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베르 1세 드 쿠르트네샹피넬 Robert Ier de Courtenay-Champignelles | |
생몰년도 | 1168년경 ~ 1329년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생장다크르 | |
아버지 | 피에르 드 프랑스 | |
어머니 | 이자벨 드 쿠르트네 | |
어머니 | 이자벨 드 쿠르트네 | |
형제 | 피에르, 알릭스, 외스타시아, 클레망스, 이자벨, 콩스탕스, 기욤, 장 | |
배우자 | 콩스탕스 드 투시, 마호트 드 메훈쉬르예브르 | |
자녀 | 블랑슈, 피에르, 필리프, 로베르, 장 1세, 기욤, 라울, 이자벨 | |
직위 | 샹피넬, 샤르니, 샹테콕, 르나르, 콩치스, 노낭쿠르, 메훈쉬르예브르 및 셀레스쉬르세르의 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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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알비 십자군에 참여했으며, 제1차 남작 전쟁에서 루이 왕자의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했다.2. 생애
1168년경에 출생했다. 아버지 피에르는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사보이아의 아델라이드[1]의 여섯번째 아들이었다. 어머니 이자벨 드 쿠르트네는 코르베유 백작 르노 드 쿠르트네의 딸로, 가티네(Gâtinais)와 푸이사이(Puisay) 일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쿠르트네 가문의 일원이었다. 형제로 피에르, 알릭스[2], 외스타시아[3] 기욤 1세 드 생리트와 재혼, 상세르 백작 기욤 12세와 삼혼], 클레망스[4], 이자벨[5], 콩스탕스[6], 기욤[7], 장[8]이 있었다.그는 쿠르트네 가문 여지의 일부를 물려받았으며, 모종의 시기에 그의 주군인 투시 백작 나르조 2세 드 투시의 딸 콩스탕스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딸 블랑슈가 태어났지만, 콩스탕스가 오빠 이티에 4세보다 일찍 죽으면서(1200년), 그는 별다른 영지를 물려받지 못했다. 그 후 로베르는 1203년에서 1206년 사이에 사촌이자 프랑스 국왕인 필리프 2세가 노르망디 공국을 정복할 때 두각을 드러냈다. 특히 가이야르 공방전에서 용맹을 떨쳤고, 가이야르 성 수비대가 항복한 뒤 필리프 2세로부터 토스니 가문에 속했던 콩치스와 노낭쿠르의 영주권을 물려받았다. 그는 두 영지를 인수함으로써 이전에는 갖지 못했던 재정적, 군사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고, 왕의 영주가 됨으로써 투시 백작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다. 1206년자 재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영지를 받은 직후 프랑스 왕실로부터 여러 개의 보석을 구입했다.
1209년경, 로베르는 베리 백국의 미망인인 마호트 드 베훈쉬르예브르와 결혼해, 메흔쉬르예브르와 셀레스쉬르세르의 영주권을 확보했다. 1210년에는 그의 군주인 이티에 4세 드 투시를 상대로 가티네, 푸이사이, 몽부아, 셉퐁즈 일대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다. 필리프 2세는 분쟁이 확대되는 걸 막기 위해 개입했고, 로베르는 투시 백작에 대해 명목상으로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자신이 가진 요새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분쟁이 해결된 뒤, 지금까지 황량했던 이 영토에 사람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샹피넬 남쪽에 빌뇌브레제네츠 시를 건설했다.
1208년 알비파를 개종하기 위해 프랑스 남부를 순행하던 수도자 피에르 드 카스텔노가 암살된 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추정된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영지에 있는 알비파를 상대로 알비 십자군을 선포했다. 프랑스의 몇몇 영주가 프랑스 남부에서 전쟁을 벌이라는 교황의 요청에 응했는데, 그중에는 로베르도 있었다. 레몽 6세는 고행을 마친 뒤 십자군 진영에 합류하기로 해, 십자군이 그의 난폭한 가신인 레몽로제 트렌카벨의 영지로 진군하도록 유도했다. 로베르는 1209년 십자군이 집결한 리옹에 도착한 뒤 베지외 공방전과 카르카손 공방전에 참여해 승리를 거둔 후 대다수 십자군처럼 북쪽으로 귀환하고 십자군 지도자로 지명된 시몽 드 몽포르[9]만이 소수의 영주 및 기사와 함께 프랑스 남부에 남았다.
그 후 시몽 드 몽포르는 카바레를 포위하기 위해 북부 영주들에게 지원해달라고 호소했다. 이에 로베르는 1211년 형제 피에르, 마엔 및 디낭 영주 유엘 드 마옌, 쿠시 영주 앙게랑 드 쿠시 등과 함께 남하해 시몽 드 몽포르와 합류했다. 카바레 요새는 곧바로 항복했고, 십자군은 여세를 이어가 매우 깊은 해자가 있는 견고한 요새 도시인 라바우르로 향해 공방전을 치렀다. 오랜 공방전에도 성과가 없자, 독일과 프리틀란트에서 파견한 기사들의 합류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 기사들은 몽제이 인근에서 푸아 백작 레몽로제 드 푸아의 역습을 받고 막대한 물자를 빼앗긴 채 패퇴했다. 이 소식을 접한 시몽 드 몽포르는 격노해 로베르와 피에르 형제를 대동해 푸아 백작을 응징하려 했지만, 푸아 백작은 이미 본토로 철수했다.
이후 그들은 몽제이 시를 철저히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육해 푸아 백에게 협력해 기사들을 물리친 대가를 철저히 치르도록 한 뒤 라바우르를 재차 포위했다. 로베르와 피에르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인 아구트 강을 건너기 위해 나무 다리를 건설하기로 했다. 이후 라바우르 시는 십자군의 끈질긴 공세 끝에 함락되었고, 시몽 드 몽포르와 로베르와 피에르 형제는 도시를 방어했던 모든 기사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라바우르의 여성 영주인 귀로드 드 라바우르를 우물에 던진 뒤 돌로 쳐 죽였으며, 주민들을 대거 학살했다. 그 후 자기 영지로 돌아간 로베르는 이단을 응징한 영웅으로서 명성을 구가했고, 루이 왕자와 카스티야의 블랑카 부부와 친분을 맺었다.
1216년, 루이 왕자가 제1차 남작 전쟁을 치르던 잉글랜드 반란 귀족들의 추대를 받고 잉글랜드 국왕이 되기 위해 영국해협을 건너기로 했다. 그는 루이 왕자의 원정에 가담했고, 루이 왕자가 캔터베리, 로체스터, 런던, 로케이트, 길퍼드, 파넘, 윈체스터, 오디햄을 순식간에 휩쓸 때 동행했으며, 1216년 말에 치러진 도버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루이 왕자는 그에게 보답하고자 로제트 성을 수여했다. 그러던 중 형 피에르가 라틴 제국의 황제로 추대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피에르와 함께 했던 상세르 백작 기욤 드 상세르는 처남인 로베르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또는 자기가 죽을 경우 그의 아들 루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백국을 지켜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는 이에 응하기로 하고 프랑스로 돌아갔다.
1217년 잉글랜드 귀족들이 헨리 3세 쪽으로 돌아서면서 상황이 악화하자, 루이 왕자는 본국에 병력과 물자 지원을 요청했다. 카스티야의 블랑카는 남편을 돕기 위해 칼레에 귀족들을 소집하고 함대를 결성했다. 로베르가 총사령관을 맡았고, 채널 제도에서 해적질하던 수도자 외스타슈가 부사령관을 맡았다. 1217년 8월 24일, 프랑스 함대가 칼레에서 출발했다. 기함에는 기사 36명이 탑승했고, 다음 3개 전함에 기사 64~89명이 탑승했으며, 나머지 전함 6척엔 무장병들이 탑승했다. 그리고 수송선 70척이 그 뒤를 따라갔다. 도버 성주 휴버트 드 버그는 이 소식을 사전에 첩보를 통해 파악한 뒤 필립 도비니에게 함대를 맡겨 요격했다. 잉글랜드 측은 전함 16~18척, 소형선 20척으로 구성되었으며, 존 왕의 사생아인 리처드 피츠로이가 전함 한 척을 지휘했다.
잉글랜드 함대는 먼저 샌드위치 항을 접수한 뒤, 적 함대가 샌드위치 항을 지나갈 때 항구에서 출진했다. 템즈 강 어귀를 향해 긴밀한 대열로 항해하던 프랑스 함대는 처음에는 적의 추격을 따돌리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가 선두에서 추격하던 잉글랜드 함선이 프랑스 함대에게 돌진했다가 반격을 받고 방향을 바꿔 물러서자, 로베르는 적이 겁에 질렸다고 간주하고 즉시 추격해 섬멸하려 했다. 외스타슈는 갑자기 항해 방향을 바꿨다간 함대가 뒤엉킬 수 있다며, 항해를 그대로 이어가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로베르는 이 말을 무시하고 전 함대에 방향을 돌려 적 함대를 추격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 함선들이 지시에 따라 방향을 바꾸기 위해 속도를 늦추자, 잉글랜드 함대가 바람의 힘을 받으며 적을 향해 신속하게 돌진했다. 여기에 휴버트 드 버그의 기함이 독립적으로 항해해 프랑스 함대를 후방에서 공격해 수송선 2척을 포획했다. 잉글랜드 궁수들은 바람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궁수들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전에 적 선원과 병사들에게 화살을 퍼부어 상당한 피해를 입혔으며, 항아리에 담아뒀던 석회를 적에게 뿌려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다. 외스타슈는 기함을 이끌고 리처드 피츠로이의 배와 교전했다. 이후 많은 잉글랜드 전함들이 하나둘씩 리처드의 배에 합류한 데 비해, 프랑스 함선들은 대열 유지에 급급하느라 기함을 지원하지 못했다.
수 시간에 걸친 해전 끝에, 프랑스 전함 1척과 수송선 64척이 침몰하거나 포획되었고, 나머지는 겨우 탈출했다. 로베르와 프랑스 기사들은 몸값을 위해 포로로 잡혔고, 프랑스 선원과 일반 병사들은 학살당했다. 외스타슈는 기함 구석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끌려온 뒤 몸값으로 10,000 마크를 지불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리처드 피츠로이 등 잉글랜드 수뇌부는 그가 본래 존 왕에게 고용되었다가 배신한 걸 규탄하고, 그를 체포한 뒤 참수형에 처했다. 그 후 로베르는 로체스터로 이송되어 윌리엄 마셜의 통제를 받다가 로베르 드 드뢰와 교환된 뒤 런던으로 가서 루이 왕자와 헨리 3세간의 평화 협약인 램베스 협약 체결에 공헌했다. 프랑스 기사들은 이 협약에 따라 전원 석방되었으며, 루이 왕자는 잉글랜드 왕위를 포기하는 대가로 10,000마크를 받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프랑스로 귀환한 그는 형 피에르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던 중 니케아 제국 황제 테오도로스 1세에게 생포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교황 호노리오 3세는 로베르에게 형제를 구출할 군대의 지휘권을 주었지만, 귀족 대부분은 이미 제5차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고, 나머지는 잉글랜드 원정대에서 막 돌아왔기 때문에, 피에르가 사망할 때까지 군대를 조직하지 못했다. 1223년 루이 왕자가 프랑스 국왕 루이 8세로 즉위했다. 이때 그는 로베르를 프랑스의 술잔 주조인으로 세워서 왕에게 바칠 와인을 준비하는 역할을 맡겼다. 이후 로베르는 바르텔레미 드 로예와 함께 루이 8세의 중요한 고문으로 활동했다. 그는 1224년 루이 8세와 함께 알비파 십자군에 착수해 푸아투와 생통주를 정복하고, 뒤이어 니오르와 라로셸을 점령했다.
1226년 다시 알비파 십자군에 참여해 아비뇽을 포위했지만 5개월간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전염병이 창궐해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5개월 후 아비뇽이 항복하면서 도시에 입성했지만, 전염병은 그 후에도 이어져 로베르의 조카 나무르 후작 필리프 2세 드 쿠르트네를 비롯한 여러 귀족이 사망하더니, 급기야 루이 8세도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당시 루이 8세의 장남인 루이 9세는 12살의 어린 나이였기에 어머니 카스티야의 블랑카가 섭정을 맡았다. 블랑카는 여러 영주들과 권력 분쟁을 벌여야 했지만, 로베르는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1229년 카스티야의 불랑카를 상대로 반기를 든 브르타뉴 공작 피에르 1세를 응징하는 원정에 참여했다.
이후 루이 8세가 아비뇽 공방전을 치를 때 참여했다가 무단으로 이탈해버렸으며, 루이 8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한 샹파뉴 백작 티보 4세를 응징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고, 양자는 서로의 영지를 지속적으로 약탈했다. 그러다가 루이 9세의 중재로 티보와 화해했다. 1235년 십자군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해 교황 그레고리오 9세로부터 면죄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걸 이용해 인근의 발렁쎄 수도원을 약탈했다. 교황은 이에 분노해 그를 파문하고 그의 영지에 성무금지령을 내렸다. 그는 교황에게 용서를 구했고, 참회하는 의미로 1237년 마르마뉴에 노트르담 드 보부아르 수도원을 세웠다. 1239년 다른 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한 원정을 떠났지만, 생장다크르에서 병사했다. 사후 아들 피에르 1세와 필리프가 아버지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3. 가족
- 콩스탕스 드 투시: 투시의 영주 나르조 2세 드 투시의 딸.
- 블랑슈 드 쿠르트네(? ~ 1268): 상세르 백작 루이의 부인.
- 마호트 드 메훈쉬르예브르: 메훈과 셀레스의 영주 필리프의 딸. 보장시쉬르루아르의 영주 장 3세의 미망인.
- 피에르 1세 드 쿠르트네(1218? ~ 1250): 아버지 사후 콩치스의 영주가 되었고, 어머니가 사망한 뒤 메훈, 셀레스, 샹테콕의 영주가 되었다.
- 필리프 드 쿠르트네샹피넬(? ~ 1245/1246): 아버지 사후 샹피넬, 르노 성 및 샤르니의 영주가 되었다.
- 로베르 드 쿠르트네(1224? ~ 1279): 오를레앙 주교.
- 장 1세 드 쿠르트네샹피넬(? ~ 1276): 랭스 대주교.
- 기욤 드 쿠르트네샹피넬(? ~ 1280): 샹피넬 영주.
- 라울 드 쿠르트네(1217/1220 ~ 1255): 일리어스 영주.
- 이자벨(? ~ 1257): 몽포콩 영주 르노 3세의 부인.
[1] 사보이아 백작 움베르토 2세의 딸.[2] 1160 ~ 1218, 조이니 백작 기욤 1세와 초혼, 앙굴렘 백작 아이마르 2세 당굴렘과 재혼[3] ? ~ 1235년 이후, 파시쉬르아르망송의 영주 기욤 드 브리엔과 초혼, 아카이아 초대 공작[4] 티에르 자작 기 6세의 부인[5] 기사 아이몬 드 샤로스트의 부인[6] 샤토포르 영주 가스세 드 푸아시와 초혼, 빌프뢰 영주 기욤 드 라 페르테아르노와 재혼[7] 1172 ~ 1233/1248, 탕레이 영주[8] 예르의 영주[9] 잉글랜드 국왕 헨리 3세와 제2차 남작 전쟁을 벌인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다.