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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6:57:07

다비드 드라군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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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 연방 제7대 제7근위군 사령관
다비드 드라군스키
Дави́д Драгу́нский | David Dragunsky
파일:다비드 드라군스키.jpg
본명 다비드 아브라모비치 드라군스키
Дави́д Абра́мович Драгу́нский
David Abramovich Dragunsky
출생 1910년 2월 15일[1]
러시아 제국 체르니고프현 수라시스키군 스뱌츠크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브랸스크주 노보지브콥스키구 스뱌츠크)[2]
사망 1992년 10월 12일 (향년 82세)
러시아 모스크바
(現 러시아 중앙 연방관구 모스크바 연방시)
묘소 노보데비치 묘지
재임기간 제7대 제7근위군 사령관
1960년 5월 ~ 196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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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형제자매 9남매 중 막내
복무 노농적군
1933년 ~ 1946년
소비에트 지상군
1946년 ~ 1992년
최종 계급 기갑상장 (소비에트 지상군)
병과 보병기갑
주요 참전 하산 호 전투
독소전쟁
주요 서훈 10월 혁명 훈장
레닌훈장 (2회)
소비에트 연방 영웅 (2회)
수보로프 훈장 2등급
적기훈장 (4회)
적성훈장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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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진급 이력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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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군인.

2. 생애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3년 2월 노농적군에 징집돼 벨로루시 군관구 제2보병사단 제4보병연대 직할 군사학교에 다니며 10월에 수료했다. 이후 1936년 사라토프 기갑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뒤 극동 지역에 파견됐다.즈 지역 스뱌츠크 정착촌 의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 그의 아버지는 직업상 재단사였습니다. 가족 중에는 8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1942년 1월 위대한 애국 전쟁 에서 독일이 점령 하는 동안 대피할 시간이 없었던 Svyatsk의 모든 유대인 거주자(148명)가 총에 맞았고 소수만이 탈출하여 당파 분리에 합류했습니다. [3] . 이 홀로코스트 범죄 행위 동안 드라군스키 가족과 친척 중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조부모, 누나(세 명의 어린 자녀가 있음), 15세 여동생을 포함하여 74명이 사망 했습니다 . 4명의 Dragunsky 형제 중 2명(Zelik과 Shavel)이 전선에서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David는 1928년 Bryansk 지방 의 Novozybkov 시에 있는 M.I. Kalinin의 이름을 딴 9년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 그 직후 그는 Komsomol 티켓을 타고 모스크바의 건설 현장으로 가서 노동자, 굴착기, 난방 및 하수도 기술자 인 Mosstroy Trust에서 일했습니다. 1931년에 그는 당 동원을 통해 농업 분야에 파견되었습니다. 칼리닌 지역 Molokovsky 지역 Akhmatovo 마을 의 독서 오두막장 , Akhmatovo 마을 의회 의장, 4개 마을 의회 연합당 조직의 비서 , 1932년 말부터 - CPSU의 Molokovsky 지구 위원회 강사 (b) ) [5] .

2.1. 제2차 세계 대전

1936년 11월 제32소총사단 제32경전차대대 전차소대장, 1937년 9월부터 전차중대장을 역임했다.

2.1.1. 하산 호 전투

1938년 7월부터 8월까지 교전하며 두각을 드러낸 공로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1939년 5월 프룬제 군사대학에 파견됐다.

2.1.2. 독소전쟁

서부전선 제242소총사단 전차대대장 드라군스키 중위는 스몰렌스크 전투에 참전했다. 제242보병사단 작전장교 당시 뱌젬스키에서 포위됐으나 얼마 안 가 탈출했다. 1942년 4월부터 세묜 부됸니 휘하에서 캅카스 군관구 작전참모의 보좌관으로 복무했다. 이후 화성 작전, 쿠르스크 전투에 참여한 뒤 1943년 10월 말 제3근위전차군 제7근위전차사단 제55근위전차여단장으로 임명돼 키예프를 탈환했다. 11월 14일까지 제55근위전차여단은 200km 이상을 진격하며 10개 이상의 점령지를 탈환한 뒤 독일 육군을 13회 이상 격퇴했다. 1천여 명의 사상자, 600명의 포로, 25대의 전차 노획, 30문의 야포 노획이란 우수한 전적을 남겨 파벨 리발코에 의해 소비에트 연방 영웅 후보로 올랐으나 니콜라이 바투틴의 반대로 적기훈장을 받는 데에 그쳤다.

1943년 12월 9일 얄촙카 마을에서 전차전을 치르다 심각한 부상을 입고 1944년 7월까지 입원했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리보프-산도미에시 작전에서 부대를 비스툴라 강까지 배치했다. 병사들에게 통나무, 판자로 도하장비를 제작하게 한 뒤 산도미에시 교두보를 성공적으로 점령했다. 이후 소련 최고회의 상무회 법령에 따라 레닌훈장, 금성메달을 받았다.

비스와-오데르 대공세에서도 성공적인 전략으로 수보로프 훈장 2등급을 받았으며, 비엘룬을 비롯한 여러 도시를 탈환했다. 베를린 공방전까지 끝낸 드라군스키 대령은 전차 9대, 자주포 3대, 장갑차 7대, 야포 7문, 수송차량 37대를 파괴한 뒤 2천 700여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프라하까지 쾌속 진격한 뒤 두 번째 금성메달을 받았다.

2.2. 전후

1949년 보로실로프 고등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50년부터 제5근위전차사단장을 역임했다. 1960년 제7근위군 사령관으로 임명됐으며, 1985년부터 소련 국방부 감찰단에서 복무했다.

2.3. 사망

1992년 10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뒤 노보데비치 묘지에 매장됐다.

3. 진급 이력

4. 기타

1942년 1월 독일 육군이 러시아 SFSR에서 저지른 유대인 학살로 드라군스키의 조부모, 부모를 포함한 70여 명의 유대인이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드라군스키는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에서 반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위원회 폐지를 두 번 고려했으나 그때마다 드라군스키가 반대에 나섰다.


[1] 구력 기준 2일[2] 스뱌츠크는 2006년 폐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