주류였다.[17] 그런데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를 내세워서 집권한 이후에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하고 수정의 밤 사건을 일으키고, 이후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하면서 나라 없는 민족인 유대인들이 자기 민족들만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오니즘이 크게 지지를 받았고, 결국 이스라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18]
[1] 단순히 인문학 쪽 저서뿐만 아니라 이공계 쪽 서적도 분서를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나치당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유대주의에 오염된 물리학이라고 거부하며 순수한 아리아인들의 물리학을 만들려는 정신나간 시도까지 했다(...). 실제로 하이젠베르크는 공식석상에서 상대성 이론을 인정하는 뉘앙스의 발언을 했다가 게슈타포에게 코렁탕을 먹을 뻔 하기도 했다.[2] 이는 20세기 초반 러시아 및 동유럽에서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독일로 이주한 유대인들을 추방하기 위한 조치였다.[3] 유대계 상점에 대한 보이콧 운동은 역으로 타국 유대인들이 주도한 해외에서의 독일 상품 보이콧 운동을 불러일으켰고 경제부장관 얄마르 샤흐트는 이러한 쓸데없는 반유대주의 활동이 경제에 불러일으키는 부담을 우려하면서 반유대주의 활동을 제어할 것을 히틀러에게 요구했다. 히틀러 본인은 당시 유대인에게 공공연히 폭력을 행사하던 돌격대로 인해 국가 이미지가 실추될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4] 이 조항의 목적은 가임기 독일 혈통 여성이 고용관계 하에서 유대인 남성과 성관계를 갖고 임신하여 사생아를 낳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었다.[5] 애초에 디아스포라 이전 유대인은 중동계 백인종이었지만 지금은 2천 년 동안 혼혈이 진행될 대로 진행돼서 그냥 유럽 백인종이 되어 버렸다.[6] 간주이다. 인정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 이 경우 대체로 독일인으로 인정되기는 했지만 위에 밉보일 경우 유대인으로 몰리는 경우가 있었다.[7] 이는 유대인 입장에서도 맞는 말이었다. 유대인 스스로의 구별 기준은 유대교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대인 입장에서는 증조부모 8명이 모두 독일인인 사람이더라도 유대교를 믿는다면 그 사람은 유대인이 맞았다.[8] 대표적으로 에르하르트 밀히와 에리히 폰 만슈타인. 밀히는 유대계 양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어머니가 외삼촌과 근친상간하여 낳은 사생아라는 숨기고 싶은 출생의 비밀을 공개해야 했으며 만슈타인은 유대계 폴란드인인지, 단순한 폴란드계인지 확실치 않아 넘어갔다. 물론 둘 다 뛰어난 무공이 없었더라면 홀로코스트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밀히는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피했지만 출생의 비밀을 두고 뉘른베르크 재판 때까지 논란이 따라다녔다.[9] 이 경우는 해외로 이민간 인원을 뺀 숫자이므로 계산 그대로 반 이상이 학살당한건 아니었다. 다만 이런저런 불이익을 받기는 했었던 듯 하다. 혼혈 유대인들조차 많은 수가 이민을 간 게 그 방증이기도 하고...[10] 그렇다고 이런 일이 많지는 않았는데 애초에 게슈타포 맘에 안 들면 그냥 체포하면 되지 몇 대조 조상 중 유대인을 찾아야 하는 수고를 애써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11] 당시에는 유대계들 중에도 우익 성향인 사람들은 히틀러가 훗날 그런 짓을 하리라는 상상은 아무도 못했고 선거용 쇼 정도로 여겼다.[12] 본인은 끌려가는 걸 면했지만 정작 독일에 있던 부모는 1942년 수용소에 끌려가 죽었다고 한다.[13] 에르하르트 밀히가 받은 그것이다.[14] 75% 유대인이면 어떤 기준으로도 가스실 행이었으니 사실 저것도 엄청난 예외였다. 다만 이 경우는 가스실로 보내자니 스페인 국적자라 외국인이기도 했고 통역장교이기 때문에 없으면 부대유지에 불편한 점도 있었고 어차피 청색사단이 있는 곳은 독일군 입장에서도 지옥이었던 동부전선이라 곧 죽을 곳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도 사실 에리히 로즈는 스페인인 외인부대 내의 압베어 끄나풀이기도 했다.[15] 마지막까지 역설적인 것은 그 전투에서 그가 노르웨이의 SS 소속 자원병들을 지휘했다는 것이다.[16] 나치와 독일 내 유대인 단체가 맺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 협약. 이 경우에는 특별세까지 면제받을 수 있었다.[17] 1917년에 영국이 밸푸어 선언을 하기는 했지만 영국이 약속을 안 지킨 게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안 지켰어도 그만이었다. 심지어 당시 영국은 밸푸어 선언 전인 1915년에 이미 맥마흔 선언으로 이중계약까지 한 상태였으니 말이다.[18] 이런 역사의 아이러니로 훗날의 이스라엘 유대인들도 유대민족법을 만들어 아랍계 주민들을 비국민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