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디르 샤의 원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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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게스탄 지역에 있는 레즈긴인들의 모습 |
1. 개요
다게스탄 원정은 1741년부터 1745년 초까지 4년동안 진행된 전쟁이며, 나디르 샤가 본격적으로 몰락하기 시작하는 시점이기도 하다. 다게스탄 원정은 말 그대로 파멸 그 자체였으며, 다게스탄 지역은 물론 아프샤르 왕조 또한 연쇄작용으로 파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더불어 당시에 아직 정립되지 않은 게릴라전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했다.2. 배경
인도 원정과 중앙아시아 원정을 성공시키면서 아프샤르 왕조의 동부지역을 크게 확대한 나디르 샤는 육상/해상 네트워크 구성에 열을 올리는 한편, 이제 캅카스 산악지대에 있는 다게스탄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과거 오스만-페르시아 전쟁(1730-1735)에서도 한차례 건드리긴 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복속시키고자 하였다.나디르 샤가 다게스탄 지역을 공격한 이유는 우선 1738년에 나디르 샤의 동생 에브라힘 콜리(Ebrahim Qoli)가 다게스탄 지역에서 전사한 것에 대한 복수차원이었으며, 더 나아가 그곳을 복속시킨다면, 이제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군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때, 강력한 이라크 방어선을 우회하여 동아나톨리아 지역으로 가는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이는 고대 로마 제국vs파르티아, 동로마 제국vs사산조 페르시아의 싸움에서 아르메니아를 두고 싸운 현상이랑 비슷하기도 하다.
3. 순조로운 시작
3.1. 온화한 정복자
나디르 샤는 15만 대군을 이끌고 고르간 지대를 넘어 아스트라바드(Astrabad) 지역을 거쳐 시르반(Shirvan) 지대에 도착하였고, 이후 1741년 8월 중순에 큐무크(Qumuq) 지역에 도착하여 수많은 다게스탄 부족들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는 나디르 샤의 강력한 위세와, 나디르 샤의 안전 보장 덕분에 가능했었던 일이었다. 실제로 나디르 샤는 항복해온 부족장들에게 선물을 주기도 했으며, 이는 친목과 신뢰감 형성을 바탕으로 한 온화한 정복전이었다.이제 남은것은 쿤자크(Khunzakh) 요새였다. 아마 이곳이 다게스탄 부족들의 마지막 요충지가 될 것이며, 쿤자크 요새만 장악한다면 매우 유리한 위치에 서는것이 가능해질 것이었다. 그러나, 나디르 샤는 갑자기 다르반드(Darband) 지역으로 회군했는데, 겨울이 온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겨울 시즌의 문제가 아니라 나디르 샤가 변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오스만-페르시아 전쟁, 인더스 강 원정때만 해도 나디르 샤는 무한한 열정과 정신력
그리고, 일부 저항적인 다게스탄 부족들이 페르시아군을 매복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킨 소식이 들렸다. 참고로 이때 페르시아군은 얼마전에 항복했던 레즈긴인들의 지원군이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나디르 샤는 수많은 레즈긴 부족들을 불신하며 그들을 호라산 지역으로 유배보냈고, 이는 레즈긴 부족들의 신뢰를 잃는 원인이 되면서, 연쇄작용으로 항복했거나 호의적이던 많은 다게스탄 부족들이 다시 적으로 돌변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말았다.
4. 헬게이트 오픈
몇몇 저항적인 레즈긴인들의 게릴라전[1]에 분노한 나디르 샤는 온화한 회유책에서 잔혹한 강경책으로 급 우회하였으며, 특히 저항하는 마을이나 도시들을 싸그리 파괴하고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비인간적인 조치는 나디르 샤가 회유했던 다게스탄 부족들의 마음을 바꿔버렸고, 결국 저항세력들이 더 늘어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4.1. 여러 문제점들
다게스탄 원정은 상당한 어려움을 내포한 전쟁이었다. 우선, 다게스탄 산악지대가 워낙 험악한 지역이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험지는 게릴라전 펼치기 좋은 곳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불어 다게스탄 부족들이 결코 나디르 샤가 원하는 회전(전면전)에 응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다게스탄 부족들은 험지와 요새를 기반으로 '히트 앤드 런' 전략으로 페르시아군 일부나 병참을 공격하여 피해를 누적시켰다. 그리고 이는 나디르 샤의 폭력성(?)을 자극하여 나디르 샤가 다게스탄 지역의 마을들을 파괴하고 불태워버리게 했고, 이는 또 나비 효과처럼 다게스탄 부족들을 등 돌리게 하는 현상을 만들어버렸다.게다가 보급도 큰 골칫거리였다. 우선 다게스탄 지역 자체가 험했을 뿐더러, 다게스탄으로 오는 길에 거쳐야 할 이란 고원지대 또한 험지라는 것이다. 거기다 서북쪽에 위치해 있어 거리가 멀다는 것도 문제. 그뿐만이 아니라 다게스탄 지역 자체가 돌무더기만 가득한 촌동네라 부유하지 않아서 현지 징발조차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카스피해를 통한 해상보급의 경우, 카스피해에 적당한 수송선이 없어서 불가능했다.(...).
4.2. 비협조적인 러시아
물론 나디르 샤도 이러한 문제점은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극복하고자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볼까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 약 10년전에 맺은 동맹은 사실상 휴지조각이 되어버렸고,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을 싫어하긴 해도 나디르 샤가 캅카스 지역에서 날뛰는 것 또한 반가워하지 않았다. 이는 나디르 샤의 강력한 페르시아 군대는 러시아에게도 위협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명목상 아직 동맹이기에 도와줬지만, 군사적 도움은 없었으며 수송의 경우 카스피해를 통해 해상 보급을 해주었는데, 그마저도 상인들한테 떠맡기고 가격을 엄청 비싸게 해버렸다. 게다가 넉넉하게 보내주지도 않고 조금씩 보내주었다고 한다.나디르 샤는 러시아의 부당함을 알고 있었으나 일단 눈 감고 받아주었으며, 결국 러시아 카스피해에서 일하는 영국 무역상 존 앨튼(John Elton)에게 의뢰하여 서페르시아 지역의 쌀을 다게스탄 지역으로 수송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1742년 11월에 나디르 샤가 한번 빡쳐서 러시아를 침공했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 국경 근처에 발만 딱 들이민 정도였으며, 오스만 제국의 움직임이 포착되자 바로 후퇴하였다고 한다.
5. 마지막 총공격(1745)
이후에 맏아들 레자 콜리와의 갈등과 비극, 그리고 오스만과의 충돌이 벌어지면서 다게스탄 지역은 잠시 관심이 멀어지게 되었다. 다만 잔류 주둔 페르시아 부대와 다게스탄 부족들 간에 산발적인 소규모 충돌은 계속 일어났던 것으로 여겨진다.그러다가 1745년이 되자, 오스만 제국과의 대치가 지속되던 중 나디르 샤가 다시 한번 다게스탄 지역을 공격하라고 지시하였다. 페르시아군은 다게스탄 부족들을 북쪽으로 밀어붙이며 다게스탄 지역 상당수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잔여 게릴라 세력들이 북쪽으로 도피하였기에 세력을 완멸시키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